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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2. 제주 4.3폭동(2) 운영자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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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48, 제주 43폭동 사건

 

 

제주도는 동서로 73, 남북으로 31, 면적이 약 18850인 타원형의 화산도이며 섬 중앙에는 해발 1,950m의 한라산이 우뚝 솟아있습니다. 한라산을 정점으로 동서로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남북으로는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도민들은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짓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거나 해산물을 채취하여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제주도는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요충지로서 일본과 중국대력의 어선, 상선의 기항지요, 특히 세계 전사(戰史)에서 전략상 결정적인 요충지대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은 본토 수호를 위한 군사기지로 제주도에 10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곳곳에 그들이 파놓은 참호와 그 외의 군사시설로, 섬 전체가 진지(陣地)화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군은 패전 이후 19458월 막대한 무기와 탄약을 땅에 파묻거나 바다에 수장한 후에 철수하였습니다.

 

 

(1) 한반도의 최남단, 제주도의 공산당 조직

갑작스러운 8.15해방을 기점으로 제주도에는 많은 인구가 물밀 듯 밀려들어와 도내 분위기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22만명 정도였던 제주도 인구는 해방이 되면서 27만을 돌파했고, 1948년에는 28만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1946년에는 콜레라(호열자)가 번져 369명이 사망한데다가 보리 흉작으로 식량난이 겹쳐 도민들의 살림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습니다.

해방 이후 갑자기 유입된 56천 명 가량의 인구 중에는, 일본 오사카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해꺼나 일본군에 종군하였던 군인, 군속, 징용노무자들이 있었고 중국에서 의용군, 팔로군에 있다가 돌아온 좌익계의 과격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지하에서 사회주의운동을 하던 자들과 합세하여 제주도 전역을 휩쓸다시피 했습니다. 순박하고 선량한 제주도민들은 그들의 선동에 현혹되었고, 혈연관계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붉은 사상으로 물들어 갔습니다.

게다가 제주도는 육지인 목포로부터 141.6, 부산으로부터는 286.5정도 떨어져 있어 폭동을 진압하기 어렵다는 지리적인 특수성 때문에, 해방 직후부터 친북 좌파들이 극렬하게 활개치고 있었습니다. 제주도 내에서만 6만여 명이 남로당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 조선 미국 군사(軍史)제주도의 약 6만내지 7만으로 추정되는 주민이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했다. 그들은 주로 무식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농부와 어부들인데, 그들은 제 2차 세계대전과 전후의 곤경에 의하여 심하게 혼란에 빠진 결과, 남조선노동당이 그들에게 지속적인 경제적 보장을 제의한 것에 쉽게 설득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도지사 박경훈이 인민투쟁위원장이요, 제주읍장이 부위원장, 각 면장이 면 투쟁위원장이었던 것을 보면, 도내 공산주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박갑동은 그의 저서 박헌영198쪽에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대한 적극적 보이코트 지령에 따라 남로당이 대대적인 무장폭동 장소로 택한 곳이 제주도이다. 남로당이 굳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를 택한 이유는 지리적이 ㄴ특수성 때문에 해방 직후부터 공산당의 조직 활동이 가장 활발했고 따라서 그들의 선전과 조직활동 등으로 도민의 사상이 자못 붉은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곳의 경찰은 사면초가의 입장에 몰려 형세가 불리했고 치안은 위기에 몰려 크고 작은 소동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군정이 실시된 지 9개월 만인 19481일부로 제주도는 행정 구역상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군()에서 도()로 승격되었습니다. 도제 실시를 계기로 행정 기구의 조직 강화, 경찰 기구의 확대 개편, 경비대의 창설 등 법적, 제도적 보강과 기구 확대가 있었습니다.

첫째, 19461116일 전국에서 가장 늦게 모슬포에 국방경비대 제 9연대가 창설되어 제주도 방위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초대 연대장은 장창국 중위가 맡았으며, 선임장교로 안영길(육사 1), 윤춘근(육사 2), 김복태(육사 2), 김득룡(육사 2) 등이 임명되었습니다. 9연대는 당시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 4연대에서 차출된 50명을 기간요원으로 하여, 모슬포에 도착하자마자 모병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기간병들이 사고뭉치 또는 좌익불순분자들이라 모병 과정에서 애로 사항이 많았습니다. 194761일 제2대 연대장으로 취임한 이치업 소령이 제 9연대를 제 2대대까지 편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자들이 많지 않아 실제 병력은 1개 대대 병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9연대 내부에는 많은 남로당 프락치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국경(국방경비대)과의 관계(75)에서는 ‘1946년 본도 31투쟁 직후 때마침 본도 주둔 제 9연대가 신설되어 제 1차 모병이 있음으로 이에 대정(大靜) 출신 4동부(고승옥, 문덕오, 정두만, 류경대)를 프락치로서 입대시켰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당시 제주도에는 1개 경찰서밖에 없었는데 1946911일부터 경찰국 성격의 제주감찰청을 발족시켜, 19461214일에 제주읍과 서귀포 등 2개소에 경찰서를 설치하였습니다. 해안경비대도 뒤를 이어 조직되어 제주도의 해안을 방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1947223일에 충청남북도의 경차로간을 제주로 파견하였고, 310일에는 제주감찰정을 제주경찰감찰청으로 개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제 강점기 때부터 좌익 사상을 가진 자가 많았던 제주도에는 1920년대의 신인회 사건을 비롯하여 1930년대의 제주 청맹 사건, 혁우동맹 사건, 야체이카 사건 등 사회주의 비밀 조직을 결성했다가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은 일이 많았고, 이들은 해방이 되자마자 빨리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해방 이후 제주도에는 1945820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가 조직되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좌우익을 구분하지 않았으므로 사회 안정과 건국 운동에만 전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194596일 건준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928일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여 미군정이 들어서면서부터 사사건건 의견충돌이 일어나던 끝에 결국 1945109일 좌익계 인사들만을 중심으로 제주극장에서 건준을 개편, 면 단위뿐 아니라 리(마을)단위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제주 지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초 정당으로는 김정로 주도 하에 1945129, ‘조선공산당 제주도 위원회(위원장 안세훈)’가 창립되었습니다. 이에 우익인사들도 대책을 상의하고 제주향교에서 우익인사들로만 건준을 개편했습니다.

당시 좌익의 지도급 인사로 알려진 안세훈(조천), 조몽구(성읍), 오대진(대정), 이도백(대정) 등은 제주읍을 중심으로 동지들을 규합하며, 청년들의 기호에 맞는 선전과 충동으로 학습한다고 밤낮으로 모이기 시작하더니, 10월 이후부터 급속도로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의 호응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제주읍에서는 건준의 기능이 마비상태가 되고, 좌익의 선동을 받은 청년 학생들이 기존 질서와 윤리를 무시하고 상하 구별 없이 종횡무진 날뛰었습니다. 그 결과 좌익계에서는 10월 말부터 12월 사이에 많은 정치단체와 소속 단체들을 만들었습니다.

19461123,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창립되자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도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로 그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이 일의 주동 인물로는 안세훈(조천), 김은환(조천), 문도배(세화), 현호경(성산), 조몽구(성읍), 오대진(대정), 김한정(대포), 이신호(대정), 이운방(대정), 김용해(하귀), 김정로(제주읍), 김택수(제주읍), 문재진(제주읍), 부병훈(화북), 송태삼(서귀포), 이도백(서귀포)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공산당의 이름으로 활동하지 않고 인민위원회 혹은 1947223일 결성된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약칭: 민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한편 1947112일에 민주청년동맹(약칭: 민청)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65일에는 민족통일애국청년회(약칭: 민애청)’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각 마을마다 민애청에 가입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할 정도였으므로, 사상도 노선도 모르는 채 마을 사람 거의가 남로당에 가입하였습니다. 헌병대, 정보기관, 경찰관 등을 제외하고는 온통 인민위원회의 세상이었습니다.

박경찬 씨(제주시 한림읍 거주)는 당시 서귀포 신예리에 거주했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증언해 주었습니다.

