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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사2. 제주 4.3폭동(4) | 운영자 | 2020-09-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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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4·3폭동 발생 이후 제주 남로당의 음모 제주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의 지령을 받은 9연대 내 남로당 주요 조직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 오일균 소령(육사 2기, 군번 10072) - 부산 5연대 2대대장으로 제주 9연대에 파견 ⦁ 이상길 중위(육사 3기, 군번 10427) - 제주 9연대 중대장 ⦁ 이윤락 중위(9연대 연대정보관) - 제주 남로당 프락치 ⦁ 고승욱 하사 - 제주 남로당 프락치 문창송(文昌松)씨가 발행한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한라산은 알고 있다)의 79-80쪽에는 9연대 내 남로당 조직책들이 “특히 대내(隊內)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최대의 힘을 다하여 상호간의 정보 교환과 무기 공급 그리고 가능한 연대 내의 탈영을 적극 추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문상길, 오일균, 김달삼 세 명은 두 가지를 모의하게 됩니다. 첫째, 4월 27일 제 9연대 사병 60여 명을 탈영시켜 대정, 화순, 중문 지서를 차례로 습격하면서 공비와 합류케 하였습니다. 연대 병력이 총출동하여 이를 추격하게 하고, 빈틈을 타서 문상길은 제 2차로 40여 명이 탄약 무기고를 부수고 많은 무기와 탄약을 훔쳐 도주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제주 인민유격대가 장기전을 할 수 있게 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하는 일이었습니다. (1) 제주 9연대 41명의 탈영 9연대장 김익렬 후임으로 온 박진경 중령은 참모를 강화하고 수원 11연대를 지원받아 3대대로 연대를 강화하였습니다. 경비대사령부는 제 2, 제 3, 제 4연대에서 기간요원을 차출하여 수원에서 제 11연대를 창설하였는데, 제 11연대 1개 중대와 9연대 1개 대대, 부산 4연대 1개 대대(대대장 오일균 소령)을 통합하셔 완전한 연대 규모를 갖추게 한 다음 11연대를 편성하여 본격적인 폭동진압에 나섰습니다. 9연대는 산으로 도피한 자들의 하산을 독력하는 선무활동을 하였는데 그래도 내려오지 않자 5월 12일부터 5월 27일까지 3,126명을 체포하고 경기대에 저항하는 자 8명을 사살하였습니다. 9연대는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폭동을 진압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런데 1948년 5월 20일,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의 지령을 받은 무상길이 9연대 안에 있던 남로당원 병사 41명을 탈영시켜 박진경이 연대장 직에서 해임되게 하려 하였습니다. 탈영병 41명을 99식 소총 1정씩을 가지고, 실탄 14,000발을 트럭에 싣고 완전무장하였습니다. 완전무장한 그들을 9연대 통신대 최상사가 이끌고 11시 30분,m 진압군인 것처럼 위장하여 대정 지서에 도착하였습니다. 탈영병 41명은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여 7개 초소에 5명씩 배치되었고 나머지는 지서 경비를 섰습니다. 그들이 각 초소에 도착한 지 5분이 못되어 호각 소리와 함께 발포 명령을 내려 경찰관 서덕주, 김문희, 이환문, 김일하 순경과 보조원 임건수 등 5명을 사살하였고, 지서주임 안창호, 허태주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탈영병이 떠나자 본부에 연락하려 하였으나 이미 전화선은 끊겨 있었습니다. 대정 지서를 떠난 탈영병 41명은 서귀포 경찰서에 가서 트럭 1대를 빌려 남원면 신례리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경찰 트럭 운전사 금촌오(21세)는 엔진이 열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여 신례리 산길로 들어가 차를 세웠고, 조수와 함께 개울에 가서 엔진을 식힐 물을 길어 온다고 거짓말을 하여 산길을 따라 도망쳐 내려와 경찰서에 신고하였습니다. 탈영병들은 서귀포를 경유하여 산으로 올라가려고 하였으나 문상길 중대장과 연락이 안 되어 불안해하며 헤매고 있다가 대정면 중산간 부락에 있는 어느 집으로 들어가 아주머니에게 밥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것을 문틈으로 내다본 남편이 경비대가 아닌 것같다는 수상한 생각에, 방 뒷문으로 나가 뒷담을 넘어서 대정 지서에 신고하여 탈영병들은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경비대는 도망치는 21명에게 집중사격을 하였고, 나머지 손을 들고 나오는 20명을 체포하여 전원 군법회의에 기소하였습니다. 박진경 연대장은 상부의 명령대로 20명 포로들을 전원 총살하였습니다. (2) 연대장 박진경 대령 피살 공비들은 4·3사건 당시에 500명 미만이었으나 2개월 동안의 전투에서 납치한 청소년들을 훈련하여 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전에는 일본군이 버리고 간 원시적 총기가 고작이었는데 군경의 신무기들을 탈취하여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력이 점점 확장되자 문상길 중위는 9연대를 남로당 군대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9연대의 제 1, 제 2연대장 장창국, 이치업 소령이 문상길 중위의 말을 듣지 않자, 음식에 극약을 ssjgdj 시름시름 앓게 만들어 서울로 쫓아 버린 적이 있습니다. 이 일로 이치업 소령은 1개월간의 치료를 받았는데, 당시는 단순한 식중독으로 알았다가 후에 체포된 문상길이 자백함으로 밝혀졌습니다. 또다시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으로부터 박진경 연대장 사살 명령을 받은 문상길 중대장은 남로당원이었던 정보계 선임하사 향회천 상사를 불러 이를 하달하였습니다. 양 상사는 즉시 남로당원 손선호 하사, 신상우 중사, 강규찬 중사, 배경용 하사에게 다음과 같은 구제적인 행동 지령을 내렸습니다. “17일 저녁 술을 많이 먹고 오는 박진경을 사살하라. 그래서 다시는 경비대가 해방군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김달삼 동무의 지령이다. 