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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사2. 제주 4.3폭동(5) | 운영자 | 2020-09-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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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폭도들의 공격과 진압군의 공격 (중산간 마을 사람들의 피해)
당시 제주의 중산간 마을에는 대체로 남로당 인민유격대를 지지하는 자가 많았는데, 토벌대가 올 때 중산간 마을 밑 부락의 세포원이 연락을 해 주어, 매복해 있다가 토벌대를 기습하거나 잠적을 해버려 토벌대를 골탕 먹이기도 했습니다. 송요찬과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 방화에 앞서 주민들에게 소개령(疏開令)을 내려 해변 부락으로 내려오도록 했습니다. 송요찬 연대장은 ‘산이 있는 사람은 모두 내려오시오. 과거는 묻지 않겠습니다. 만일 내려오지 않은 사람들은 공비로 인정하여 즉시 사살하겠습니다.’라는 전단을 뿌리고 대자보를 전 지역에 붙여 산에 있는 사람들의 자수를 유도하고, 토끼몰이식으로 한라산을 뒤졌습니다. 이후 산에서 얼신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폭도로 간주하여 무조건 사살하였으므로, 이때 많은 산사람이 죽었습니다. 또한 주민들 중 상당수가 해변 마을로 내려갔으나, 끝까지 내려가지 않고 산간 지역에 은신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 1948년 11월의 중산간 부락의 소개(疏開)로 인하여 발생된 피해 규모는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의 1949년 4월 1일자 「정보참모부 일일보고서」에 (1) 완전파괴부락 45개, 부분파괴부락 43개, 합계 88개 부락이 파괴되어 이재민이 해안 부락으로 이동하였으며, (2) 제주도민 민가의 근 3분의 1가량이 파괴되고, (3) 30만 제주도민의 약 4분의 1이 소개되어 해안 부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또한 제주도 4․3사건의 전 과정을 통해서 생긴 피해는, 제주도 사회계장 김인화(金仁和)의 기고문 “4․3사건 이재민 원주지복귀상황”(「제주도」, 제 8호, 1963년)에서 ‘피해부락수 160개, 피해호수 15,228호, 이재민 80,065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관호 제주도지사는 서울신문 1948년 12월 9일자에서 ‘폭도가 방화한 민가의 소실동수가 3천호이고, 특히 11월 하순경에 폭도가 남원리 3백호와 위미리 4백호에 방화하여 일시에 소실되었으며, 11월 중에 폭도의 방화가 가장 심하여 서귀포공립중학교와 서귀면사무소를 비롯한 해안부락 1천 1백호에 방화하였고, 이들 방화로 집을 잃고 헐벗은 이재민이 1만 2천 명에 이르며 그 중 8천 명은 긴급원호를 요하는 요구호자들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중산간 부락에서 해안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친척이나 아는 사람의 집(심지어는 마굿간까지)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또 이주한 부락의 외곽성에서 부락 주민들과 함께 민보단원으로서 엄동설한에도 보초를 서야만 했습니다. 또한 군경토벌대의 토벌보조원으로서 군경토벌대의 무기, 식량 등의 운송을 비롯하여 토벌작전에 조력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해안 부락의 주민들로부터는 폭도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멸시를 당하였고, 경찰당국의 감시가 계속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락을 경비하는 중 인민유격대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하는가 하면, 때로는 군경토벌대에 의해서 소요가담혐의자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현장처형을 당하는 처절한 고난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폭도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폭도들에 의해, 토벌군의 말을 듣지 않으면 토벌군에 의해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되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또 토벌군이 폭도 차림으로 마을에 들이닥쳐 좌익들을 죽이는가 하면, 폭도가 토벌군복을 입고 나타나 토벌군 행세를 하며 우익들을 죽이니, 제주도민은 숨이 막히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1948년 10-11월에 폭도들의 공격과 군경의 강경 토벌로 제주도민이 당한 피해는 너무도 참혹했습니다. 상황이 이토록 비참하게 전개된 것은, 폭도들의 국군공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폭도들이 국군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국군이 강경토벌을 진행시킬 이유가 없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부터 7월 말까지는 국군 토벌대가 제주도 양민을 죽인 사실이 없다는 것이 이를 입증합니다. 당시의 참혹상은 아래와 같습니다. • 1948년 10월 23일 오전 6시 30분, 폭도 40여 명이 조천면 함덕 지서와 조천 지서를 공격하여 경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다 도망쳤다. 같은 날 7시 30분 9연대 장교와 사병이 지프를 타고 조천리 쪽으로 가다가 폭도들의 매복 기습을 받고 장교와 사병이 부상을 당하였다. 뒤이어 9시경 폭도들이 제주읍을 향해 접근해 오는 것을 경찰이 격퇴하였다. • 1948년 10월 24일, 애월면 수산리 경찰 김창순(23세)이 폭도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 1948년 10월 26일, 폭도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고성마을의 김창언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 1948년 10월 26일, 남원면장 양기행(46세)은 폭도들을 반대한 것이 화근이 되어 그의 아내 현신춘(45세)과 함께 학살당하였다. • 1948년 10월 27일, 폭도들은 구좌면 하포리 부두형(23세)을 산으로 끌고가 난자해 학살하였고, 같은 날 그의 부친 부평규(57세)도 학살하였다. • 1948년 10월 27일, 애월 지서를 습격,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져 폭도 1명이 부상당하고 경찰 김종석, 손귀현 등이 피살되고 6명이 부상당하였다. • 1948년 10월 28일, 폭도들은 애월면 신엄 3구 양영호(37세)와 강병호(24세)를 학살하였다. 1948년 11월 7일 강병호의 부친 강위조(45세)가 실종되었다. • 1948년 10월 28일, 폭도들은 조천면 신흥리 김태배의 형 김태승(30세), 형수 김순옥(20대 후반), 5촌 숙모 한행중, 작은 어머니 고씨 등 4명을 학살하였다. 김순옥은 당시 만삭의 임산부였다. 진압군은 조천면 일대 폭도들의 검거에 나섰다. 그러나 폭도들은 1948년 11월 11일 또 김태배 사촌 집에 나타나 김정흥(73세), 김경선(41세), 김태옥(25세), 김태인(15세), 5촌 고모, 5촌 숙모 등을 모조리 학살하였다. • 1948년 10월 29일, 애월 지서를 공격한 폭도들이 장전마을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진압군은 새벽 1시 고성리를 포위, 8시간 동안 폭도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폭도 두 명이 사살되었으며, 폭도들은 철모, 망원경, 담요 등을 버리고 도망쳤다. 진압군은 이 마을을 수색하여 20여 명을 총살하였다. • 1948년 11월 2일, 폭도들은 성산면 수산 1리 조태흡(51세)을 학살하였다. • 1948년 11월 4일, 폭도들이 한림면 청수 2리 경찰 고태화의 아버지 고달연(50세), 동생 고경화(19세)를 학살하였다. • 11월 11일 새벽 3시경, 폭도 30여 명이 발소리를 죽이며 신엄 지서 가까이 가서 지서를 공격하였다. 