그의 할머니는 모두들 주변에서 남로당에 가입하라고 했지만 처음 몇 번은 그냥 무심코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가입 안 한 사람들을 한쪽에 세우더니 몰살을 시키는 끔찍한 장면을 다 지켜보시고는 이거 가입 안 하면 정말 죽겠구나싶어 그 자리에서 당 가입 서류에 서명을 하였습니다. 순진한 할머니는 언제든지 위협을 당하면 보여 주기 위해 외출할 때마다 그 서류를 항상 들고 다녔습니다. 그 이후로 어느 날 좌익분자 색출을 위한 경찰의 소집령이 있었는데, 이념에 대해 아무런 분별이 없으셨던 할머니가 그저 목숨을 부지할 일념으로 자신의 남로당 가입 서류를 가지고 가서 내보이려 하자, 이때 곁에 있던 이웃 사람이 깜짝 놀라 빨리 그것을 감추라고 손짓하여 주는 바람에 겨우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 간단한 일화만 보아도, 당시 많은 양민이 좌익과 우익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두 진영 모두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 때문에 희생된 예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좌익들의 세력에 비해 민족주의 보수 애국 세력들은 매우 약했습니다. 친일파 타도, 반공을 내세운 자생적 조직인 한라단이 있었으나 정치적 역량은 미미했습니다. 제주에서의 우파 단체로는 19463월에 발족된 대한독립촉성연맹 제주도지부(위원장 김충희)19472월에 결성된 광복청년회 제주도지부(위원장 김인선)가 있었는데, 이 두 단체는 194710월에 대동청년단(단장 김인선, 약칭: 대청)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1948년에 대청과 함께 대한청년단(약창: 한청)으로 흡수 통합된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조청)제주지부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주도지부(위원장 박우상) 및 한독당 제주도당(위원장 김근저)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익 단체의 활동은, 좌파에 비해 늦게 출범해서 그런지 당시 마을 단위로까지 조직화되었던 인민위원회에 비하면 그 영향력이 미약했습니다.

그러다가 19473·1발포사건 이후 좌파 진영이 검거사태를 피해 지하로 숨어들자 우파 진영은 조직을 확대하는 등 활기를 띠기 시작했는데, 194711월에 서북청년회(약칭: 서청) 제주도지부(위원장 장동춘), 12월에 조선민족청년단 제주도당부(단장 백찬석)등을 결성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있기는 했으나, 해방 직후에 결성된 제주도 인민위원회19473·1발포사건까지 사실상 제주도 전역을 지배한 자치 행정기구였고, 그 배후에는 남로당이 있었습니다. 당시 10배가 운동을 벌여 남로당 당원수가 50,000여 명에 달했는데, 당시 제주도 인구가 27만 명이었음을 감안할 때 제주도민 상당한 수가 좌경화되었던 것입니다.

 

 

(2) 1947, 제주 3 · 1발포사건

3 · 128주년 기념행사와 좌 · 우익 충돌

194731일은 1919년 기미독립만세 사건의 제 28주년이 되는 날로,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는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 날에 일어난 모든 좌우익 충돌 사건은, 남로당 중앙본부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많은 인명 피해를 빚어냈습니다(사망자 16, 부상자 22: 조선일보 194734일자).

서울에서는 좌익과 우익이 서로 각기 다른 장소에서 31절 제 28주년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서울 남로당은 민전을 중심으로 남산공원에서 ‘3 1기념 시민대회라는 이름으로, 우익 진영은 서울운동장에서 기미독립선언 전국대회라는 이름으로 집회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민족적 행사가 좌익 따로 우익 따로 진행된 것은 194631절 행사와 8.15 광복 1주년 행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시민 동원 능력은 좌익이 우익보다 훨씬 우세했고 조직적이었습니다. 좌익과 우익 진영은 행사를 마친 후 남대문에서 맞부딪치게 되어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정인수(16)군과 박수호(26)군 등 16명의 사망자와 50여 명의 중경상자를 냈으며, 이 외에도 전북 정읍, 전남 순천, 기타 여러 지방에서 충돌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냈습니다. 결국 194731절 행사는 찬탁과 반탁, 좌와 우의 격돌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31기념행사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소요는 규모면에서는 서울의 경우가 가장 큰 충돌이었으나, 사상자의 수나 경찰과의 충돌 면에서는 부산과 제주도에서의 소요가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제주도는 우익이 약하여 아예 좌익과 다툴 힘이 없는 지역이었으므로,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주최하에 좌익진영의 기념식만이 거행되었습니다.

 

 

3 · 1절 기념투쟁을 위한 남로당중앙당의 지령

194731기념투쟁 당일 25,000명이라는 놀랄만한 인원이 동원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제주 인구의 십분의 일로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민전, 인민위원회, 민청, 부녀동맹, 교원조직, 직장조직 등을 통해 인원동원에 총력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 남로당중앙당의 지령에 의한 조직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당시 남로당제주도당이 내린 지령서와 미군정 당국의 조치가 이를 반증하고 있는데,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차 지령서] 1947216일 남로당제주도당은 3 1운동기념 투쟁 방침을 하달하여 제주도 각급 인민위원회,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조선부녀총동맹 등의 좌익단체 대표로서 각 읍면과 부락 및 직장, 그리고 학교에서 3 1절기념준비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아울러 선전활동을 비롯한 투쟁방침을 제시하였습니다. 당일 복장은 전투식으로 하며, 집회 장소에 인민위원회기를 들고, 구호는 인민위원회로의 정권양도, 박헌영 체포령 철회, 인민항쟁관계자 석방, 입법의원 타도, 삼상회의 결정 즉시실천, 남로당의 깃발 아래로 인민의 결집등으로 할 것을 제시하였습니다. 특히 31운동을 10월 인민항쟁과 현 정세에 결부시켜(‘10월 혁명은 31운동의 혁명적 정신과 혁명적 요구를 계승한 위대한 민족적 투쟁이다’) 민주주의임시정부(공산주의임시정부) 수립에의 방향으로 전 인민의 진로를 밝힐 것을 지령했습니다.

이와 같은 31절기념투쟁 방침을 보면, 국민의례적인 31절을 기념하기 위한 데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저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남한의 자유주의 내지 자본주의 질서를 파괴하고, 미군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투쟁방편으로 31절 기념행사를 이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1947217, 김두훈 집에 각계각층을 총망라한 인사가 집합하여 31기념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194731일 시위를 단행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위원장에 안세훈, 부위원장에 현경호, 오창흔 2명을 추대하였으며, 총무부 재무부 재정부 선전선동부를 설치하고 위원 28명을 선정하였습니다(제주신보 47218일자).

 

 

[2차 지령서] 1947220남조선노동제주도위원회의 서한으로 각 가두 농촌 야체이카에게 31운동기념투쟁방법을 하달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시위행렬을 합법적으로 못하는 시()에는 당 독자적으로 감행할 것이므로 각 세포에서는 당지도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게 하기 위하여 특별대표를 선정하여 저놈들의 주목을 끌지 않게 할지어다(24일까지 완료)’라고 지령한 것입니다. 게다가 31운동기념투쟁의 목표에 있어서는, ‘우리들은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미군정과 타협하여 우리 민주진영을 분열, 파괴, 약화시키는 기회주의자들에게 속지 말고 인민투쟁의 피투성이 속에서 나온 남조선노동당을 지지하고, 그 지도하에 쉬지 않는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또 사회노동당을 위시한 일체의 기만적 회색분자들을 소탕하며, 우익이라 칭하는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숙청함으로써만이 우리의 승리를 기대할 수가 있다라고 지령하였습니다. 2차 지령서를 통해, 집회 시위가 허가를 받지 않더라도 반드시 도당 독자적으로 감행할 방침을 분명히 한 것이고, 반동분자들을 북조선과 같이 철저하게 숙청하여 인적청산을 완성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이때는 194843폭동 11개월 전이며, 31발포사건 8일 전입니다. 일부 좌익 측에서는 31발포 사건 때 미군과 경찰이 제주도민을 탄압하고 또 194836일과 14일에 있었던 경찰고문치사 사건 때문에 제주 43민주항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데, 그러한 주장은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왜곡시킨 것입니다. 분명히 제주 31운동기념투쟁은 남로당 중앙당에 의해 사전에 계획되고 지령된 것이며 이것이 43폭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3차 지령서] 1947225일 각 야체이카에게 하달한 선전선동요강을 보면, 남로당중앙당 선전부의 지령에 따라 1947210일부터 310일까지를 31기념 캄파기간으로 정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31운동의 원인 진행 의의 교훈 등을 그들 방식대로 해설하여 선전선동하였습니다. 3 1운동의 실패 원인이, 농민을 중심으로 한 근로인민대중의 혁명적 봉기를 일으키지 않고 지주와 대자본가와 종교가 등의 대표자들이 타협적이고 무저항주의적으로 행동한 탓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투쟁으로서만 가능하다고 선동했습니다.

둘째, 3 1기념일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당의 기본노선과 결부시켜 선전선동 지시하였습니다.

셋째, 선전선동활동의 구체적 방법으로, 대중과 호흡을 같이하고 감정을 격발시켜 전취하기 위하여 대중과 함께 활동할 것을 제시하였습니다.

넷째, 31캄파의 구호를 제시하였습니다(15가지).