신상우는 부대 정문에서 연대장이 오는 것을 확인하고, 강규찬은 이것을 확인받아 배경용, 손선호에게 알리고, 배경용은 불을 켜주고, 손선호가 총을 쏘는데, 두 발을 쏘면 잠을 자던 사람들이 놀라니 한 발로 끝내야 하며, 죽은 후에 피가 많이 흐르고 보기가 흉하니 머리에 딱 한 발로 죽여야 시체가 험하지 않고 증오심이 적을 것이다. 실수로 잡히면 다른 사람을 물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상을 명심하고 즉시 행동 개시!” 박진경 연대장은 성공적인 진압 작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6월 1일 대련으로 진급되었습니다. 6월 17일, 박 대령은 작전에 협조했던 도민들을 위로할 겸 도내 기관장과 연대참모들을 제주읍 관덕정에 있는 요정 옥성정에 초청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령 진급 축하연을 잘 마쳤습니다. 술에 약한 박 대령도 그날은 흠뻑 마시고 얼큰히 취해 새벽 1시쯤 제주농업학교에 주둔중이 연대본부의 연대장실로 돌아와서 옷을 입을 채로 침대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1시부터 연대장이 깊이 잠들기까지 두 시간 가량을 기다린 그들은, 6월 18일 새벽 3시 15분, M1 소총 두 발로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하였습니다. 총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잠에 곯아떨어져 있던 경계병이 뒤늦게 사태를 알아차리고 확인해 보니 박 대령은 사무실의 침대 위에 피투성이가 되어 이미 숨져 있었습니다. 박진경 연대장은 당시 28세로, 9연대장으로 부임한 지 약 한 달 만이었습니다. 위생병이 달려와 울면서 연대장의 시체를 씻었는데, 검사 결과 M1 소총 총탄이 심장과 두개골을 정확히 관통했습니다. 그때 시체를 매만지며 눈물을 흘리던 그 위생병이 바로 M1 소총으로 박진경을 암살한 손선호 하사였다는 기막히 사실이 후에 밝혀지면서 천하를 경악케 하였습니다. 1948년 6월 22일 오후 2시, 통위부 사령부에서는 박진경 연대장의 장례식이 엄수되었습니다. 28세의 젊은 나이로 사랑하는 아내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으니, 젊은 미망인의 몸부림치는 오열은 장례식장을 숙연케 하였습니다. 박진경 연대장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끌려간 학도병 출신으로, 부산 5연대 사병으로 있을 때 백선엽 연대장이 추천하여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특채 임관되었습니다. 일본군에서고위 하사관을 지낸 박진경 연대장은 종전 말기에 제주도에 주둔하여 일본군이 축성한 진지나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 폭동을 강력하게 진압하기 위해 특별히 발탁된 인물이었습니다. 미군정 장관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은 한국 장교 중 백선엽과 박진경이 가장 정직하고 머리가 좋아 한국 육군을 이끌어갈 사람으로 판단하여 적극 후원하였다고 합니다. 딘 소장은 자신이 아꼈던 박진경 연대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직접 제주도에 가서 C-47 수송기에 박 대령의 유해를 싣고 왔습니다. 사건수사에 미 CIC까지 동원되어 도내에 있는 전 M1 소총을 감정하는데 1주일을 소요하셨는데도 단서조차 잡지 못하였습니다. 1주일이 가도 박진경 암살범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김종평 전투사령부 정보참모에게 투서가 들어왔습니다. “모슬포의 처가에 칭병하고 누워 있는 9연대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 최모 상사를 잡아보면 사건 전모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밀고 였습니다. 이때 연행된 사람은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가 최상사와 3명의 하사관, 문상길의 약혼녀[고양숙(高良淑): 서귀포 남로당 총책의 딸]였습니다. 이때 문상길의 약혼녀 고양숙이 연행 된 것은, 문상길 중위가 9연대 안에 있는 80여 명이 넘는 남로당원과 오일균 소령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애인을 대신 희생시키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양숙의 부친은 서귀포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던 순박한 사람이었으며, 그녀의 모친 문애숙(여성동맹위원장)은 좌익계로 부유한 집안이었고, 급하고 과격하며 배짱 있는 성격이었는데, 아마도 그의 딸 고양숙와 그 남편에게 좌익 사상을 심어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고양숙의 고향 친구 강애숙 씨의 증언). 당시 23세였던 문상길은 처음에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면서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으나 계속된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암살사건 전모와 연대내 좌익 계보를 자백하였습니다. 그는 조사과정에서 가슴에 붙은 붉은 부적이 발견되면서 덜미가 잡혔습니다. 문상길의 가슴에 빨간 물이 들어 있는 것을 이상히 여겨 조사관이 가까이 가서 보니 종이가 땀에 젖어 가슴에 붙어 있었는데, 종이에 쓰인 글씨가 땀에 범벅이 되어 가슴을 빨갛게 물들이고 글씨는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종이가 부적임을 알아 본 조사관이 “박진경 연대장을 죽이고 가슴이 뛰고 불안해서 부적을 붙인 게지?”라고 묻자, 문상길은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자신이 그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음을 자백하였습니다. 무당이 문상길을 살리려고 써준 부적이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증거물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조사 끝에 암살 3개월 만이 1948년 9월 23일 수색 기지에서 문상길 중대장(23세)와 손선호 하사(22세)에게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사형 집행 제 1호였습니다. 배경용 하사(19세), 신상우 중사(20세)도 사형이 언도되었으나 특사로 감형되었으며, 양회천 상사는 무기징역이 언도되었습니다. 