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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2. 제주 4.3폭동(1) 운영자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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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 초기 공산주의의 배경

 

해방 이후 5년간의 극심한 혼란기를 중심으로, 그 전()으로는 일제 강점기 36년의 암울한 시기였고 그 후로는 이북의 불법 남침에 의해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던 6.25동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혼란기 5년 어간에 나라의 존재 기반을 통째로 뒤흔들었던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46년 대구 10.1폭동 사건·1948년 제주 4·3폭동 사건·19481019일 여수 순천 사건이 있습니다.

이러한 폭동반란 사건들과 6·25동란의 근본 원인은, 해방 이후 나라가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사회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이 땅에 급속도로 파급되었던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1) 19193 · 1독립운동 이후 전개된 공산화의 물결

1919년 거족적인 3·1독립운동으로 국권 회복을 기대했으나 일제의 칼날에 무참히 짓밟혔고, 그 결과로 오히려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혹해지자 3·1운동 이후 민족의 허탈감은 극도에 달했습니다.

​"이 때 백성들의 마음을 강하게 유혹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이었습니다."

191711월 당시 러시아에서 레닌의 주도 하에 일어난 피의 혁명 곧 볼세비키 당에 의한 폭력 혁명이 성공한 이후, 전 세계적으로 공산화의 물결이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러시아 공산당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지도적 지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3국제공산당)이 서립(1919.3.2.)된 이후에는 각국 공산당이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18122일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에서 한인 김철훈 등이 주동이 되어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를 조직하였고, 626일에는 이동휘(애국투사) 등이 주동이 되어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창립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효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당초 이러한 공산주의 운동의 최초 동기는, 공산주의 본래의 목적 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써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에 의존하려 한 것은, 지리적인 여건이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유리하였고 특히 레닌의 공산혁명정권이 세계 식민지민족 해방운동에 동조하면서 강대국의 약소국 병합정책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공산당은 소비에트 정부의 후원 아래 공산화를 목적으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공산주의자들은 토지도 나누어 주고, 있는 자 없는 자 차별 없이 다같이 잘 살고 평등하게 사는 좋은 세상이 온다.”는 말로 백성들을 유혹하였고, 동시에 미국은 우리를 돕지 않는다.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할 수 있다.”라고 선전하였습니다.

초기 독립 운동가들 중에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짐짓 공산당 조직에 몸담은 사람이 많았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배경 때문입니다.

즉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했던 것이므로 이런 배경 하에 공산주의는 애국지사들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파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을 선두에서 지휘했던 자가 바로 박헌영(朴憲永)입니다.

 

 

(2) 1925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조직

19198월말 이동휘는 중국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임되었고,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하여 공산주의 모임을 형성, 이를 점차적으로 발전시켜 19211월에는 한인사회당고려공산당으로 개편하였습니다.

이때 박헌영은 고려공산당 청년동맹의 책임비서가 되어 국내에 공산당 세력을 넓혀 나갔습니다.

서울에서는 1921서울 청년회’, 1924화요회, 북풍회와 같은 좌파 조직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소규모로 활동하던 공산당 조직이 3.1독립운동이 있은 지 6년 만인 1925417,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박헌영, 김재봉, 윤병덕(회요회, 1924.4.17), 김약수(북풍회, 1924.12.25.)20여 명이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을지로 1가 중국집 아서원 2층에서 이 일을 비밀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1925418, 박헌영의 집에서 젊은 공산주의자들을 모아 놓고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 박헌영이 실권자가 되었습니다(당시 25).

 

박헌영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녔는데, 1919년 졸업을 며칠 앞두고 3·1운동이 일어나 졸업식도 못한 채 학교를 마쳤습니다. 1920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중국에 있을 때 김만겸을 만나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받고, 상해 고려공산당 청년동맹을 조직하여 책임비서가 되었습니다.

1922325일 박헌영은 공산당을 확대 조직하려고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신의주 경찰서에 체포되어 16개월 복역 후에 출옥하였고, 1924120일 서울에 도착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3) 1882, 임오군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결성된 지 약 7개월 만인 19251122,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우연히도 조선공산당원의 일본 경찰 폭행사건이 터졌고, 결국 그 밑바닥에 조선공산당이라는 엄청난 비밀결사가 숨어 있다는 것이 적발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전국 공산주의자 일제 검거령을 내려 37명이 수배를 받았고(박헌영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다시 6 · 10만세 운동의 주도 세력이었던 많은 조선공산당원들이 조선총독부의 조사를 받으면서 조선공산당은 1927년부터 그 세력 확장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한편,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령으로 신의주에서 넘겨진 박헌영 등 21명을 합쳐 1, 2차 공산당 사건 관련자로 모두 135명이 체포되어, 그 중 101명이 예심을 거쳐 공판을 받았습니다(조선공산당 사건).

 

19266·10만세 사건과 관련되어 잠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박헌영은, 미치광이 행세를 하여 풀려났습니다.

이와 관련해 박갑동 박헌영(73)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헌영의 병세를 알아본즉 밥만은 제대로 잘 먹으나 정신이 좀 돈 것 같다고 간수들이 말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때 박헌영이 정신이상자처럼 행세를 한 것은 순전히 감방을 빠져나가려고 일부러 엄살을 부린 것이다.

192711월 중순께 옥중에서 박헌영의 발광상태는 극도에 달했다. 그는 감방에서 두 번이나 목을 매어 죽을 듯이 바둥댔기 때문에 간수들도 겁을 내었다.

