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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사3. 여수 14연대-반란(순천사건)(1) | 운영자 | 2020-09-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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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 반란 The uprising of Yeosu 14th regiment on October 19, 1948 국방경비대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은, 제주 4.3폭동과 맞물려 일어난 사상 초유의 유혈 폭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제주도의 폭동진압을 위해 출동 준비 중이던 여수 14연대 내의 인사계 지창수 상사와 대전차포 중대장 김지회 중위, 순천 파견 2개 중대 선임중대장 홍순석 중위의 주도로, 좌익 남로당원 40여 명이 일으킨 군 반란입니다. 이 사건은 남로당원이 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일반 서민들을 충동질하여 일으킨 폭동과는 달리, 국군 1개 연대 전부가 반란군이 되어 일으킨 대대적인 군 폭동입니다. 그 성격상 국가 전복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전쟁과 방불한 대단히 큰 반란 사건인 것입니다. (1) 남로당의 국방경비대 침투 공작 남로당 부위원장 박헌영은 국방경비대가 점차 군대의 면모를 갖추어 가자, 군에 대한 침투 공작을 시도하였습니다. 특히 1948년 5.10선거 과정에서 좌익 세력의 피검자가 많아지자, 그 일을 서둘러 본격화했습니다. 국방경비대는 신병을 모집할 대 미군정의 방침에 따라 신상 조사나 사상 검토를 하지 않고 신체 검사와 구두 시험만으로 모집했기 때문에 좌익 세력들이 경찰의 수배를 피해 마음껏 입대할 수 있었습니다. 남로당의 국방경비대 침투 공작 가운데 특이할 만한 점은, 장교와 사병을 구분하여 침투방법을 달리하였다는 것입니다. 장교는 중앙 군사부가 관리하고, 하사관과 사병은 각 지방 도당에서 관리하는 이원적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장교는 근무지 이동이 심하고, 사병은 각 도(道)가 모병 단위여서 부대 이동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로당 장교의 군내 침투 공작은, 첫째 개인적인 실력으로 입교하는 방법, 둘째 정부 군․정계의 유력 인사를 이용하여 추천을 받아 입교하는 방법, 셋째 남로당 수뇌부가 군내 당 조직에 추천하여 입교하는 방법, 넷째 사관학교 직원으로 있는 당 조직에 추천하여 입교하는 방법, 넷째 사관학교 직원으로 있는 당 세포를 이용하거나 또는 그들을 매수하여 입교하는 방법, 다섯째 기성 장교의 신원과 인적 사항을 조사하여 접근할 소지나 잠재 성분을 가지고 있는 자를 포섭하는 방법, 여섯째 장교들의 대인 관계, 지연, 혈연, 인연, 동기동창 관계 등 다양한 인적 관계를 이용하여 포섭하는 방법등을 이용하였습니다. 남로당 사병의 침투 공작은, 부락에서 당성이 강하고 성분이 좋은 분자를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입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창설된 국방경비대 내부에는 남로당원이 대거 침투되었고, 밤마다 공개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학습하며 토론을 벌였습니다. 1연대의 경우 주말이면 남산공원에서 개최하는 공산당 집회에 사병을 인솔하고 참석하여 공산주의 사상 교육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당시 국방경비대에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 들어온 사상적 불순자들에 전력을 다해 군대 안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들끓었습니다. 이같은 남로당의 군내 침투 공작은 후일 군 내부 반란의 화근이 되었으며, 급기야 여수 주둔 제 14연대 반란이라는 큰 폭동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2) 영암 군경 충돌 사건(1947년 6월 1일) ‘국방경비대’는 경찰의 예비 병력이므로 ‘경찰예비대’ 성격이 강해서 경찰에게 무시를 당했습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경찰 복장은 미군 복장과 같이 하고 무기도 미제 M1소총으로 무장하게 하였으나, 국방경비대는 일본 군복을 입히고 무기는 일제 38식이나 99식 소총으로 무장하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국방경비대의 계급장은 경찰 계급장을 뒤집어서 사용하게 하였고, 경찰들의 가정환경이나 교육수준도 국방경비대 병사들에 비해 다소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경찰들이 무시하였습니다. 반면 국방경비대는, 당시 경찰들의 80% 정도가 친일 출신이므로 ‘매국노’로 취급하여 무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경찰과 경비대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광주 4연대 1대대와 영암 경찰 간에 충돌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광주 4연대 1대대로부터 창설된 여수 14연대에도 영향을 미쳐, 1948년 10월 19일 여순 반란을 일으키게 된 큰 불씨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암 군경 충돌 사건은, 1947년 6월 3일 전남 영암에서 국방경비대 광주 4연대 제 1대대와 영암 경찰 간에 발생한 무력 충돌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결정적인 불씨는, 제 4연대 소속 김형남 하사와 경찰 사이의 충돌이었습니다. 시비의 원인은 경비대의 김형남 하사가 외박 후 부대 복귀를 위해 신북지서 안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경찰들이 무궁화 모양인 경비대의 계급장을 사쿠라 같다고 비아냥거린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김 하사가 먼저 경찰들을 폭행하자 지서 순경들이 본서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본서에서 출동한 형사들이 김 하사를 공무집행방해, 폭행 등의 죄목으로 연행했습니다. 한편 지서 밖에서 군기병들은 외출 사병들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다가 흥분하여, 보초를 서고 있던 순경을 골목으로 끌고 가 집단 구타를 하였습니다. 당시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영암 본서를 찾아간 김희준 중위와 군기대장 정지웅 중위 일행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경찰서장 면담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하고 경찰 간부들과 언쟁을 벌였으며, 경찰측은 경비대가 경찰의 보조기관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김하사를 구속한 것이 법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김희준 중위와 정지웅 중위는 귀대 길에 올랐고, 신북지서 앞을 통과할 즈음, 갑자기 30m가량 앞서 달리던 차량에서 경찰 10여 명이 공포를 쏘면서 김 중위 일행의 차를 강제로 정지시키고 사병들을 하차시켜 폭행했습니다. 이때 경찰로부터 뭇매를 맞은 군기대 선임하사관은 광주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운전병을 통해 사건의 경위가 부대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흥분한 300여 명의 대원들은 김은배 중사의 지휘하에 무기고를 열어 총과 실탄을 휴대하고 차량 7대를 이용해 출동하였습니다. 