지서를 공격하면 경찰은 안전한 곳에서 꼼짝 않고 총만 쏘아대고 있었다. 폭도들은 우익대표 김여만의 집에 갔으나 그가 없자, 김여만의 처 고선잠(35세)과 딸(3세), 애보기 정추자(11세) 등을 칼로 찔러 죽였다. 그리고 집에 불을 질렀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 마을 가옥 여러 채에 불을 질렀다. 그래도 경찰들은 폭도들이 무서워서인지 지서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11월 11일, 제주도 경찰이 보고하기를, 폭도들이 신엄리 부락과 조천리 부락을 습격해서 약 110동의 가옥이 소실되었다. ※ 이상 내용의 일부는 이선교 著 「제주 4․3사건의 진상」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혀둡니다. ① 민보단(民保團)의 조직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 정부가 출범하였으나, 공산계열의 세력들이 정부를 전복하려고 방방곡곡에 세포망을 조직하는 등 온갖 책동과 음모에 시달리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미 폭동이 진행중인 제주도의 경우 치안 대책 마련이 대단히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끝난 후 부락의 자체경비임무를 담당하고 있던 「향보단」은 1948년 10월 「민보단」으로 개편되어 군경의 토벌작전을 보조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민보단이 조직완료된 것은 1948년 10월경이었으며 그 조직목적은 공산주의자 파괴행위에 대응하는 경찰활동의 보조역할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민보단의 임무는 1948년 10월 19일자 「현대일보」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습니다. 1. 민보단원은 그 부락내의 도난을 미연에 방지하고 2. 그 부락의 모범인물이 되어 청소년의 선도를 도모하며 3. 경찰력이 돌발사건진압에 총출동하지 못할 경우에는 내무치안의 전 책임을 부과시킬 것을 예상하고 있다. ② 제주도 내 전면적인 성곽의 축조 군경토벌대는 각 부락의 외곽에 돌로 만든 성을 구축하고, 민보단원으로 하여금 이 성을 지키게 하여 인민유격대가 경찰지서를 비롯한 관공서나 부락을 습격하는 것을 방어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의 이차적인 목적은 인민유격대와 부락 주민을 차단시키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경찰 지서의 성곽 구축이나 일부 해안 부락의 외곽성 구축은 1948년 여름 무렵에 시작되었고, 제주도 전 부락에 대한 전면적인 성곽 구축은 1948년 11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48년 11월부터 다음해의 3월경까지 제주도 전역에서 주민을 동원하여 각 부락에 내성(높이 5척=약 1.5m)과 외성(높이 12척=약 3.6m, 넓이 6척=약 1.8m)을 쌓아, 민보단원으로 하여금 이 성곽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부락에 따라서는 내성과 외성의 구분 없이 단일성을 쌓기도 했습니다. 성곽은 제주도에 흔한 돌로 쌓았습니다. 성곽 외부에는 가시덤불이나 기타의 장애물을 두어 인민유격대원이 쉽게 성을 넘어 부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민보단원은 죽창이나 철장을 무기로 갖추고 며칠에 한 번씩 교대로 경계임무에 임하였습니다. 남자가 부족한 경우에는 여자가 보초를 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민들이 성곽을 만든 이후 그것을 경비하는 데 겪는 고통은 너무도 컸습니다. 성곽은 주민들에게 보호수단이 되면서도 오히려 인민유격대에게 부락주민에 대한 적개심을 자극시키는 원인도 되었습니다. 성곽이 없을 때는 인민유격대가 부락주민을 직접 공격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으나, 1948년 11월부터 부락민과의 접촉이 끊겨 식량 조달이나 정보 수집 등이 차단되자, 인민유격대가 부락을 습격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결국 보초 서는 민보단원을 죽이고, 식량, 의복 등 물자를 마구 약탈해 갔습니다. 이에 항거하는 주민은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고, 집을 불태우고 도망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는 등 큰 문제로 번졌습니다. 계엄선포 이후 군경토벌대와 인민유격대 사이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쌍방간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경토벌대를 지원하던 우익단체회원과 민보단원 및 기타 일반주민의 희생이 매우 컸습니다. 특히 중산간 부락이 폐허화되고 일반주민의 가옥이 많이 소실되었습니다. 또한 인민유격대에 의해 경찰지서를 비롯한 관공서, 학교, 우익인사의 가옥 등도 많이 소실되었습니다. 한편 소요가담 또는 인민유격대에 협조한 혐의를 받은 일반주민이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체포, 구금되거나 처형되는 일도 많았습니다(군사재판 또는 현장즉결처형). 참으로 이 기간의 제주도는 유사 이래 다시없는 비극으로 가득했습니다. 마을마다 잿더미요, 마을 여기저기에 시체가 즐비하였고, 부상자들과 어린이들의 신음소리와 울음소리, 비통함과 억울함에 사무친 제주도민의 통곡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습니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예측불허의 숨통 막히는 순간들, 살얼음 위를 걷는 듯 밤낮으로 초긴장하는 시간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참으로 헤어날 길 없는 지옥과 같은 잔인한 역사적 암흑기였습니다. (11) 제주 제 9연대를 대전 제 2연대로 개편(1948년 12월 29일) 1948년 12월 29일 제 2연대(연대장 함병선 중령)가 재편돼 제 9연대의 뒤를 이어 제주도의 인민유격대 토벌작전을 위해서 투입되었습니다. 여수 14연대 반란과 같은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제주도의 제 9연대를 대전으로 철수시키고 대전의 제 2연대를 제주도로 이동시켰습니다. 함병선 연대장은 본부와 2대대를 제주시에, 1대대를 서귀포에, 3대대를 한라산 중턱의 오동리에 배치시켜 언제든지 즉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토벌작전이 강화되자 이덕구 부대에서는 많은 이탈자가 생겨 조직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귀순자 중에는 제주 오현중학교에 다니는 김정진(17세)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덕구의 경호원이었습니다. 연대장의 직접 지휘 하에 이 소년의 안내로 어승생악으로 수색전을 펼치면서 16시경에야 병기창과 보급창을 발견하여 소총 370정과 실탄 수천발을 노획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덕구는 재차 제주읍을 공격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지만 치명적인 타격을 받음으로써 재기불능 상태가 되었습니다. 연대장 이하 출동대대는 진압에 성과를 거두고 이곳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귀순한 김정진이 갑자기 옆에 세워 놓았던 칼빈총으로 연대장을 저격하려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고, 이를 다시 푼다는 것이 눌림쇠를 눌러버려 탄창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함병선 중령은 다행히 위기일발의 순간을 모면했습니다. 헌병들이 곧바로 김정진을 총살시키려하자, 연대장이 제지시키고 그에게 왜 그랬는지를 물었더니, “순간적으로 김일성한테 영웅칭호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전후를 고려함 없이 죽이려 했다.”