 

 

[4차 지령서] 1947225, 조선민주청년동맹 제주읍위원회 선전교양부에서는 ‘31운동기념캄파 전개에 관한 건을 하달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31운동과 10월 혁명의 의의와 성질을 분석 설명하여 대중을 고무하여 31기념일을 대중을 인입하는 동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어에서는 우리들의 지도자 박헌영선생 체포령 즉시 철회하라! 정권은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우리의 지도자 박헌영, 허헌 선생, 김일성 장군 만세!’ 등이었습니다.

 

 

1947225,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의장단 안세훈 등은 제주도군정청 미국인 경찰고문관 패트리지 대위를 방문하여 31절기념집회를 하겠으니 허가해 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한 것입니다. 228일 제주도군정청은 안세훈 외 수 명을 재차 불러서 제주감찰청장 강인수, 1(제주)경찰서장 강동효, 미국인 경찰고문관 패트리치 대위 등이 배석한 가운데, 당국의 의견을 설명하고 수석민정관 스타우트 소령으로부터 시위행렬은 절대 금지하고 기념행사는 제주서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거행하라고 최후 통고하였습니다.

이렇듯 집회시위를 허락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남로당에서는 새로운 투쟁 명분을 만들어 내고 투쟁 강도를 더욱 높여 미군정을 궁지로 몰아가려고 의도적인 집회와 시위를 계획, 강행하였습니다.

 

 

3 · 128주년 기념 제주도 대회

제주 31절 기념투쟁은 제주도 전역 3개 영역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첫째는 제주북국민학교에서 31기념투쟁준비위원회가 주도한 제주읍, 애월면, 조천면 지역의 연합행사였고, 둘째는 오현중학교에서 거행된 각 학교 31기념준비위원회가 주도한 학생들의 기념 행사였으며, 셋째는 한림면, 대정면, 안덕면, 중문면, 서귀면, 남원면, 표선면, 구좌면에서 각기 면 단위로 거행된 기념행사였습니다. 이날 제주도 전역 31기념행사에는 대력 10만 명 정도가 모였는데,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거행된 행사가 가장 핵심적이고 규모가 컸습니다.

 

 

오전 8시부터 오현중학교에는 학생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여 약 2,000여 명이 시위를 하였는데, 학생들은 4-5명씩 팔을 끼고 허리를 잡고 대열이 끊어짐이 없이 시위행진을 계속하면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31절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모스크바삼상회의절대지지!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촉구! 미군은 남조선에서 당장 물러나라! 남조선과도정부 반대!’ 등의 표어와 플래카드들을 들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시위를 하지 말라고 설득하였으나 학생들은 미군은 물러가라고 맞섰습니다(제주신보 194746일자). 어느새 3,000여 명이 된 학생과 군중대열은 동문통과 서문통과 남문통을 통해 제주북국민학교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제주북국민학교에 모인 인원은 약 25,000명이었는데, 좌익 단체 소속만 17,000여 명, 일반 군중이 8,000여 명이었습니다. 이날 우익들은 참석하지 않았는데, 좌익들은 31발포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신엄 마을 청년들이 구엄 마을에 몰려가서 문영백을 비롯해 우익사람들에게 31절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테러를 가하였습니다. 결국 문영백 씨의 두 딸(숙자 14, 정자 10)4843일 무장대의 칼과 죽창에 맞아 숨지고 말았습니다.

 

 

제주북국민학교25,000여 명이 모였으므로, 그 주변 일대는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정문 쪽에서 일부가 미군정은 물러가라”, “친일파를 처단하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한참 동안 군중을 선동하여 흥분시킨 다음, 남로당지지 청년들이 7-8명씩 조를 짜서 살기등등하게 구호를 외치면서 쏟아져 나갔습니다. 군중심리로 모여든 구경꾼들까지 합세하기 시작하여, 그대로 방치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동원한 경찰은 제주출신 330, 1947223일 충청도에서 지원받은 응원경찰 100명으로 도합 430명이었습니다.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들은 대구사건 등의 경험이 있어 더욱 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념행사 이후 조직적인 시위와 발포 사건

경찰의 삼엄한 경비가 이루어진 가운데 11, 좌파 주도의 31절 행사가 금융조합 이사 고창무의 사회에 위원장 안세훈의 개회사로 시작되었습니다. 안세훈의 연설이 끝나고 각계 대표들이 나와서 연설을 한 후 양과자를 먹지 말자”, “신탁통치를 절대 지지한다”, “민족 반역자를 처단하라고 하면서 경찰을 비방하고 인민공화국수립 만세를 삼창하고 오후 2시경에 끝났습니다. 식이 끝나자 25,000여 명의 군중은 지금부터 전 참가자는 읍내시위행진에 옮겨 질 것을 긴급동의하고, 드디어 81조로 스크럼(scrum)을 짜고, 운동장에서 나와 두 갈래로 흩어지면서 시위를 하였습니다. 한 갈래는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다른 한 갈래는 감찰청을 거쳐 동문통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250분쯤, 기마경찰관 임영관 경위가 제주경찰서(1구경찰서)로 가기 위해 사거리 커브를 돌아 발 디딜 틈도 없는 무리들 사이를 지나칠 때,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대여섯 살 난 어린이가 말의 발에 부딪혀 쓰러졌습니다. 임 경위는 아이가 쓰러진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려 했고, 군중들은 기마병이 사람을 치었다고 고함을 지르며 여러 사람들이 기마경찰관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임경위가 탄 말이 돌에 맞아 뛰기 시작했고, 진정시키려 했지만 흥분한 말은 경찰서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군중들이 경찰에게 돌멩이를 던지고 저 놈 잡아라! 하면서 경찰서로 몰려들었습니다. 보초를 서고 있던 육지경찰과 도청 정문망루에 있던 육지경찰이 경찰서로 떼를 지어 몰려드는 군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6명이 죽고 6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총격을 가한 경찰들은 육지에서 대구 폭동을 진압했던 경험이 있어 혹시 대구 폭동과 같은 일이 벌어지는가 생각한 것입니다. 갑작스런 총성에 놀란 수많은 군중은 삽시간에 흩어졌고, ‘경찰이 사람을 치어 놓고 그냥 가더니 이제는 총질까지 한다면서 웅성거렸습니다.

 

 

도립병원에서의 두 번쨰 발포 사건

이날 제주경찰서 앞에서의 사망자 6명과 부상자 6명을 도립병원으로 옮길 때, 도립병원에서 두 번째 발포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상시 도립 병원 내에는 허와 순경이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었고, 그를 두 사람의 육지경찰이 간호를 하고 있었습니다. 관덕정 쪽에서 총성이 울리고 도립병원에 갑자기 피투성이가 된 부상자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이를 본 육지 경찰 두 명 중 이문규 순경(충남 공주 경찰서 소속)이 공포심에 총을 발포했고, 발포한 총에 맞아 행인 2(장제우, 정낙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들은 대구 101폭동사건을 경험했던 자들이어서 위협을 크게 느꼈고, 대구에서의 악몽이 되살아나 도립병원이 점령이라도 당하는가 하여 발포를 했던 것입니다. 미군정보보고서에는 그들은 대전에서 훈련을 받았고, 1946년 가을 좌익 폭도들에 의해 동료 경찰이 잔혹하게 당했던 사실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미군 조사단이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경찰의 발포사건이 잘못 되었던 점을 지적하자 강인수 제주도 감찰청장은 1947311일 유감을 표시하며 ‘31기념일의 도립병원 앞에서 발포는 경찰의 무례한 행위로써 미안스럽게 여긴다고 처음으로 경찰의 잘못을 시인하였습니다(제주신보 1947314일자).

