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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2. 제주 4.3폭동(3) 운영자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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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5·10 단독선거 반대 폭동 사건

 

1948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 초안을 북한에서 확정하고 사실상 북쪽이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이후 박헌영은 남쪽에 있는 이주하, 김삼룡 등의 남로당 지도부에 지령을 내려 1948510일 제헌국회의원선거를 방해하도록 했습니다.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2·7투쟁을 전국적으로 일으켰는가 하면, 남로당은 5·10선거 반대운동의 핵심 지역으로 제주도를 선택했습니다.

5·10선거 국회의원 후보 등록이 1948321일 마감되자, 폭도들은 국회의원 입후보자에게 사퇴하라고 협박하고, 선거인명부를 압수하였으며,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남로당원들을 동원하여 악선전하였습니다. 8-9일 양일간에 통신시설을 파괴하였고, 선거 당일 10일에는 투표소를 습격하고, 투표하러 가는 주민들을 산중으로 납치하여 협박을 하였습니다. 군과 경찰의 미묘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동안, 폭도들은 5·10선걸르 무효화하려고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사령관 김달삼은 폭도들과 남로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전하였습니다.

도민여려분, 북조선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수원까지 남하하고 있소! 한 달만 참으면 제주도는 해방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해방군이 경찰이 되고 토지도 나누어주고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 공정한 세상, 평등한 세상이 옵니다.”

도민들은 남로당원들이 전하는 이 말을 믿고 성금도 갖다 주고 소나 말을 잡아서 유격대 부식에 쓰라고 제공하였습니다.

 

 

이때 우익 경찰과 경찰 가족에 대한 학살은 극에 달하였는데, 심지어 공산 폭도들은 경찰관의 계급에 따라 1만원에서 3만원까지 현상금을 붙여 살해를 권장했습니다.

제주도 폭동에 관한 조병옥 경무부장의 진상발표내용을 194868일 대동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자세히 보도하였습니다.

 

 

방화, 윤간, 생매장 감행 - 조병옥 부장 제주도 폭동 진상 발표

418일 신촌에서 폭도들이 육순이 넘은 경찰관 부모의 목을 자루고 수족을 각기 절단했습니다. 임신 6개월인 대동청년단 지부장의 아내를 참혹하게 죽였습니다.

420일 선흘리에서는 임신 중인 경찰관 부인의 배를 갈라 죽였습니다.

425일 모슬포에서는 경찰관의 노부모를 총살한 뒤 수족을 절단했으며, 임신 7개월 된 경찰관의 누이를 산 채로 매장했습니다.

519일 제주읍 도두리에서는 대동청년단 간부의 젊은 부인(24)3세 된 장남을 30여 명의 폭도가 동리 고희숙 방에 납치한 후 십 수 명이 윤간하였으며, 동리 김승옥의 노모 김씨(60)와 실매(實妹) 옥분(19), 김중삼의 처 이씨(50), 16세 된 부녀 김영년, 26세 된 김순애의 딸, 36세 된 정방옥의 처와 4세 된 동인의 장남, 20세 된 허영선의 딸 외 그의 5, 3세의 어린이 등 11명을 역시 고희숙 방에 납치·감금하고 무수히 난타한 후 도두리에서 서북방 15km 떨어진 눈노름이라는 삼()지대에 끌고 가서 노소를 불구하고 50여 명이 강제로 윤간을 하고, 그리고도 부족하여 총창과 죽창, 일본도 등으로 부녀의 유방, 복부, 음부, 둔부 등을 난자한 후 미처 죽기도 전에 땅에 생매장해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중 김성희만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폭도들은 식량을 획득하기 위하여 부락민의 식량 가축을 강탈함은 물론 그 가족·부녀에게 자금을 조달하는 등 비인도적 만행을 필설로 말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이와 같은 폭도들의 천인공노할 행태가 제주도 전역에 자행되었는데, 그들의 만행은 다음과 같습니다.

5 · 10선거 지지자 학살

51일 새벽 1, 폭도들은 선거관리위원장 이원백(57)의 집을 습격하여 죽창과 낫과 도끼로 그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죽였습니다.

· 같은 날 새벽, 폭도들은 제주읍 도평리 우익 청년 박형종(25)의 집을 기습, 떼거리로 달려들어 죽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55일 새벽 2, 제주읍 화북 마을 임형권(61)의 집을 기습, 자고 있던 그를 죽창과 낫, 도끼 등으로 사정없이 찔러 죽였습니다. 같은 마을 장순정, 안여창도 폭도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58일 오전 9, 선거관리위원장 김경종(42)의 집에 폭도 10여 명이 들이닥쳤는데 김경종이 없자 그의 어머니 박사일(72)과 딸 희진(12)을 죽창으로 찌르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김경종의 처 김죽현(42)은 이웃집에 있다가 자기 집이 불에 타는 것을 보고 집으로 가다가 폭도들에 의해 두 살짜리 아들 희석과 함께 죽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ㆍ 폭도들은 이어 대청단장 강익수의 집을 찾아갔다가 강익수가 없자 동생 강천수와 강인수를 납치해 갔습니다. 그리고 대청단원 가족인 이찬용의 어머니 이윤형, 부계열, 부창숙 등을 학살하였습니다.