그래서 수갑을 채워두자 이번엔 수갑을 차고도 이리저리 방을 헤매며 어찌나 몸부림을 쳤는지 온몸에 멍이 들었다.

박헌영이 발광기를 시작한 지 두 달째가 되었다. 하도 광기가 심해 독방에 두었으나 갈수록 태산이었다. 대변을 보고는 손에 쥐어 벽에 바르고 간수가 밥을 갖다 주면 밥은 그대로 두고 변을 먹기까지 하였다.

감방에서 차츰 박헌영의 미친기가 소문났다. 감옥의() 조차도 자기로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다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고옥(古屋) 등 변호사들은 책부원(責付願)을 내고 15일 박헌영의 보석을 또다시 신청, 22일 재판장의 허가를 받았다. 그의 치밀한 능청이 드디어 계획대로 적중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어수룩했던지, 아무튼 박헌영의 광인행세가 성공한 셈이 됐다. 그가 감옥문을 나서는 날 감옥문 밖에서는 고향인 예산에서 올라온 그의 어머니와 처 주세죽(朱世竹), 그리고 관계변호인 친구들이 그를 맞았다. 2년 만에 햇빛을 보는 그의 심정이야말로 무척 감회에 벅찼었겠지만 그는 여전히 반기는 노모와 부인조차 모르는 척 사람만 보면 무서워 달아나려고만 했다.

그는 곧 서대문동의 김탁원(金鐸遠) 병원에 입원했는데 유명한 정신병 의사인 김 씨조차도 병이 원체 악성인데다가 신체가 극도로 쇠약해 낫는다 해도 시일이 상당히 걸리겠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박헌영의 정신병자 노릇은 완전무결했던 모양이다.

 

 

(4) 공산주의 지하활동

1927년 석방된 박헌영은 소련으로 달아나 소련 국제 레닌 학교에 입학,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공산주의 운동들을 사주하고 지원하다가 1934년에 다시 체포되어 1939년까지 6년간 복역하고 나와 김삼룡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지도하면서 전국적인 공산당 지하 조직을 갖추어 갔습니다.

경성콤그룹의 맴버들은 조선공산당 총무부장겸 재정부장이었던 이관술이 대전에서 엿장수를 하면서 돌아다녔듯이 장사꾼 혹은 노동자 등으로 변장을 하고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독서 서클이나 노동자 조직을 통해 창씨개명, 징용, 공출을 반대하는 것을 선동하며 공산당 활동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4012월부터는 공산당 지하 조직이 계속 폭로되기 시작하여 194212월쯤엔 대부분이 경찰에 잡히는 신세가 되어, 결국 경성콤그룹조직은 해체되었습니다. 박헌영은 이런 검거의 사태 속에서 빠져나와 일본 경찰이 생각지도 못한 전남 광주로 피신하였습니다.

해방 때까지 3년간 광주시 백운동 215번지 광주 연와벽돌 공장에서 김성삼이라는 가명으로, 한낱 벽돌을 굽고 나르는 인부 행세를 하며 지속적으로 공산주의 지하활동을 하였습니다.

 

           

2. 해방 이후 공산주의의 확산

 

 

(1) 해방과 동시에 38선으로 분단된 조국

3·1독립운동이 있은 지26년 만인 1945815, 일본이 패망하고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우리나라는 감격적인 해방을 맞게 됩니다. 가난의 설움, 힘 없는 설움, 나라늬 주권 없는 설움 속에 36년간 참기 어려운 박해를 받아오던 우리 민족이, 드디어 자유와 해방을 맞이한 것입니다. 꿈같은 소식에 태극기를 손에 들고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가릴새 없이 서로 얼싸안고 나라를 되찾은 감격에 눈물을 흘리면서 연거푸 만세! 만세!를 외쳤습니다. 일장기에다가 태극과 팔괘를 적당히 덧칠하여 급히 만든 태극기를 흔드는 자도 있었습니다. 일제에게 짓눌려 마음껏 웃어보지도 못하고 목청껏 울어보지도 못한 우리들, 일그러졌던 얼구 ㄹ주름 사이로 감격의 눈물이 시내같이 흘렀고 남녀 노소의 통쾌한 만세소리는 삼천리를 진동시켰습니다.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너무 좋아서 잠을 잘 수 없었고 너무도 크고 벅찬 하늘의 선물에 온 국민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습니다.

약삭빠른 일본인들과 고등계 형사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본래 이 땅의 주인들이 36년 만에 거리와 골목을 가득 메웠습니다.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이라도 하는 듯 대한의 산천초목들도 다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고, 그 기쁨의 함성은 지축을 흔들정도였으니, 참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 그날! 감격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1945815일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은 사실이지만, 주권을 가진 완전한 국가로 독립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해방을 위해 독립투사들이 투쟁하였지만, 실은 우리나라의 해방은 2차 대전 때 일본의 패망과 연합군의 승리로 인해 부산물로 거저 얻은 것이요, 자력이 아닌 타력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사상가 함석헌 선생은, 8.15해방을 가리켜 하늘이 준 떡이라고 했습니다.

굶주린 자가 떡을 기다리듯이 대한민국 백성이 해방을 기다리던 그 열망을 하나님께서 채워 주셨다는 말입니다. 실로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자주와 자립과 번영의 새날을 기약하는 민족재기의 새로운 출발점으로서,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5621일 미군은 약 50만 명을 동원하여 12,000명이 전사하고 군함 100여 척의 소실 끝에 일본의 오키나와를 점령하였습니다.