고 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에 연대장은 법으로 처단하지 않고 17세의 소년인 그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어 대한민국 국민이 되게 하였습니다. ①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 해제 1948년 10월 28-29일 고성전투에서 인민유격대 1백 수십 명의 병력이 섬멸되자, 육본은 인민유격대가 대부분 궤멸된 것으로 오판하여 송요찬 연대장도 폭도섬멸이 목전에 다다랐다고 언급하였고 신문에도 제주 폭도를 완전히 소탕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결과 정부는 1948년 12월 31일 제주도의 계엄을 해제하였습니다. ② 1949년 1월 1일, 폭도 600여 명 국군 2연대 3대대 기습 공격 잠시 잠잠하던 인민유격대는 제 2연대가 제주도에 투입되면서 새로운 공세를 활발히 전개하였습니다. 계엄령 해제와 2연대 제주 주둔 환영식을 마친 12월 31일 저녁 9시에, 하산한 폭도 600여 명이 새벽 1시(1월 1일) 오동리에 있는 3대대를 기습 공격하였습니다. 수많은 폭도들이 3대대 공격한 것에 놀란 진압군은, 1949년 1월 4일 육․해․공군 연합작전을 실시하였습니다. 이에 수많은 산사람들이 하산하였고, 진압군이 이들을 수용하여 양민으로 인정된 자는 귀향조치하였습니다(「한국전쟁사 1권」, 445.). ③ 1949년 1월 12일, 의귀리 국군 2중대 공격 1949년 1월 11일 밤, 폭도 200여 명이 하산하여 남원면 의귀리에 주둔중인 2연대 2중대를 포위하고, 1월 12일 오전 5시 국군을 공격하였습니다. 설재현 2중대장은 12일경에 많은 폭도들이 새벽에 공격해 올 것이라는 첩보를 듣고 이미 새벽 3시에 전 중대원들을 완전 무장시켜 내무반에서 출동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2시간에 걸쳐 치열한 사격전이 벌어진 후 날이 새자 폭도들은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주한미군사령부, 「G-2일일보고서 1949.1.14」에는 무장대의 습격사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1월 12일 새벽 6시 30분께 약 2백여 명의 유격대가 제주도 의귀리에 있는 2연대 2중대를 습격했다가 패퇴했다. 2시간에 걸친 접전 끝에 유격대는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반면 한국군은 4명이 사망했고 10명이 부상했다. 유격대로부터 M-1 소총 4정, 99식 소총 10정, 칼빈총 3정을 노획했다.」 여기에서 국군의 희생자는 문석준, 이범팔, 안성혁, 임찬수 등 4명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2)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신설(1949년 3월) 1949년 3월 2일에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새로 설치되어 유재흥(柳載興) 대령이 사령관으로서 제 2연대를 비롯한 군․경 작전을 통합 지휘하였습니다(참모장 함병선 중령). 해군은 해안을 봉쇄하고, 육군 항공대는 연락기로 작전을 지원하였습니다. 1949년 3월 경만 해도 한라산에는 폭도의 세력들이 500-600명 정도가 잔존하고 있던 것으로 파악되었고, 무장하지 않은 지원자 내지 동조자도 1,000-1,500명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로 보아 인민유격대의 무장세력은 최대 절반 정도만 감소한 상태로 나머지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남원면 산록 전투(떼를 지어 하산하는 주민들) 1949년 2월 16일 새벽 2시 남원면 산록에서 인민유격대 700여명이 야영중인 본부중대 150명을 포위한 후 집중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부중대의 과감한 공격으로 포위망이 뚫렸고, 폭도들은 16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는 도망쳤습니다. 이후 3월부터는 함병선 연대장의 선무방송을 듣고 산에 있던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떼를 지어 하산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진압군이 중산간 마을의 허리를 완전히 장악하여 폭도들을 지원하는 주민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산에서 식량을 구할 길이 막막해지자 견디지 못하고 하루에도 수백 명씩 하산하였습니다. 당시 군인들은 무더기로 하산하는 그들의 바싹 말라 흉측한 몰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굴 속에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린 데다 옷도 여름옷 그대로이고 운동부족으로 걷지 못하는 이도 많았다고 합니다. ② 1949년 3월 9일, 노루오름 전투 독립 1대대의 1개 중대가 산물내 앞 노루오름에서 매복한 폭도들의 기습공격을 받아 중대장과 소대장 등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고 중대원들은 주둔했던 원마을까지 후퇴하였습니다. 폭도들은 진압군 36명을 사살하고 총 40여 정과 식량 4석, 담배 300갑을 노획하여 갔습니다. ③ 이덕구의 최대병력(인민유격대 1천여 명)이 동원된 녹하악 전투 1949년 3월에 설치된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는,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벌인 지 약 2개월 반 만인 5월 15일에는 이제 사령부를 해체해도 될만큼 커다란 전과를 올렸습니다. 주민들의 협조가 맞물리면서 한라산 지구 공비들은 설 자리를 잃은 채 자멸해 갔으며, 특히 이덕구가 이끈 1천여 명의 인민유격대가 우연히 진압군과 정면충돌 한 사건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1949년 3월 말에 있었던 이 녹하악(鹿下岳) 전투에 직접 참여한 제 2연대 1대대 4중대장 김주형 중위는 진중친필수기에 당시 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1949년 3월 말, 제 2연대 2대대와 3대대 및 6여단 유격대대 및 3개 대대가 북제주군과 성산포 등 3개 방향으로 공격하고 제 2연대 제 1대대가 남제주군의 중문 서북방 정악-노로악-한대악을 연하는 선을 차단하여 무장대를 포착 섬멸하는 요지의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의 작명이 하달되었다. 나(제 1대대 4중대장)는 제 1대대 전투대대장 임부택 소령에게 ‘녹하악(鹿下岳)과 절악(折岳) 일대를 야간수색을 하고 13시까지 계획된 차단선을 점령하겠다’고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나는 이미 출동한 중문리 동북방에 있는 제 1중대 기지에서 숙영하고 새벽 3시에 출동하였다. 캄캄한 밤길을 약 한 시간 정도 행군하여 녹하악 동쪽 고갯마루에 당도할 찰나 무장대와 마주쳐 조우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무장대가 고개정상을 선점하고 사격하는 상황이라 나는 불리함을 깨닫고 선두의 1개 분대만으로 적을 견제토록 하고 주력은 포복으로 녹하악 정상을 선점하였다. 고지 정상에서 지형을 살펴보니 동북쪽 멀지 않은 곳에 절악이 있음을 알아내고 최의경 소위에게 경기관총 2정과 60미리 박격포 1문을 주면서 1개 소대로 절악을 점령하고 적의 주력에게 집중사격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새벽 5시 경, 중대는 고갯마루의 적에게 집중 사격을 하였다. 약 1시간 여의 격전 끝에 적은 10여구의 시체를 버리고 물러났으며 우리는 고갯마루를 확보하고, 수 명의 중상포로를 획득하였다. 중상포로들의 진술에 의하면 무장대는 제주도인민군사령관 이덕구가 진두지휘한 1,000여 명이며, 작전목적은 제 1중대 기지를 유린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즉 이들은 전날밤 20시에 인접한 안덕면 사무소와 지서를 습격, 방화하였다. 그러면 인접의 제 1중대가 이튿날 출동할 것이고, 기지에는 소수의 잔류병력 뿐이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기지를 유린하고 무기, 탄약, 식량, 피복 등을 탈취하려고 했다. 