제 1대대장 최창언 대위가 급보를 받고 부대에 들어와 장교들을 불러 심하게 꾸짖고 사태 수습을 위해 장교들도 출동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연대 장교들이 허겁지겁 뒤쫓아갔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서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경찰측은 아예 망대에다 기관총까지 걸어놓고 쏘아대고 있어서, 경비대가 몹시 불리하였으며 희생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이때 연대장 이한림 소령이 경비대에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으며, 영암군수와 함께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만나 유혈 방지 원칙에 합의함으로써 총격전은 종결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제 4연대는 6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한 반면 경찰측은 피해가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군기대원 3명이 경찰관 폭행죄로 군정재판에 회부되었고, 경찰은 경비대를 더욱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주번사령 이관식 중위가 파면되었고, 대대 선임하사관 김인배 상사가 병력 지휘책임, 최석기 상사가 수송부 선임하사관으로서 차량을 도우언한 책임으로 각각 10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남도에서는 군과 경찰 간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국방경비대와 경찰 간의 갈등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좌익 세력들은 바로 이 점을 악용하여 제 4연대 내에서 경찰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며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고, 광주 4연대에서 차출된 자들로 구성된 전남 여수 14연대는 반란을 일으킬 결정적인 빌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지창수 상사가 반란을 선동할 때, 바로 이점을 집요하게 부추겨 14연대를 자극하였던 것입니다. (3) 국방경비대 여수 14연대 창설과 반란 음모 여수 14연대는 여수읍 신월리(현 여수시 신월동)라는 바닷가 지역에 위치하였습니다. 신월리는 여수읍에서 가파른 구봉산 허리와 바다를 끼고 동쪽으로 약 4KM 지점에 버선코처럼 툭 튀어 나온 여수 반도 남단에 있으며, 구 일본 해군 비행장 기지였습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 때 농민들의 논밭과 마을을 강제로 빼앗아 사용했던 곳입니다. 여수 14연대는 1948년 5월 4일, 광주 4연대(1946.2.15. 창설)에서 차출된 1개 대대를 근간으로 신편(新編)되었습니다. 반란 당시 박승훈(朴勝薰) 중령(일군대좌, 일본 육사 제 27기생)이 연대장으로, 이희권(李喜權) 소령이 부연대장으로 있었습니다. 제 14연대 기간요원은 하사관 출신 50여 명이 근간이 되었습니다. 지창수 상사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고, 그 역시 광주 제 4연대 모병 때 입대했던 자입니다. 광주 4연대 1대대에 남로당원 홍순석 중위(육사 3기), 김지회 중위(육사 3기)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밤마다 내무반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가르쳤는데, 육사 3기의 80%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한편 당시 여수를 중심으로 여천 일대 도서크고 작은 섬들지방에는, 지주계급에 반발하여 생겨난 좌익세력이 상당한 규모로 확대되어 가고 있었고, 여천 지방 역시 대대로 이어온 지주세력에 대한 반감 때문에 많은 서민층이 은밀하게 좌익에 가담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홍순석 중위는 순천 파견대장이란 요직을 맡고 있었고, 지창수 상사 또한 인사처 선임하사로, 정낙현 상사는 정보처 선임하사로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반란음모는 암암리에 무르익어 가고 있었습니다. 1948년 10월 초 평양에 있는 북괴 외무성에서는 이미 이중업(남로당 빨치산 군사책)의 보고를 통해, 여수 14연대 내 남로당 조직책 지창수 상사가 폭동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4) 우체국 일반 전보를 통해 하달된 제주도 출동 명령 1948년 10월 11일, 육본에서는 제주도의 폭동 진압을 위해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신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구 6연대와 부산 5연대에서 각각 1대대를 여기에 배속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10월 15일에는, 여수 14연대 1개 대대를 제주 9연대에 증파할 계획을 세우고, 연대장 박승훈 중령에게 여수 우체국 일반전보를 통해 “14연대 1개 대대는 1948년 10월 19일 20시에 여수항을 출발하여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라”는 출동명령을 내렸습니다. 국방경비대는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설 면에서 경찰보다 뒤떨어진 열악한 환경이어서 자체 통신시설이 갖추어 있지 않았으므로 불가피하게 우체국 통해 명령을 하달하게 되었습니다. 박승훈 중령은 출항전문지시가 여수우체국을 통하여 일반전보로 하달되어 기밀이 누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출항시간 변경을 논의한 끝에 4시간을 늦춘 24:00시로 변경하였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육본의 하달명령은 박승훈 연대장이 보기도 전에, 우체국에서 일하는 남로당원에 의해 여수 인민위원장이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여수 인민위원장은 김백동(전남도당 책임자)에게 보고하였고, 김백동은 이재복(남로당 군사부장)에게 보고하였으며, 이재복은 다시 이중업(남로당 빨치산 군사책)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에 이중업은 이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이재복에게 여수주둔 제 14연대에 침투해 있는 프락치들로 하여금 폭동을 일으키도록 지령하였고, 이재복은 지창수 상사에게 지령을 내렸습니다. 반란의 총책임자는 지창수 상사로 임명되어 있었으나, 일단 거사에 성공하면 지휘계통이 서야 하기 때문에 전투 지휘는 김지회(육사 3기, 대전차포 중대장), 홍순석 중위(육사 3기, 순천 주둔주대 선임 중대장)가 맡도록 하였습니다. 또 “이미 여수, 여천 일대의 민청 민애청 인민위원회 간부들과도 내통이 되어 있으니, 반란 직후 이들을 무장시켜 주는 동시에 장교는 이용가치가 있으면 가두고 나머지는 모두 사살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반란을 선동할 것을 지령하였습니다. 14연대에서 반란이 터지면 전군이 들고 일어나 순식간에 호응하도록 계획한 것입니다. (5) 인사계 지창수 상사의 반란 선동 드디어 제주도 폭동 진압을 거부하는 여수 14연대 반란의 거사일이 되었습니다. 10월 19일 오후 7시, 출동대대의 환송을 겸한 회식이 장교식당에서 개최되어 전 장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식사를 마친 연대장과 참모들은 여수항 군함에 군수물자를 선적하느라 부대를 출발, 여수항에 도착하여 선적을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대전차포 중대장 김지회 중위와 연대인사계 지창수 상사는 모의 끝에 장교회식 때를 이용하여 장교들을 모두 사살하고 봉기하려 하였으나 장병들의 이목이 있어 실행을 못하고 부대 출발 직전에 거사하기로 변경하였습니다. 10월 19일 오후 8시, 지 상사는 연대 내 핵심세포 40여 명에게 사전 계획대로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케 하고 비상나팔을 불게 하였습니다. 비상나팔이 울리자 출동대대의 사병들은 출발신호인 줄 알고 지체없이 연병장에 집합하여 줄을 지어 실탄 지급을 기다렸습니다. 