1945716, 2차 세계대전 중에 핵폭탄 실험에 성공한 미국은 194586일 오전 815(출근 시간), 일본의 군수기지였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습니다. 히로시마는 순식간에 초토화되어 아예 그 형체가 사라졌고, 한꺼번에 약 14만 명이 사망하여 시신은커녕 유골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부상자는 8만 명이었습니다. 이에 500만 명이 죽어도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다던 일본은, 미국측이 3일 후인 89일 오전 112, 나가사키에 다시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약 74천 명이 죽고 75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자, 810일 항복 의사를 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815일 정오 히로히토 천왕(裕仁, Hirohito: 1901-1989, 124대 일왕)이 라디오를 통해 미국에 무조건 항복한다고 전 세계인들이 듣는 가운데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이라 자처하던 히로히토는 맥아더 장군 앞에 무릎을 꿇고 미국에 항복한다는 항복문서에 서명까지 했습니다.

이후 일제는 카이로 회담(19431127)과 얄타 비밀협정체결(1945210)에 이어 포츠담 회담(1945726)에서 선언한 내용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인정하고 우리나라에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감격어린 해방을 맞음과 동시에 불행히도 국가의 미래가 뜻밖의 방향으로 엮이어 나가게 되었으니, 그것은 국토의 분단이었습니다.

미국이 일본에 핵폭탄을 터뜨리자 소련은 일본이 곧 항복하리라고 예상하고, 미국에게 요청받은 날짜보다 이틀을 앞당겨 89일 단 하루 만에 만주에 있는 일본군을 점령하고 곧이어 한반도를 향해 진격하였습니다. 813일에는 나진과 청진을 점령하고 24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하였습니다. 소련은 미국보다 먼저 한반도를 점령하였습니다.

이에 미국은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대령(케네디 대통령 재임시 국무장관)과 챨스 본스틸(Charles Hartwell Bonesteel )대령(후에 주한 8군 사령관) 등이 38선을 그어, 38선 이북은 소련이 일본의 항복을 받고, 38선 이남은 미국이 항복을 받기로 결정하였습니다.

815일 이 건의안을 소련에 전달하였는데, 별다른 언급 없이 묵시적으로 동의하였습니다. 이는 트루먼 대통령 회고록에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미군은 남한에 있는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하여 98일 상륙하였으며, 194599일 일본군은 중앙청에서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고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철수하였습니다.

북한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남한은 미군이 점령한 때부터, 우리나라는 언제 다시 합친다는 기약도 없이 광복과 함께 38선으로 분단된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반도에 일본군이 없었따면 소련군과 미군이 오지도 않았을 것인데, 일제의 압제는 결국 국토분단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스즈키 수상은 1945728일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여 항복하려고 하였으나 본토의 과격파 장교들 때문에 못하고,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815일 항복을 하였습니다.

만일 스즈키 수상의 계획대로 728일 항복하였다면,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에 진격 할 수 없었고 그들에게 발언권도 없으므로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원폭으로 일본인이 그토록 많이 희생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미군은 1941128일부터 1945815일까지 4년 동안 싸워 일본을 패망시켰는데, 소련은 겨우 8일간의 참전으로 한반도의 중간인 38도선 북쪽을 점령하여 한반도를 분단시켰습니다.

그러므로 38선 분단의 원인은

첫째로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결과이고,

둘째로 해방 당시 스스로의 힘으로 일본군을 몰아내지 못했던 상해 임시정부의 무능 때문이며,

셋째로 소련군이 먼저 북한을 점령한 데 있습니다.

 

 

(2) 해방 직후, 박헌영의 등장과 조선인민공화국

8.15해방으로 온 국민이 감격은 했지만, 갑작스럽게 맞이한 해방이었으므로 우리나라의 지도층은 이 날을 맞을 준비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193·1운동을 계기로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으나, 얼마 안 가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각자 독자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일제에게 검거되었거나 친일파 가운데서 전향한 자가 많아, 해방 당시에는 여운형의 건국동맹 외에는 이렇다 할 통일조직이 없었습니다.

 

분열된 독립운동 조직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파 : 이승만, 이기붕, 허정

중도파(임시정부) : 김구, 김규식, 이범석, 이시영

장안파 : 김두봉, 최창익, 무정, 허정숙

소련파 : 김일성, 최용건, 남일, 김책, 김광협

국내 민족파 : 조만식, 송진우, 김성수, 안재홍, 장택상

국내 진보파 : 여운형, 홍명희, 조태암

 

 

[국내 공산계]

서울(장안): 이영, 정백, 최익한, 이승엽

화요회(재건파) : 박헌영, 이관술, 김삼룡, 이주하

ML(막스 레닌): 이정윤, 신용우, 박용선

기타 : 박열(11파적 투사)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통치 때보다 더 무서운 혼란과 무질서에 휩싸였고, 대한민국의 운명은 공산주의가 뿌리내리느냐, 자유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느냐 하는 새로운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때 나라의 주도 세력을 잡은 것은 공산주의였습니다.

해방이 되자 지하에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 감옥에서 석방된 공산주의자, 해외로부터 돌아온 좌익 세력은, 마치 경칩을 맞아 활개치는 풀벌레처럼 활개치기 시작했습니다.