그런데 야간이라 행군이 늦어져 새벽 4시 경에 고갯마루에 도착했는데 뜻밖에 국군과 마주쳤다는 것이었다. 고갯마루에서 물러난 적은 약간 후퇴하여 응사해 왔다. 이때 절악을 점령한 최의경 소위의 특공소대가 측후방에서 적에게 집중사격을 가했다. 불의의 공격을 당한 무장대는 다시 1km정도 후퇴하여 동에서 서남으로 흐르는 소하천을 의지하여 완강히 저항하였다. 지근거리에서 숨막히는 격전이 11시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피해가 속출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돌격뿐이라 판단하고 절악의 최 소위에게 기관총과 박격포로 엄호사격을 지시하고는 11시 30분경에 돌격명령을 내렸다. 적은 우리의 일제돌격에 압도된 듯 분산되어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은 차후집결지를 정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졌으며, 도처에서 각개격파됨으로써 이후로는 대병력에 의한 작전이 없었다. 이 전투에서 우리는 사살 178명9유기시체), 소총(99식, 38식, 칼빈 등) 203정, 권총 4정, 기관총 2정, 일본도 3본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날 작전을 공중지휘하던 유재흥 사령관은 비행기가 추락하다가 어승생악 부근의 소나무에 걸려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 이 녹하악 전투에서 이덕구가 진두지휘하는 공비주력이 토벌작전 부대에 의하여 거의 섬멸되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습니다. ④ 잔존세력 소탕을 위한 편의대 운용(1949년 4월) 인민유격대의 주력이 섬멸되자, 군은 잔존세력을 소탕하기 위하여 4월부터 다시 10여 명의 소규모로 편의대를 운용하였습니다. 편의대에서 활약한 의귀리 전투의 주인공 이윤 중사는 그의 저서 “진중일기”(2002년, 124-127쪽)에서 아래와 같이 진술하였습니다. 「나는 4월 2일 특무공작대 임무를 받고 4월 7일 한라산으로 침투했다. 특무공작대는 편의대로 한라산에 침투하여 중요정보를 수집하는 임무였는데,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에 각각 1개조씩 2개조가 편성되었으며, 내가 남제주군 공작대의 책임자였다. 나는 10여 명의 대원을 직접 선발하였으며, 특히 수일전 귀순해 왔으며 마을 유지로서 이장직도 수년간 역임한 바 있는 오송주를 공작대에 합류시켰다. 4월 15일에 오노인을 통하여 무장대의 1개 동굴을 포착하고 야밤에 기습하여 26명을 생포하여 중대로 보냈고, 4월 18일에는 그간 생포한 남자 32명, 여자 16명 등 48명을 압송하여 하산하였는데, 이들을 본 유족들이 몽둥이와 식칼을 들고 나와 원수를 갚게 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이 무렵 우리 공작대가 성공하자 각 토벌부대는 우리와 비슷한 편의대를 입산시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대원을 보강한 뒤 다시 입산하였으며 4월 23일에는 남제주군 군당 특공대가 은거하던 동굴을 기습하여 13명을 생포하였는데, 이중 기골이 장대한 부씨 형제가 공작대의 첩보원으로 활약하겠다고 자원하기에 그들을 공작대에 합류시켰다. 5월 14일, 나는 부씨 형제에게 아직까지 한라산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남원면당 위원장 김계원과 접촉하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일주일 후인 20일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즉 이들은 남원면당에 침투해서 김계원과 접촉을 하였으며, 제주도당 간부들이 모두 남원면당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중대한 정보를 입수하고는 즉시 중대에 연락하여 1개 소대의 병력을 지원받았으며 5월 26일 새벽 3시를 기하여 수악계곡에 있던 이들의 숙영지를 포위 ․ 기습하여 23명을 사살하고 8명을 생포하였다. 8명의 포로 중에는 남원면당 위원장 김계원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2명은 육지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특수임무수행 중 357명을 생포하여 하산시켰다.」 이윤 중사의 진중일기에서와 같이, 토벌부대가 산에서 공비를 보면 무조건 사살하지 않고 가급적 생포하여 하산시킨 것은 위기 속에서도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합법적 절차에 의해 귀향 또는 의법처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3) 이덕구의 최후(1949년 6월 7일) 1948년 12월 이덕구의 경호원이었던 김정진(17세)이 경찰에 자수함으로써 이덕구의 은신처(아지트: 제주시 용강)는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함병선 연대장의 직접 지휘 하에 어승생악에 있는 인민유격대 병기창 및 보급창을 급습하여 소총 370정과 실탄 수천 발을 압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덕구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폭도들을 지휘하였으나, 대규모화 된 토벌대의 진압에 결국 덜미가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덕구는 1949년 6월 7일 새벽 3시, 비밀리에 배를 타고 제주도를 탈출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총 사령관 이현상과 합류할 계획으로 하산하다가 견월악 부근 제주읍 용강리 북받친 밭에서 경찰에게 포위되었습니다. 제주읍 화북 지서 김영주 경사를 비롯한 경찰 5명과 민보단원 5명이 이덕구를 포위하면서 자수를 권하였으나 경찰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고, 이에 경찰도 집중 사격을 하여 이덕구의 몸은 벌집같이 되어 죽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로, 제주 4․3사건 발생 1년 2개월 만에 짧은 생을 마쳤습니다. 무장대는 대부분 와해되었지만, 경찰은 그의 사체를 제주읍 중심지인 관덕정 광장에 십자형 틀에 매달에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경계로 삼을 뜻으로 공개하였습니다. 이에 관해서 1949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는 “이덕구 반도사령 사살로 제주 소탕전 완전종식(국방부서 전과발표)”이란 제하에 “제주사태는 제 2연대의 맹활약으로 말미암아 소기 이상의 성과를 거두어 도민은 일로 평화건설에 총진군을 보여 주고 있거니와, 아직 4, 5명의 잔도가 산중에 출몰하고 있다는 것을 탐지한 소재 국군은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7일 하오 4시경 621고지에서 제주도 공산군 총사령 이덕구를 사살하는 동시에 이 사령의 연락병 2명을 체포하고 2명의 귀순자가 있었는데, 이것으로써 제주도의 소탕전은 완전히 종식을 지은 셈이라고 한다.”라고 보도하였습니다. 한편 이북으로 올라갔던 김달삼은 1949년 8월에는 월북한 남로당원들로 구성된 군사교육기관 강동정치학원 졸업생 300명을 영솔하여 유격대 제 3병단장으로서 부사령관 남도부(본명 하준수)와 함께 동해안 태백산(太白山)으로 침투하였다가 국군 토벌대의 공세에 밀려 잠시 북으로 퇴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549부대(945부대)를 조직하여 동해안으로 침투하였다가, 1950년 3월 22일 정선군 반론산에서 국군 토벌대 8사단 21연대의 공격을 받아 월북하였습니다. 그 후 한국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 오전 9시경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원 500여 명으로 구성된 549부대로 내려왔습니다. 이들은 태백산으로 들어가서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남침하였는데, 경남 신불사 부근에서 부산 지구에 침투할 계획으로 남하하다가, 낙동강 전투가 가장 극렬했을 무렵인 1950년 8월 30일 수도사단(연대장: 백인엽)에 의해 대부분 사살되었습니다. 