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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녹이 예언한 세상 심판의 모습 | 운영자 | 2020-06-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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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예언한 세상 심판의 모습 유 1;14-16 유 1:14-16 아담의 七世 孫 에녹이 사람들에게 對하여도 豫言하여 이르되 보라, 主께서 그 數萬의 거룩한 者와 함께 臨하셨나니 15 이는 뭇사람을 審判하사 모든 敬虔치 않은 者의 敬虔치 않게 行한 모든 敬虔치 않은 일과 또 敬虔치 않은 罪人의 主께 거스려 한 모든 剛愎한 말을 因하여 저희를 定罪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怨望하는 者며 不滿을 吐하는 者며 그 情欲대로 行하는 者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爲하여 阿諂하느니라 ........ 에녹은 아담의 7대 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채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하늘나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도 65세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에녹의 삶이 갑자기 바뀐 것은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65세 후부터입니다. 그때부터 에녹의 삶이 갑자기 바뀐 것입니다. 아들 므두셀라의 뜻은 히브리 원문을 볼 때 ‘종말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므투”는, ‘종말, 죽음, 끝’이라는 뜻이고, “셀라”는 ‘셀라흐’로 ‘보낸다’는 뜻입니다. ‘므두셀라’는 ‘종말을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자식 이름을 지으면서 종말을 보낸다는 뜻으로 이름을 짓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에녹은 종말을 보낸다는 하나님의 이상(理想)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대로 아들 이름을 므두셀라 라고 지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받았던 “종말을 보낸다.”는 그 이상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再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 1: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가로되 보라 주께 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연대(年代)를 계산해보면 에녹 65세가 약 주전 3427년경입니다. 지금이 2014년이니까 지금부터 5441년 전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된 세월입니까? 지금 우리가 말세 지말에 산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재림을 그렇게 사모하고 실감 있게 느끼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우리 때 예수님이 재림하시겠어?’ 이러면서 당연히 자기 때는 재림 안하신다고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예 재림은 자기와 상관없는 이야기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5441년경에 살았던 에녹은 벌써 재림(再臨)하시는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유다서 1;14에서,“임하셨나니”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르코마이’의 과거형(過去形)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에녹 속에 재림하신 주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재림은 미래적(未來的) 사건입니다. 그런데 지금 에녹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에녹은 늘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재림하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 주님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녹은 주님의 재림과 종말을 체험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하였고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세상 종말에 대하여 그 당시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유 1;14에서, “예언하여 가로되”, 이것을 헬라어 원문은 분사 형으로 쓰였습니다. 에녹은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세상 종말과 심판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에녹이 예언한 세상 심판의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짜 믿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진짜 믿는 사람은 자기가 믿는 것을 입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속사의 말씀을 진짜 믿는다면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예언한 세상 심판의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1. 심판 주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히브리서 9:27에 사람에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바요.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세상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유다서 1:14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말씀하면서 15절에는 그 예수님께서 뭍 사름을 심판하사 정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 예수님에게 심판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요 5:22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또 요 5:27은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심판은 어떤 심판일까요?