이때 진창수 상사는 병사들의 반(反)경찰 감정을 교묘히 자극하면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반란을 선동하였습니다. “인사계 선임하사관 지 상사이다. 지금 긴급 정보에 의하면 여수 경찰이 평소 우리와의 사소한 충돌로 반감을 품고 전 일본 해군을 동원하여 여수에 상륙하여 14연대를 포위하고 공격하려고 하고 있으니, 우리는 제주도 출동에 앞서 이들 악질 반동 경찰과 일본군을 타도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제주도에 가서 동족상잔을 할 이유가 없으니 제주도 출동을 반대해야 한다. 지금 북조선의 인민군도 남조선 해방과 일본군 격퇴를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는 소식이다. 미국 앞잡이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인민을 버리고 비행기로 일본으로 도망갔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지금 북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하여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 모두 나의 뒤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좌익들이 일제히 “옳소!”하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북한 인민군이 남진한다는 말에 갈피를 잡지 못한 데다 해방군이 된다는 소리에 놀란 하사관 2명과 사병 1명이 ‘경찰을 타도하고 제주도에는 안 간다 해도 해방군은 안 된다’고 고함치자 좌익 하사관들이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총살하였습니다. 어리둥절해 있던 장병들은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고 겁에 질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지창수와 함께 반란군에 가담, 맹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여수 14연대 내부에 있던 남로당원들은 미리 ‘제주도에 출동하면 비행기들이 우리가 탄 배를 폭파시킬 예정’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드려 놓았고,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14연대 장병들은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모두 제주도 가기를 꺼려하는 분위기여서, 쉽게 저들의 반란에 동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6) 반란군들의 무기고 점령 비상나팔과 총성에 놀란 제 2, 제 3대 대원들도 무슨 일인가 하여 연병장 쪽으로 나오고 있었는데 지창수 상사와 그의 일당들이 “빨리 나와라! 무기고에 가서 총과 실탄을 가질 수 있는 데까지 가지고 집합하라”고 하였습니다. 연대 내 무기고에는 제주도 토벌 부대에 공급할 목적으로 미군의 신식무기(미제 M1소총과 60mm박격포)와 풍부한 탄약과 폭탄이 지급되어 있었으며, 반납해야 할 3,000여 정의 구식무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무기가 평소보다 두 배 가량 더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무기고와 탄약고는 일본 해군이 산허리를 터널같이 뚫어놓은 것을 콘크리트칠을 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입구에 철조망을 치고 보초를 세웠습니다. 반도들은 보초를 서던 하사를 무참하게 쏘아 죽이고 문에 잠겨있는 열쇠를 총으로 터뜨려 그곳을 점령한 후, 힘에 겨울 정도로 탄약을 휴대하였습니다. 이미 탄약고는 점령되었고, 지창수 상사는 실탄을 최대한으로 장전하라고 하면서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 장교들을 모조리 죽여라”라고 외쳤습니다. 반란군으로 변해 버린 1대대뿐 아니라, 2대대와 3대대 장병들까지 영문도 모른 채 실탄을 지급받아 반란군이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반란군으로 돌변한 3,000여 명은 지 상사 지휘하에 모든 군량을 동원하여 여수 시내로 돌격하였습니다. 당시 1대대 병력을 제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정박 중이던 LST 선박이, 반란이 일어나 직후 바로 기관총 사정권을 벗어난 해상으로 옮긴 게 다행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승선한 사병 43명과 7만 4천여 발의 실탄 등이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7) 14연대 핵심 장교들의 죽음 반란군이 각 대대 병사(兵舍)를 돌아다니며 “안 나오는 놈들은 다쏘아 죽인다”고 위협을 하자, 도처에 숨어 있던 자들도 공포에 떨면서 하는 수 없이 나와 무장을 하고 집합하였습니다. 사병들은 희생자가 별로 없었지만 장교들은 발견하는 대로 무조건 사살하였습니다. 제 5중대의 주번사관 박윤민 소위(육사 6기)는 비상나팔 소리를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연병장으로 나갔다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보초에게, “주번사관이다. 쏘지 말라!”고 외치면서 가까이 갔다가 배(방광)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습니다(후에 대령으로 승진). 1대대 부관 김정덕 소위(육사 5기)가 사병들에게 집단구타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조병모 소위(육사 6기)가 “왜 장교를 때리느냐”고 외치자 반란군 사병들이 “뭐 이 새끼”하면서 총검으로 조병모 소위를 찔렀는데, 칼날이 복부에서 등 뒤까지 관통하여 즉사했습니다. 이틈에 달아나던 김 소위도 팔에 총탄을 맞고 탄약고 앞에서 쓰러졌고, 제 1대대장 김일영 대위도 쫓아 나오다 사살되었습니다. 당시 1대대 작전교육관으로 있던 전용인 소위는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당시 1중대장실에서 자고 있다가 밖으로 나가 연병장으로 향하는데... 근무중대 옆 사무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총소리가 나면서 여러 명이 언덕길을 달려 내려왔다. ... 대대 부관 김정덕 소위가 양팔이 늘어져 덜렁거리는 상태로 달려 내려와 ‘저놈들이 나를 쐈다’고 소리치며 내 앞에 털썩 쓰러졌다.” 한편 여수항의 LST에서 점검과 부대도착을 기다리고 있던 연대장과 부연대장은, 23:00시 경에야 탈출해 온 연대수송장교 정 중위가 연대 내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고함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부연대장 이희권 소령(학병출신, 군사영어학교)은, 정보주임 김래수 중위를 대동하고 연대로 향했는데, 정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탄약고 부근에 이르렀을 때 무심코 “부연대장이다”라고 말하자 곧 집중사격을 받아 옆에 있던 김 중위가 현장에서 즉사하였습니다. 반도(叛徒)들의 집중사격으로 이 소령은 포복하여 겨우 연대본부로 들어가 스피커로 방송하기를 “나는 부연대장이다. 불순분자의 선동에 넘어가지 말고 마음을 돌려라. 대한민국에 충성할 군인들은 연병장에 모여라. 지금도 시간은 늦지 않았다”고 호소하였으나, 반군들이 움직일 리 없었고 계속되는 총성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껴 할 수 없이 다시 차를 타고 여수읍 헌병 파견대로 가서, 순천에 전화할 것을 독촉했습니다. 순천에 14연대의 2개 중대가 철도보호 임무를 띠고 파견 나가 있었는데, 바로 그 2개 중대의 선임중대장이 반란 주동자 홍순석 중위였습니다. 이 사실을 몰랐던 부연대장은 반란이 일었으니 빨리 2개 중대를 인솔해서 여수로 출동하라고 명령했으나, 그는 “부연대장님, 저는 아파서 못가겠습니다.”라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홍순석은 끝내 이 소령의 명령을 듣지 않고 순천 경찰서를 습격하기 위해 은밀한 계획 하에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부연대장은 나중에야 홍순석 중위가 순천지구의 반란주모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창수를 비롯한 14연대 내부의 남로당원은 저항하는 하사관과 사병 40여 명을 그 자리에서 살상했습니다. 