한때 인민공화국 세상이 되면 전 도민이 잘 살게 된다고 호언장담하던 허위 선전자들은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감언이설에 현혹된 무지몽매한 백성들만 산 속 동굴과 숲 속 어딘가에 남아 공산주의자들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산짐승처럼 뛰어다니다가 귀중한 시간과 재산, 또 목숨을 헌신작같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14) 이덕구를 이은 인민유격대 사령관들 5월 15일 제주도 전투사령부는 해체되었고, 5월 20일에는 토벌작전 중 숨진 희생 토벌대원을 위한 합동위령제가 열렸으며, 마침내 7월 7일 제주도민 명의로 한라산 정상에 평정비가 세워져 길고 긴 4․3사건의 참극이 끝났음을 알렸습니다. 제 2연대는 평정을 끝내고 원대 복귀하였고, 7월 15일 독립 제 1대대(대대장 김용주 중령)가 제주도에 도착하여 잔여 폭도들을 진압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까지도 산에 100여 명이 넘게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덕구가 죽은 이후 제 3대 폭도 사령관은 김의봉이었습니다. 1950년 7월 25일 좌파 폭도들은 중문면 하원리 지서를 습격하고 민가 99채에 불을 질러 세를 과시했습니다. 폭도 살여관 김의봉은 부하들을 데라고 조천면 농촌지대에 침투하여 주민들에게 ‘조국해방 전선에 단결투장하여 인민군 진격에 호응하자’고 선동하였습니다. 2007년 3월 14일 제주 4․3사건 희생자 심사가 완료되었는데, 이때 발표된 총 희생자는 14,033명입니다. 희생자의 이름은 제주도 봉개동에 위치한 제주 4․3평화공원 안에 있는 위패에 빠짐없이 새겨져 있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희생자 위패에 제 3대 폭도 사령관 김의봉이 있는가 하면 박진경 연대장 암살범(신선우, 강자규), 국군 제 9연대 탈영병(강정호, 송원병)의 이림이 함께 올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폭도 사령관의 이름이 있는가 하면 대한민국 정부를 공격한 폭도들의 이름이 들어 있다면, 현재 그곳 명칭 ‘평화공원’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희생자로 등재된 각 사람에 대한 심사회의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마땅히 명단에서 빠져야 할 폭도들이 4․3폭동 희생자로 버젓이 명단에 올라가 있는데, 그 수는 무려 1,540명에 이릅니다. 대표적인 인물 18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한국근현대사와 북한의 실상」, 90.] 6․25발발 이후 북한이 목포까지 점령하였을 때, 4․3주동자였던 고승옥, 백창원, 송원병이 ‘인민군이 목포까지 왔으니 제주도에 상륙한 이후에 나가야 한다’고 말 한마디 했다가 좌익 폭도 사령관 허영삼, 김성규 등이 ‘지금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위 3인을 포박하여 인민재판으로 처형하였습니다. 실제 당시 제주도 좌파 폭도들은 금방이라도 대한민국이 망하고 제주도가 공산화될 것이라고 선동하면서 지서를 습격하고 우익인사들을 학살했습니다. 3대 사령관 김의봉이 진압군의 집중공격으로 사살되자, 1951년 3월 좌익 폭도들은 허영삼을 사령관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후 폭도들은 두 파로 나뉘어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이덕구가 사살된 이후 산에 남아있던 무장대원들은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했고, 오랫동안 산 생활을 하다 보니 초근목피로 생명을 잇는 것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결국 배고픔 때문에 산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6․25휴전 선언 이듬해인 1954년이 되자 당국은 “산에 남은 무장대는 남자 4명과 여자 2명으로, 이들은 두 갈래로 분리되어 서로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무장대원 1명이 투항하여 산에 남은 대원은 5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956년 4월에 구좌읍 송당리 현재 송당목장이 있는 곳에서 무장대원 1명이 경찰유격대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사살된 대원은 구좌읍 상도리 출신 정권수였습니다. 한편 경찰은 남은 4명의 무장대원들의 신상을 발표했습니다. 김성규(중문면 색달리, 36세), 오원권(구좌읍 송당리, 39세), 변창희(제주시 이호동, 22세), 한순애(조천읍 와산리, 23세) 등이며, 이중 김성규가 두목이고, 죽은 정권수는 부두목이었습니다. 1957년 3월 23일, 남아있던 유일한 여성 무장대원 한순애가 제주시 월평동 견월악 인근에서 수색 중이던 사찰특수유격대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리고 1957년 3월 27일, 김성규와 변창희가 한라산 중턱에서 경찰과의 전투 끝에 사살되었습니다. 1957년 4월 2일, 4․3폭동 발단일인 4월 3일을 하루 앞둔 이날, 만 9년 만에 드디어 마지막 공비 오원권(39세)이 북제주군 구좌면 송당리 토굴에서 생포되었습니다.
8. 결론 제주 4․3폭동의 결과와 진상 제주 4․3사건은 제주도에서 1948년 4월 3일에 발발한 좌익(남로당) 세력의 무장폭동 사건입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에서 좌익이 주도한 3․1절 행사 후 시위 군중과 경찰과의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한 이래 1년여 동안 경찰과 좌익간에 쫓고 쫓기는 긴장상황이 계속되다가, 1948년 4월 3일 좌익(남로당)이 대한민국 전복을 목적으로 경찰과 선거종사자와 우익 청년단 등에게 무장 공격을 가한 사건을 말합니다. 제주 4․3사건은 남로당의 지령에 의해 약 6만 명의 공산당원들이 일으킨 반(反)국가적 무장반란이었기 때문에, 국가 권력을 동원하여 수 년간에 걸쳐 힘겨운 작전 끝에 소탕하였습니다. 1948년 4월 3일 발생하여 1949년 6월 7일까지 1,500여 명의 폭도들 중에 100여 명만 남기고 진압하기까지 거의 1년이 걸렸습니다. 이후, 소개령이 내려졌던 산간 부락민들에게 1954년 4월 전면 입주 허가를 내렸고, 9월 21일에는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하여 전면 개방하였으며, 백록담에 평화기념비를 세우고, 주민을 동원한 성곽경비를 철폐하여 경찰로 대치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하였습니다. 제주 4․3폭동은 사건 발생부터 수습까지 6년 6개월이란 시간이 걸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긴 반란이었습니다. 1957년 4월 2일, 마지막 공비 오원권이 잡히기까지 만 9년간 4․3사건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1만 명이 넘었으니, 통탄을 금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던 것입니다. 실로 제주 사람들의 눈물, 아픔, 설움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절감하게 됩니다. 사망자 수(數)에 관련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4․3위원회와 제주도에서는 행정력을 총동원하고, 언론기관도 동원되었으며, 유족회 측에서는 보상을 운운하며 피해자 신고를 독려하였고, 심지어 일본과 미국까지 출장, 홍보 활동을 하며 신고를 받았습니다. 