문상길은 키가 작고 남자치고는 곱상한 외모였으며 내성적인 성격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 문상길 중위의 직속 상관이었던 부(副)대대장(前 육군참모총장)은 그의 저서를 통해 문 중위가 남로당원인 것과 연대장 암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격이 컸으며, 며칠 수 체포된 문 중위를 만났을 때 그로부터 자신까지 가차 없이 죽이려 했었다는 고백을 듣고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박진경 연대장을 직접 쏘아 죽인 손선호 하사는 당시 22세로, 경북 경주 출신이었으며, 대구 10·1폭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경비대에 입대한 자였습니다. 문상길 중위가 사형되기까지 입을 다물고 관련 남로당원들을 불지 않음으로, 오일균은 그 죄상이 발각되지 않아 무사하였고, 이윤락 중위도 무사하였습니다. 한편 박진경 연대장 암살범 배후 인물로 김익렬 연대장이 지목되면서 한 달간 미군 CIC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여수 14연대의 연대장으로 있다가 그 해 8월 초 온양 13연대의 연대장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김익렬 연대장에게는 우일 14연대 반란과 관련하여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전화위보그이 기회가 되었습니다. 박진경 연대장 피살 이후, 7월로 접어들면서 제주도민은 밤낮으로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밤이면 폭도가 두려워 울담 밑이나 돼지 막 같은데서 숨어 지내다가 새벽에야 집에 들어오면 경찰서에 호출될까봐 집안에 앉아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들녘에 나가자니 공비의 납치가 무서워 안절부절 못하다가 쥐 소리만 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4월 이후 7월까지 좌우 양측의 틈바구니에서 양민들도 수천 명 죽었지만, 군경 합동 소탕작전에 폭도들도 한풀 꺾일 만큼 섬멸되어 7-8월에는 상황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5-6쪽에는 “약 4,000명의 병력으로써 국경과의 충돌을 피하며 그들의 포위토벌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동시에 일면으로는 국경내부의 충돌 특히 대내 최고악질반동인 박진경 연대장 암살과 탈출병 공작을 추진, 그동안 쓰라린 퇴격전술에 의하여 상당한 우리 쪽의 피해도 있었으나, 6월 18일 오전 3시쯤을 기하여 대내에서 박 연대장이 암살되자 적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6월 17일까지의 제 4차공격을 최후로 산 공격을 단념, 이후 주로 중산촌 부락을 습격하면서 그들이 퇴각하게 됨에 따라 우리의 전술은 여기에 성공을 보게 되었음.”이라고 밝혔습니다. (3) 최경록 연대장을 암살하려는 문상길의 음모 1948년 6월 18일 박진경 연대장이 갑자기 암살되고 곧바로 6월 21일 후임으로 최경록 연대장이 부임하였으며, 그는 약 1개월간에 걸쳐 제주도 소요사태 진압을 위한 토벌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제 11연대는 1948년 7월 15일에 재편, 제 9연대에 토벌임무를 인계하고, 7월 25 일 수원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최경록 연대장은 제주도에 부임하여 박진경 연대장의 암살범을 체포하고 나서 장병들의 정신교육에 치중하면서 다음과 같은 토벌작전을 실시하였습니다. ① 반도와 주민을 분리하기 위하여 피난민 수용소를 설치하고 초토화된 작전지 역의 피난민을 수용하였다. ② 수용된 용의자들에게 선무교육을 실시하여 사상을 선도하였다. ③ 산중에 입산한 주민들도 선무공작으로 하산시켜 반도가족들과 양민들을 분 리시켜 재생의 기회를 주었다. ④ 해안선 부락은 이미 축성중인 방법을 조속히 완료하여 부락‘자위대’에게 치 안을 유지시켰다. ⑤ 반도와 민중을 완전 분리시키고 반도들의 근거지를 산중으로 몰아넣었다. 최경록 연대장은 부임 이후 경찰과 경비대를 총동원하여 360개 오름을 뒤져 1,454명의 폭도들을 연행하여 600명을 기소하고, 나머지는 수용소에 보냈습니다. 군경의 합동 작전으로 공비들이 잠잠해진 후 최경록 연대장의 후임으로 송요찬 소령이 임명되었습니다. 총사령부에서는 제 11연대 철수 후 350명(2개 중대)을 제 9연대에 배속하여(1948.8.14) 토벌작전을 강화시켰습니다. 한편 최경록은 부임할 때 독일산 셰퍼드를 잠자리 옆에 꼭 두었는데, 그 이유는 경호원도 부관도 당번도 누가 좌익인지 몰라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나 개는 주인에게 뒤통수를 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후일 문상길 중위는 최경록 연대장을 박진경 연대장처럼 암살하려고 두 차례나 시도했지만, 최 연대장이 데리고있는 개 때문에 실패했다고 실토한 바 있습니다. (4) 포로수용소장이 된 오일균 소령의 음모 오일균 소령(1926년 1월 11일생)은 충북 청원 현도면 우롱리 출신으로, 청주중학을 졸업, 일본육사 61기 출신이며 육사 생도대장을 지냈습니다(군번 10072). 대대장 오일균 소령은 군에 침투한 남로당의 핵심분자로, 4·3폭동 진압 차 부산 5연대 휘하 제 2대대를 제주 9연대로 파견된 것은 불난 제주도에 휘발유통을 노낸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오일균 소령은 남로당원이었는데, 처음 부산 5연대에서 파견되었을 때부터 주민의 신고가 들어와도 훈련 상태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박진경 암살 사건 이후, 최경록 연대장이 부임하자 오일균 소령은 집중 수색을 견디다 못해 대대장직을 사임하고 자신이 솔선해서 포로수용소장을 지원해 부임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오일균은 폭도가 아닌 일반 양민을 대신 수감시키고 폭도들을 합법적으로 석방하여 인민유격대의 김달삼에게 보내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 사실은 한 양민이 송요찬 연대장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보낸 진정서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송요찬 연대장이 수용소를 직접 순시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였고, 오일균은 곧 보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오일균은 연행되어 이 사실에 대해 거짓말을 계속하다가 결국 솔직히 자백하여 군법회의에 넘겨졌고, 보안법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아 1949년 2월 수원에서 총살당했습니다. 