사병들은 희생자가 별로 없었지만 장교들은 발견하는 대로 무조건 사살하여 14연대의 지휘급 장교 24명은 순식간에 살해되었습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참변이었습니다. 이때 살해된 장교 24명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육사 2기 1대대장 김일영 대위, 2대대장 김순철 대위, 3대대장 이봉규 대위, 연대 작전 주임 강서윤 대위 육사 3기 1중대장 차지영 소위, 2중대장 김용관 중위, 진도연 중위, 이병우 중위, 길원찬 중위 육사 4기 정보주임 김래수 중위 육사 5기 김록영 소위, 맹택호 소위, 박경술 소위, 민병흥 소위, 김진용 소위, 이상술 소위, 장세종 소위 육사 6기 이병순 소위, 김남수 소위, 유재환 소위 김일득 소위, 노영우 소위, 이상기 소위, 조병모 소위 장교들과 장교 밑의 하사관들까지도 모두 사살되어 지휘관이 사라지자 여수 14연대 내의 사병 2,300여 명은 자동적으로 지창수의 선동에 따라 일시에 반란군이 되고 말았습니다. 연대 병력을 반란군으로 조성시키는 데 성공한 지 상사는, 자신이 해방군의 연대장임을 선언하고 그들이 계획한 대로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등을 다시 임명하여 반군지휘체계를 편성하였습니다. 편성이 끝나자 그들은 다시 부대 내에 숨어 있는 장교들을 색출하여 대부분 사살하고, 군의관이나 통신 장교 같이 이용가치가 있는 자들은 창고 안에 구금시켰습니다. 한편 연대장 박승훈 중령은 반란 보고를 받은 후, 제 14연대 제 1대대의 제주도 출항을 환송하기 위해 여수에 머물고 있던 제 5여단 참모장 오덕준 중령을 찾아가 사건 발생을 보고하였습니다. 연대장과 제 5여단 참모장은 즉시 연대로 향했으나 반란군들의 기세를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그 길로 연대를 빠져 나와 여수항에서 해군 경비정을 타고 목포로 피신했습니다. 목포에 도착한 참모장 오덕준 중령은 진상을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고, 연대장은 제 5여단 사령부가 있던 광주로 갔습니다. (8) 여수 인민위원회 소속 23명의 반란 가담 여수 인민위원회 소속 23명은, 1948년 10월 19일 20시경에 14연대 정문 앞 식품점에서 반란이 성공하기를 기다렸다가, 성공했다는 연락을 받자 영내(營內)로 들어와 합세하고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면서 이들도 함께 무장하고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이 사실은 여수 남로당에서 반란 지령을 내렸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여수 14연대 반란은 결코 항쟁이 아니라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군 내부의 남로당원들에 의한 반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창수가 14연대 전 대원들 대부분을 장악한 데다 이에 호응한 여수 민애청원과 좌익 학생 등 공산 좌익 민간세력까지 규합하여, 그날 밤 11시 30분경에는 이 여세를 몰아 여수 읍내로 쳐들어갔습니다. 제일 먼저 여수 경찰서를 습격한 반도들은 계속해서 우체국, 지서 등 관공서와 공공건물을 접수, 방화하고 경찰관과 관리, 우익 인사, 우익청년단 간부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하였습니다. 시체가 산더미같이 길가에 쌓였고 집집마다 살해된 사람이 없는 집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어두운 밤이었고, 예기치 않은 반란이었으며, 그곳 지리와 당시 실정에 밝은 좌익 학생들과 민애청원이 가담했었기 때문에, 그들의 학살은 무자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경찰관 및 경찰관 가족을 모조리 찾아냈고 관리와 우익 인사, 이에 반항하던 일부 우익청년들, 그리고 그 가족들도 모두 그들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9) 5시간 만에 반란 성공, 여수 시내 점령 아비규환 속에 피와 총성과 불꽃으로 생지옥을 이루었으니, 지창수와 반란군이 성공한 시간은 새벽 1시로, 반란 시작 약 5시간 만이었습니다. 10월 20일 01:00 해군 함장은 해군 총사령부로 무전을 쳤습니다. 「현재 여수읍은 불바다, 반도들은 약 400여 명, 경찰서는 방화로 연소 중이고 수십 명의 연대 장교 및 사하관이 피살됨.」 14연대 반란군은 경찰과 심야 총격전을 벌여 여수 시내는 떠나갈듯했고, 여수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불안과 공포 속에 떨었습니다. 소수의 경찰 병력으로는 반란군을 도저히 저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찰들은 자연히 밀리고 밀려 경찰서로 집결하게 되었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피신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반란군들이 시내로 들어오자마자 좌익단체 및 학생단체 600여 명이 합세하여 ‘인민공화국만세’와 ‘인민해방군만세’를 외쳤습니다. 이들에게도 싣고 나온 무기탄약을 지급했습니다. 좌익단체원들이 선도하여 반란군은 각 관공서 은행 등 주요기관을 향해 전진하였습니다. 20일 03:30경, 여수 경찰서가 반란군에게 점령당했습니다. 20일 05:00경, 여수 시내 관공서 및 은행, 신문사 등이 점령되었습니다. 여수 시내에 인공기를 내건 것이 5시 30분이 었습니다. 20일 09:00경, 여수시는 완전히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포고문에서 일체의 방송을 청취하는 자는 총살에 처한다고 경고하였으므로, 순진한 여수 시민들은 공포와 불안에 떨며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반군들과 좌익분자들의 난동 속에서 금족령에 묶여 피신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시민들은 23일이 되어서야, 반도들이 제 14연대에 침투한 일부 공산세포들과 이에 동조하는 지방 공산당원이라는 것을, 서울 중앙방송국 방송을 듣고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인민공화국의 적기(赤旗)가 나부끼고, 여수 온 시내가 관공서에 인민공화국 포스터가 나붙었습니다. 불과 하루도 못 되어 여수 시내가 인민공화국 천지가 된 것을 볼 때, 저들이 14연대 반란을 사전에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대부터 남로당 중앙당 이현상의 지령으로, 김지회 중위가 반란군 사령관이 되고 지창수는 1개 대대로 여수에 남아 치안을 담당하였습니다. 시민들은 인공기를 들고 중앙동 광장에 모였으며, 시가지에는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위원회’의 이름으로 ‘이승만, 이범석등 반동분자들이 민족상잔을 벌이려고 자기들을 제주도로 파견하려 했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여 궐기했고 남북통일을 위해 매진하겠다’라는 취지로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붙였습니다. ➀ 제주도 출동 절대 반대 ➁ 미군도 소련군을 본받아 즉시 철퇴하라 ➂ 인민공화국 수립 만세 20일 10:00경, 읍사무소 자리에 보안서(保安署)를 설치, 피신한 경찰관 가족, 우익 인사, 공무원 등을 색출하기 위해 가가호호 수색하며 기분대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또한 조선은행 여수 지점을 장악하여 ‘조선 인민공화국 중앙은행’으로 바꾸어 부르고, 3,550만원의 현금을 강탈하였으며, 각 은행 지점 및 금융조합에서도 거액의 현금을 강탈하였습니다. 반란군은 그 지방 공산주의 청년들과 합세하여 무기로 시민들을 위협하고 선동하는 한편, 응하지 않는 양민을 허다하게 학살하였고, 또 그 일부세력은 철도를 점령하였습니다. 어제까지의 친구가 원수가 되고 이웃이 적이 되어 고발하고 보복하는 인민재판이 열리는가 하면, 계속해서 인민대회를 열어 공포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습니다. 