3 1발포 사건은 제주경찰서 앞에서 경찰의 발포 사건과(6명 사명, 6명 부상)과 도립병원에서의 경찰의 발포 사건을(2명 부상)말합니다. 당시 제주경찰서 앞에서의 발포나 도립병원에서의 발포는 대구 사건을 경험한 육지 응원경찰이 공포에 질려 순간적이 판단 실수로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남로당은 이때 경찰관이 자위적인 방어로 일으킨 돌발적인 상황을 부풀려서, 마치 상부에서 계획적으로 발포 명령을 내린 것처럼 꾸며 시민들이 경찰에 대한 악감정을 갖도록 선동하였습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이 사건을 이용해 반()미군정, ()경찰 투쟁일 대대적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산하 단체에 이번 발포사건에 대한 적대심을 앙양시키는 동시에 민중이 지금 무조건으로 공포심을 가진 것을 해소시키는 것에 전력을 다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투쟁 방침으로 각 외곽 단체 및 양심적 유지로 하여금 피해자와 부상자에게 물질 또는 정신적인 위로를 하도록 부추기고, 강동효 서장 및 악질 경관을 극형에 처하도록 선전하는 동시에 삐라전을 전개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제주도 전역에는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였다는 내용의 전단이 살포되었습니다. 이처럼 남로당 좌익 계열은 경찰의대응을 부풀리면서 민심을 현혹하였습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발포한 경찰을 처벌하지 않으면 전도(全道)적으로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노골적으로 협박하였습니다. 이에 경찰은 며칠 후 제북교 앞에 있는 모처에서 모의를 하던 파업투쟁주동 인물 안세훈, 김용해, 오대진, 이도백, 조몽구를 비롯한 지방대표 28명을 즉각 체포하여 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뚜렷한 증거도 없이 사람을 무더기로 구속하는 것은 인권유린이므로 풀어줘야 한다는 미군

 

별지2 194731발포 사건 당시 제주북국민학교 주변

 

 

경찰고문관 패드리지 대위의 주장에 따라 할 수 없이 그들을 석방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풀려나자 경찰을 제외한 도 군청과 읍, 면 등 행정기관이 술렁거리고 제주농업학교 등 교육 기관까지 심상찮은 동요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47310일 제주도 총파업(166개 단체, 41,211명참가)

제주 남로당은 3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빌미로 1947310부터 총파업을 일으켰는데, 북군청을 제외한 제주도의 모든 관공서뿐 아니라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근로자, 각급 학교, 심지어는 공무원과 회사원, 노동자, 교사, 학생까지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었습니다.

총파업은 남로당 제주도당 배후에서 조직적으로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35일 남로당 제주도당과 제주읍당 상무위원회 간부 수십 명이 제주읍 삼도리 김행백 집에 모여 3 1사건대책 남로당투쟁위원회를 조직(위원장 김용관, 부위원장 이저행(李著行), 지도부 김용관, 조직부 김용해, 선전부 김영홍(金英鴻), 조사부 김영홍)하고 당의 대정면당의 건의를 토대로 하여 파업지령서의 문안을 작성하여 각 읍면에 대량으로 배포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제사 말햄수다 43증언자료집 Ⅰ」211쪽에는 도당으로부터 전도 12면에 발송한 총파업에 관한 지령서의 전문에서는 전년 38이남 각지에서 연속 봉기한, 이른바 ‘10월 인민항쟁‘10월 혁명으로 찬양하고, 금번의 반동경찰에 의한 학살정책에 대항키 위하여 대정면 건의에 따라 전도 총파업으로 즉시 돌입할 것을 지시했으며, 다음 본문에서는 총파업의 방침과 각 지역간의 연락방법 등 세밀한 기술 문제들이 취급되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주도 총파업은 166개 단체, 41,211명이 참가하였습니다. 은행, 우체국, 전화국 등이 파업에 가담하여 제주도의 모든 행정이 마비되었습니다. 직능별 팡버실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주도청을 비롯한 군면사무소 등 23개 기관 515

제주농업학교 등 중학교 13개교 교직원 학생 3,999

제주북교 등 초등학교 92개교 35,861

제주우체국 등 우체국 8개소 136

제주여객 등 운수회사 7개 업체 121

식산은행 등 은행 8개소 36

남전 출장소 등 15개 단체 542

 

 

심지어 애월 지서, 한림 면사무소, 대정지서, 중문지서 등이 파업에 가담하였습니다. 중문 지서의 경우, 6명의 경찰(지서장 양경환 경사, 한태화, 강석조, 강경진, 강수천, 송공삼 순경)이 발포사건에 항의하여 아예 사직서까지 제출했습니다.

‘310제주도 총파업, 81856개 단체가 파업을 해제하고, 학생들도 324일부터 조금씩 등교하기 시작하여 3월 말에는 전원이 직장에 복귀함으로써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파업에 가담한 자들의 엄청난 희생과 제주도민의 삶에 어려움만 주었을 뿐 총파업을 통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3 1발포 사건 이후 수습방안

순간적인 판단 실수로 자위적 방어를 위해 발포한 사건을 가지고 제주도민들은 총파업을 하는 등 강력하게 항의하며 나갔습니다. 이에 경찰에서는 이는 남로당의 선동에 의해서라고 판단하고 강경진압을 결정하였습니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강 청장에게 총파업에 가담한 경찰 66명을 즉시 파면시켰고, 경찰이 파업에 동참하고 지서를 텅텅 비워둔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라면서, 분명히 이 사람의 사상이 불순할 것이니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제주 31발포사건 이후 미군정은 제주 군정장관(스타우트 소령 해임, 베로스 중령 부임), 제주 도지사(박경훈 사임, 유해진 부임), 제주 감찰청장(강인수 해임, 김영배 부임), 제주 경찰서장(강동효 해임, 김차봉 부임) 등에게 사태의 책임을 물어 처리함으로써, 19474월 말 제주도 총파업 사건을 수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병옥은 31사건 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담화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조사위원은 경무부 공안국 부국장 장영복, 북군수 방명효, 검사장 박종훈, 군정재판관 싸라 대위, 제주여중 교장 홍순영 등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이들은 합동조사를 하여 조병옥에게 보고하였고, 조병옥은 제주지사 박경훈, 제주도 군정관 스타우드 소령 3인에게 이를 검토하여 담화문을 발표하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만장일치의 합의로 담화문을 발표하였습니다(제주신보 1947322일자).

 

담 화 문

조선군정청 경무부장, 동 제주도지사, 동 제주도 군정관 3자의 임명에 의한 제주도 제주읍 31절 발포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그 사건 관계자 및 증인에 대하여 모든 관계 사실을 조사 심리한 결과 전원 일치 아래와 같이 합의를 보았다.

 

1. 제주도 감찰청 관내 제 1구 경찰서에서 발포한 행위는 당시에 존재한 여러 사정으로 보아 치안 유지의 대국에 입각한 정당방위로 인정함.

2. 제주도립병원 앞에서 발포한 행위는 당시에 존재한 모든 사정으로 보아 경 찰관의 발포는 무사려한 행위로 인정함. 그러므로 발포 책임자인 순경 이 문규는 행정 처분에 처함이 타당하다고 인정함.

 

1947319

 

 

 

총파업을 선동한 500여 명을 체포하여 199명을 기소하고 61명 기소예정, 178명 계속 구금, 258명 석방, 연행자 중에는 총파업 본부장인 도청 산업국장 임관호, 과장 이관석, 인사과장 송인택, 회계과장 강산염 등 도청 간부 10여 명도 있었습니다(제주신보 1947412일자).

미군정에서는 발포사건의 당사자인 이문규 순경을 파면하였고, 파업에 가담한 경찰 66(경위 1, 경사 8, 순경 57)을 직장 이탈사태로 모두 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주 출신 경찰은 파업에 가담하여 사상이 불순하다고 하여 한직으로 밀려났고, 육지 경찰이 제주 경찰의 핵심자리를 맡았습니다.

 

육지에서 지원받은 응원경찰은 4757일 제주도를 떠났는데, 이에 제주 경찰만 가지고는 치안이 어려울 것 같아 반공청년단체인 서북청년단(서청)을 계속 제주도에 상주시키도록 했습니다. 새로 부임한 도지사 유해진은 제주도는 좌익이 강한 섬이라고 생각하여 부임하면서 서청단원 7명을 데리고 왔는데, 이들은 밤에도 지사의 관사를 경비하였습니다.

서청단원은 평남청년회, 함북청년회, 함남대한혁명청년회, 황해청년회 등이 통합하여 1946년 대구 101폭동 후 1130, 서울에서 조직되었습니다(대표 선우기성). 회원은 약 6,000여 명이었으나 194762,000여 명으로 줄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조선의 국제 문제를 방해하는 음모자들을 제거한다.” 즉 반공이었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북한에서 공산당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어 월남한 자들로, 공산당이 두고 온 북한의 가족들을 수감시키거나 살해 추방하고 대산을 강탈하거나 몽땅 몰수하여, 공산주의자라면 이를 갈고 한을 품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좌익척결에 공이 큰 반면, 8.15직후 제주도 사정을 잘 알지 못하였던 관계로 우익인사를 좌익으로 매도하기도 하였고, 일부 단원들이 상식에 지나친 포악한 행동과 윤리에 벗어난 파렴치한 행동으로 서청의 이미지를 흐려놓는 오점을 남긴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19473 1발포 사건과 19484 3폭동

좌익 쪽에서는 제주 31발포사건을 좌편향적으로 해석하며, 미군과 경찰이 제주도민을 탄압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려는 목적으로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허위 주장입니다. 아래 사건들이 194731발포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1947815일 남로당에서 해방 2주년 행사 때 전국적인 폭동을 준비한다는 정보를 받은 조병옥 경무부장은 812일부터 좌파 간부 검거에 나서 1,300여 명을 연행하였습니다(독립신보 1947813일자). 이는 31발포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1948122일과 26일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 남로당 간부들 221명을 연행한 것은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이지, 31발포사건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1948년 정월 명절을 앞둔 29, 안덕 지서 최창정 경사와 오두황 순경이 사계리 순찰을 나갔다가 마을이 조용하고 또 다음날이 명절이기도 하여 고향 생각을 하며 고망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이 과하여 잠이 들었습니다. 한편 사계리 송죽마을 청년들은 510선거 반대 시위를 하려고 준비를 끝냈는데 경찰관 2명이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고망술집에서 어제 저녁부터 진을 치고 있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 연락을 받은 사계리 송죽 마을 청년 이양호, 임창범 등은 마을 청년들을 동원하여 오전 9시 경 경찰의 총을 빼앗고 둘을 묶어 폭행하였으며, 마을에 머물게 된 경위와 밀고자들을 대라고 추궁하였습니다. 이때 이화영 경위의 인솔 하에 제주 경찰학교 졸업을 앞둔 40명이 2대의 트럭을 타고 훈련 차 이동하던 중 안덕을 지나 중문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급보를 받고 안덕지서 경찰들과 함께 현장에 출동하였습니다.