그는 일본 육사의 마지막 기인 제 61기에 입교했으나 4개월 만에 해방되어 돌아와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 경비대에 들어온 후로는 박헌영의 지령을 받다가 박헌영이 월북하자 김삼룡과 접선을 해 왔었습니다. 당시 남로당의 군 총책은 오일균과 김종석 두 사람인데, 그는 군내에서 좌익을 포섭하는 조직책이었습니다. 그는 경비사관학교 생도대장을 지내는 동안, 제 3기 중에서 문상길을 비롯한 수십 명을 포섭하였고, 그가 옮겨가는 곳에서는 군내에 공산당이 자리를 잡고 했습니다. 창군 때부터 여순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군 내부의 공산당 조직은 모두 오일균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중앙일보 1982년 12월 16일자에 장창국이 쓴 「육사졸업생」이라는 글을 보면, 제주도 4·3폭동에서 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죽인자가 문상길 중위와 최모 상사였는데 최모 상사는 제주에 있던 11연대(연대장 박진경)의 오일균 대대 소속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같은 글에서 “김학림, 강필원 등은 숙군 때 총살을 당했다. 김학림은 사관학교의 구대장으로 발령받아 근무했었는데 생도대장 출신 오일균 소령, 조병건 소령 등과 함께 군내의 좌익 핵심으로 활약했다. 3기 후보생들에게 신상파악을 이유로 밤마다 불러 좌익 사상교육을 실시한 것 등 활동 사실이 적발됐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 한의사를 통해 총과 실탄을 빼돌린 김창봉 대위 제주 8연대 내에 오일균, 문상길, 이윤락 외에 2대대장 김창봉 대위(육사 5기)도 남로당원이었는데, 최경록 연대장이 부임했을 때 그의 꼬리가 잡히고 말았습니다. 손영로 중대장이 “폭도들이 조천 마을을 습격하고 있으니 빨리오라”는 조천 지서의 다급한 지원요청을 받아 중대원들을 이끌고 출동했는데, 김창봉 대대장은 상관의 명령 없이 움직였다고 지나치게 호통을 쳤습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손영로 중대장은 비밀리에 정보과 김두현 소위에게 김창봉 대대장의 뒷조사를 부탁하였습니다. 김두현 소위는 김창봉이 조천리의 큰 부자 한의사와 평소 은밀히 만나는 것을 알아내고, 부하 5명을 데리고 한의사의 집을 덮쳐 조사하여 증거물을 찾았습니다. 한의사는 처음에는 끄떡도 하지 않다가, 부인과 자식들을 붙들어다 위협하자 모든 것을 실토하였습니다. 그는 김창봉 대위로부터 총과 실탄을 받아 공비들에게 공급하였고, 9연대 작전 기밀도 빼돌렸습니다. 김두현 소위는 이 사실을 송요찬 연대장에게 보고하였고 헌벙대 1개 소대를 데리고 가서 김창봉 대대장을 체포하였습니다. 김창봉은 군법에 넘겨져 사형당하였습니다. (6) 해주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차 월북한 김달삼 ‘1948년 8월 25일’은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기 전에 선거가 치러진 날입니다.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선거는 남북한을 통틀어 해야 한다고 합의하여 남한에서도 각 시·군에서 5-7명의 대표자를 최고인민대의원으로 선출하자고 결정하였는데, 인구비례에 따라 남한에서는 360명, 북한에서는 212명을 선출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따라 박헌영은 김삼룡에게 “이남에서 비밀리에 선거인의 선거를 하여 대표자를 해주까지 파송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에 남한에서는 각 시·군 대표 대의원 1,080명을 선출하여 해주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7월 중순부터 남로당, 전평, 전농, 민애청 등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인 남로당 지하 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남로당 전권위원이 8만여 명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남로당 전권위원들이 전남, 강원, 경북, 경남 등 산간마을에까지 찾아가 밤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선거에 대해 설명하고 투표를 실시하여 지역대표를 선출하였습니다. 그 결과 남한의 총 유권자 8,681,746명 중 77.52%, 즉 약 670만 명이 지하 선거(북한 8.25선거)에 참여하였고, 대의원 1,080명이 당선되었습니다. 김달삼은 52,350여 명의 투표용지를 해주 대회까지 가지고 갔습니다. 이때 제주도 대표 대의원으로 안세훈, 김달삼, 고진희, 문등용, 강규찬, 이정숙 등 6명이 함께 갔고, 김달삼은 최고인민회의에서 제주도 폭동의 진상을 보고하여 대의원들의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습니다. 이렇듯 남한에서는 지하 선거를 통해서, 북한에서는 흑박함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이 9월 2일부터 평양에 모여 인민공화국 창건을 위한 이른바 ‘조선최고인민회 제 1차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김달삼은 김일성, 허헌 등과 함께 49명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헌법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때 김달삼은 국기훈장 2급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박헌영, 홍명희, 김책을 부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되었습니다.
7. 제주 인민유격대 제 2대 사령관 이덕구의 폭동