인민대회는 20일 15:00경에 열렸습니다. 여수에 ‘인민공화국’을 만든 좌익세력은 중앙동 관장에서 약 4만여 군중이 모인 가운데, ‘추도가’, ‘해방의 노래’ 등으로 ‘인민대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들 중에는 ‘한 집에 한 사람씩은 꼭 나와야지 안나오면 큰일난다.’고 하면서 붉은 완장을 차고 위협하는 좌익계 청년들의 강요에 못 이겨 따라온 사람들이 1,000여 명이었으며, 지창수 상사가 사회를 맡아 진행하였습니다. ➀ 남로당 여수지구당 위원장 이용기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➁ 보안서장으로 내정도니 유목윤의 격려사 ➂ 지창수의 인사말 ➃ 민주청년동맹과 여성동맹 등 단체 대표들의 축사 등이 이어졌습니다. 다음은 여수시 남로당 위원장 ‘이용기의 연설 내용입니다. “지난밤부터 여수에는 인민해방군이 상륙하여 우리를 해방시키고 순천으로 북상하여 이를 점령하고 북으로 북상 중에 있다. 또한 이북의 인민군대가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 중에 있으며, 남조선의 전체 해방은 목전에 도달하고 있다. 이북의 인민군대가 38선을 돌파하였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도 오늘 아침에 일본으로 도망쳤다. 따라서 우리 인민은 총궐기하여 남조선을 완전히 해방시키는 데 앞장을 서야 한다.” <6개 항목의 결정서> ○ 인민위원의 여수 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 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위해 토지계획을 실시한다. 그리고 유목윤의 격려사를 마친 후 지창수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반란 첫 지휘관으로 활약한 지창수는 오늘의 주인공이라 할 만큼 군중들은 열띤 박수로 그를 맞이했고, 지창수 또한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능숙한 말솜씨로 장내를 사로잡았습니다. “존경하는 여수인민 여러분! 저는 14연대 인민해방군 사령관 지창수입니다. 저도 여러분같이 억압받는 인민의 아들이며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군인의 한 사람입니다. 어젯밤 우리는 북조선 인민군과 미리 짜놓은 계획대로 동족상잔의 제주파병을 거부하고 우리 인민의 적인 경찰을 쳐부수고 여수 인민을 해방시켰습니다. 또 우리는 북조선 인민군과 미리 약속한대로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서 김지회 동무가 오늘 아침 2개 대대 병력을 거느리고 이미 순천으로 떠났습니다. 인민군도 이 순간 38선을 뚫고 노도와 같이 밀고 내려오고 있습니다. 어디 그 뿐인 줄 아십니까? 남한 내의 모든 국방군들도 인민군과 합류하기 위해 전국에서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이승만도 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어제 일본으로 도망가고 없습니다. 여수인민 여러분! 이제 우리가 바라던 조국통일은 단지 시간문제입니다. 우리가 남쪽에서 밀고 올라가고 북쪽에서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다가 마주치는 그 순간이 바로 조국이 통일되는 순간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민해방군은 앞으로 군사작전에만 주력하고 후방의 혁명과업은 우리 인민위원회와 보안서가 맡아서 잘 처리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여수인민 여러분! 우리가 혁명과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승만일당의 주구노릇을 하던 경찰과 친일파 그리고 모리간상배 등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소탕해야 합니다. 친애하는 여수인민 여러분! 이것은 오로지 여러분께서 앞장서서 맡아주셔야 할 중대고업입니다. 혁명에는 본래 사정(私情)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애국하는 마음으로 이런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색출하여 혁명과업 완수에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땅을 파는 농군이 땅 임자가 되고 천대받는 머슴들이 주인이 될 수 있는 올바른 세상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존갱하는 여수인민 여러분! 앞으로 이 여수 땅은 우리 14연대 인민해방군이 조국통일의 첫 북을 올린 영광스러운 땅으로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여수인민 여러분, 우리 다같이 씩씩히 일어납시다.” 14연대 반란이 시작되면서 계속된 이와 같은 [선전 선동 구호와 주장]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점령을 목표로 남진 중에 있다’는 허위 선전입니다. 반란 주동자들은 이런 내용으로 선동연설을 했을 뿐 아니라 선전문을 만들어 돌리고 벽보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인민공화국을 찬양하는 반란 구호를 외쳤습니다. 여수인민대회 6개 항목의 결정서에는 ‘대한민국의 분쇄맹세,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 무효선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게다가 여수 전 시내와 관공서에는 인민공화국의 적기(赤旗)가 나부꼈고, 인민공화국 포스터가 나붙었습니다. 이 사실은 여수 순천 사건이 명백하게 대한민국 정부의 체제전복을 위한 폭동이었고 반란이었음을 입증해 줍니다. 이날 인민대회에서는 이용기, 유목윤,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송욱 등 6인이 의장단에 선출되었고, 혁명과업 6개 항의 결의문이 채택되었습니다. 이 대회를 계기로 지금까지 지하에 숨어 있던 민애청, 민청, 학생동맹, 여성동맹, 합동노조, 교원노조, 철도노조 등 좌익단체 청년들 600여 명이 자발적으로 ‘인민의용군’을 조직하여, 무기를 들고 경찰과 우익 인사들의 체포와 재산몰수에 나섰습니다. 이에 따라 시내에는 긴장과 공포분위기가 확산되었습니다. 6개 항목의 결정서를 채택한 인민대회를 마치자, 모였던 시민들은 곧이어 군중시위에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여수 시내는 순식간에 좌익 세력에 의한 인공치하(人共治下)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경찰관이 반도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는데, 아이들과 놀고 있던 경찰관의 아들(8세)이 이를 보고 “아저씨, 우리 아버지 살려 주세요”하고 울부짖었습니다. 반도들은 계속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는 여덟 살 난 아이에게 기관단총을 난사해 죽였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본 아버지가 걷지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지자 그에게 기관단총을 퍼부었습니다. 처음 5-6발을 맞고 비틀거리는 경찰관에게 다시 7-8발의 총발을 쏘았습니다. 처음에는 잡아온 인사들을 모두 유치장에 감금하였으나 나중에 경찰관만은 지하실로 옮겨 격리시켰습니다. 경찰서 안에서의 인민재판이란 총살이 아니고 집단구타여서 사방에서 피를 토하고 흘리며 이미 반죽음을 당했습니다. 모든 경찰관들이 실신하여 시멘트 바닥에 쓰러지자 구둣발로 걷어차 일으키며 운동장으로 집합하라고 하였습니다. 겨우 기어서 운동장에 모인 그들을 99식 장총으로 집단 학살 하였습니다. 경찰서 뒤에는 방공호가 있었는데 반도들이 이 속에다 경찰관 30여 명을 몰아넣고 집중사격을 가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도 살아나오지 못하도록 삽으로 방공호의 입구를 흙으로 덮어 버렸으며, 그것도 모자라 무너진 방공호 위를 트럭으로 짓뭉개 놓기도 했습니다. 경찰서 지하실에는 아직 처형되지 않은 경찰관 가족 30여 명이 있었는데, 휘발유를 뿌려 전원 태워 죽였습니다. 한 경찰관 부인을 강제로 옷을 벗겨 국부를 총검으로 찔러 학살한 채 길바닥에 버렸습니다. 