1) 공의(公義)로운 심판이십니다. 여러분, 세상 심판은 공의롭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분명히 이 사람이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변호사를 잘 동원해서 또는 판사한테 잘 보여서 무죄로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죄인인데 무죄(無罪)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정말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덮어 씌움을 당하고 오해를 받아서 그 자리에 진짜 범인은 빠져나가고 엉겁결에 그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 재판에서는 그 사람이 사형을 받고 무기 징역을 받고 20년, 15년 형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공의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심판은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오해를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언젠가 예수님께서 풀어줄 날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弑害)했던 김재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형당할 때 나는 억울하다. 1심, 2심, 3심 모두 사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제 4심, 하늘에 심판이 있는 줄 믿노라 했습니다. 그 김재규라는 분도 하늘의 심판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예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2) 참된 심판입니다. 예수님의 심판이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요 5:30에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또 시 9:8에도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시 98:9에도 자기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하나님의 심판, 예수님의 심판은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심판은 참된 심판입니다. 요 8:16에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예수님의 심판은 참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계 16:7, 계 19:2에도 그의 심판은 참되시고 의로우시다 이렇게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판단하시면 예수님이 심판하시면 그것은 무조건 옳고, 무조건 진실이고 무조건 맞다는 것입니다. 3) 은밀한 일을 드러내시는 심판입니다. 롬 2:16 곧 내 福音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 의 隱密한 것을 審判하시는 그날이라 전 12:14 하나님은 모든 行爲와 모든 隱密한 일을 善惡間에 審判하시리라 죄(罪)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지었는데 밝히 드러나는 죄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밝히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지어놓고도 몰래 지으니까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렇게 안심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에 장관을 하려고해도 국무총리를 하려고 해도 이 청문회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과거의 행적이 다 나타납니다. 은밀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청문회가 있습니다. 세상 청문회는 공의롭지 못하고 진실 되지 못한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청문회는 진실 되고, 공의로운 청문회입니다. 하나님의 청문회는 은밀한 것이 다 드러납니다. 딤전 5:24에 참으로 신기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딤전 5:24 어떤 사람들의 罪는 밝히 드러나 먼저 審判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罪는 그 뒤를 좇나니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느니라. “밝히 드러나는”, 누구나 다 아는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숨겨진 죄도 언젠가는 밝히 드러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 5:24을 표준 새 번역에서는 ‘어떤 사람들의 죄는 명백해서, 재판을 받기 전에 먼저 드러나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나중에야 드러납니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시 90:8에는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며, 하나님의 얼굴 빛 가운데 우리 죄를 놔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몰래 지은 죄도 결국엔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은밀한 죄를 예수님이 심판할 날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목사님 전도사님 모르게 남편 아내 자식 부모 모르게, 동료들 모르게 은밀한 죄를 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할지라도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철저하게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해야 합니다. 에녹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증거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은밀한 죄를 회개하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받은 성도로서, 남들이 보지 않는다고, 교회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은밀한 죄를 짓는다면 교회 사람들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밀한 죄를 언젠가는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저와 여러분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은밀한 죄를 저지른다 할지라도 그 죄가 순식간에 없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과거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도 깨끗이 사하는 능력이 있는 피입니다. 엡 1:7에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恩惠의 豊盛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救 贖 곧 罪죄함을 받았으니
오늘도 우리의 은밀한 죄를 진심으로 회개함으로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경건치 않는 일을 심판하십니다. 오늘 본문 유다서 1:15을 보시면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는 자의 모든 경건치 않게 행한, 경건치 않는 일을 심판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경건치 않는 일이 무엇일까요? 16절의 말씀을 보면 정욕대로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 1:15 이는 뭇사람을 審判하사 모든 敬虔치 않은 者의 敬虔치 않게 行한 모든 敬虔치 않은 일과 또 敬虔치 않은 罪人의 主께 거스려 한 모든 剛愎한 말을 因하여 저희를 定罪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 1:16 이 사람들은 怨望하는 者며 不滿을 吐하는 者며 그 情欲대로 行하는 者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爲하여 阿諂하느니라 1) 정욕이 무엇입니까? 정욕(情慾)은 헬라어 ‘에피뒤미아’ ejpiqumiva입니다. 이것은 ‘악한 충동, 악한 욕심, 악한 욕망, 탐심’을 말합니다. 사람은 욕심이 너무 커지면 결국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악한 욕심, 악한 탐심, 악한 욕망, 이 정욕을 버린다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약 1:15에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에 이르니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정욕의 종류가 있습니다. ① 마음의 정욕이 있습니다. 