ㆍ 양치기하던 안재철, 하계현을 학살하였습니다.

ㆍ 제주읍 오등리 고다시 마을 대청단원 강상배를 납치하고, 그의 어머니와 처를 학살하였습니다.

ㆍ 제주읍 오등리 인다라 마을 선관위원장 김영창의 처 현정춘을 학살하였습니다.

ㆍ 제주읍 내도리 이장 신현집(42)의 집을 새벽에 습격하였는데, 신현집은 뒷마당으로 도망치려 하였으나 폭도들이 죽창과 낫과 도끼로 난도질하여 그의 온 몸이 벌집같이 되어 죽었습니다.

ㆍ 투표 당일(510) 오전 7, 99식 소총 3정을 든 대원들을 선두로 죽창 부대 50여 명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들은 즉시 투표소를 포위, 선거인명부를 압수하고 투표함을 박살냈습니다.

ㆍ 어수선한 틈을 타 도망가던 가시초등학교 교장 문상현이 폭도들에 의해 죽었고, 부인은 죽창에 찔렸으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폭도들은 투표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선거에 참여하는 자들을 죽였습니다.

ㆍ 성산면 수산리 향사 마을에 30여 명의 폭도들이 내려와 투표소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도망자들에게 총을 쏘았는데 고신권의 어머니, 고학선의 어머니, 강정보의 어머니가 총에 맞아 피를 토하다 곧 죽고 말았습니다.

510일 오후, 중문면 상예 2리에서 폭도들은 선거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대청단장 김봉일 부부와 국민회 상예회자아 오대호 등 3명을 납치해 소나무에 묶어 놓고 대창으로 찔러 학살하였습니다.

 

 

특히 510, 폭도들의 5·10선거 방해 공작은 곳곳에서 극려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폭도들은 투표용지와 투표함 등을 모아 불을 질렀습니다.

ㆍ중문면 투표소를 습격, 투표용지 파괴

ㆍ성산면 투표소 방화

ㆍ제주읍사무소 폭파

ㆍ제주공항 근처에서 총격전

ㆍ표선면 1개 투표소 습격, 2명 사명, 투표용지 파손

ㆍ구좌면 송당리 2명 사망, 1명 부상, 가옥 7채 방화

ㆍ조천면 14곳의 투표소가 제 기능을 못함

ㆍ조천면 북촌리 투표소가 방화돼 투표용지 파손

ㆍ성산면 투표소 습격, 4명 피살

 

이와 같이 폭도들은 5·10선거 지지자들과 그 가족들을 무참히 죽이고 폭력으로 투표를 저지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북제주군 갑구(43%)와 을구(46.5%)는 극심한 방해공작으로 투표율이 미달되어 선거가 무효화되었고, 남제주군만이 간신히 선거가 치러져 오용국(吳龍國)이 당선되었습니다. 5·10총선거를 전후한 남로당의 만행은 전국적으로 사상자 846명을 발생시켰고, 습격과 폭행이 1,047건에 달했습니다.

한편, 선거가 무효화되었던 북제주군 2개 선거구의 재선거는 1년만인 1949510일에 실시되어, 갑구에서는 홍순영(洪淳寧), 을구에서는 양병직(梁秉直)이 당선되었습니다.

 

 

조천면 함덕 지서 공격과 한림면 명월리 학살

513일 오후 4, 함덕지서 경찰 후원회장이 돼지고기와 술과 김치 등 먹을 것을 주어 경찰들이 음식이 있는 책상으로 모여 있는 느슨한 틈을 타, 폭도들과 협조자 300여 명이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 손쓸 겨를도 없이 지서 주임 강봉현 경사가 즉사하였습니다.

514일 오전, 함덕 지서는 다시 공격을 받아 강태경 순경이 피살되었습니다.

ㆍ폭도들은 국회의원 입후보자로 있다가 사퇴한 한림면 명월리 임창현의 둘째 아들이, 손자와 같이 장례 준비를 하고 입관하고 있는 중에 폭도들이 나타나 3명을 납치, 며칠 후 학살하였습니다.

 

 

한림면 저지 마을과 저지 지서 공격

513일 오전 7, 폭도 150명 이상이 저지 지서와 저지 마을을 공격하였는데, 김인하 순경은 대항도 못하고 도망치다가 죽창에 찔려 피살되었고, 지서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으며, 우익 인사들의 집을 골라 100여 채에 불을 질렀습니다.

ㆍ경찰 후원회장의 아버지 현명조(65), 경찰보조원 고성현의 어머니(53) 3명이 경찰 협력 가정이라는 이유로 학살되었습니다. 저지 1구장 문명조(65)도 학살당했습니다. 경찰협조원 박용주(44)도 죽창으로 난자당한 후 다음 날 병원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한림면 금악 마을 습격

금악 마을은 좌익이 장악한 마을로 5·10선거를 치르지 못하였으며, 마을 428m 봉우리에 보초를 세워 진압군이 출동하면 깃발로 신호를 하여 마을 사람들이 도망치도록 했습니다.