 

해방 다음 날 816, 서울 종로 네거리 등 시내 곳곳에는 뜻밖의 벽보가 나붙기 시작했습니다.

근로 대중의 위대한 지도자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와 우리를 지도해 달라!”, “박헌영 동지여, 어서 출현하라! 우리는 박 동지를 기다린다”, “박헌영 등장을 갈망한다라는 벽보가 서울 장안 구석구석에 나붙었습니다.

 

이에 박헌영은 819, 김성삼이라는 가명을 벗어버리고 전남 광주에서 상경, 서울에서 공산당 재건 공작에 착수하게 됩니다.

결국 그 벽보는 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한 사전 준비로, 박헌영의 동지들에게는 그의 상경을 알리는 신호였으며 일반 국민에게는 박헌영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연극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박헌영의 등장과 함께 조선공산당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박헌영은 820, 그가 머무르고 있던 명륜동 김해균의 집에 콤그룹과 화요회의 중심인물을 모아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이 자리에서 자기가 작성한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테제를 정식으로 제기하여, 잠정적인 정치 노선으로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8월 테제, 이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 위원회의 활동지침서입니다. ‘8월 테제는 전반적으로 민족 분열과 계급 대립을 극대화시킨다는 내용으로, 36년간 일제의 폭정과 식민지 통치로부터 겨우 벗어나 극도로 혼란했던 우리 민족의 앞길을 가로막는 위험한 지침서였습니다.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재건준비 위원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19254월에 창건되어 1928년에 해체되었던 조선공산당을 재조직하겠다는 의도였고, 자기가 이끌어갈 당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해방 이후 1945816, 조선건국동맹의 위원장이었던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약칭: 건준)가 세워졌습니다(부위원장: 안재홍). 건준은 광복 직후의 혼란한 상황에서 좌파적 성향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었으며, 해방 이후 145개 지방 조직까지 마친 당시 가장 큰 정치단체였습니다.

그 설립 배경을 보면, 해방되기 직전 8월 초 태평양전쟁의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감지한 일제가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안정적으로 귀환시킬 대책이 시급할 때였습니다.

이때, 조선 총독부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한국의 민족 지도자 중에서 협상대상자를 찾던 중, 815일 새벽 여운형과 송진우, 안재홍 등과 개별적인 교섭을 벌이게 됩니다.

송진우는 이를 거절하였으나, 여운형은 건국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일제의 조선총독부에게 그 권한을 대한민국에 전폭 이양하도록 요구하는 5개 조항의 조건을 제시하였고, 일제는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처음 조직된 정치단체였던 건준은, 극도로 혼란한 과도기의 국내질서를 바로잡는 데 민족의 총역량을 집중하였습니다. 이는 1945828일 발펴된 건국준비위원회 선언문과 강령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 준비위원회는... 새 국가 건설의 준비기관인 동시에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적 제 세력을 집결하기 위하여 각층 각계에 완전히 개방된 통일기관이요 결코 혼잡된 협동기관은 아니다. ... 새 정권이 수립되기까지의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본 위원회는 조선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의 완전한 독립국가 조직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정권을 수립하는 한 개의 잠정적 임무를 다 하려는 의도에서 아래와 같은 강령을 내세운다.”

 

.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을 기()

.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

.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

 

 

그러나 중간좌파 성격의 위원장 여운형은, 점점 공산주의자들에게 그 정권을 빼앗기는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건준에 참가하여 이를 변질시켜 정권을 찬탈하려 한 것입니다.

한편 여운형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3만 명의 좌익 범죄자들을 석방시키는 등 건준이 지나치게 좌익진보세력으로 흐르게 되자, 민족주의계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여 탈퇴하였습니다.

결국 아무런 기반이 없던 여운형은 건준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박헌영과 더욱 가까이 뭉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822일 제 1차 개편과 93일 제 2차 개편에서는 대부분의 간부가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94일 집행위원회 개편을 단행하고, 96일에는 경기여고(지금의 창덕여고 자리) 강당에서 600여 명으로 구성된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하게 됩니다. 이 회의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안이 통과된 뒤 조선인민공화국(약칭: 인공)을 급조로 창건하였습니다. 이때는 재건파 조선공산당이 정식 출범하기 전이었는데도 박헌영이 서둘러 추진했던 이유는, 미군이 진주(進駐)하기 전에 잠정적인 임시정부를 미리 수립하여 기정사실을 만들자는 속셈이었습니다. 인공의 중앙위들은 52명 중 38(72%), 그 후보위원은 20명 중 15(75%)이 공산당원이었습니다.

이후로 건준은 그 존재 의의가 없어져 97일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미군이 진주(98)하기 전에 조선 공산당을 정부로서 합법화시키기 위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선공산당으로 흡수한다는 박헌영의 건준 변질 전략이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여운형은 그 열정과 명성을 박헌영에게 이용만 당했고, 결국 남한 내에 공산주의 세력이 자리잡게 하는 산파 역할만 한 셈이었습니다.

 

 

마침내 911,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조선공산당(약칭: 조공)이 재건되었습니다. 조공의 총비서는 박헌영이었고, 당 조직 준비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박헌영 직계인 김형선, 이현상, 김삼룡, 이관술 등이었습니다.