롬 1:24에 우리 마음에 너무 욕심이 가득한 것입니다. ② 몸의 정욕이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입니다. 우리 이 몸 덩어리가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롬 6:12에는 ‘몸의 사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 2:11과 요 1서 2:16에는 ‘육체의 정욕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갈 5:16과 엡 2:3에는 ‘육체의 욕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③ 눈의 정욕입니다. 요 1서 2:16에 ‘안목의 정욕’이라고, 민 15:39은 ‘눈의 욕심’이다. 이 눈이 욕심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이 눈이 욕심이 많아서 그냥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윗이 저녁에 일어났습니다. 지금 군사들은 전쟁(戰爭)터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기도해야 될 터인데 저녁에 늦게 일어난 것입니다. 왕궁(王宮)을 거니는데 이 눈에 아름다운 여자가 벌거벗고 목욕하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나가 버리면 되는데 이 눈이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쁘다. 저거 내가 데리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아 장군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도 데리고 와서 간음(姦淫)하고 같이 잠을 잤잖아요. 이게 바로 눈의 정욕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볼 때 마음의 정욕, 몸의 정욕, 그리고 눈의 정욕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정욕들을 이겨야 만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바로 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이기고 하나님과 같이 걸었다는 것입니다. 요일 2:16-17 이는 世上에 있는 모든 것이 肉身의 情欲과 眼目의 情欲과 이 生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世上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世上도 그 情欲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行하는 이는 永遠히 居하느니라 설교하는 사람들이 가장 괴로운 것이 뭔지 아십니까? 자기는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말씀을 증거 할 때 양심이 소리치고 말씀이 찌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말씀이 그 사람을 바꿔가는 것입니다.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 말씀을 증거 했는데 만약에 에녹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했다면 하나님과 동행이 되겠습니까? 에녹은 날마다 마음의 정욕, 몸의 정욕, 눈의 정욕을 믿음으로 이기면서 하나님과 같이 걸어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동행입니다. 맨날 머릿속으로는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변화 될거야! 라고 입으로 증거 합니다. 그러면서 본인의 삶이 그렇게 바뀌지 않는 다면 그것은 동행이 아닙니다. 3) 정욕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됩니다. 내 마음이 막 욕심을 부립니다. 또 몸이 욕심을 부립니다. 또 내 눈이 욕심을 부립니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 정욕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거절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정욕을 이기는 길이 됩니다. 출 20:17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신 5:21에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 출 20:17에 ‘탐내다’는 히브리어로 ‘하마드’입니다. 구속사 시리즈 제 7권을 보면 ‘하마드’가 나옵니다. 이것은 외적인 욕심을 말합니다. 신 5:21의 집을 ‘탐내다’는 히브리어로 ‘아바’ 입니다. 이것은 내적인 욕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적 욕심뿐만 아니라 내적인 욕심도 금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세상의 정욕을 이기고 승리할 줄 믿습니다. ② 성령을 좇아 행하여야 합니다. 갈 5:16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여야 합니다. 이 ‘성령을 좇아 행하라’의 헬라어 원문은 ‘성령과 함께 걸어라’입니다. “걸어라” 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할라크’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영과 성령님과 함께 걸어간다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대적합니다. 시소를 보면 한쪽이 올라가면 한쪽이 내려갑니다. 그런 것처럼 갈 5:17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고 성령과 함께 걸어가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이 육체의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생긴다 할지라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갈 5:18에 너희가 만일 성령이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아래 있지 않는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율법아래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맨날 죄짓고 그 죄 때문에 죄 의식에 가득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과 함께 걷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열심히 읽고 성경을 공부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요 6:63에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씀이 영이고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하나님의 영과 생명이 여러분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 성령의 소욕이 강해지고 육체의 소욕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으면 세상의 정욕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구속사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시면 성령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딤후 3:16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벧후 1:21도 모든 성경이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을 통해 쓰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면 나도 모르게 성령이 충만해 집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소욕이 강해지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속사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듣고 전하면 세상 죄가 내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늘도 에녹은 이렇게 산 것입니다. 