514, 대청 부단장 김태화(29)와 그의 부인 이유생을 학살하였습니다.

ㆍ강안용의 집을 습격하여 학살하고, 그의 부인 김임후(36)의 허벅지를 대창으로 두 군데 찔러 실신시켰습니다. 김임후는 이 상처로 평생 고생하며 살았습니다.

 

 

제주읍 도두리에서의 만행

도두리는 43일 이후로 90% 이상이 좌익에게 장악된 마을로, 510선거를 치르지 못하여 경찰의 토벌대상이었습니다.

59, 권투선수 윤상은(26)이 투표를 하지 않기 위해 산으로 피하라는 폭도들의 말을 거부하자, 폭도들은 죽여버려!”하면서 모두 달려들어 그를 죽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511, 선거관리위원장 김해만(53), 대청단장 정방옥(31), 단원 김용조(23)를 붙잡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나무에 묶어놓고 칼로 난도질하여 죽였습니다.

514, 선거관리위원 김상옥(44)과 대청단원인 그의 아들 김택훈(27)을 산으로 끌고 가 죽였습니다.

518, 김해만의 처 장인동(52), 딸 김순풍(19), 아들 김광홍(9)과 정방옥의 처 김순녀(24), 김용조의 처 문성희(26), 대청단원 김성언의 어머니 고정달(56) 등을 산으로 끌고 가 죽였습니다.

이 밖에 폭도들은 식량을 얻기 위하여 마을의 곡물과 가축을 닥치는 대로 약탈해 갔고, 심지어 그들에게 끌려간 부녀자에게 매음을 강요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등 하늘이 용서못할 비인도적인 만행이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대정면 영락리 영락 마을 습격

독립촉성국민회 회원이었던 고성두(63)의 다섯 아들의 이름은 문홍(34), 대흥(29), 용흥(27), 덕흥(25), 창흥입니다. 용흥과 덕흥은 경찰로, 우익가족이었습니다. 518, 폭도들이 이들의 집을 습격하여 문흥이 나와라!”고 소리지르자 고문흥은 재빨리 숨어버렸습니다. 폭도들은 아들의 행방을 모른다고 하는 고성두 부부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남은 가족들도 다른 곳으로 끌고 가 죽였습니다.

 

 

서귀면 서홍리 마을 습격

서홍리는 서귀포에서 북쪽으로 1지점에 위치, 제주도에서 가장 따듯한 동네로 한라산과 가까우며, 서귀포시에서 폭도들에게 제일 처음 피해를 입은 동네입니다.

1948416, 변시진(37)의 집을 습격하였습니다. 변시진의 맏딸 변안순(당시 13)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가 저녁을 먹으면서 오늘은 분위기가 이상하니까 다른 곳으로 피해야겠다고 하셨는데, 갑자기 아버지와 절친했던 서홍리 위 목장 사는 청년(이하 )이 찾아와 어쩔 수 없이 집에 머물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씨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폭도들이 아버지 변시진의 이름을 부면서 들이닥쳤고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 문고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들이 문 밖에서 칼로 마구 찔러 손에 상처가 나자 아버지가 살려 달라고 하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어머니가 보니까 먼저 찾아온 씨가 손을 들면서 저는 ○○입니다.”라고 신분을 밝히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변시진이 다시 방으로 뛰어 들어가자, 폭도들이 따라 들어와 칼과 죽창으로 수십 군데를 찔러 죽였습니다. 맏딸 변안순이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온 몸은 죽창에 찔려 성한 곳이 없었고, 방바닥에 피가 흥거한고 피 냄새가 방안에 진동했습니다. 달빛에 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계셔서 살아계신 줄 알고 몸을 흔들었으나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고, 아버지 손을 잡으니 손가락이 두 개 잘려 있었습니다. 폭도들은 상부에서 지시한 사람을 죽인 증거물로 신체의 일부를 도려내어 가져갔다고 합니다. 부친을 죽인 폭도는 동네 이장 아들이었으며, 그 일 후엔 그는 동네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고찬경(24), 고찬하(22) 형제를 칼로 수십 군데를 찔러 비참하게 학살하였습니다.

향보단 마을 소대장 강남석(42)의 복부를 칼로 찔러 학살하였습니다.

당시 반장이던 고평호(49)는 칼에 여러 군데 찔러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며칠 후 숨졌습니다. 부인 양월규(46)도 폭도들이 공격할 때 손으로 칼을 막다가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변기원(66)은 아들들을 피신시키고 집을 지키다가 학살되었습니다.

 

 

안덕면 창천 마을 습격

510, 우익 애국단체인 독립촉성국민회 상예 2리 분회 회장직을 맡았던 오대호(48)가 폭도들의 칼에 의해 전신이 갈기갈기 찢기고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오형인의 어머니는 남편 오대호가 참혹하게 죽은 모습을 보고 쓰러져 다시 회복을 못하고 2개월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오대호의 아들 오형인의 증언).