(1) 인민유격대 제 2대 사령관 이덕구(1948.8-1949.6.7) 남로당원 김창봉 대위가 잡히고, 문상길 중위가 박진경 연대장 암살혐의로 잡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또 오일균 소령은 대대장직을 사임하였고, 제주 인민유격대 제 1대 사령관 김달삼은 최경록 연대장의 대대적인 진압 때문에 꼼짝 못하고 산 속 깊은 곳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김달삼은 북하의 8월 25일 선거를 위해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라는 이북의 지령을 받고, 8월 2일 성산포에서 어선을 타고 목포에 도착하여 열차편으로 서울에서 모여 38선을 넘어 월북하였습니다. 제주 인민군은 북으로 올라간 김달삼이 북한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곧 내려올 줄 알고 고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 인민군이 내려와서 자신들을 도와 이승만 세력을 곧 무너뜨리고 남한이 해방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확신에 차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제사 말햄수다-4․3 증언자료집Ⅰ」197쪽에 기록된 이운방씨의 증언에서 확인됩니다. 「‘남부군’(이태의 『남부군』)에 간호병의 말에도 나왔듯이, “인민의 군대는 지지 않아요.” 우리는 사실 그런 확신을 가졌어. 인민의 군대가 오면 승리할 것이라는. 이승만 세력은 곧 무너진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조국통일은 금방 될 것이라 생각했어. 당시 활동하는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었지, 그런 확신이 있으니까 일을 한것이지. 그런 낙관 없이 어떻게 일을 하겠나. 그때는 내려오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고, 남침이니 북침이니 그런 말은 염두에 없었고 그들이 이남을 해방시키는 것은 의무라고 생각했지. 1950년 6월 25일이 너무 늦다고 생각했어. 왜 더 빨리 내려오지 않는가 하고. 이 말은 그때 생각이 그랬다는 거요.」 그러나 기대와 달리 김달삼은 아무 소식도 없었고, 북한에서는 무기공급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사 말햄수다-4․3 증언자료집Ⅰ」232쪽에서 밝힌 이운방 씨의 증언에 의하면, “밀항선을 이용하고 김달삼을 안내인으로 한다면 무기 탄약의 원조쯤은 그리 곤란한 일도 아니었다. ... 그러나 무기의 원조는커녕 두 사람의 기도자까지 눌러두고 있었으니 제주 유격대 측의 입장에 선다면 더욱 괴상스러운 처사라 아니할 수 없겠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김달삼을 이어 이덕구가 제주 인민유격대 제 2대 사령관직을 맡았습니다. 이덕구는 제주도 조천면 신촌리 사람으로, 일본 경도에 있는 입명관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였습니다. 일본군의 관동군 소위로 임관한 장교였으므로 조천면에서는 지식이 높은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해방 직후 일본 육군 소위로 귀국하여 조천면 민정 책임자를 맡았고, 1946년 3월에 개강한 조천중학원에서 1947년 3월 총파업 이전까지 역사와 체육 담당교사로 근무하던 중 1947년 3·1사건 이후 검거되어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1947년 여름 돌연 자취를 감추고 한동안 조천면 사돈집에서 숨어 지내던 그는 남로당 간부회의 도중 검거됐다 풀려난 뒤 한라산에 입산, 4․3사건 발발 후 김달삼 밑에서 행동대장으로 있다가 김달삼의 월북 후 사령관을 맡게 된 것입니다. 정부는 4․3폭동이 거의 진압되는 듯하여 안심하였으나, 이덕구가 새로운 인민유격대 사령관이 된 후, 7-8월을 지나면서 지서 습격과 경찰관을 비롯한 인명 살상이 점점 늘어나, 한동안 잠잠했던 제주도는 또다시 폭동의 불길이 크게 타올랐습니다. 이덕구는 토벌대를 단번에 섬멸하고 제주도를 해방시키겠다며 1948년 9월 15일을 기점으로 경찰과 국군과 우익인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 1948년 9-10월, 인민유격대 폭도들의 학살과 만행 최경록 연대장의 집중 진압으로 인민유격대의 세력이 잠시 주춤하는 듯했으나 9월부터는 공세가 강화되어 큰 폭동으로 번져갔습니다. 지도자를 자처하던 간부급들이 없어지는가 하면, 평양에서조차 제주에서의 폭동이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덕구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수차례에 걸쳐 돌격을 밀어붙였습니다. 이는 제주 인민유격대가 북으로부터 원조가 끊긴 상태에서 국군의 토벌작전으로 숨통이 조여 오는 가운데 이제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돌격 투쟁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1948년 9월 15일 중문면 도순리에 사록 있던 대동청년단원 문두천을 칼로 난자하여 학살한 것을 계기로 이덕구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어, 15-18일에는 제주도 전역에서 4명이 피살되었고, 9월 18일에는 성광리에서 부락민 약 12명이 납치되었으며, 9월 18일에는 함덕리 주민 30명이 봉화신호를 올리는데 동원되었고, 9월 17일에는 김녕리의 경찰지서가 방화되었습니다. • 9월 18일, 성산명 고성 2구 민보단장 김만풍의 집에 폭도들이 들이닥쳐 김만 풍을 칼로 찔러 학살하였고, 양민 오만순(37세)을 학살하였다. • 산사람 7명이 대검을 들고 설치며 이한정의 집에 찾아왔을 때 즉시 조 밭으로 달려가 거기서 일하는 할머니의 등 뒤 치마 속으로 숨어 목숨을 건졌다. 특공대 장 박인주는 도망쳤으나 폭도들이 그를 잡아 대검으로 찔러 현장에서 학살하였 다. • 10월 1일, 폭도들은 제주읍 도남리 토벌에 앞장선 대청단장 등을 잡기 위해 장례식장에 잠입하기로 하고 국군 복장으로 위장한 후 국군부대가 가까운 오등리 장지로 향하였다. 오후 3시경 철모에 M1 소총을 멘 군복을 입은 국군 3명과 양 복을 입은 4명이 장례식장에 나타났다. 이들은 정병택(22세)과 그의 아버지 정익 조와 전 구장 김상혁(60세)을 조사할 일이 있으니 부대로 가자며 끌고 가 장지와 부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학살해 버렸다. • 10월 1일, 폭도들은 밤중에 중문면 도순리의 경찰들을 집중공격 하였다. 한밤 중에 총소리가 천지의 어둠을 갈랐다. 정찬수, 박흥주, 최영규, 김병호 등 경찰 5 명이 죽었고, 부상자가 속출하였으며, 경찰 2명이 납치되었다. 나머지 경찰들은 수수밭에 숨었다가 겨우 살았다. • 10월 6일 오후, 40여 명의 폭도들이 비밀리에 구좌면 김녕리로 가다가 20명 의 경찰과 맞닥뜨려 총격전을 벌였다. • 10월 6일 오후 3시 30분, 색달리에서 약 40명으로 추정되는 폭도들과 국군간 에 전투가 벌어져 국군 1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 10월 7일, 200여 명의 폭도들이 몰려와 조천지서 앞에서 ‘경찰은 물러가라’는 시위를 하였다. (3)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 제주도 폭동이 어느 정도 진압된 줄 알았는데, 폭도들이 다시 경찰을 습격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정부는 큰 충격을 바고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제 9연대 1개 대대, 제 6연대 1개 대대, 제 5연대 1개 대대, 해군함정 및 제주경찰대를 총동원하여 토벌작전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대토벌작전을 실시하여 제주도 폭동을 완전히 종식시키려는 의도에서 여수 14연대 1개 대대를 9연대에 배속시키고자 했습니다. 