늘 성경 읽고 구속사의 말씀을 공부하고 늘 성령의 소욕이 강하게 살았기 때문에 마음의 정욕, 몸의 정욕, 눈의 정욕을 이기고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구속사의 말씀으로 무장해서 세상의 정욕을 이기고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은 강퍅한 말을 심판하십니다. 유 1:15 이는 뭇사람을 審判하사 모든 敬虔치 않은 者의 敬虔치 않게 行한 모든 敬虔치 않은 일과 또 敬虔치 않은 罪人의 主께 거스려 한 모든 剛愎한 말을 因하여 저희를 定罪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오늘 본문 하반 절에 모든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행한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강퍅한 말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강퍅한 말, 헬라어로 ‘스클레 로스’ 이것은 ‘단단하다, 난폭하다. 사납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할 때 부드럽고 고운 말을 쓰면 좋잖아요. 그런데 사납고 강퍅한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 속에 폭력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너 같은 것은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어.’ 자기가 뭔데 교회에 나오라 말라 합니까? 얼마나 거친지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강퍅한 말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몸만 경건하게 살면되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도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에녹이 “여러분 하나님이 강퍅한 말을 심판하십니다”. 라고 이렇게 300년 동안 증거 했는데 에녹이 강퍅한 말을 하며 살았겠습니까? 늘 에녹은 부드럽고, 곱고, 착한 말, 선한 말을 쓰면서 말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어떤 말을 하기 전에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 말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말인가? 동행하지 않는 말이냐? 생각해서 동행하지 않는 말이면 말을 고쳐야 합니다. 말이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강퍅한 말을 심판하십니까? 유 1:16 이 사람들은 怨望하는 者며 不滿을 吐하는 者며 그 情欲대로 行하는 者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爲하여 阿諂하느니라 유 1:17 사랑하는 者들아 ! 너희는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의 使徒들의 미리 한 말 을 記憶하라 1) 유 1:16에 불만을 토하며 원망하는 말을 심판하십니다. 원망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남편 탓, 아내 탓, 자식 탓, 부모님 탓, 더 나아가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천막 속에서 부부끼리 속닥속닥 은밀히 원망함도 다 들으셨습니다. 신 1:2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 106:25-26을 보시면 장막 속에서 원망하던 사람들 광야에서 다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처음 출애굽 할 때 민 1:46을 보시면 20세 이상 남자만 603550명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여호수아 갈렙만을 제외하고 603548명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 다 죽었습니다. 모세와 아론, 하나님을 원망했기 때문에 다 죽은 것입니다. 민 14:28-30을 보세요. 29절 하반 절에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거하게 하리라고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민 14:28-30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盟誓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行하리니 29 너희 屍體가 이 曠野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二十歲 以上으로 計數함을 받은 者 곧 나를 怨望한 者의 全部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外에는 내가 盟誓하여 너희로 居하게 하리라 한 땅에 決斷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오늘 우리도 천국 입성을 앞두고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다 내 탓이다. 내가 잘못했지, 네가 그래서 그런거야. 네가 잘못했잖아. 그런 순간에 아니지 나도 똑같지 뭐,’ 하면서 자기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남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나를 돌아봐야 합니다. 에녹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에녹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 내 탓으로 보고 늘 돌아보고 회개하고 늘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다 변화 영생한 것입니다. 원망함의 뒤에는 불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불만은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내 남편한테 만족해보세요. 절대 원망하지 않습니다. 내 부모님께 만족해 보세요. 절대 부모 원망하지 않습니다. 만족이 안 되니까 원망하는 것입니다. 남편 만족이 안 되요. 내가 저런 00를 만나서 내 인생을 망쳤다. 만족이 안 됩니다. 만족하는 사람은 감사합니다. 그런데 만족이 없고 불만이 가득 차 있으니까 원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여러분의 입에서는 원망의 말, 불평 불만의 말이 아니라 감사의 말이 넘쳐나시길 바랍니다. 감사는 현재 나의 처지보다 더 못한 상황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도 지금이 낫지’ 하면서 ‘고마워하고 행복해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티코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맨날 그랜저만 바라 봐 보세요. 그 사람은 남편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철, 지옥 철에 타서 흔들거리는 사람을 바라보면 티코가 있는 것이 감사하게 됩니다. 위만 쳐다보지 마시고 나보다 못한 상황, 사람, 환경을 바라보면 그 때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통계를 보니까 세계 700명을 뽑아서 그 사람의 감정에 따라서 몸의 체온이 몸의 색이 어떻게 바뀌는지 조사를 했습니다. 그냥 감사하고 행복해 사는 사람은 온 몸에 불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온 몸이 따뜻하고 혈액순환이 잘 됩니다. 