이때 집게된 피해자 수는 14,028명이었으며 그 중에는 국내(본토) 578명, 일본 57명, 미국 4명 등 제주도 외에서 신고한 637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군․경관의 피해현황을 보면, 순직경찰관 120명, 부상자 137명(1954년 4월 4일자 「제주신보」), 응원경찰관 순직 3명, 부상 1명이었으며, 군인은 제 9연대․제 11연대 장병 전사 1명, 부상 3명, 재편된 제 9연대 전사 장병 30명 내외, 부상 15명 이상이었고, 5개월간의 토벌작전에서 제 2연대 119명이 전사하였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제주도의 선량한 주민들이 남로당 인민유격대와 군경 토벌대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고 희생되었다는 점입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당에 가입하지 않거나 산사람들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로당의 폭도들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고, 칼과 죽창에 찔려 죽었고, 나무에 묶여 총살을 당하고, 생매장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집들이 불태워지는 등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무참하게 토막난 시체를 겨우 찾아 맞추어 장례를 치르는가 하면, 아예 시체를 찾지 못한 경우도 다반사였습니다. 또한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불가피하게 진행되었던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 사람들은 군경 토벌대에게도 무차별 학살을 당하거나 인권을 유린당하는 등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렇게 제주도민들은 밤에는 죽창을 가진 산사람이 무서워 떨고 낮에는 기관총을 가진 군경 토벌대 앞에서 떨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좌우익 이념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데 폭도들의 협박에 못 이겨 쌀을 주고 도장을 찍어준 양민들도 희생을 당했습니다. 밤중에 폭도들이 쳐들어와서 쌀을 안 내주고 당 가입 도장을 안 찍으면 죽인다고 하는데, 시키는대로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시 제주도 전역에 휘몰아친 급작스러운 4․3폭동의 충격으로 정신질환에 걸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강을선 씨 증언, 당시 13세). 표선면 토산리의 경우는 마을 전체에 남자가 남지 않을 정도로 초토화되었습니다. 군인들이 “16세부터 60세 미만 남자는 모두 나오라. 빠지는 자가 있다면 죽을 줄 알아라.”라고 명령하여 남자 114명이 모였는데, 그들을 새깨줄로 모두 묶어 표선 바다 모래밭으로 끌고 가서 일시에 기관총으로 쏘아 죽였던 것입니다(유일한 생존자 김주담 씨 증언). 4․3당시 서귀포 중학교 교감으로 재직중이던 현성효 씨(玄聖孝, 당시 31세, 현 서귀포시 서귀동 거주)의 증언에 의하면, 토벌대나 폭도나 다를 것 없이 조금만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면, 그때 말로 “해치우라.”는 한마디에 죽여 버렸기 때문에, 오늘 본 사람이 내일 없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제주 4․3사건의 주체와 그 목적, 그리고 성격에 대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제주 4 ․ 3폭동의 주체 - 남로당 중앙당 노무현 정부에서 발행한 「제주 4․3사건진상보고서」에서는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라고 하여, 4․3사건을 일으킨 주체에 대해 남로당 중앙당 지령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제주도 내에서 독자적으로 계획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축소 왜곡하였습니다. 그러나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이 분명히 있었고, 또 남한을 공산화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는 건제하에 일으킨 사건이란 점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진행과정 곳곳에서 분명히 증거되고 있습니다. 확실히 4․3사건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으로 그 휘하의 전라남도 위원회 및 제주도 위원회와 인민유격대 등의 좌익 집단이 일으킨 반란입니다. 4․3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밖으로 드러난 제주도 남로당 지휘체계를 보면, 제주도민들이 제주도당 위원장직과 인민유격대 사령관을 맡고 있으므로 마치 그들이 사건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상급당인 전남도당과 중앙당에서 지도원(오르그)이 파견되어 투쟁에 관한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였으므로, 실질적인 지휘자는 중앙당과 전남도당에서 파견된 지도원이었습니다. 제주도 무장대의 내부 문건인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17, 75, 76, 78, 79쪽)에는 여러 차례 남로당 중앙당의 지시가 있었음을 반복하여 기록하였고, 중앙당의 지령에 따라 행동하고 또 진행과정을 보고하고 적절한 지시를 요청 ․ 건의하였습니다(75쪽). 또한 같은 보고서에는, 1948년 2월 말에 육지로 갔다가 보름만인 주도당이 결정한 무장공격에 관하여 「‘국경(국방경비대) 프락치는 도당에서 지도할 수 있다. 이번 무장반격에 이것(경비대)을 최대한 동원하여야 한다’고 언명하였음.」이라고 언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앙당의 주요 전략사업인 ‘무장투쟁’을 지도원이 지시했다는 것은 오르그가 중앙당으로부터 무장투쟁과 경비대 동원에 관하여 승인을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박갑동 씨는 그의 저서 「박헌영」198-199쪽에서 “중앙당의 폭동지령이 떨어졌다. 아마도 그 지령은 3월 중순쯤에 현지와 무장행동대 두목 김달삼에게 시달된 것으로 안다. ... 당시 중앙당에서는 이 사건이 터질 무렵 당군사부 책임자 이중업과 군내의 프락치 책임자 이재복(민간인 중앙당 군사부원) 등을 현지에 파견하여 소위 현지 집중지도로써 군사활동의 확대를 기도했다. 도 폭동의 두목 김달삼의 장인이며 중앙선전부장 강문석을 정책 및 조직지도 책임자로 선정하여 현지에 보냈었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이때 이재복은 조경순의 안내를 받아 제주도에 갔으며, 도당위원장 안세훈이 피검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게 되자 조직부장 김달삼에게 “단선을 하면 반공국가가 탄생되어 남로당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제주도에서 단선반대투쟁을 강력히 전개하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주한미육군 971방첩대 문건과 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정보보고서에 의하면, 전국적인 2․7폭동이 경찰의 신속한 대응으로 빠르게 진압되자, 남로당 제주도당에도 “2월 15일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키라.”는 지령이 하달되었습니다. 그 폭동 지령문의 내용은 ⑴ 1948년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 전역에서 폭동을 시작하라 ⑵ 경찰간부와 고위관리들을 암살하고 경찰무기를 노획하라 ⑶ 유엔9한국)위원단과 총선거, 군정을 반대하라,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 등 3개항이었습니다. 또한 김달삼이 1948년 8월 해주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여 연설했던 내용을 보면, 제주 4․3폭동이 소련 및 공산당 세력과 연결되어 있으며, 제주도만의 독립사건이 아니라 소련이 벌인 남한 전체에 대한 적화통일 공작의 일환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날 김달삼은 연설을 통해 제주도 폭도들이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한 구체적 사실들을 보고하였습니다. “드디어 4월 3일 오전 2시를 기하여 인민군 즉 ‘산사람’들은 총 했습니다. 