제주도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제 9연대의 상급부대인 제 5여단의 여단장 김상겸(金相謙) 대령이 임명되었으나,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 반란이 일어나 8일 만에 해임되었고, 제주도경비사령관직은 제 9연대장 송요찬이 겸직하였습니다. 이로써 송요찬은 진압군의 총책임자가 되었습니다. (4) 1948년 10월 17일, 무허가통행금지 포고령 송요찬 연대장은 10월 17일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으로부터 5km이상 중산간(中山) 지역으로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특별 통행증을 발급받은 주민만 통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는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지구에 계엄이 선포되기 전에 실시 된 것입니다. 이 포고문은 주로 중산간 마을 거주자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무허가로 통해하는 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총살에 처한다는 특별한 작전이었습니다. <1948년 10월 17일자 송요찬 제 9연대장의 포고문>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량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지령을 봉지하여 차등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퇴를 가하여 본도의 영원한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만대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분자를 철저 숙청코저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적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행동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4킬로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는 그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폭도배를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5) 1948년 10월 24일, 대한민국을 상대로 이덕구의 선전포고 1948년 10월 23일 폭도들이 제주시가로 사격을 가하고 제 9연대의 지프차를 공격하는가 하면, 제주도 북방의 50여개 처에 봉화가 점화되었고, 처처에서 집단회의가 개최되었으며, 북한의 조선인민공화국기가 곳곳에 게양되었습니다(재조선 미육군사령부의 1948년 10월 2일자 정보참모부 일일보고서 기록). 그리고 다음 날인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는 정부와 군경당국에 대해 ‘선전포고문’을 발표했습니다. 김봉헌․김민주 공편「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165-167쪽에서는 선전포고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제주도 인민유격대는 총책임자 이덕구 명의로써 동년(※1948년) 10월 24일 괴뢰정부에 대한 선전포고문과 일체의 토벌군과 통치기관들에게 ‘호소문’을 광포하였다. ... <국방군, 경찰관>들에게의 ‘호소문’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덕구의 선전포고문(1948년 10월 24일)은 소련의 10월 혁명을 기념하고, 특히 1948년 10월 19일 일어난 여수 14연대 반란으로 폭도들의 기세가 등등하던 차에 단행된 것이었습니다.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의 명의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항하여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과, 대한민국 정부를 ‘괴뢰정부’라고 칭한 것만 보아도 4․3사건이 폭동이고 반란이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즉, 이덕구의 선전포고는 남한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내란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선전포고 이후 제주도 인민유격대가 국군 9연대 6중대를 공격한 사건(1948년 11월 2일)을 계기로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6) 인민유격대와 내통한 제 9연대 내 비밀조직 발각(10월 28일) 군의 토벌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남로당의 세포조직이 군에 침투하여 인민유격대 측에 토벌대의 정보를 누설해 군의 작전수행을 어렵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문상길 중위와 오일균 소령이 사라진 뒤에 등장한 9연대 내부의 남로당 프락치는 구매과장 육사 4기 출신 강의현 소위였습니다. 최경록 중령 이후 송요찬 소령이 연대장으로 부임했을 때, 강의현 소위는 문상길과 오일균이 그랬듯이 소요찬 연대장을 암살하고 9연대를 반란군으로 만들어 제주도를 공산화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송요찬 연대장은 군 내부에 있는 남로당원 색출을 위해 일부 병력을 여순 반란군으로 위장시켜서 조천면에 상륙토록 하고 반란군들이 이들을 환영하는 것을 포착할 때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 작전을 5중대 이근양 중대장에게만 비밀리에 지시했습니다. 그리고는 경찰국장 홍순봉 경무관에게 국군이 반란군으로 위장하여 상륙하니 놀라지 말라고 통보해 주려고 수화기를 들었는데, 교환병중 좌익분자들이 전화선을 합선시켜 작전이 폭도들에게 누설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송요찬 대령은 그 즉시 연대 교환병과 경찰 교환수를 모조리 체포, 조사하여 9연대 안에 남로당원 장교 6명과 사병 80명을 유치장에 잡아 가뒀습니다. 