10월 20일까지 이틀 동안 여수 경찰서에서 희생당한 의원은 경찰관 59명, 의용경찰 20명, 의용소방대원 5명, 우익계 인사 10명, 기독교인 7명, 경찰관 가족 40여 명이었습니다. 21일, 여수 인민위원회의 기능이 시작되어, 은행예금 동결령, 재산몰수령을 내리고, 인구와 적산가옥(敵産家屋)을 조사하였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인민재판이 열려 해당자들은 즉석에서 처형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죽창이나 총검, 몽둥이로 그 자리에서 때려 죽이는 등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22일, 군청 등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군수 이하 11명을 해임(파직)했습니다. 23일 오후 3시, 반란군은 여수읍 대판통 사거리(현 중앙동 로터리)에서 소위 인민대회를 통한 인민재판을 열어 사형이 결정되면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했습니다. 처벌 대상은 ‘반동’으로 분류된 약 800여 명의 경찰과 그 가족, 그리고 우익 인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붙잡혀 여수 경찰서 뒷마당과 여수읍 대판통 사거리(현 중앙동 로터리)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천일 고무공장 사장 김영준, 대한노총 여수지구위원장 박귀환, 사찰계 형사 박찬길, 박기남, 경찰서 후원회장 연창희, 한민당 간부 차활언 등 주요 우익인사가 처형되었습니다. 경찰은 군중들에게 잡히면 마구 밟히거나 구타를 당해 살해되었고, 반란병사에게 잡히면 마구 밟히거나 구타를 당해 살해되었고, 수습을 위해 현장에 나간 사람들은 한동안 넋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이날 노총 여수지구 위원장이자 전국 항만노조 조직위원인 김창업에게도 총살형이 내려졌는데, 사형장에 선 그가 마지막으로 노래 하나만 부르게 해 달라고 부탁하여 부른 노래가 「울밑에 선 봉선화」였습니다. 그가 3절까지 부르는 동안 장내는 울음바다로 변하였는데, 그 순간 사수가 총살을 중지하라는 싸인을 쏘라는 신호로 착각하여 쏜 네 발의 총알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퍼져나가 여순사건 기간 동안 「울밑에 선 봉선화」는 일제 강점기보다 더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23일 오후 3시, 남면지서 앞 갯가에서 남면과 화정면 지서 경찰관 9명을 총살하였는데 그 중 강복암 순경은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같은 날 지방 폭도들의 밀고로 삼일면 지서 경찰관 허종 경사를 비롯한 이정호, 박종규 등 5명을 감금하여, 유달산 호랑이로 알려진 서종현이 일본도로 사정없이 후려갈겨 검붉은 피가 바닥에 고였고 5명의 경찰관들은 의식을 잃었습니다. 죽지 않을 만큼 전신을 구타당해 얼굴을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10) 여수 경찰서장 고인수의 처형 고인수 여수 경찰서장은 경찰서를 사수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지키기 위해 200여 명으로 방어 준비를 하고 4시간을 겨우 버텼지만, 새벽 3시 30분 여수 경찰서는 반란군이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5명의 경찰관이 순직했고, 반란군이 50여 명의 죄수를 풀어주고 반란군에 가담하게 했습니다. 고인수 서장은 피신을 거부하였지만, 정보과장 박명규에게 팔목을 잡혀 뒷문으로 억지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20일 오전 10시경 경찰서를 불지르고 이대부터 지방 좌익들과 합동으로, 경찰관과 우익진영 인사의 검거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특히 가담자 중에는 여수수산고등학교와 여수여자중학교 학생들이 눈에 띄게 많았는데, 세라복을 입은 16, 17세의 여중생들에게까지 권총과 카빈 소총이 지급되어 이들의 철없는 만행이야말로 반란군들보다 더 잔인했습니다. 여학생들은 치마 속에 총기나 수류탄 등을 숨겨서 국군을 유혹한 후 현장에서 살상하는 수법을 쓰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이 99식 소총을 조작할 줄 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는데, 나중에서야 좌익 선생에게 조작법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들은 휴교 조치를 하였는데, 민애청 소속의 좌익 학생들은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고, 좌익 선생들도 직장조직위원회를 조직하기에 바빴습니다. 반란군은 좌익 학생들에게 무기를 지급했고, 학생복 차림으로 무장한 이들은 제 세상이나 만난 듯 읍내로 나가 반란군과 합세하여 경찰관 또는 우익인사들을 체포하는 데 앞장섰으며, 심지어 자기 은사들을 끌어다가 반란군에 인계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의 행동은 거칠어졌고, 사형장에서는 서로 총살하려고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20일 풍덕천 제방에서 또 하나의 만행이 저질러졌는데, 반란군과 지방폭도들이 경찰을 숨겨줬다는 혐의로 각각 30세, 25세 정도의 남녀를 끌어다 옷을 벗겼습니다. 이들은 지방폭도들이 평소 자신들의 사적 감정을 보복하기 위해 거짓말로 모략하여 반란군에 잡히게 한 사람들입니다. 반란군은 총검으로 이들의 옷을 찢었는데 살결까지 찢겨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대낮에 군중들이 보는 가운데 속옷까지 찢겨 알몸이 되었고, 자꾸 쓰러지는 그들을 총검으로 계속 일으켜 세워 남녀를 서로 마주보게 하고 등을 찔러 죽였습니다. 오전 11시경 고인수 서장은 경찰서를 사수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경찰관 정복차림으로 다시 본서로 향하다가 읍사무소 앞 공터에서 총으로 무장한 남학생 2명의 검문에 걸려 끌려갔습니다. OB암살대장 서종현(유달산 호랑이, 후에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국군토대에게 사살됨)의 표적이 되었던 고인수 경찰서장은 첫 발에 오른팔, 두 번째 발에 왼팔을 맞은 후, 피투성이가 된 두 팔을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다가, 연이은 3발의 총탄을 맞고 두개골에서 붉은 선혈과 함께 하얀 뇌수가 쏟아져 그 자리에서 순직했습니다. 이때 아직까지 살아있던 경찰관들이 상관의 죽음에 원한을 품고 반도들에게 대들었습니다. 이에 반도들은 8명의 경찰관을 여수 경찰서 담에 묶어서 세운 후 차례로 한 명씩 트럭으로 들이받아 경찰관들이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특히 여수 경찰서 소속 여(女)경 국막래(24세)를 붙잡아, 대낮에 군중 앞에서 발가벗긴 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부분에 총 두 발을 쏘아 죽였습니다. 같은 여수 경찰서 소속 여(女)경 정현자(鄭玄子)는 폭도들이 옷을 갈기갈기 찢고는 목에 쇠사슬을 매어 가지고 시내를 1시간 동안 일주하고 다시 경찰서로 돌아와 총탄 2발을 쏘아 죽였습니다. 이렇게 폭도들은 야수처럼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노란 코트에 빵모자를 쓴 서종현은 M1소총을 든 세 명의 학생을 대동하고 나타나, 경찰서 유치장 6개의 감방에 빽빽이 갇혀있던 우익인사들을 향해 창살틈으로 총격을 가했습니다. 유치장 안은 총탄을 피하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결국은 신음하며 모두 죽어갔습니다. 이같은 무차별 학살은 2, 3, 4, 5 감방의 순으로 진행됐습니다. 반란군들은 여수 일대의 해안선도 일체 봉쇄하여, 20일 오전 부산에서 도착한 여객선 승객 중 정형 형사의 신분을 확인하고 경찰서 후정으로 끌고 가 총살했습니다. 정보과 반찬호 순경도 한복으로 갈아입고 시내를 지나다가 붙잡혀 파출소 앞까지 끌려가 몽둥이에 맞아죽었는데, 얼마나 두들겼는지 마지막에는 혀까지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피를 본 폭도들의 만행은 갈수록 잔인해졌습니다. 