제일 몸이 차가워지는 사람은 늘 우울해하고 신경질내고 짜증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몸의 색이 검정에 가까운 파란색이었습니다. 의사들이 이 몸의 온도가 1도만 올라가도 면역력이 5배 증가한다고 합니다. 몸이 따뜻하면 암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감사하고 행복하면 내 몸의 체온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맨날 짜증내고 신경질내고 열 받아 살면 그 사람은 얼굴에만 불이 들어오고 그 밑에는 다 차가워요.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나의 처지를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2) 자랑하는 말을 심판하십니다. 유 1:16에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자랑하다 헬라어 원문은 ‘지나치게 부풀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실보다 과대포장해서 미화시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 ‘자랑’이라는 단어 앞에 “허탄한” 이라는 단어가 붙습니다. ‘허탄한 자랑, 쓸데없는 자랑, 텅 비어있는 자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약 4:16, 벧후 2:18에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허탄은 거짓이 많아서 미덥지가 않은 것입니다. 벌써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세상 말로 뭔가 뻥을 치는 것 같아 미덥지가 않은 것, 그것이 허탄 입니다. 조그만 진실에 수 많은 거짓을 더해서 마치 그것이 진실인양 미화시켜 속삭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그 말대로 심판하신다고 마 12:36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恩惠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驕慢한 者를 물리치시고 謙遜한 者에게 恩惠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벧후 2:18 저희가 虛誕한 자랑의 말을 吐하여 迷惑한 데 行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淫亂으로써 肉體의 情欲 中에서 誘惑하여 마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無益한 말을 하든지 審判 날에 이에 對하여 審問을 받으리니 우리는 있는 그대로 진실 되게 말해야 합니다. 나한테 유리하게 포장해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사람은 진실해야 되고, 정직해야 되고 객관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3) 이를 위하여 아첨하는 말을 심판하십니다. 유 1:16 이 사람들은 怨望하는 者며 不滿을 吐하는 者며 그 情欲대로 行하는 者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爲하여 阿諂하느니라
하반 절에 나옵니다. “이”라는 것은 자기의 이익을 말하는 것으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아첨한다는 것입니다. ‘아첨하느니라’ 는 헬라어 원문은 ‘얼굴을 놀라게 하다. 자기 얼굴을 놀라게 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남자가 있습니다. 그럭저럭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를 어떻게 꼬셔야만 거래가 잘 되는 거야. 그래서 이 남자를 보자마자 놀란 얼굴로 바꿔서는 ‘참 미남이시네요.’ 하는 것입니다. 또 여자 얼굴이 옥돌매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를 꼬셔야만 이득이 되니까 ‘어머 참 이쁘시네요.’ 완전히 과대 포장을 하는 것, 이것이 아첨입니다. 하나님은 그것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강한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한 사람들에게는 한 없이 강합니다. 가난하고 못살고 몸이 약한 사람들 앞에서는 권위를 내세우고 무시하다가 갑자기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높은 사람, 권력자가 나타나면 딱 얼굴을 바꿉니다. 이게 아첨하는 것입니다. 시 12:3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하나님 이 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언어 생활을 돌이켜 봐야 합니다. 과연 나의 입이 원망하는 입이었는가? 자랑하는 입은 아니었는가? 나의 입이 더러운 이익을 위해서 아첨하는 입은 아니었는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에녹은 말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무조건 말을 할 때도 이 말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말이 아닌가를 살펴보시고 아니라면 딱 다물고 지켜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정 교회가 큰 역사를 이룰 줄 믿습니다. 여러분 거리에 나가 보세요. 심지어 같이 말씀을 받은 사람들끼리 얼마나 입이 거친지 몰라요. 그것은 동행이 아닙니다. 에녹은 입술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너무 너무 위대하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부터 내 말을 내놓을 때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말이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동행은 논리가 아니라 삶입니다. 목사님이 강단에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을 구구절절이 아무리 잘 증거 하면 뭐합니까? 여러분 각자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면 그것은 실패(失敗)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실제 삶을 통하여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에녹은 입으로만 증거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증거 한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녹은 늘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에녹은 말이나 행동에 늘 감사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에녹은 산 속에 들어가서 혼자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닙니다. 창 5:21에 에녹은 65세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 를 낳았으며.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식을 낳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과 떨어져 살았다면 어떻게 자녀를 낳았겠습니까? 에녹은 혼자 산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닙니다. 에녹은 모든 일상 생활을 다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말에나 일에나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에녹처럼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는 우리 가정 교회(제주)의 성도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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