522, 상창리 우익 오향주(46)를 학살하였고, 이어 창천리로 내려와 마을 이장 대청단장 강기송(39)을 학살하였습니다.

510선거 업무를 지원하였다고 오남주(43)를 납치해 갔습니다. 오남주의 아들 오상옥은 이날 즉시 경찰에 입대하였는데, 아버지 오남주의 시신이 병악 뒤에 있다는 진술에 따라 확인 후 아버지가 처참히 학살당한 것을 보고 통곡하였습니다.

상예 1리 오성호와 색달리 강보찬 등을 납치해 학살하였습니다. 시신은 8개월 후 녹하지오름에서 찾았습니다.

 

 

구좌면 하도 마을 습격

57일 새벽 130, 복면을 한 폭도들이 대동청년단 부단장 이하면(27)의 집을 습격, 칼로 난자하여 학살하였습니다.

우익 백일선(60)의 집을 습격하여 두 아들을 찾았으나, 아들이 없자 아버지 백일선을 학살하였습니다.

평소 폭도들을 비판하였던 부평규(57)의 집을 습격하여 칼로 배를 찔러,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졌습니다.

임대진(54)은 안방에서 죽창으로 20여 군데를 찔려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애월면 장전 마을 습격

410, 대동청년단 단장 강상부(34)의 집을 습격하여 죽였고, 총무 고종언(25)은 폭도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 철창으로 난자하여 죽였고, 같이 있던 8개월 어린 아이는 핏속에 묻혀 죽고 말았습니다.

420, 제주읍사무소에 근무하는 손창보(29)가 습격을 받아 학살당했습니다.

 

 

조천면 북촌 포구 경찰관 살해

618일 오전 11, 정체불명의 어선이 포구 쪽으로 다가 오자 마을 빗개(보초)가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어선은 우도를 출발하여 제주 읍내로 가던 중 심한 풍랑 때문에 북촌 포구로 피해 진입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폭도 참모격인 김완식 등 청년 3명이 배에 올라가 경찰 2명에게 총격을 가해 우도 지서 주임 양태수(27) 경사가 죽었고, 진남호(23) 순경은 복부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어선 안에 있던 승객 김응석(37) 이장과 백순경의 처와 아들, 강 순경의 장모, 지서 금사 양남수(19) 13명은 산으로 끌려갔는데, 총상을 입은 진 순경은 끝내 숨졌고 나머지는 토벌군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그밖에 제주읍 외도 지서 주임 김벽택의 큰어머니 홍기조도 죽창으로 난도질 당하여 죽었습니다.

증언 관련 중 일부는 이선교 제주 43사건의 진상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혀둡니다.

 

 

(7) 5 10단독선거 결과 제헌국회와 대한민국 정부수립

북한은 이미 김일성을 중심으로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제주도에서는 남로당의 온갖 방해공작이 이어지는 가운데 1948510 38도 이남에서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남한 788만 명의 유권자 중 93%가 투표하여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였습니다. 531, 이 땅에 최초의 국회가 개원했고, 71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습니다. 717에는 대한민국 헌법 및 정부조직법이 공포됐습니다. 그리고 720에는 국회에서 정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을 선출했습니다. 724 정부통령 취임식을 가졌고, 84 초대 이범석 내각이 구성돼 출범하게 됐습니다. 1948815 해방 3주년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이 중앙청에서 정부수립을 선포했습니다. 그렇게 고대하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제 1공화국이 어지럽고 혼란한 가운데서도 비로소 출범하게 된 것입니다.

 

 

다음은 1948531, 이승만 대통령의 제의에 따라 제헌국회에서 드린 기도문입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攝理)하시는 하나님,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을 축복하셔서 감사가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여 주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日帝)의 폭력을 굽히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念願)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歡喜)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攝理)가 세계만방에 정시(呈示)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羞恥)를 신원(伸寃)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塗炭)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擴大)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 밖에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민생의 복락(福樂)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依支)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ka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미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重且大)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無力)한 것을 생각할 때 지()와 인()과 용()과 모든 덕()의 근원(根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要素)를 저희들이 간구(懇求)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司會)하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옵시고 또한 여기서 양심(良心)의 정의(正義)와 위신(威信)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의 기쁨을 다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우리나라가 해방 기념일로 지키는 815일은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이기도 합니다. 실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그 의미가 대단히 큰 날입니다. 국회는 1949921, 이 날을 포함하여 4개 국경일(31,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을 정하였습니다.