주동 청년들은 두 명의 경찰관을 속칭 권개물쪽으로 끌고 가다가 향사에서 300m 떨어진 밭에 팽개치고 달아났습니다. 경찰들은 집집마다 뒤져 연루된 자들을 연행하다가 임창범(28)의 집에서 10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수첩을 발견하고는, 그 가족들까지 잡아들였습니다. 경찰의 취조가 더욱 날카로워지자 임창범의 어머니는 취조 후 견디다 못해 자기 집으로 돌아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마을 유지들은 이러다가 마을이 큰 변을 당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마을에서 주동자들을 책임지고 데려올 테니 마구잡이로 잡아다 구타하지 말 것을 경찰에 호소하고 주동자들을 설득, 마을의 앞날을 위해 주동 청년들이 자진해서 나타날 것을 독촉하여 임창범(28), 이양호(25) 등 주동자 7명이 자수함으로써 수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사건 역시 31발포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194836일 제주중학교 2학년 김용철(21), 314일 대정면 영락리 양은하(27), 3월 말 박행구(22) 510선거 반대자 세 사람이 경찰의 고문에 못 이겨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모슬포 지서에서는 양은하를 고문치사한 경찰관 2명을 체포하였고, 조천 지서와 모슬포 지서 경찰관 5명은 징역 5, 1명은 징역 3년의 선고를 내려 과잉수사에 대한 책임을 물었습니다(조선일보 194859일자). 그런데 좌익 쪽에서는 제주도에서 해방 이후 194731사건 이전까지 경찰의 고문문제가 제기된 적은 없다. 그러나 31사건 이후 경찰의 고문이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라며 경찰고문치사 사건을 1년 전의 194731사건과 연루시켜 마치 31사건의 연장이 43사건인 것처럼 확대 왜곡하고 있습니다. 경찰 고문치사 사건은 31발포사건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더구나 이 사건은 43폭동 결정 후에 발생한 것이므로 43사건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3) 5·10단독선거 반대를 위한 19482·7폭동 사건

 

 

19451228대한민국에 임시정부를 세워 5년간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국에서 신탁통치를 한다.”는 내용이 발표되자, 이 신탁 통치안에 대하여 우익은 결사반대(반탁), 좌익은 적극지지(찬탁)로 그 대립이 너무 심하여 결국 무산되고 맙니다. 박헌영은 처음에 반탁 전단을 시내에 살포할 정도로 반탁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으나 해가 바뀌면서 갑자기 찬탁으로 돌변했습니다. 그 이유는, 소군정으로부터 소련의 정책이니 찬탁을 따르라는 명령식 설득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찬탁 이유를, 전단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신중히 검토한 결과 우리는 다음의 태도를 표명한다. ... 문제의 5년 기한은 그 책임이 3상회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자체의 결함(장구한 일제 지배의 해독과 민족적 분열) 등에 있다고 우리는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후 남로당은 “3상회의의 결정이 비록 즉시 절대독립 허용을 국제적으로 승인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 조선의 자주독립 요구와 배치되지 않는다는 담화문을 발표하였습니다.(194613)

 

 

·소 공동위원회는 양측의 의견 대립으로 194658부로 제 1차 회의가 무기휴회되고, 1947715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신탁통치 안건이 좌우의 극한 투쟁으로 무산되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19479,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는데, 그 상정 내용은 남북한 통일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합법 정부를 세우고 합법 정부가 수립되면 외국군은 90일 이내에 철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9471028유엔은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 정부수립, () 외국 군대 철수를 투표한 결과 41:0으로 가결되어 1948331일 이전에 남북한 인구 비례에 따라 비밀 투표에 의한 보통선거를 함께 실시하고 선거가 끝난 뒤 90일 내에 외국 군대는 철수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을 필두로 한 민족대표자들은 만약 소련이 반대하면 추후에 북한을 참여케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남한만이라도 총선을 실시,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과도 국회를 조직하여 조속히 외국군 정부 하에서 벗어나야 함을 주장했습니다.(경향신문 19471120일자, 동아일보 19471127일자). 그러나 남로당은 총선거의 급속 실시 주장을 단정음모라고 맹비난하며 계속 반대하였습니다.

194818 유엔 선거감시단이 서울에 도착, 활동을 개시하면서 북한에 가서도 활동을 하려 하자 소련과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은 유엔 결의를 무시하여 유엔 선거 감시단의 입북을 결사반대 하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소련과 북한 공산당의 반대로 한반도가 통일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다시 상실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194825일 군정장관 리치가 미군철수설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틀 뒤인 27, 남로당은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습니다(2·7폭동). 그 후 미국은 1948226 한반도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도록 다시 유엔에 상정하였고, 유엔은 31:2(기권 11)로 가결하였습니다. 그래서 1948510일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198명의 제헌 의원 선출). 5·10단독선거는 대한민국을 건국하게 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선거였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서 북한을 배제한 남한만의 단독선거일이 510일로 확정되자,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려고 했던 박헌영은 합법적인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필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급박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510일에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성공적으로 실시되어 합법적인 정부가 수립될 경우, 북한과 남로당의 혁명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5·10선거 반대 운동 그 속에는 박헌영의 지령에 의해 한반도를 공산화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겠다는 최종 목적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박헌영은 한반도 전체 통일 선거와 북한을 제외한 남한 단독선거를 모두 반대하였습니다. 이는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려는 음모 때문이었습니다. 유엔의 개입으로 입지가 어려워진 박헌영은 합법적인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해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1947년 말부터 소련이 거부하면 남한만이라도 단독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분위기가 일자, 그가 지령한 첫 번째 무력 투쟁이 19482·7 폭동이었습니다.

194827, 남로당은 당원 30만 명을 동원하여 전국적으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남로당은 이때 9개항의 투쟁슬로건을 내걸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조선의 분할침략계획을 실시하는 유엔한국위원단을 반대한다.

2.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3. 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통일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인에 맡겨라.

4. 국제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파를 타도하라.

5. 노동자, 사무원을 보호하는 노동법과 사회보험제를 즉시 실시하라.

6. 노동임금을 배로 올려라.

7.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8.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라.

9.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그들은 이상의 구호를 외치면서 파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이는 김일성이 주장하는 유엔의 조선위원단 반대 양군 즉시 철퇴 단독선거 반대 등의 내용과 똑같습니다.

곳곳에서 다리가 폭파되고, 기관차까지 파괴되었으며 전선이 끊어지고 전신주가 파괴되었습니다. 여기에 운수, 전신, 전화의 파업이 곁들여져 교통, 체신이 혼란에 빠졌고, 남한의 행정기관들이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혼란을 틈타 부산항만의 선박노동자들도 해상파업에 들어갔고, 탄광의 광부들도 파업을 벌였습니다. 서울과 각 지방에서는 민주학생연맹의 지휘 아래 일부 학생ㄷㄹ이 동맹휴학에 들어갔습니다. 목포와 인천 및 강릉 같은 곳에서는 관상대와 측후소(기상대)의 일부 종사원들이 파업에 가담해 기상관측마저도 한때 큰 장애를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경찰서와 지서를 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제주도는 다른 지역만큼은 아니지만, 27일 새벽을 기해 도내의 경찰서들을 습격해 살상과 방화를 일으켰습니다. 서광(西廣) 지경에서는 순찰중인 경찰관 한 명을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시위대들은 이때부터 소위 인민해방군으로 개편하여 일본소총과 수류탄, 일본도(日本刀), 죽창 등으로 무장하고 폭도화하였습니다. 그들은 안덕면 지서를 습격하고 지서장을 살해하였습니다. 경찰이 추격하여 발본하려 하였으나 폭도들은 어느새 험산유곡에 익숙해져 1,300여 개의 동굴을 이용하면서 한라산 전역에 전투기지를 구축하고 4·3폭동까지 이어나갔습니다.