서울 시민들이 조선공산당 재건을 알게 된 것은 912일 있었던 대규모 시가행진 때문이었는데, 이 시가 행진은 당 재건보다 앞서 조직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의 경축을 겸한 행사였습니다. 시위대는 조선공산당 재건 만세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종로-을지로-광화문-중앙청을 휘돌아 오후 4시쯤 해산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 박헌영은 해방 이후 가장 큰 실권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1945107일에는 인민위원회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남한이 마치 조선인민공화국이 된 것 같았습니다. 이들은 노동자, 농민, 도시 일반 근로자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옹호하고 서민생활을 급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투쟁한다고 선동함으로써, 국민의 호응을 받았습니다.

미군정의 설문 조사 결과,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 78%가 공산주의 사상을 선호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후 박헌영은 이승만을 만나 면담하고 인공 주석 취임을 간곡히 부탁했으나 이승만이 이를 거부했고, 마지막으로 1116일에도 이를 요청하였으나 이승만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는데, 이후 박헌영은 사사건건 이승만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1220, 이승만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온 세계를 파괴하는 자도 공산당이요, 조선을 파괴하는 자도 공산주의자라고 하면서 박헌영의 조공과 완전한 관계단절을 선언했습니다.


박헌영은 사흘 뒤 이승만을 민족반역자 및 친일파의 수령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조공 중앙위 대표 명의로 발표했습니다.

 

19451228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3개국 외상회의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가결하였습니다.

미국은 한국을 즉시 독립시키자고 제의하였으나 소련은 한국을 3개국이 신탁통치해야 한다고 고집하였습니다.

한국 국민에게 이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신탁통치에 대하여 좌우익 모두 결사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지령을 받은 박헌영은 194612일 돌연 찬탁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박헌영은 미군정청에게 조선공산당의 입장을 납득시키려고, 1946111일 하지 사령관을 찾아가 신탁통치반대 집회를 중지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했습니다.

결국 박헌영은 우파 지도자 이승만과 미군정과의 협력관계를 맺는 데 모두 실패했고, 이후 그 정책을 전환하여 우익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1946215,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을 결성하였습니다. 이들은 더 나아가 정부수립에 필요한 제반 시책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농업문제 연구위원회를 비롯하여 8개의 각 분야별 전문위원회까지 구성하였습니다.

 

이후로 남한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좌우의 이념대립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침내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19467, ‘지금까지 우리가 미군정에 협력하여 왔으며 미군정을 비판하였으나 앞으로는 우리가 이런 태도를 버리고 미군정을 노골적으로 치자... 지금까지 미군정과 그 비호하의 반동들의 테러에 대하여 그저 맞고만 있었으나 지금부터는 그대로만 있을 것이 아니라 정당방위의 역공세로 나가자. 테러는 테러로, 피는 피로써 갚자.’는 폭력전술을 채택하면서 이를 신전술이라고 불렀습니다.

 

 

(3) 조선공산당의 위조지폐 사건(일명 조선정판사 사건’)

박헌영에 의한 조선공산당의 남한 공산화 공작이 처음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194510월 말부터 19464월 초 수차례에 걸쳐 있었던 정판사(精版社) 위조지폐 사건입니다.

정판사는 서울 중구 소공동 조공 본부 건물에 함께 있던 조공 기관지(해방일보)의 인쇄소인데, 일제 때는 조선은행의 지폐를 찍던 조폐공장이었습니다. 조산공산당은 일본이 철수하면서 파괴하지 않은 9개 징크판(인쇄용 판넬)을 가지고 조선정판사 건물에서 1,200만원(당시 환율로 12만 달러)의 위조지폐를 인쇄, 이를 조선공산당 재정 담당 이관술이 맡아 시중에 유포시켜 경제를 교란시키고, 당의 활동비로 사용한 것입니다.

경찰의 조사 결과, 너무 가난했던 공장장 김창선이 징크판 1개를 훔쳐다가 2만원에 팔아먹으면서, 조선공산당에 의한 위조지폐 발행사실이 탄로나게 되었습니다.

위조지폐범은 모두 공산당원으로, 조선공산당 중앙당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발표되자, 당시 공산주의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대다수의 백성들은 충격을 받고 점점 조선공산당에 등을 돌리고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당시 급속도로 번져가던 조선공산당의 발목을 휘어잡은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무기휴회로 들어간 상태(194658)에서, 미군정이 좌익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탄압을 시작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696,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간부 이강국, 이주하가 체포령을 발부받게 됩니다. 같은 날 미군정청은 3개 좌익신문 조선인민보, 중앙신문, 현대일보를 폐간시키고 신문사의 간부들을 체포했습니다. 이때 박헌영은 이북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지하로 잠입했다가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박헌영이 이북으로 올라간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엇갈린 견해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미군정의 체포령이 떨어지기 전날인 194695일 오전 8, 관 속에 들어가 장례차로 위장하여 의정부 포천 위쪽 양문리 근처 38선에서 이동수 외 5명 청년들의 경호를 받으면서 이북 해주로 탈출했다.는 견해입니다.

박갑동 씨는 그의 저서 박헌영167-168쪽에서 박헌영은 194696일 체포령 전에 극적으로 서울에서 극비리에 탈출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탈출 행각에 대해서, 박헌영은 이날 한 평 반 남짓한 영구차 속, 자기 키보다 조금 큰 검은 관 속에 반듯이 누워 시체를 가장해서 월북했다는 것이다.