참으로 아무 힘도 없고 초라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던 우리나라가 유엔으로부터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받기까지 수많은 목숨들이 디딤돌로 바쳐졌습니다. 그렇게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헌신적인 애국자들과 나라를 위한 저들의 숨은 업적들, 그 의로운 일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아가 저들이 미처 이루지 못한 국가적 대() 사명이 우리 자신들의 몫으로 여전히 남겨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 김익렬(9연대장)과 김달삼(인민유격대 사령관의 평화협상

 

 

(1) 제주도 모슬포 주둔 9연대에 진압 작전 요청

5·10선거 반대를 위한 인민유격대의 무장폭동이 강력해지고 경찰력으로 폭동 사태가 진정되지 않아 점차 입산자가 증가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자, 미군정은 군병력을 증강하는 조치를 위하였습니다. 미군정은 각 도에서 경찰 1개 중대씩을 차출, 8개 중대 1,700명을 제주도에 급파하였고, 경무부는 제주에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경무부 공안국장 김정호를 사령관에 임명하여 경찰력으로 폭도들을 토벌하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대정, 성산 지서를 경찰서로 승격시켜 제주경찰서, 서귀포경찰서, 대정경찰서, 성산경찰서 등 4개 경찰서로 확대 정비했습니다. 이러한 조치와 더불어 경무부장 조병옥은 경찰력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 서북청년단에 요청하여 반공정신이 투철한 서북청년단 요원 500명을 추가로 투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인민유격대의 기세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경찰은 많은 희생자만 발생할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경찰의 초기 대응작전이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국방경비대 총사령부에서는 417일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제 9연대에 진압 작전을 실시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당시 제주도에는 국방경비대 제 9연대가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연대장은 김익렬 중령이었고(1947.9-1948.5.5), 1대대장은 이세호 대위, 2대대장은 오일균 소령이었습니다.

410, 김영배 제주 감찰청장이 제 9연대를 방문하여 경비대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9연대장은 치안 상항에 군이 개입할 수 없으며, 상부에서도 아무런 지시가 없다고 하면서 경찰측의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또 부산 제 5연대에서 진압차 파견되었던 대대장 오일균 소령은 폭동 사태는 경찰과 주민 간의 충돌이므로 경비대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면서 의도적으로 진압 임무를 회피했습니다. 진압은 경찰이 할 일이지 군이 개입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제주 9연대는 몇 번 작전에 참가하였는데, 이처럼 오일균 소령이 제주 남로당과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때마다 작전 계획이 미리 적에게 알려져, 어쩌다 적과 만나면 서로 공격하지 않고 접전을 회피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산중으로 4km 이상(아지트와 공비와 폭도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 등 작전상 유리한 지역)은 제주 9연대에서 맡겠다고 하여, 경찰이 아예 출동하지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찰은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적절한 토벌작전을 펴지 못하는 사면초가에 빠져 발만 동동 굴러야 했습니다.

 

 

(2) 인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의 평화협상

 

 

김익렬 연대장은 9연대 안에 오일균 소령, 문상길 중위, 이윤락 중위, 고승옥 하사 등 제주 남로당의 프락치들이 많이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폭도들과 서로 총을 겨누지 않고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연대장의 의중을 알게 된 오일균 등 9연대 내부의 남로당 조직책들은 이를 교묘히 이용하면 경비대의 토벌을 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주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오일균의 제안으로 사령관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열었습니다.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국경(국방경비대)과의 관계항목(78)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9연대 연대장 김익렬이 사건을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하여 인민군 대표와 회담하여야 하겠다고 사방으로 노력중이니 이것을 교묘히 이용한다면 국경의 산 토벌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어 4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전후 2차에 걸쳐 군책(김달삼)과 김 연대장과 면담하여 금번 구국 행정의 정당성과 경찰의 불법성, 특히 인민과 국경을 이간시키려는 경찰의 모략 등에 의견의 일치를 보아, 김 연대장은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적극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음(1차 회담에는 제 5연대 대대장 오일균 씨고 참가, 열성적으로 사건 수습에 노력하였음).

 

 

김달삼은 남제주군 대정읍 영락리 태생으로 본명이 이승진이었는데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하여 대정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주 9연대와 대정중학교는 구 일본 병영을 함께 쓰고 있었으므로 서로 아는 사이였습니다.

2·7사건으로 검거선풍이 일자 그는 부산에 있는 그의 장인 강문석(남로당중앙위원)에게 피신하여 있다가 내려와서 김달삼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고 좌익 활동을 하였습니다.