 

 

2·7폭동사건이 27일부터 220일까지 약 2주간 지속되어 전국적으로 집계된 통계에 의하면 파업 30, 맹휴 25, 충돌 55, 시위 103, 봉화 204, 검거인원 8,479명 등으로 피해가 상당했습니다.

27폭동 시위 하루만의 피해 집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망 : 경찰 15, 선거공무원 15, 후보의원 2, 공무원 11,

양민 107명 등 230

부상 : 경찰 23, 공무원 12, 우익 인사 63, 시위자 35

경찰피습 26, 무기약탈 12, 동맹휴교 60, 파업 14,

검거인원 8,479, 참가인원 30만 명

 

 

시위에 참가하고 검거되지 않은 자들은 이후 38선을 넘든가, 경비대에 입대하든가, 산에 들어가 빨치산 야산대를 이루게 됩니다.

한편 제주도는 27폭동 당일에는 타 지역에 비해 조용한 편이었으나, 그 이후 여러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24군단 정보보고서에는 “29, 10, 11일 밤, 제주 지역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동한 17건의 폭동과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 폭동을 유형별로 보면 6개의 경찰지서 습격, 삐라 살포, 칼과 곤봉으로 무장한 폭도들의 시위 등이었다. 주목할 점은 많은 폭도들이 소련국가를 불렀다는 사실이다. 보고된 사망자는 없으나 경찰 2명이 심하게 구타당했다. 경찰은 3일 동안 약 290명을 체포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 4 · 3폭동의 결정 시기

27폭동은 전평과 남로당의 지령에 의해 자행된 전국적 규모의 소요 사건으로서 남로당 입장에서 볼 때 특별한 성과는 없었다 할지라도 파괴와 습격으로 제주도민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제주도의 경찰력을 시험해 보았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제주도 좌익 계열은 자신을 얻었습니다.

 

 

폭동의 계획과 그것을 실행하기까지는 반드시 신중을 기한 토론과 장기간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제주 43폭동은 제주도의 공산화는 물론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킬 목적으로 유사 이래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된 큰 사건이었던 만큼 43당일 훨씬 이전부터 작전 계획과 이를 위한 구체적인 회의, 훈련 준비 등의 절차가 수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1948620일 미 제 24군단 정보참모부 헝거(R. Hunger) 상사가 남로당원들을 조사해서 얻은 증거 자려에 의하면, ‘인민해방군은 19481월 이전 한림지역의 오름 중턱에 설치된 일본군 군사시설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고, 19482월 초에 300여 명이 애월면 샛별오름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는 경찰보고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폭동 거사를 이루기 위한 훈련 준비가 산속에서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데다, 이제 최종적으로 폭동 시기의 결정 문제는 더욱 신중을 기하였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최종 날짜를 결정한 때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다음과 같이 추정은 가능합니다.

27폭동 이전인 122 경찰이 남로당(북제주군) 조천지부에서 개최돈 남로당원들의 불법회의장을 급습했을 때, ‘2월 중순에서 35일까지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켜 경찰간부와 고위 공무원을 암살하고 경찰 무기를 탈취하라는 내용의 문건이 나왔습니다. 경찰은 1948122일과 26, 두 차례에 걸쳐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당원 221명을 강제로 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폭동을 모의하는 모임을 가졌다고 해서 구속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결국 제 1차로 63명을 풀어주고, 19483월 초순 전원 석방하였습니다.

 

 

역시 미군정보고서에도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은 2월 중순부터 3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도록 명령 받았다. 1948122일 남로당 북제주군 조천지부에서 열렸던 공산주의자들의 불법회의장을 급습한 경찰이 노획해서 번역한 문건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2월 중순부터 35일 사이에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요구했다. 또한 경찰간부와 고위 공무원을 암살하고, 경찰 무기를 탈취하라.는 지침이 발표되었다(C-3). 212일에 경찰과 방첩대는 남조선노동당본부를 기습해서 1948215일에 시작해서 194835일까지 분쟁을 계속하도록 지시 하는 내용의 다량의 전단과 문서를 발견하였다.’(B-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당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2월초부터 한 보름 동안 구좌면과 조천면 지역에서 장소를 옮겨가면서 몇 차례 하였는데, 최종적으로 소위 신촌회의(북제주군 조천면 신촌리)에서 각 면, 리의 책임자들이 모여 주야로 3일간 토론을 하게 됩니다. 끝내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220경 투표로 폭동을 결의하고 경찰과 무장투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225에는 군사부를 신설하는 등 구국투쟁위원회체제로 당을 개편하고, 228전남 오르그’(조직 지도자)가 제주도를 방문하였다가 315 제주 43폭동 작전을 세우게 됩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제주도 폭동을 최종 결정한 날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촌회의 직후에 도당이 전투태세(구국투쟁위원회)로 개편된 225일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한편 225일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 14명이 조천읍 선흘리에 모여 개편한 구국투쟁위원회의 조직도를 보면, 군사부에 ‘4 3지대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 또한 225일에 43일을 거사일로 결정했다는 추정을 뒷받침 합니다.

남로당 중앙당에서는 전쟁을 방불케 했던 27폭동을 경찰이 빠르게 진압한 것에 놀라, 앞으로 510선거 반대투쟁은 육지에서 떨어져 진압이 어려운 제주도에서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27폭동 이후 남로당의 510선거 반대 투쟁이 가장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일어났던 곳이 바로 제주도입니다.

제주도는 선거구 3개 중 두 곳이 무효가 될 정도로 방해공작이 폭력적이고 극심하였습니다. 제주도는 남로당의 당세가 좋고, 한라산 등 산이 많으며, 일본군이 산에 파놓은 참호와 그들이 버리고 간 무기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지리적으로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국군의 출동과 진압이 어려운 이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제주 남로당은 27폭동에 가담하지 않아 수배자가 없었으므로 활동이 자유로웠습니다. 제주 남로당이 27폭동에 가담하지 못한 이유는, 경찰이 남로당에서 전향한 김석천과 김생민을 통해 남로당 제주도당의 조직을 파악한 후, 27폭동을 준비하는 회의 장소를 덮쳐 122일과 26일 두 차례에 걸쳐 제주 남로당 위원 221명을 대거 연행했기 때문입니다.

 

 

(5) 4 3폭동 사건의 시작

봉화는 무장대들의 연락 신호로, 보통 한 달에 몇 번 올려지던 것이 3월 말경에는 거의 매일같이 올려져 도민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었으며, 경찰의 신경을 자극시켰습니다.

 

 

12개 지서 습격

194843일 일요일 새벽, 희미한 그믐달(음력 224)이 떠있을 뿐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사방은 조용하였으며 전날에 약간의 가랑비가 내린 탓인지 날씨는 다소 쌀쌀하였습니다. 이날 새벽 2시를 기해서 한라산 정상에 봉화가 오르고 뒤이어 한라산 중허리의 89개의 오름마다 봉화가 올랐습니다.

사전에 이를 신호로 하여 연락하고 기다렸던 약 350여 명의 무장유격대원들은 면 별로 마을 부근의 동굴과 숲속에서 총, 죽창, 곤봉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가 봉화불을 보자 흥분하였고, 제주도 내지서 24개 중 12개 파출소 곧 제주읍의 삼양지서 화북지서 외도지서 애월면의 구엄지서 애월지서 한림면의 한림지서 대정면의 대정지서 남원면의 남원지서 성산면의성산포지서 구좌면의 세화지서 조천면의 조천지서 함덕지서 등을 일제히 공격하였습니다.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12-14쪽에는 1948315-43일 사이에 일어난 무장폭동때의 자위대 내지 인민유격대와 경찰과의 읍면별 충돌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주도 경찰관내 애월면 신엄 지서장 문익도 경감은 머리가 톱으로 잘렸고,

송원화 순경이 폭도들의 칼과 죽창에 8군데나 찔렸으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 고향 오라리에서 부친이 무장대의 테러를 받아 사망했습니다.

남원지서 협조원 방성화는 폭도들이 쏜 총에 복부를 맞아 즉사 하였고,

김석훈은 도끼에 맞아 팔이 잘렸고,

고일수 순경은 칼로 난도질을 당하고 목이 잘렸으며,

함덕 지서 지서장 강봉현이 죽창으로 난도질당하여 죽었고,

세화 지서 황 순경김 순경이 부상을 당하였고,

조천 지서 양창국유 순경이 부상을 당하였고, 60이 넘은 한경찰관의 부모 목을 자르고 팔 다리까지 절단하였으며, 임신 6개월의 부인은 시동생이 대동청년단 지부장직에 있다는 이유로 참혹하게 타살(打殺)되었습니다.