38선 접경에 이를 때까지 혹시나 경찰의 검문을 염려해서 가족으로 분장한 남녀당원 몇몇이 흡사 경기도 일원의 어느 선산에 매장이나 하러가는 듯한 장례차림을 꾸민 것이다. ... 이 행렬에 뽑힌 5명의 호위원은 공산당 내에서 엄선된 일당백의 행동대원들이었다. 라고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전 북한고위관리 서용규 씨는 박헌영의 월북에 대해 또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박헌영은 19461011일 김일성과의 6차 회동차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강원도 홍천과 철원을 잇는 루트를 통해 월북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 박헌영을 맞으러 평양을 출발했던 일행들과 박()이 만난 곳은 평강(平康)이었고 그곳에서 차로 원산까지 와서 하루 쉬고 다음날 대동강 상류의 다리가 있는 강동군까지 그를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

여기서는 박헌영의 월북을 돕기 위해 평양에서 사람을 보내온 사실을 구체적인 접선 장소까지 밝히며 증언하였습니다.

또 다른 견해로는, 스티코프 비망록의 기록입니다.

194616일 박헌영이 남한을 탈출해 북한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했는데 그를 관에 넣어 옮겼다. 박헌영이 휴식을 취하도록 지시했다(107).

이 기록에서는 스티코프가 9월 총파업이나 대구 10·1폭동 등에 거약의 활동 자금 및 활동 지침을 주었을 뿐 아니라, 박헌영의 월북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월북한 박헌영은 평양에 그 거처가 마련되어 있었으나, 남로당을 지휘하게이 용이한 북위 38도선 부근 황해도 해주에 있으면서, 남한에 있는 조선공산당원들과 프락치를 조종, 요인 암살 및 대대적인 폭동을 계속해서 일으켰습니다.

 

 

(4) 북로당(김일성의 북조선 분국)과 남로당(박헌영의 서울 중앙당)

19458월 말, 38도를 경계선으로 한 분할점령이 확실시되자 소련군 사령부는 북한 지역을 소비에트화하려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습니다.

당시 공산당 중앙은 미군 주둔 지역이었던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이북 지역도 서울의 조선공산당의 지도 아래 당세를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소군정은 북한을 점령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조직되어 있던 서울의 조선공산당을 인정하고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당시 서울 총영사관 부총영사: 샤브신).

이 때문에 불편했던 소군정은, 11당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38선으로 분할된 특수한 환경을 빌미로 북쪽에 조선공산당 분국을 결성케 하여 사실상 2개의 당을 만들게 됩니다.

이는 소군정과 김일성이 장차 남한의 남로당까지 흡수하여 자신들이 중앙 역할을 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이러한 소군정의 입장은 19451010-13일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북부조선 책임자와 열성자회의에서 발표한 29개항 정치노선과 조직강화에 관한 결정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중 제14항에는 조선공산당은 비록 어리고 약하나 과거 20여 년간 일본제국주의와 모든 개량주의와 또 당내 분파적 기회주의, 타협주의와의 투쟁의 산물이다. 대회는 중앙에 충실이 복종할 것을 맹세한다.”라고 하여, 이때만 해도 박헌영 중심의 서울 조선공산당을 지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15항에서 북부조선 각 도당부는 북조선의 특수성을 보아 볼셰비키화 활동의 민활과 사업의 확대 강화를 위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치할 것을 결정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북조선 분국은 이러한 결정사항에 대하여 1023일 서울 중앙의 박헌영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형식까지 취하였습니다.

다음은 박헌영이 수락한 서울 중앙의 평양분국 승인서입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451023일 평양에서 열린 서북 5도당 책임자금() 열성자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설립에 대한 결정을 옳다고 보고 이를 승인함.

 

 

19451023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총비서 박 헌 영

도위원회 전()“

 

 

 

그러나 소군정은 처음부터 북조선 분국 정도가 아니라 북한에 아예 당 중앙을 조직하려고 했으므로, 19467월에 10여 일간 극비리에 박헌영(46)과 김일성(34)을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을 북한 정권의 최고지도자로 지명, 북한의 소비에트화 조기 정착을 지시했습니다(중앙일보 19911130일자 1).

 

그리고 1946828일부터 30일까지 3일간 이북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조선노동당(약칭: 북로당)의 창립대회가 열렸습니다.

 

이후 약 3개월이 지나 남한에서도, 미군정의 탄압과 3당의 이해관계가 얽혀 우여곡절 끝에 19461123 신민당(백남운), 인민당(여운형), 조선공산당(박헌영) 3당이 합당하여,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이 출범하였습니다.

박헌영은 악랄한 파업을 선동하고 그 기세를 몰아 드디어 대구의 10월 폭동을 일으켜 유혈적인 파괴난동행위를 야기시키고, 국민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고 있는 틈을 타 비밀회합 끝에 남로당을 결성하고 다음과 같은 인원을 선출하였습니다.