1차 회담시(일시 장소와 회담내용 미상)에는 경비대에서 오일균 소령이 배석하였고, 2차 회담시(구억초등학교)에는 연대정보관 이윤락 중위가 배석하였습니다. 당시 이윤락 중위는 그 정체가 노출되지 않은 남로당원이었으므로 김익렬 연대장은 공산당원을 부하로 배석시켜 반란군 괴수인 김달삼과 회담을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김 연대장은 공산당원인 정보관 이윤락 중위가 제공하는 그릇된 보고를 그대로 믿고 제주 사태를 잘못 판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1983114일부터 121일까지 연재된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제주 4·3사건의 진상(이선교 113-116)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봄기운이 한창 감도는 1948428(또는 30) 상오 11시였다. 이윤락 중위가 반도(叛徒)의 통보를 받아왔다. 하오 1시에 회담하자는 것이었다. 장소는 반도측이 안내키로 했다. 김 중령은 상사와 가족, 친지에게 유서를 써놓은 다음 연대 장병들을 집합시켜 놓고 회담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만일 반도들이 나를 살해하면 이는 민족반역 행위이니 장병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탕하여 나의 원한을 갚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하오 5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살해된 것으로 알고 전투행동을 개시하되 부연대장의 지휘를 받으라고 했다. 실로 초인적인 용기와 신념이 없이는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 김익렬 중령은 낮 12시 정각 장병들을 사열한 다음 이윤락 중우와 운전병만을 데리고 지프를 타고 정문을 나섰다. 지정된 방향으로 차를 몰아 연대본부에서 15km쯤 떨어진 한라산 중턱 고지에 이르지 목동이 소를 길 가운데로 몰아 차를 세웠다. 차가 멈추자 정중히 인사하며 연대장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황색기를 흔들어 신호를 보내고는 저쪽 초등학교로 가라는 것이었다. 학교(구억초등학교) 정문에는 두 명의 보초가 서 있다가 받들어 총으로 예를 표했다. 이 학교가 반도의 본부였는데 거기서는 연대본부가 빤히 내려다 보였다. 일행은 햇볕이 잘 드는 8조의 다다미방으로 안내되었다. 중앙에는 예쁘장한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5-6명의 반도가 이들을 맞았는데 그 중 군계일학 같은 수려한 미모의 청년이 나서더니 자기가 대표자 김달삼이라고 소개하며 찾아와서 고맙다고 했다. 또박또박한 서울 말씨였다. 당시 김 중령은 27세였는데 김달삼25세로 미남 배우 같이 잘 생겼다.

인사가 끝나고 대좌하자 미제 럭키 담배와 일본 녹차가 나왔다. 김 중령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신이 진짜 김달삼이고 실권자인가?

김달삼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묻는 의도를 알겠다. 연배보다는 애국심과 정신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하도 젊고 미남배우처럼 잘 생겨서 살인할 사람같이 보이지 않아 물어본 것이다.

김 중령의 말이 떨어지자 옆에 있던 50대 정도의 반도들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두 사람의 대화는 다시 이어졌다.

산에서 의식주나 통신 등 불편이 많겠다.

그렇치 않다. 그런대로 지낼 만하다.

경비대가 당신들을 아직까지 토벌치 않은 이유를 아는가?

그것은 군대가 우리의 궐기 동기를 이해하여 우리를 동정하고 있기 때문에 토벌명령을 못 내리기 때문이 아닌가?

군대는 개인의사에 관계없이 명령만 하면 복종하게 되어 있다. 만일 오늘 회담이 결렬되면 당신과 나는 다음엔 전쟁터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당신들이 경찰과 교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석다(石多)의 제주도에서 돌담을 끼고 사격전을 벌이면 피해는 많고 효과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돌담이 많은 제주도에선 박격포가 유용할 것 같아 보내달라고 위에다 요청했더니 박격포 부대를 보내겠다기에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순간 김달삼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잠시 후 그는 . 이제 회담에 들어갈까요?하면서 김 중령을 바라보았다. 김 중령이 그럽시다!하여 본격적인 담판이 시작됐다.

미제 담배와 일본제 녹찻잔이 놓여있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경비대 연대장인 김익렬 중령과 반도들의 두목 김달삼의 회담이 무르익어 갔다. 아직 동안의 27. 25세의 두 청년이었다. 김달삼이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은 미군정하의 조신인 군인이다. 교섭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행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연대장이 개인 자격으로 이런 회담에 나올 권한은 없다. 나는 미군정 장관의 지시에 따라 왔다. 나는 군정장관 제너럴 딘의 권한을 대표하여 여기서의 나의 발언이나 결정은 군정장관의 그것이다.

그렇다면 회담이 되겠다. 나는 폭도’(김달삼은 제주도민의 거사라고 호칭)의 전권을 가진 대표자다.

김달삼은 이어 미리 준비해 둔 노트의 메모를 보면서 앉은 채로 약 30분간 공산주의답게 열변을 토했다.

김 중령이 입을 열었다.

해방된 지 3년이 됐고 미군정하에서 군인 노릇을 하면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배우고 익혀 왔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공산주의를 배웠고 얼마나 알겠는가. 알지도 못하는 외래사상을 위해 청춘이나 생명을 바칠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보다는 민족의 자주 독립이 급선무이니 무기를 버리고 귀순하여 조국건설을 위해 합심하여 노력하자!

이에 김달삼은 안색을 바꾸고 핏대를 올리면서 언성을 높여 말했다.

연대장은 정의감이 강하고 선악을 식별하는 분별력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당신도 민족반역자나 악질 경찰처럼 자기네 죄상을 은폐하고 우리 의거를 공산주의 소행으로 덮어 씌우려는가?

 

 

근처에 있던 폭도들도 일제히 김 중령과 우리 당국에 대해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김달삼은 분을 참지 못해 계속 언성을 높였다.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이상 회담을 진행시킬 필요가 없다.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이다. 이젠 믿을 데가 없으니 이북에 연락하고 마지막엔 소련의 지원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당신들이 정말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회를 계속하자.