화북지서 협조원 이시성이 불에 타 죽고, 김장하 경찰 부부가 대창에 찔려 죽었으며,

외도 지서 선우중태 순경이 혼자 숙직하다가 무장대가 쏜 총에 맞아 즉사하였습니다.

 

 

경찰 수뇌부는 신엄지서와 구엄마을 상황을 둘러보고 이를 폭동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의사 문종후는 날이 밝자 경찰 측의 요청을 받고 문용채 제 1구 경찰서장의 지프에 동승, 이 마을 습격 뒤의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분 서장은 시체들이 즐비하게 쓰러진 모습을 보고 흥분된 목소리로 이것은 폭동이다!”라고 외쳤습니다.

 

 

4 3폭동 초기에 동원된 인민유격대 무장력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11-12쪽에 의하면 유격대(톱 부대) 100, 자위대(후속부대) 200, 도군위 직속 특경대 20명 등 합계 320명 병력이 편성 완료되었습니다. 인원 편제는 101소대, 2소대 1중대, 2중대 1대대로 편성되었습니다. 인원편제는 101소대, 2소대 1중대, 2중대 1대대로 편성되었습니다. 무기로는 99식 소총 27, 권총 3, 수류탄(다이너마이트) 25, 연막탄 7, 기타 죽창 등이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320일경, 샛별오름 공동묘지에서 67명 전원에 대한 합숙 훈련도 실시되었습니다.

 

 

43일 새벽 폭동이 시작된 상황에 대하여, 이제사 말햄수다-43 증언자료집Ⅰ」 215-216쪽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습니다.

운명의 날은 바로 194843일이다. 이날 미명을 기해 예정된 계획에 따라, 유격대는 그의 협력자들과 공동전략을 취하면서 일사불란의 규율 밑에 각 면 지서와 서북청년회관, 그리고 일상에 반동으로 지탄되는 자의 집에 대하여 총검을 가지고 기습하며, 혹은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공격하였다. 이날의 최초의 일격에 의하여 다수의 반동분자들이 숙청되었으며, 수인의 반동 경관이 납치되었다. 이 일격은 예상한 바의 성공을 거두었으며, 장래의 전망도 대단히 유망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 희망에 차 있으며, 승산이 확실한, 신성한 싸움으로 믿어지고 있었다. 모든 학교는 폐쇄되었다. 학생들은 학과를 포기하고 투쟁에 가담했다. 개교와 취학은 혁명이 승리하고 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라고 단정하였다.

 

 

한국전쟁사(1967) 437쪽에는 당시 무장대의 병력과 무기에 대하여 이들은 일본군이 철수 시 산중에 매몰한 무기를 수집하여 이것으로 무장하고 군사훈련은 팔로군 출신들이 담당하여 중국에서 사용한 유격전으로 자못 그 기세는 당당하였다. 이들의 무장병력은 500명에 달하였고, 부화뇌동한 수()1,000명에 이르러 총수 1,5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43폭동 초기에 동원된 무장병력은 이보다 훨씬 많은 무려 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는 194731기념투쟁을 사실상 주도한 김봉현과 소년 게릴라로 입산 활동한 김민주가 공편한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83쪽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남로당 인민유격대가 당시 제주 9연대 국방경비대에 맞서기 위해 그 수에 있어서도 전혀 뒤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대비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43발발 당일 인민유격대에 의한 제주도 내 지서들의 습격 상황을 육군본부정보참모부에서 발행한 공비연혁(194-195)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습니다(14개 지서가 습격당한 것으로 기록).

19483월 말일 경 제주도 폭동사건의 괴수(魁首) 김달삼(金達三), 조노구(趙魯九) 등은 국방경비대 제 9연대 내 공산 두목 문상길(文相吉) 중위 등과 암암리에 밀회하여 민간 폭도들은 제주도 내 14개 지서(支署)를 습격, 방화할 것과 국방경비대 제 9연대는 제주경찰감찰청 및 제주경찰서를 기습 점령하여 일시에 도내 전() ()를 공산계열의 수중에 넣으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194843일 새벽 02시경 남로당원 김달삼(金達三)의 총 지휘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제주경찰서관내의 화북(禾北), 조천(朝天), 함덕(咸德), 외도(外都), 애월(涯月), 신엄(新嚴), 삼양(三陽) 등 지서를 비롯하여 모슬포 경찰서 관내의 한림(翰林), 고삼(高三), 저지(楮旨)각 지서 및 서귀포 경찰서 관내의 남원(南元), 성산(城山) 세화 등 14개 지서를 모조리 습격하는 한편 수많은 애국인사(愛國人士)들을 함부로 살상하고 방화, 약탈하는 등 갖은 만행을 제멋대로 감행하면서 도내각지를 점령, 횡횡한 유혈의 참화(慘禍)는 양민들로 하여금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하였다.

인민유격대는 서북청년단의 숙소와 대동청년단, 독립촉성국민회등 우익 단체의 사무실에도 4-5명씩 무장폭도를 배치하여 일시에 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우익인사들의 집을 습격해 살해하고 각 관공서와 교회당, 사찰 등을 습격, 파괴, 방화하여 피해를 주었으며, 살상, 납치 등 인명피해를 냈습니다. 피습 지서가 북제주군에 집중된 것은 그곳에 남로당 내지 인민위원회와 자위대와 인민유격대가 잘 편성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제주도 치안기능의 중추부(제주경찰감찰청, 북제주경찰서, 제주도청, 북제주군청 등)가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당초 계획은 제주 9연대 남로당원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일부 장병이 제주경찰감찰청과 제1구 경찰서도 습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계획에 차질이 생겨 습격하지 못했습니다.

 

 

1947년 가을부터 무장봉기를 철저히 준비했던 인민유격대

무기를 지참하고 곳곳에서 습격과 학살을 자행한 무장유격대는 이미 1947년 가을쯤부터 한라산에서 거점별로 훈련을 실시하여 43일의 무장폭동을 장기적으로 준비하고 있던 자들입니다. 전투부대로서의 유격부대가 편성되어 국가를 상대로 전면적인 무력투쟁전, 즉 유격전을 벌인 것은 제주 43폭동이 처음이었습니다.

이들은 단선 단정 반대 구국투쟁조국의 통일독립을 외치면서 인민공화국 절대 사수 510단선 반대, 군정수립 음모 반대 미 점령군의 즉시 철퇴 경찰 일체의 무장해제 응원경찰대의 전면 철수 인민유격대의 합법화 등을 요구함으로써 미군정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습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27투쟁을 전기로 510단독선거를 실력으로 저지하기 위해 새로 군사부를 설치하고 극좌성형의 김달삼(대정면 당조직 책임자)을 군사부장으로 해서 게릴라 근거지를 한라산의 밀림 안에 설정하였습니다. 인민유격대는 애월 지구에서는 애월면 녹고악 한림 지구에서는 애월면 샛별오름 주변에서 편성되고, 이어 제주도의 지구별로 각기 편성되었으며, 무기와 기타 보급의 준비는 그 전부터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문승의 제주사람들의 설움에서는 인민유격대가 19478월에 지휘부를 한라산에 두고 각 거점별로 훈련을 실시하다가, 27 구국투쟁을 시험적으로 치르고 나서 각 지구별로 자위대를 재편성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연락총책이었던 김생민은 한 좌담회에서 남로당 야산유격대 즉 무장폭도는 이중업에 의해서 대구폭동사건 직후 조직되었는데, 제주도에는 194710월 조직, 2개소에서 훈련을 시켰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공산문제 연구가인 유관종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군사부장은 김달삼(본명 이승진, 남로당 중앙선전부장 강문석의 사위)으로서 이미 19479월부터 한라산에서 자체적으로 훈련을 시켜왔다. 무장대장 이덕구도 학병출신의 소위였다. 군사부 부부장은 조몽구였다. 이들 세 사람이 제 9연대의 제 2중대장 문상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장대의 훈련을 비밀리에 실시해온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이로 보아 194843일의 무장폭동에 행동부대로 동원되었던 자위대 내지 인민유격대는 19478-9월에 편성되어 훈련에 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415, 폭동 이후 조직 정비

그리고 43사건이 발발한지 10여 일 만인 1948415일에 제주도당 대책회의가 중앙당의 지시로 열렸습니다. 지금까지 투쟁결과를 분석하고 장래의 투쟁방침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김봉현김민주 공편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88쪽에서 이와 같은 긴박한 정세하에 43무장투쟁의 총화에 대한 구체적이며 과학적인 분석에 기초하여 앞으로 도래할 510망국단선보이코트에 대한 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도당부대회(4.15)가 항쟁의 불꽃 속에서 진행되었다. ... 봉기원들의 전취한 성과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510망국단선을 완전 무효로 돌리고 조국의 통일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에 전진할 확고한 입장을 취하였다.” 라고 기술하였습니다.