 

위 원 장

허 헌(許憲)

부위원장

박헌영(朴憲永), 이기석(李基錫)

위 원

이승엽(李承燁), 구재수(具在洙), 김삼룡(金三龍), 김용암(金龍岩),

강문석(姜文錫), 유영준(劉英俊), 이현상(李鉉相), 고찬보(高贊輔),

김오성(金午星), 송을수(宋乙秀), 이재남(李載南), 김상혁(金相赫),

김영재(金永才), 김계림(金桂林), 김광수(金光洙), 정노식(鄭魯湜),

성유경(成有慶), 정 윤(鄭 潤), 김진국(金振國), 현우현(玄又玄),

홍남표(洪南杓), 박문규(朴文圭), 이주하(李舟河), 김태준(金台俊),

허성택(許成澤)

중앙감사위원장

최원택(崔元澤)

중앙감사부위원장

김형선(金炯善), 이석구(李石玖)

 

 

 

허헌위원장직을 맡고 박헌영은 북한에 있는 몸이라 부위원장 직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박헌영 수하의 인물들이 남로당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실질적으로 박헌영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남로당은 산하 전평노조, 민애청, 민주학생연맹, 여맹(女盟)등의 조직을 확대 강화시켰고, 1947년부터는 미소공위에 대응하기 위해서 이른바 당원 5배가 운동(당원 한 사람이 다섯 사람 이상의 신입 당원을 포섭해서 입당시키는 것을 책임제로 지시하였습니다.

 

 

이렇게 남측은 남로당’, 북측은 북로당으로, 남과 북에 두 개의 공산당이 창당되었습니다. 북조선 분국이 창건된 초기에는, 소군정과 김일성 계열은 서울의 남로당과 형식상 동등한 지위를 가졌어도 어디까지나 서울 중앙당, 즉 남로당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소군정이 김일성을 북로당 책임비서로 세움으로써, 공산당 권력의 주도권은 이제 서울(박헌영)에서 평양(김일성)으로 이동했다는 것이 공식화 된 것입니다.

한편 박헌영은 월북할 당시만 해도 평양에서 그에게 사택과 사무실을 제공했고(나중에 대남 연락을 관장하는 중앙연락소가 됨), 또 해주에도 해주연락소가 별도로 만들어져 대남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박헌영의 활동을 돕기 위해, 출판사와 양양, 연주 등지의 남북교역 창구인 상사, 재정조달용 광산 및 기업소가 따로 제공되었습니다. 이처럼 박헌영이 최종 월북한 초기에는 김일성의 후한 대접을 받았으나 점점 제 2인자로 밀려났고, 결국엔 김일성으로부터 미 제국주의자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숙청되고 말았습니다.

박헌영이 최종 월북한 이후 남한에서는 좌익 진영이 정치적 공백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또 북한에서는 북로당이 유일집권당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북한에서는 19472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명칭에서 임시자를 빼버리고,

이어 194826북조선 인민위원회북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바꾸고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였습니다.

들은 이 헌법은 전 조선이 통일될 때까지 북조선에서 실시한다.”라고 공포하여, 사실상 김일성이 북한을 완전히 장악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헌법을 공토하고 화폐를 발행하는 일은 공식적인 정부가 탄생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므로, 사실상 북한쪽에서 남한보다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이북에 머물면서도 이남에 지령을 내려 큰 폭동과 반란을 통해 남한 사회를 집어삼킬 듯 자기 세력을 과시하던 박헌영의 신전술은, 종국에는 미군정의 탄압을 받아 스스로 올무에 갇히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가 월북한 이후 공백이 길어짐에 따라 그를 추종하던 이남의 남로당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점점 결집력을 잃고 당 내부 자체의 힘도 잃어 갔습니다. 공산당 지도부의 권력 장악 싸움 끝에 내버려진 그들은, 박헌영의 최종 월북으로 그 세가 크게 기울고 말았던 것입니다.

 

 

(5) 19469월 총파업(23일부터 약 1주일간)

194658일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무기휴회 된 이후, 좌우익이 자신들의 정치노선에 따른 정부수립을 위해 사활을 건 대결국면을 펼치는 가운데, 이미 조선공산당은 파업, 테러, 기타 각종 반정부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던 박헌영은, 이남의 공산당 세력을 더욱 조직화 하여 더욱 극렬한 투쟁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1946512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주최 독립전취국민대회를 열고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위한 운동을 시작한데다가, 63일에는 정읍에서 이남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폭탄 발언을 함으로써 양측의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습니다.

한편 북한에서는 소련의 로마넨코 정치 부사령관에 의해 괴뢰정권이 점차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공산주의자들의 야욕이 노골화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차츰 자유 남한으로 월남하는 동포들이 많아지자, 1946523일 미군정 당국이 ‘38선 무단월경 금지령을 내려 남북 왕래가 인위적으로 차단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남 정세가 혼돈 상태에 놓이게 되자, 19466월 말 박헌영은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627일부터 712일까지 보름 동안 평양을 방문했습니다(4차 회동). 이때 박헌영은 이남에서의 활동에 대해 폭력 전술 이른바 신전술을 처음 언급하게 되는데, 김일성의 반대로 5차 회담으로 미뤄지게 되었습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의 지령 하에 전평은 9월 총파업을 단행하기 위해 9월 중순 어느 날 대구시 금정 소재 전평 경북도위원회 사무실에서 조선공산당 대구시당 위원장 손기영, 전평 경북도위원회 위원장 윤장혁과 기타 각 급 공산조직 단위 책임자들과 모여 재차 파업을 위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이날 소위 남조선노동자 총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라는 폭력단체를 불법 조직하고, 그 간판을 전평 경북도위원회 사무실에 게시해 놓았습니다. 조직적인 파업을 지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민의 호응이 필요했기에, 먼저 공산당 산하에 예속된 노동자들을 집합시켰습니다. 또한 전평 대구시위원회 선전부장 염필수는 이미 11명의 공산주동 간부들과 연일 시내 각처를 쏘다니면서 적기가를 부르고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라, 식량을 더 배급하라, 노동자의 임금을 인상하라.”하는 등의 선동 구호를 외치며 노동자들에게 파업할 것을 강권했습니다.