우리가 폭동을 일으키고 싶어서 일으켰는 줄 아는가. 살기 위해서 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 조건을 들어주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게만 해준다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겠다.

오늘 즉시 지서습격 등 일체의 전투행위를 중지하도록 요구한다.

연락상 즉각 중지는 어렵다. 전 도에 연락하려면 5일 정도는 주어야 한다.

무장은 즉각 해제하라.

비무장주민을 하산시켜 약속이행 여부를 확인하고 자유와 안전이 보장됐으면 3개월 후에 전원 무장해제를 받겠다.

범법자의 명단을 제출하고 전원 즉시 자수토록 하라.

무슨 소린가. 우리의 사인방화는 정당방위이며 당연 행위다.

법치국가에서의 살인, 방화는 세계 어느 국가에서나 불법이며 정당성 여부는 재판을 통해서 가려져야 한다. 나의 요구는 이상 세 가지다.

여기서는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인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약속 위반의 배신행위로 본다는 것과 무장해제는 축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는 두 가지 조건에 합의하고 범법자 인도 문제는 나중으로 미뤘다.

이어 반도 측의 요구조건이 나왔다.

제주도민으로 행정과 경찰 업무를 수행하고 반역적인 악질 경찰과 서청을 제주도에서 추방하라.역시 상투적인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김 중령은 이렇게 말했다.

민족반역행위, 악질행위가 입증되면 해직, 추방, 처벌하겠다. 제주도민만으로의 행정, 경찰 구성은 정치적인 문제이지 군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독립 정부가 들어서면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약속한다.

이때 밖에 있던 반도들이 함성과 박수를 쳤다. 담판은 이어졌다.

제주도민의 경찰이 편성될 때까지 군대가 치안을 맡고 지금의 경찰을 해체하라.

이 회담이 성공하면 자연히 군대가 치안을 맡게 되면 경찰은 나의 지휘를 받게 된다. 따라서 해체할 필요는 없고 인원을 축차로 개편하겠다.

의거(폭동) 참여자를 전원 불문에 붙이고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라.

교전중이 아닌 때 범한 살인, 방화 행위 외에는 전원 불문에 붙인다. 군에 귀순하면 생명과 재산, 안전, 자유를 보장하겠다. 살인, 방화를 저지른 범인이라도 귀수하면 극형은 면케 해준다.

그러나 김달삼은 범인 문제만은 승복하지 않았다. 시간이 벌써 430분이 되고 있었다. 김 중령이 말했다.

나는 지금 가야한다. 5시까지 귀대치 않으면 내가 당신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고 부하들이 전투를 개시하기로 되어 있다.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고 다시 만나 마무리짓자.

회담장이 갑자기 긴장됐다. 김달삼이 말했다.

오늘 결말이 안 나면 회담은 결렬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범법자 명단을 제시하라. 당신과 지도급들은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모든 폭도의 귀순과 무장해체를 책임 있게 해주면 내가 개인 자격으로 배를 마련해서 희망하는 해외로 탈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겠다.

이 말이 떨어지자 회의장에서는 희색이 감돌았고 김달삼은 김 중령의 손을 잡아 흔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말 고맙다. 귀순과 무장해제가 약속대로 잘 끝나면 나도 자수하여 모든 책임을 질 것이고 법정에 나가 우리의 정당성을 정정당당히 밝히겠다.

오늘의 약속은 나의 생명과 명예를 걸고 이행하겠다. 내 가족 전원을 약속이 이행될 때까지 당신들에게 인질로 맡기겠다.

당신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데 불편한 이곳에서는 노모와 부녀자를 모실 수가 없으니 내가 지정하는 민가에 이주시키되 주변에 군인이나 경찰이 얼씬하지 말라. 우리가 감시하겠다.

좋다. 그렇게 하겠다.

 

 

이렇게 하여 대체적인 합의가 성립되어 김 중령 일행은 지프를 몰아 반도지역을 벗어났다. 4시간 30분에 걸친 숨 막히고 진땀나는 담판이었다.

일단 연대에 들렀던 김 연대장이 맨스필드 대령에게 협상 결과를 보고 했더니 그는 대만족이었다. 제주군정청의 명령에 따라 경찰은 자체건물 경비만 하고 그 밖의 지역 전체의 치안 책임은 경비대가 떠맡게 됐다.

 

 

다음은 양측의 협상 내용입니다.

- 4.3은 말한다.2, 김익렬 유고 중에서 -

 

1 72시간(3) 안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인 충돌이 있으면 연락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단정한다.

2무장해제는 단계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시 전투를 재개한다.

3친일을 했거나 민족 반역한 관리 및 악질 경찰은 사실이 증명되면 해직 및 추방하며, 범법한 서북청년단 등도 처벌 및 추방한다(제주도민만으로 행정관리 및 경찰을 편성하자는 요구는 미합의.)