10월 20일까지 이틀 동안 여수경찰서에서 희생당한 인원은 경찰관 59명, 의용경찰 20명, 의용소방대원 5명, 우익계 인사 10명, 기독교인 7명, 경찰관 가족 40명이었습니다. 10월 26일 진압부대가 드디어 여수의 외곽에 다다랐고, 27일 새벽부터 소탕작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소탕작전에 어려움을 준 것은 여학생들의 저항이었습니다. 17세 전후의 소녀들이 99식 소총을 들고 반격하였는데, 이들의 저항은 순천의 경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세었습니다. 특히 여수여중생들은 교장 송욱이 여수 순천 반란의 민간인 총지휘자로 활약했기 때문에 이미 많은 학생들이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군·경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순천사범 학생 40%, 순천농중 학생 30%를 필두로 여수수산중학교 학생은 거의 전부가 좌익이었습니다. 순천농중학교 당국의 자체 조사 발표를 보면 전교생 847명 중에서, 출석생이 289명, 결석생이 308명, 신병자 28명, 가족보호 중인 자 109명, 혐의 ㅣ의자 25명, 행방불명자 3명, 반도에 피살된자 1명, 처형자 8명, 시가전 유탄에 의한 사망자 5명, 미조사자 72명, 반도에 가담자 34명이었습니다. 가냘픈 여학생들의 반격은 진압군에게 가소로우면서도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마치 게릴라처럼 숨거나 위장해서 기습을 해와 이들로부터 입은 피해는 예상 외로 큰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여학생들을 잡아다가 심문을 하면서 ‘너는 총살이다’라고 위협을 하였더니 처음에는 부인을 하며 엉엉 울다가 ‘하나, 둘’구령을 하면서 정말 총살하는 듯 자세를 취하였더니 이들은 ‘인민공화국 만세’를 높이 불렀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편 좌익 여중생들은 반란군들에게 밥을 해 주며 부역을 했습니다. 피신한 우익 인사들의 빈 집에 들어가 반란군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였습니다. 모 여중 5학년 18살 손 양의 경우 얼마나 열성적으로 부역을 했던지, 국군 진압부대가 오자 반란군을 따라 입산해야만 했습니다. 1년 후 그녀는 국군에 의해 다시 검거되었는데 그때 그녀의 품에는 어린 핏덩어리가 안겨 있었습니다. 반란군을 따라 입산한 그녀는 몸까지 제공했으며 그런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요구하면 몸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누구의 아이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순천에 붙잡혀 온 손 양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재판 결과 그녀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11) 순천 경찰서 장악 학살과 만행을 계속하여 여수를 장악하고 인민공화국으로 만든 반란군은, 20일 새벽에 순천으로 향하였습니다. 반란군 3개 대대중 1개 대대만 여수에 남고 2개 대대가 출발했습니다(약 2,000명). 반란군 중에 약 700여 명은 오전 9시 30분경 12칸으로 된 순천행 통근열차 6개 차량에 분승하고, 나머지 1,300여 명은 각종 차량을 이용하여 순천으로 향했습니다. 한편 순천 경찰서는 이미 여자 교환수로부터 14연대 반란 사실을 연락 받고도, 사태의 심각성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여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20일 오전 10시 30분경 순천 경찰서가 반란군에게 점령되었고 10여 명의 경찰이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습니다. 장성 경찰서 응원부대가 순천에 도착한 것은 10월 20일 오전 9시, 총무과장(현 경무과장) 임해휴 경위를 비롯 10명의 경찰이 폭도들과 싸운 끝에, 박태환, 정삼화, 김진용, 김규환 등 4명이 총에 맞아 죽었고, 총상을 입은 임 경위는 경찰서 후정으로 끝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수십 명의 경찰관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고, 그 역시 총에 맞아 죽었는데 숨져가면서도 너무나 억울해 양손으로 땅을 얼마나 후볐는지 손톱이 하나도 남지 않고 떨어져 나갔습니다. 14연대 반란군이 순천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순천시의 좌익 세력들과 중고등학생이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반란군은 순천의 중고 여학생들에게 깃발을 흔들고 퍼레이드를 하게 하였으며, 또한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든 소위 「반동수색대」를 앞세워, 우익 인사들과 우익청년들과 그 가족들 500여 명을 인민재판으로 학살하는 만행에 참여케 하였습니다. 20일 오후 3시, 반란군에 점령당한 순천 경찰서 꼭대기에는 인공기가 달려 있었고, 이곳을 본부로 정한 반란군은 각 기관을 차례로 점령, 경찰관과 우익 인사 검거에 나섰습니다. 21일 새벽, 호남은행지점(현 조흥은행) 앞에서 반란군과 지방폭도들이 경찰관과 우익 인사들을 10명씩 줄지어 끌고 와서 은행 벽에 세우고 사살하였습니다. 끌려온 경찰관들의 가슴에는 태극기, 우익 인사들의 가슴에는 대동청년단기가 동여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반항할 힘이 없을 만큼 구타를 당해 맥없이 끌려와 그대로 총살당했습니다. 21일 오후에 700-800명이나 되는 우익 애국인사가 반도들의 손에 잡혀 경찰서, 소방서 기타 기관에 분산 감금되었습니다. 이들은 형식상 취조라는 것을 했는데, 취조를 맡은 자 중에는 각 기관의 급사, 음식점 잡부들이 있는가 하면 며칠 전까지 순천 경찰서에서 형사 정보원으로 근무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민주학련에 적을 둔 좌익학생들의 질문공세도 무서웠는데, 이들은 잡혀 온 학생의 친구들 이름까지 훤히 대면서 주로 학생들을 문초했습니다. 죽이는 방법은 총살, 타살, 교살(絞殺), 소살(燒殺) 등으로 살해방법이 결정되면 그 자리에서 처형했습니다. 좌익학생들은 또한 학교선배, 자기를 가르쳐 준 스승 등을 찾아 다녔습니다. 스승이 없으면 스승의 부인과 가족들을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50대 어느 교장 부인을 자식들이 보는데서 거꾸로 매달아 몽둥이로 때려 죽였습니다. 이보다 더욱 날뛰는 것은 유치장에 잡혀있던 잡법과 혐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반도에 의해 풀려나자마자 자기와 원한이 있는 집부터 찾아가서 귀중품 약탈, 부녀자 강간, 기물 파손, 방화 등을 자행하고, 그 후에는 반도들의 일당에 가담하여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날뛰었습니다. 무고한 양민들을 경찰서 상무관으로 끌어들여 우익계 인사 이동작(주조업), 김주수(철도병원장), 김흥조(동인의원장) 등을 차례로 학살하였습니다. 순천 도립병원 앞 뜰에서는 당시 순천경찰서 표갑신 순경과 우익계 인사 성대포 등을 인민재판에 부치고 사형이 확정되기도 전에 지방 폭도들이 일어나 돌과 몽둥이로 때려 현장에서 숨지게 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특히 순천 지역 일대에서는 무려 경찰관 400여 명이 반란군 진압 작전을 펼치던 중에 전사하거나 반란군에 의해 학살되었습니다. 일단 우익 세력으로 낙인찍힌 사람은 점령한 첫날 은행 앞 광장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폭도들은 피신했던 경찰관을 체포하여 산 채로 모래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기도 했습니다. 모래구덩이에 묻힌 뒤 미처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경찰관을 위에서 죽창으로 푹푹 찔러 죽였습니다. 이같은 폭도들의 만행으로 읍내는 가는 곳마다 시체더미뿐이었고, 경찰서 앞뒤는 물론 조흥은행 담벽, 장대다리 일대는 코를 막지 않고는 지날 수 없을 정도로 악취가 풍겼습니다. 