대책회의 후 조직정비 때에는 무장대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 <자위대>를 해체하고 각 면에서 열렬한 혁명정신과 전투경험이 있는 자를 30명씩 선발하여 <인민유격대>에 통합하여 산중의 무장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였습니다. 공동생활을 하는 까닭에 일상생활상의 혼란과 보급 문제 때문에 인민유격대를 250명으로 정리강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의 자위대는 각 부락 방위를 위해 분락으로 하산시켰습니다(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19-21). 체계상으로도 정비하며 도당에 3대 연대를 편성하였습니다.(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22-23). 이는 무장대의 주력을 도당에서 직접 지휘한다는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국방경비대로부터 무기 반출

이후로 남로당의 오일균 소령과 문상길 중위는 국방경비대로부터 무기 반출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80-83쪽에 의하면 오일균은 총 2정과 실탄, 2,400(1600+800), M1 소총 2정과 실탄 1,443발을, 문상길은 99식 총 4, 그리고 병졸 최 상사 이하 43명이 각각 99식 총 1정씩을 가지고 탄한 14,000발을 트럭에 실어 탈출하였습니다. 이때 무기나 실탄을 소지하고 탈영한 자는 총 75명이며, 그들이 9연대에서 빼돌린 무기는 총 67, 탄환이 3,858발입니다. () 보고서 80쪽에는 김익렬 9연대장이 칼빈 탄환 15발을 유격대에 공급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주 인민유격대 제 1대 사령관 김달삼이 19488월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지서 습격 45회 이상, 지소 소각 5개소 반, 지서 파괴 5개소, 전선 절단 893개소, 도로 파괴 79개소, 57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실제로 인민군들이 자행했던 피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구엄 마을 문영백의 딸 문숙자(14)와 문정자(10) 피살

구엄 마을은 신엄지서 관내인 북제주군 애월면에 소재하였는데, 당시 몇 되지 않는 우익색채 마을 중의 하나였습니다. 43폭동 당일 자정을 전후 해 인근 수산봉고내봉파군봉에 봉화가 오르고, 수많은 횃불들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봉기의 신호를 보냈습니다. 구업 마을을 습격한 무장대는 족비 100명에 가까운 대부대, 도로를 가득 메운 이들은 세 시간 가량 마을에 머물면서 자신들이 지목했던 우익이사 집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습니다. 이 마을에는 일제시대부터 구장(區長)을 지낸 바 있는 문영백(文永伯)의 주도 아래 독촉국민회와 대동청년단이 결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폭도들이 제일 먼저 노린 것은 구엄 마을 동 부락의 문영백의 집이었습니다. 무장대는 4-5개 조로 나누어 우익들을 살상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문영백의 집은 두 채였습니다. 그날 안채에는 문영백과 처, 두 딸 숙자(14), 정자(10), 그리고 두 살짜리 막내아들이 있었으며, 바깥채에는 농업학교에 재학중이던 큰아들 천우(17)와 둘째아들 홍우(12)가 있었습니다. 무장대는 먼저 안채를 덮쳤는데, 그 와중에 문영백은 다른 문으로 급히 피신했고, 마침 부엌에 있었던 그의 처도 몸을 숨겨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러나 큰 딸 문숙자와 둘째딸 문정자가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폭도들이 두 딸을 마당으로 끌어내고 저것들을 죽이라!”고 소리치자 큰 딸 숙자가 동생을 더욱 바싹 안고 살려 주세요!”라고 울부짖었으나, 10명이 칼과 죽창, 낫으로 잠옷 차림의 두 소녀를 처참하게 찔러 죽였습니다. 폭도들의 와 와!’하는 소리에 잠을 깬 큰 아들 천우는 무장세력에 붙잡혀 나오다 주위를 살펴 도주했고, 둘째 홍우는 굴묵(방에 불을 때게 만든 아궁이)’ 속으로 몸을 숨겨 무사하였습니다.

 

 

문기창 문창순 고군칠 강성종 문용준 양용운 가족

43일 새벽 구엄 대동청년단장 문기찬(文琦粲, 33)과 단원 문창순(文昌順, 34)이 자기 마을에서 3km 가량 떨어진 지금의 하귀 1리 사무소 앞 한 길가에서 시체로 발견되어 충격파장을 더했습니다. 문기찬의 눈에는 곡괭이가 꽂힌 참혹한 모습이어서, 이를 본 어머니가 실신하였으며, 문창순은 죽창에 찔려 죽어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간, 무장대는 중부락의 고군칠(高君七), 서남부락의 강성종(姜性鐘)문용준(文溶準)의 집을 습격, 인명을 살상하거나 방화했습니다. 고군칠은 습격 당시 몸을 피했으나, 임신중이던 그의 처가 몽둥이로 맞아 중상을 당하였습니다. 강성종의 가족들은 사전에 몸을 숨겨 무사하였으나, 그의 기와집은 무장대들에 의해 소각되었습니다. 문용준은 자기 집에서 무장대에 잡혀 심하게 구타를 당하였는데, 그는 1947‘3·2테러사건때에도 부상을 당한 바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사경을 헤매다 며칠 뒤 숨졌습니다.

또한 한림면 한림리에서도 독립촉성회 일을 보던 양용운의 집을 습격, 방화하고 양용운 부부와 장남 성보, 둘때 순보, 셋째 득보등 5인 가족을 납치하여 한림읍 상대리경 속칭 처나오름 동칙 죄남내라는 골짜기에서 돌과 몽둥이로 쳐 죽였습니다.

 

 

경찰숙소 기습, 김록만 · 현주선 · 강한봉 · 김창우 · 박창희

새벽 2시 한림면 한림리 서청원(서북청년단원)들이 숙식하고 있는 한림여관 경찰 숙소를 40여 명의 폭도들이 기습하여 이북 출신 김록만 순경이 죽고 경찰 2명이 중상을 당하였고, 제주 9연대장 김익렬 외 9명은 기적적으로 도망쳐 살았습니다. 국민회제주도감찰위원장 겸 한림면위원장을 맡았던 현주선(玄周善, 46)은 새벽 2시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아 폭도들이 휘두른 칼에 등과 옆 가슴 등 세 군데나 찔려 중상을 입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바깥채에 살던 국민회 한림면 총무 강한붕(姜漢鵬)이 부상을 입었고, 국민회 간부였던 김창우(金昶宇), 박창희(朴彰禧)도 같은 시간에 기습을 받아 부상을 당하였으나 목숨만은 구했습니다.

 

 

우익 청년들의 피해

194844일 폭도들은 연평리 대청단원(대동청년단원) 오승조(36)를 대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46일 대청 간판과 사무실을 부수고, 이호리 대청 총무 이도연(37), 단원 양남호(32)에게 대청 활동과 5·10선거에서 손을 떼라며 죽였습니다.

47일 한림면 저지 마을 대청단원 김구원, 김태준, 고창윤 등이 폭도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413일 제주읍 화북지서 임선길 순경이 폭도들의 총에 맞아 즉사하였으며, 417일 조천면 선흘리의 대청단원 부동선, 부용하, 고평지 등이 죽임을 당하였고, 418일 신촌에서 경찰관 김성호의 부친 김문봉(64)이 폭도들의 칼에 살해당하였습니다.

당시 폭도들은 밤마다 마을을 다니며, 적기가(赤旗歌)를 부르고 5·10선거 반대를 외치고 선거관리위원과 우익인사를 골라 죽였습니다. 또 경찰에 의해 피살된 동료의 시신을 관에 담아 메고는 상복을 입고 데모까지 벌였습니다. 이것이 제주도 남로당원 6만 여명이 일으킨 제주 4·3사건의 시발이었습니다.

제주 4·3사건이 경찰에 항거한 민중봉기였다면, 왜 무고한 백성들과 선거관리위원들을 이토록 잔인하게 죽여야 했습니까? 제주 4·3사건은 결코 경찰에 항거한 민중봉기가 아니고, 잔악무도한 남로당의 공산폭도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반란이요, 폭동입니다. 이 사건을 두고 최근 사회일각에서는 미제국주의자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순진한 제주도 인민들의 민중항쟁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입니다. 제주 4·3사건은 남한의 적화라는 목적과 그 조직이 뚜렷하고, 무기와 폭력을 이용하여 무참하게 저질러진 분명한 폭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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