이날 인민의 일부이며 반동의 거점인 지서 20개소를 일제히 습격하여 악질경관 10명과 11명의 테러단 서청원 그리고 악질 반동 등 10명이 인민군의 애국정신에 불타는 정의의 총칼 앞에 제거되었으며... 지금 이 순간까지 경관 100여 명, 반동 400여 명이 숙청되었습니다.” 그리고 김달삼은 인민유격대가 45회 이상의 지서 습격 및 야외투쟁을 통해 57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각종 시설물을 파괴하고 다수의 무기를 탈취하는 등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김달삼은 통일중앙정부 수립을 위한 통일선거 지하 선거 지지율이 유권자의 80%에 가까웠다고 자신있게 밝혔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민주조선 완전자주독립 만세!”,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쏘련군과 그의 천재적 령도자 쓰탈린 대원수 만세!”를 부르고 연설을 마쳤습니다. 이러한 김달삼의 연설 내용은 제주 4․3폭동이 소련과 공산당 세력과 연결되어 있으며, 대남공산화 전략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2) 제주 4 ․ 3폭동의 목적 - 남한에 인민공화국 수립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 집단이 제주도 4․3폭동을 단행한 목적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저지하고 인민공화국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남로당의 정책 목표를 실현하는 데 있었습니다. 남로당 대정면 책임자였던 이운방 씨는 「이제사 말햄수다-4․3증언자료집 Ⅰ」 198쪽에서 “주도자는 빨갱이로 봐야지. 최종 목적은 공산주의니까. 그들의 우선 목적은 통일조국건설이고, 그 과정에서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지.”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좌익측이 제시한 4․3폭동의 목표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남한단독정부수립 저지 둘째, 통일민주독립정부 건설 셋째, 미군정당국의 탄압에 대한 인권 보호 첫째와 둘째는 모두 공산주의 정부를 건설하겠다는 뜻입니다. 셋째에서는 미군정당국의 탄압에 대한 인권 보호 문제를 내세웠습니다. 인권유린(人權蹂躪)은 ‘인권을 침해하는 일’, 특히, ‘공권력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인간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하는 일’을 이릅니다. 개인의 기본권은 비단 국가공권력에 의해서만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회구성원에 의해서 보호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찰이나 우익측에 의한 인권유린행위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남로당의 잔악한 인권유린행위로부터도 보호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한단독정부수립저지를 위한 남조선노동당 등 좌익계의 전면적 무력유격투쟁”이라는 제주도 4․3폭동이 가지는 본질적 속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제주 4․3폭동은, 남로당이 5․10단독선거를 저지하여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세우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만행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순진한 제주도민을 공산화하려 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군대와 경찰을 투입하여 진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사회질서가 파괴되거나 국가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경찰이나 군대가 동원되어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국법에 따라 범법자를 처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제주도에서 과잉진압으로 인한 피해가 심각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공산폭도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잔악한 만행에 군경의 진압과정만을 비난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강력한 진압이 없었다면, 또 제주도의 반공도민 수만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의 판도는 현재와 크게 달라져 있을 것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3) 제주 4 ․ 3폭동의 성격 - 남한의 단독정부수립 저지를 위한 남로당의 반란 제주 4․3사건의 기본 성격은,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저지하고 인민공화국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기존질서체계의 전복을 목적으로 남로당 중심의 좌익 집단이 일으켰던 폭동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를 ‘괴뢰정부’, ‘적’, ‘원쑤’라고 칭했는가 하면, 심지어 이덕구는 1948년 10월 24일 대한민국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하고, 11월 2일에는 국군 9연대 6중대를 공격하여 국군 21명이 사망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1947년 3․1기념투쟁 때의 지도자 김봉현과 소년 게릴라고 입산 활동한 김민주가 공편한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 투쟁사」에는 제주 4․3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위한 투쟁임을 분명히 밝혔다. ② 투쟁과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 ③ 오각별 공화국기를 옹포통조림공장 옥상과 한라산 꼬대기 그리고 삼성혈까지 도처 강산에 게양하였다. 이도종 목사(李道宗, 1892년생)는 1919년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모금운동에 참여한 바 있는 독립운동가이자(당시 협재교회 전도사로 시무 중이었다.). 제주도 1호 목사로 기독교 불모지인 제주도에서 16년간 10개 교회를 개척하신 분입니다. 이 목사님은 1948년 6월 16일 순회 예배를 드리기 위해 고산을 출발해 인성, 화순교회로 가던 중 남제주군 대정읍 신평리 인향동 인근 중산간 도로에서 산사람들에 의해 납치, “양놈의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 “미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다른 10여 명과 함께 구덩이에 생매장 되었습니다(당시 55세). 그들은 왜 독립운동가이며 성직자인 그를 생매장한 것입니까? 저들은 겉으로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항쟁하고 친일파를 배척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반동으로 몰아 무자비한 학살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남로당에 가입하지 않은 자, 5「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10선거에 참여하려는 자, 선거관리인, 지하 선거 비협조자, 식량이나 물건을 지원하지 않은 양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증오하는 기독교 목사인 이도종 목사도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납치되어 생매장된 것입니다. 그렇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1,764명이 살해되었습니다. 