이렇게 반란군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민심은 동요되었고, 순진한 주민들은 실제로 공산정권이 출현한 것으로 착각하여 반란군의 선동과 강압에 의해 이들에게 가담하는 자가 속출하였으므로, 무장폭도들 편에 속한 자의 수가 수천 명에 달하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하룻밤 사이에 폭도로 돌변하여 반란군의 선동에 따라 제 세상이나 만난 듯 날뛰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무기가 지급되자, 평소 사감(私憾)이 있는 사람만 걸리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사살했습니다. 진압군 4연대 2대대(대위 유정석)가 소대급 특공부대를 조직해 순천 경찰서를 탈환했을 때, 사무실과 후문에는 두 손을 뒤로 결박당하고 다시 굵은 철사로 묶인 채 총살 당한 시체가 층층이 쌓여있었는데, 모두 경찰관들과 그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학살한 시체들은 시가지 곳곳에 널려 있었고, 집단 학살당한 시체들은 주로 순천 경찰서 안에, 그리고 순천 시가지 중심권에서 약간 벗어난 동쪽 지점의 옥천 냇가에 무더기로 널려 있었습니다. 마치 10월 24일에는 비가 내려 경찰서 마당은 피바다를 이루었고, 피비린내와 시체 썩는 악취가 뒤섞여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광경이었습니다. 아무리 사나운 맹수도 사람을 이렇게 잔인하게 학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948년 10월 25일, 조선일보(본사특파원 유건호)는 당시 순천 거리와 순천 경찰서에서의 참담한 광경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길거리엔 이곳저곳 시체가 산란한데, 어느 것은 썩고 어느 것은 불에 타고 어느 것은 개가 덤벼 뜯어먹고 있다. 경찰서 문 안에 들어서니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팔을 묶이어 총살을 당한 외에 다시 가해를 당한 70여구의 시체가 뒤엉켜 있고, 불탄 버스 속에는 백골이 우수수하다.” (12) 순천 경찰서장 양발원 총경의 처형 당시 순천 경찰서장 양발원 총경의 처형은 가장 처참하여 공산분자들의 악독함과 잔인성을 여지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양 서장은 처음에 잡히지 않으려고 경찰복을 벗고 농부 차림의 한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이때가 정확히 21일 오전 10시였습니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마주친 서너 명의 학생들이 양 서장의 특징인 썬글라스를 알아보고는, 지방 폭도들에게 신고해 버렸습니다. 나주가 고향인 그는 어려서부터 승마를 즐기다가 말에서 떨어져 오른쪽 눈을 실명하는 바람에 의안을 해 넣고 이를 가리기 위해 언제나 검정색 썬그라스를 쓰고 다녔습니다. 양 서장이 끌려갈 때는 이미 400여 명의 우익 인사들이 체포되어 경찰서 유치장은 마치 콩나물시루 같았다고 합니다. 폭도들은 양 서장을 경찰서 뒤뜰 느티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물을 먹이더니 참나무 뭉둥이로 후려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폭도들은 사형집행 전 양 서장을 시내에 끌고 다니며 ‘나는 순천 군민의 고혈을 빨아먹은 서장이요, 그 동안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라고 사과의 말을 연속으로 외치게 하고, 외치지 않으면 죽을 지경까지 구타하였습니다. 평소 검은 썬글라스를 끼고 다니던 것이 거슬렸던 그들은 서장의 눈알을 뽑고, 이정렬 청년단장과 함께 군용 차 뒤꽁무니에 매단 채 의식을 잃을 때까지 서서히 읍내 비포장도로를 돌았습니다. 폭도들은 돌로 양 서장의 머리와 다리를 마구 내리쳤습니다. 양 서장은 이정렬 청년단장과 함께 현대 중앙극장 앞 전신주에 나란히 매달려 총살되었고, 폭도들은 그 죽은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순천 감찰서장 한운경 감찰관도 반란군에 체포되어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무기고 앞 벽에 세워져 무참히 총살당했고, 반란군은 그의 시체에 콜타르를 칠해 불태웠습니다. 국군 진압부대가 진격하였을 때 시내에는 도처에 시체가 널려있었고 경찰서에는 팔을 뒤로 묶인 채 총살당하거나 가해(加害)를 당한 70여 구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불에 탄 버스 속에는 백골이 우수수하였고, 더욱 처절한 것은 집집마다 시체 하나 둘씩 없는 집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는 눈을 도려 빼고 껍질을 벗기고 꼬챙이로 찌르고 칼로 살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탄환을 수없이 전신에 놓고도 또한 오히려 부족하여 얼굴이나 전신에 기름을 뿌려서 불을 질러 태워버리는 등의 이러한 반도의 잔학무도한 살육은 천인공노라거나 귀축(鬼畜)의 소행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합니다(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편 1949. 1. 25 발행 「반란과 민족의 각오」 70-71, 85-87면 인용). 순천은 20일부터 23일까지 4일간, 여수는 27일까지 8일간 공산천하가 되어, 우익 단체와 그들의 가족들이 반란군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당하였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순천 시가는, 집집마다 애통한 울음소리만이 처량할 뿐이고, 거리마다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으며, 온통 붉은 핏자국으로 가득했습니다. 내 남편, 내 자식은 살았는가 해서 경찰서 옆에 모여들어 행방불명된 가족들을 찾는 사람들이 애통하며 흘린 눈물로, 순천시는 한없는 슬픔의 도가니였습니다. 이처럼 무자비하고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살인마들이, 털끝만큼이라도 동족이라는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까? 이 비열하고 악독한 자들의 살인극이, 어찌 민족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소위 ‘혁명’이나 ‘항쟁’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 당시 민족의 비통한 역사를 똑바로 알고, 똑똑히 기억하고, 현재와 다가오는 미래에 이러한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수를 거쳐 순천까지 점령한 반란군은, 순천 경찰서 관내 별양지서와 벌교서 관내 조성 지서를 점령하였고, 창성 지서에서는 경찰관 30명을 발가벗기고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20일에서 21일 사이에 광양, 남원, 구례, 보성의 경찰서들이 하나둘씩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반란의 여파가 타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아예 반란군이 도착하기 전에 경찰관 및 우익 인사들이 미리 도주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런 혼란을 틈타 지방 토착 좌익 세력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경찰서를 무혈점령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20일 저녁과 21일 사이, 남원에서는 반란군의 일부가 도착하자마자 폭동이 일어났고, 구례 경찰서는 토착 좌익들에 의해 이미 수 명의 경찰이 피살되었고, 보성은 경찰 및 우익 인사들이 피신해 버리자 지방 토착 좌익들이 경찰서를 공격하여 무혈점령하였습니다. 고흥에서는 순천에서 들어온 반란군과 그에 동조한 지방민들이 행동을 같이하여 고흥읍을 점령하고, 그에 저항하는 경찰관 7명과 주민 6명을 총살 혹은 살해하였습니다(광주신보 1948. 10. 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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