그 중에 장 중위, 권 중위와 그 외 하사관들은 명령만 있으면 언제든지 연대장을 암살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고 자백했습니다. (7) 1948년 11월 2일, 폭도들의 제주 9연대 6중대 공격 여수 14연대가 반란에 성공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폭도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국군을 공격해 본적이 없던 그들은 이제 국군을 공격하기 위한 대담한 작전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48년 11월 2일, 대낮에 제주 한림에 주둔한 9연대 2대대 6중대를 공격하여 국군 14명이 순식간에 숨졌고, 이 보고를 받고 3중대가 2개 소대를 이끌고 도착했는데 7명이 전사하여 당일 총 21명의 국군이 숨지고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폭도들의 막강한 세력에 깜짝 놀란 국군은 강경진압으로 대처하였습니다. 만일 폭도의 군 공격이 없었다면 국군이 폭도들을 죽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부터 7월 말까지 국군 9연대(혹은 11연대)는 제주도 양민을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2개 중대가 엄청난 피해를 보았으므로 대대장은 5중대장 이근양 대위에게 폭도들의 매복에 걸리지 말고 조심스럽게 소탕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3시간 가까이 수색하여 중산간 지역의 민가에 숨어있는 폭도들을 발견하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오전 6시 30분경, 2개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30분간 집중사격을 가하였습니다. 이때 100여 명의 폭도가 죽고, 몇 명이 부상을 당해 살아 있어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후 송요찬 연대장은 9연대와 경찰을 총동원하여 보급창, 무기 수리공장, 식량창고 등은 경찰에 맡기고, 국군은 폭도들의 아지트를 기습하도록 하였습니다. 폭도들의 창고에는 겨울을 나기 위한 어마어마한 식량과 물자가 쌓여 있었는데, 중대 선임하사들은 그것이 중산간 마을의 주민들 중에 내통자가 있기 때문임을 알고 그들을 찾아내어 처형하자고 강력하게 건의하였습니다. 100여 명의 폭도가 죽고 겨울 식량을 많이 빼앗긴 이덕구는 중문지서를 집중공격하고 면사무소의 양곡을 탈취하여 겨울준비를 계획하였습니다. 11월 5일 새벽 3시, 150여 명의 폭도들이 중문지서를 집중공격하여 면사무소의 곡식을 털어갔습니다. 서귀포 경찰서에서 중문지서를 돕기 위해 트럭 1대에 30명이 전속력으로 달려왔는데, 폭도들의 매복에 걸려 집중사격을 받고 운전수 오유삼이 다리에 총을 맞고 기관총사수 김재환이 총을 맞고 분대장 김남군 경사가 폭도들의 총에 맞아 즉사하였습니다. 모슬포 3대대도 연락을 받고 중문지서 못 가서 색달동안에 이르렀을 때 폭도들의 매복에 국군 1명이 전사하였습니다. 11월 7일 아침 7시, 폭도들이 서귀포경찰서를 대낮에 공격하였고, 주변에 있는 집 72채에 불을 질렀습니다. 11월 11일, 폭도들은 신엄지서를 습격하고 우익 김여만의 처 고선집과 딸과 아들을 모두 죽이고 이 마을 80채에 불을 질렀습니다. (8) 제주도경찰국 내의 인민유격대 내통 비밀조직의 발각 (11월 7일 제주도 적화음모사건) 남로당은 경찰 간부들을 모조리 죽이고 제주도 내에 있는 4개 경찰서를 모두 점령하여 제주도를 공산화하겠다는 대대적인 적화야욕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1948년 11월 7일에 일어난 이른바 「11․7사건」이라는 제주도 적화음모 사건입니다. 남로당이 이 날을 기해 경찰에 침투돼 있는 프락치들로 하여금 무기고를 점거, 탈취케 하고 전 경찰과 사회저명인사, 우익정당 및 사회단체 간부들을 살해한 다음 각 관공서를 모조리 불태워 제주도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흉계를 꾸민 것입니다. 이는 4월 3일의 경찰공격 사건에 이어 제주도 전역을 장악하려던 남로당의 두 번째 시도였습니다. 이 사건은 월간지 「신천지(新天地)」 1949년 9월호에 “남로당 지령하에 수개월간 계획한 전 제주를 완전히 인민공화국화 하려던 대 음모사건으로써 여순사건과 비교할 바가 아닌 대대적 음모다.”라고 소개되었습니다. 제주도 적화음모를 계획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여수 14연대 반란이었습니다. 저들은 어리석게도 여순지구의 반란군이 장차 제주도에 상륙하여 자기들과 합세할 것이라는 풍문에 속아 공산혁명을 위한 결정적 시기가 왔다고 착각한 것입닏. 만일 이 음모가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제주도는 또 한 차례 비극을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제주경찰서 내부의 남로당원을 검거하게 된 계기는 바로 경찰서구내 이발소에서 근무하던 프락치 서용각의 신고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었는데, 합동통신의 김기자로부터 “이제 곧 제주도가 해방된다. 지금 산으로 올라가라. 산에 연락해 두었으니 영웅대접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폭도들이 뭔가 큰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번민하던 그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위생계장 고창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고, 음모의 전모가 상부에 보고된 것입니다. 그 결과, 좌파 경찰 11명, 도청, 법원, 읍사무소, 해운국 내의 좌익 75명이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수사가 한 달여 동안 계속 되면서 서귀포 등 제주 일원에서 1,000여 명의 가담자를 검거하였습니다. 이후 상부에서는, 제주도 출신 경찰과 국군은 도저히 그 사상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제주도 내 특별수사대 12명을 모두 육지 출신으로 교체하였습니다. (9) 계엄 선포 이덕구가 사령관이 되면서 처음 일으킨 9.15사건 이후 10월 24일 이후부터 인민유격대의 공격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강의현 소위 등 80여 명의 남로당원 반란모의 실패(10월 28일), 75명의 좌익 경찰과 좌익 공무원 등의 제주도를 적화하려는 음모가 실패(10월 31일), 국군 9연대 6중대 공격으로 중대장 이하 21명 사망(11월 2일). 