이렇게 무기를 들고 대한민국 건국을 결사반대하였으니, 이는 분명 폭동이고 반란이지 인민항쟁이 아닙니다. 남로당의 1946년 10월 인민항쟁이나 1948년 2「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7구국투쟁같은 것은 폭력투쟁을 벌이기는 했어도, 아직 체제 전복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948년 4월의 제주도 4․3폭동이나 1948년 10월의 여수․순천 사건을 위시해서 그 후 남한 전역에서 전개 된 유격전은 기존질서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혁명투쟁으로 전개해나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세운 「정부탄압에 대한 ‘항쟁’」이란 것은 자신들의 투쟁을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며, 이는 ‘정부탄압’의 유무와 상관없이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저지하고 기존질서체제를 전복하여 인민민주주의 정부, 즉 공산주의 정부를 건설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제주도 4․3무장투쟁은 그들이 전개한 기존질서체제 전복활동에 대한 “정부탄압”에 맞서는 ‘정당방위’의 한계를 훨씬 능가하는 ‘무력혁명투쟁’이었던 것입니다. 실로 4․3폭동은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할 정도로 위협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큰 것도 사실이나, 만일 그때 제주 4․3폭동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였다면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건국되기 힘들었을 것이며, 6․25사변 때 대한민국의 운명은 현재와 완전히 뒤바뀌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군경 및 제주도민의 희생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글을 맺으면서 제주 4․3폭동은, 전쟁기간도 아닌 시기에 낙원처럼 아름답고 살기 좋은 땅 제주도에 크나큰 희생을 가져온 참혹한 비극이요, 너무나 깊은 상처요, 엄청난 슬픔이었습니다. 4․3사건 주동자들은 폭동만 일으켜 놓고 대부분 도피하거나 북한․일본(조총련 가입)으로 도망가 버리고, 이념에 대해 아무런 개념도 없고 힘없는 자들만 남아서 고스란히 피해를 당했습니다. 서귀면 인민위원장이었던 이도백 같은 자는 많은 주민을 남로당에 가입시키고 4․3사건을 일으킨 후에 자신은 7년 동안 숨어 지낸 자로 유명합니다. 당시 제주도는 섬인 관계로 육지 상황에 대한 소식이 늦고, 또 지역 특성상 대부분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순박한 사람들이어서, 제주도민은 남로당의 선전선동에 쉽게 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무상교육 등 부자나 가난한 자 없이 평등하게 잘 살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무조건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또한 군경의 과잉진압으로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재산피해를 입었습니다. 남로당 가입이나 활동을 주동한 자들을 무책임하게 다 빠져나간 상태에서 죄 없는 양민들만 희생된 것입니다. 희생자 연령대가 0세부터 90여 세까지였으니, 성인남녀, 어린이,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태아까지 소중한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간 한 맺힌 사건이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제주의 산과 들과 깊은 바다에서 졸지에 희생되어, 그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던 행방불명자는 4천여명에 이릅니다. 우리는 그 희생자의 넋을 달래고 유족들을 위로하며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4․3폭동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그 진상을 제대로 밝혀 후세대에게 올바른 역사 의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에만 집착해서 4․3사건을 일으킨 결정적인 원인을 덮어버리고 사건의 주모자들을 교묘히 숨겨두고서, 그것을 ‘항쟁’이나 ‘민중봉기’라고 억지 주장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뒤얽힌 사건의 주체와 목적과 성격과 결과를 한 올씩 풀어가야 하고, 그것이 제주도와 대한민국에 어던 영향을 미쳤는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제주 4․3사건과 같은 불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상호간에 대립의식을 해소하고 화합과 결속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왜곡되어 있는 제주 4․3사건의 역사를 정확하게 바로잡고, 그에 따라 무고한 피해자들의 신원파악과 명예회복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희생자의 명예회복이란, 군경의 과잉진압으로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국가에서 공인하여 이를 보상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생자로 신고된 자들을 면밀히 살피는 일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헌법재판소는 2001년 9월 27일의 제주 4․3특별법 헌법소원에 대한 결정문에서 제주 4․3사건 희생자에서 제외되어야 할 대상으로 ⑴ 수괴급 공산무장병력 지휘관 또는 중간간부 ⑵ 4․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⑶ 무장유격대와 협력하여 진압군경 및 동일들의 가족과 제헌선거관여자 등을 살해한 자 ⑷ 경찰 등의 가옥과 경찰관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방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자로 명시했습니다. 둘째, 4․3사건의 진상을 올바르게 밝힘으로써 그동안 훼손되었던 국가의 정체성도 반드시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반란이 일어날 때 진압하지 않는 국가는 없었습니다. 만일 4․3사건의 진압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가 어찌되었을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입니다. 제주 4․3사건은 남로당이 북한 김일성 세력과 함께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는 목적으로 일으킨 무장반란이었다는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데도, 아직도 국가의 공권력에 과감히 도전하면서 군인․경찰을 학살자로 규정하고, 반란 자체를 두둔하면서 민중봉기 내지는 민중항쟁이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국가정체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제주도 반공도민 수만 명과 군경관들이 흘린 귀중한 피와 6년 6개월이라는 장기간의 물적․심적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립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제 서로간의 깊은 감정의 골을 메우고 화해하며, 4․3사건의 정확한 진상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재인식하는 가운데, 온 국민이 함께 대한민국의 새 출발을 다짐하며 하나 된 마음으로 밝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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