4 경찰의 인원을 감축한다(현재의 경찰을 해제하자는 요구는 미합의.)

5 살인 방화 등 범법자의 명단과 범죄내용을 제출하고, 자수 시 관대히 처분하며 폭도의 무장해제와 귀순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은 개인적으로 보장한다.

(1, 2항은 김익렬 연대장 요구에 대한 합의이고, 3, 4항은 김달삼 요구에 대한 합의이며 5항은 양측의 공동요구에 관한 합의임)

 

 

 

협상은 대체로 순조롭게 끝났으나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그 무렵부터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시작했는데, “시간을 벌기 위한 반도들의 술책에 연대장이 기만을 당했다.”, “연대장이 폭도 두목과 내통했다.”는 등의 중상모략이었습니다. 이것은 곧바로 경찰정보로 중앙에 보고되었습니다. 한편 폭도들 사이에는 김익렬 연대장이 기만전술로 귀순자들을 모아 한꺼번에 몰살하려 한다는 터무니없는 풍문까지 나돌았습니다.

 

 

(3) 제주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해임(194856)

 

 

김익렬 연대장이 평화협상을 통해서 김달삼과 합의한 내용은, 뒤이어 벌어진 51일 오라리 사건과 53일 하산하는 주민 기습사건으로, 경찰과 경비대 간의 불신의 골이 깊어지게 하였고, 미군정 당국의 딘 장군이 주재하는 최고수뇌회의(55) 때 평화협상은 자동 파기되었습니다.

오라리 사건과 하산하는 주민 기습 사건의 내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오라리 사건(51)

오라리는 제주읍에서 한라산 쪽으로 2km 지점에 위치, 5개 마을로 되어 있으며, 600여 호에 3,0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51일 자정 즈음, 오라리에서 방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오라리에서는 411일 경찰 송원화의 부친 송인규가 폭도들에 의해 살해된 후, 좌익과 우익이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까지도 죽이는 사건들이 번갈아 일어났습니다. 429일에는 이 마을의 대청단장(박두인)과 부단장(고석종)이 납치되어 산으로 끌려갔으며, 30일에는 대청단원의 부인인 강공부(23), 임갑생(23)이 산으로 끌려갔다가 임갑생은 도망쳤고, 임산부였던 강공부는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인 51일에 강공부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30여명의 우익 청년들이 임산부까지 죽인 폭도들의 만행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오라리 연미 마을에 들어와 좌익 청년들의 집 12채에 불을 지르고 떠났습니다.

산에 있던 폭도 20여 명이 마을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 급히 달려왔으나 불을 지른 대청원들은 이미 없었습니다. 폭도들은 마침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가 그가 김규찬 순경의 어머니 고순생(42)임을 알고 우르르 달려들어 죽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순경의 어머니가 폭도들에 의해 살해됐다는 소식을 들은 경찰들은 흥분하여 폭도들을 찾았는데, 이때 마을 사람 중에 정지하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던 고무생(41, )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이처럼 김달삼과의 평화협상으로 잠시 휴전 기간이 진행되는 동안, 방화 사건이 일어나고 총격전이 벌어지자 깜짝 놀란 제 9연대장 김익렬은 현장으로 달려가 사태를 조사하고, 방화가 우익 청년들의 소행임을 알아내어 이를 미군정장관 맨스필드에게 보고했는데 별로 호응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맨스필드가, 폭도들이 먼저 4.28평화협상을 깨고 사람을 납치 살해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하산하는 주민 기습 사건(5.3사건)

 

 

5315:00 , 200-300명의 입산 주민들이 귀순하겠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그들은 9연대 병사 7명 및 미군 병사 2명과 미 고문관 드르스 중위 인솔 하에 오라리 부근을 통과하여 제주 비행장으로 하산하고 있었는데, 정체불명의 무장대 50여 명이 갑자기 기관총과 칼빈총을 난사하였습니다. 갑자기 총격을 받은 귀순자들은 몇 사람이 죽고 나머지가 다시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이때 미군의 반격전으로 무장대 5명이 죽고 몇 사람이 부상으로 생포되었습니다. 생포된 자는 제주 경찰서 소속이라고 하였는데, 제주도 군정당국이 경찰에 조사를 의뢰한 결과 경찰과 미군, 경비대를 이간시키기 위해 폭도들이 경찰로 가장하여 저지른 소행으로 밝혀졌습니다. 결과적으로 김익렬 연대장과 김달삼 제주 인민유격대 사령관의 평화협상은 완전히 깨졌고, 경찰과 경비대 간의 불신의 골만 깊어졌습니다.

 

 김익렬 9연대장은 그가 폭도들과 협상한 사실과 55일 대책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과 육박전을 벌인 사실이 상부에 보고되면서 이에 대한 문책으로 다음날 56일 해임되었고, 후임으로 해방 당시 일본군 제주도 부대에 근무한 경험이 있어 제주도 지리를 잘 알고, 일본군이 축성한 진지나 지형을 잘 알고 있는 서울 총사령부 인사과장 박진경 중령이 임명되어 항공편으로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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