이렇게 많은 국군이 희생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정부에서는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국군은 강경진압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① 1948년 11월 17일, 계엄 선포 이덕구의 선전포고(1948년 10월 24일)와 인민유격대가 국군 9연대 6중대를 공격한 사건(1948년 11월 2일) 때문에, 정부에서는 1948년 10월 25일 여수 순천 지구에 대통령령 제 13호 계엄을 발표한 데 이어 제주도에서 1948년 11월 17일 대통령령 제 31호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이란 제하에 계엄을 선포하였습니다. 계엄령 선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덕구의 선전포고문 발표 이후 군경의 토벌대는 강경 진압작전을 전개하였고, 인민유격대와 협조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여 투옥 및 처형하였으므로, 제주도 남로당은 그 조직이 궤멸될 정도의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특히 1948년 11월 17일 이후 12월 31일까지의 계엄선포기간에는 제 9연대의 토벌작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인민유격대는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일반주민이 체포․구금되거나 현장에서 즉결처형되는 사례가 급증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계엄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언도자는 후에 처형되고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육지의 형무소로 이송되어 복역하였습니다. 그런데 2003년 12월 15일 발간된 정부보고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 1대 폭도 사령관 김달삼을 이어 제 2대 폭도 사령관이었던 이덕구가 1948년 10월 24일 대한민국 정부를 향해 <선전포고>한 내용을 계획적으로 삭제하고, 이승만 정부의 계엄령 선포를 부각시켜, 마치 군경의 강경 진압으로 무고한 양민이 학살당한 것처럼 거짓말로 확대 해석하였습니다. 제민일보 4․3 취재반장이었으며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수석전문위원으로 참여한 양조훈(제주출신, 제주 부지사 역임)씨가 자신의 저서 「제주 4․3은 말한다 Ⅳ」 68쪽에서는 이덕구의 선전포고 내용을 자세히 다루었으면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② 다랑쉬굴 사건 계엄선포 기간에 중산간 지역에서 있었던 많은 사건 중 ‘다랑쉬굴 사건’(1948년 12월 18일)은 좌익편향적인 자들이 완전히 거꾸로 해석하여 4․3사건을 ‘민주항쟁’으로 미화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군경 진압군에 의한 참극의 상징’처럼 본 사건을 왜곡 포장하고, 제주도 ‘4․3평화공원’ 내부 전시실에도 ‘다랑쉬굴의 비극’이라는 제하에 ‘저항도 못하는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초토화작전의 실상이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나종삼(羅鍾三) 전 4․3위원회 전문위원은 경찰조서와 당시 하산한 자들의 진술을 확인하고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고발한다(2)」, 「국방 119」(2004년 4월호) 87쪽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습니다. 「1948년 12월 3일 밤에 100여 명의 무장대가 세화리를 습격하여 138채의 가옥을 방화하고 43명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 경찰 10명과 민보단원 100명으로 토벌대를 편성하여 인근 산간지역을 수색하다가 다랑쉬굴을 발견하였고, 토벌대가 굴속에 11명이 있음을 알고 수차례나 투항을 권고해도 불응하자 연기를 피워 질식사시켰다. 이들 중 7명은 20-30대 청년들로서 남로당 구좌면 위원장 정권수의 지휘를 받아 통신, 보급,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쇠창과 죽창 등으로 무장한 공비들이었다.」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이 굴속에 있는 자들에게 밖으로 나오면 살려주겠다고 몇 차례에 걸쳐 권유하였으나, 나오는 사람이 없어 굴속을 향해 총을 몇 발 쏘자 그제야 고태원(25세)이란 자가 나와 굴속에 11명이 있고 자지가 자수시키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군인이 그의 몸에 줄을 묶어 앞세우고 뒤에서 따라 들어갔으나 중간에 그가 줄을 끊고 도망쳐버려서, 따라가던 군인은 밖으로 나오고 계속 자수를 권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응하지 않자 굴 입구에 불을 던졌는데 30여 분쯤 지난 후 청년 1명만 빠져나와 덕천리 쪽으로 도주하였습니다. 다랑쉬굴 11명의 유골은 1992년 3월 22일에 발견되어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제주도지방경찰청 보안과」 문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발견된 유류품에서 • ‘가마솥, 물통, 그릇류’ 등은 입산공비들이 장기간 은신하기 위한 생활용구이고 • ‘철장, 도끼, 대검, 낫’ 등은 통상 입산 공비들이 휴대하여 살상(殺傷)용으로 사용했던 무기인 점 당시 정황으로 보아 전시 유골들은 생존 시 재산(在山) 공비들로 양민들에게 살인, 방화, 약탈 등 만행을 저지르고 동굴 속에 은거해 있다가 군․경․민 합동 토벌대의 작전과정에서 소탕된 입산 공비들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음.」 그런데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00쪽에는 “1992년 구좌읍 중산간 지대에 있는 다랑쉬굴에서 유골 11구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군의 진압작전에 희생된 도피 입산자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4․3사건 당시 은신자에 대한 무분별한 작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라고 잘못 기술되어 있습니다. 역사서로서 후세에 남겨질 정부보고서에 4․3관련한 여러 사건들이 좌편향적으로 심하게 왜곡되어 기록된 점에 대하여 실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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