해방 다음 해인 1946, 병술년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물자난으로 서민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는데, 물가가 하루 사이에 2-3배가 뛰는 정도여서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공산당이 전술을 펼치기에 매우 유리한 사회적 조건이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생활필수품 부족으로 고통스러웠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식량 부족이었습니다. 선량한 국민들도 덩달아서 속히 식량 배급을 증대하라.”는 등의 구호를 서슴지 않고 외쳤습니다. 결국 19469월 말, 사회의 분위기는 시한폭탄의 폭발 직전 상황과 다름없었습니다.

 

그 결과 공산당의 선동으로 1946923일 부산 철도노동자 7,000여 명이 파업 선언을 하면서 9월 총파업이 시작되어, 924일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산하 철도종업원 4만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곧바로 전국 철도 운행은 전면 중단되었습니다. 해방 당시만 해도 고속도로가 발달하지 않아 모든 화물에 대한 철도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이들은 노조원 처우개선 유구를 당국이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파업 이유로 내세웠으나, 실제는 북한 주둔 소련군의 지령에 의한 파업 이유로 내세웠으나, 실제는 북한 주둔 소련군의 지령에 의한 파업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산하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약칭: 전평)에 지령을 내려, 철도 노조 총파업본부를 영등포 공장에 설치하고 전국철도노조에 다시 파업지령을 내렸습니다. 철도파업을 시작으로 전신·전화·전기·운수·섬유·금속·화학·출판·신문 등 40여 개의 노조단체 노동자 251천여 명이 가담함으로써, 해방 후 최대 규모로 발전했습니다. 파업은 1주일간 계속되었으며, 서울에서만 295개 공장이 파업에 들어갔고 3만여 명의 노동자와 16천 명의 학생이 가담하였습니다.

 

 

이 파업에 대해 미군정 러치(Aecher L. Lerch) 장관은 불법이라 선언하였고, 이어 30일 오후 5시부터 수도경찰청 경찰관 3,500명이 총동원되어 철도 노조 총파업본부를 급습, 농성 중이던 1,800명을 검거함으로써 일단락지었습니다. 이날 대량 검거로 경찰관과 철도 노동자 사이에 충돌이 생겨 10여 명이 부상했고, 그 중 두 명이 현장에서 죽는 사태까지 일어났습니다.

 

이 파업은 당초부터 소련군정과 조선공산당의 정치적 음모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파업에 의하여 노동자들이 실질적으로 얻은 이득(식량문제 해결, 처우개선 등)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수사기관에서 보면 분명히 이것은 사전에 계획된 적색분자들의 조직된 행동이었습니다. 공산도배들의 흉계인 것을 새까맣게 모르는 국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심지어 각급 학교 학생들까지 합세 내지 협조하는 방향으로 나갔으니,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국은 이 사태가 공산당의 선동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하였고, 103일자 대동신문에서는 9월 총파업의 배후 조종자가 조선 공산당이라고 발표하였지만,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결국 직접적인 이익과는 전혀 상관없이 파업에 선동된 전국 각 산업별 노동자들은 공산당의 음모에 이용만 당한 꼴이 되었고, 이후 공산당은 이 9월 총파업을 전초전으로 대대적인 폭동 계획을 실천에 옮겨갔습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각종 파업들이 잇따랐던 것입니다.

 

 

 

3. 1946, 대구 10.1폭동 사건

 

 

대구 10·1폭동 사건은, 박헌영이 1946924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 조직을 총동원한 철도파업과 9월 전국 노동자 총파업에 연이어 일으킨 사건으로, 위조지폐 사건 이후 박헌영이 이북 해주로 올라가 폭력 전술(신전술)로 노선을 변경한 이후 일어난 전국적 규모의 폭동이었습니다. 박헌영은 자신과 동료들에 대한 체포령을 무효화하여 다시 뭉치게 할 속셈으로, 미군정과 합의할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그의 체포령이 있은 지 불과 한 달도 못 되어 큰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박헌영의 세력은, 앞서 일으킨 1946710일 서울 을지로 화물자동차 파업과 19469월 전국 4만여 명의 철도노동자 파업으로 나타났습니다. 당시 유일한 대규모 운송수단이었던 기차의 운행을 막은 것은 국가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습니다.

914일 서울 철도노동자 3,600명이 파업한 것을 시발점으로 923일 상오 1시를 기해 부산 철도공장 종업원들이 총파업을 선언하였으며 사태는 급기야 대구로 번저갔습니다.

파업 노동자들이 전평 경북도지부 산하로 집결하고 대구 시내 일반 시민들이 좌익의 선동과 식량사정에 대한 우려와 불만이 겹쳐 동요하자, 이를 기회로 조선공산당 대구시당 위원장이 주동이 된 남조선노동자총파업 대구시투쟁위원회는 계획적인 파업지도와 민심 선동에 나섰습니다. 전평 대구지방 선전부장(염필수) 11명은 노동자들을 이끌고 대로상에서 공공연하게 적기가를 부르며 식량증배와 임금인상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대구 철도파업 당일인 924, 전면적인 열차 운행 중단에 따라 대구역에서는 단 한 차례의 기적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전날 예매한 열차표를 환불해 주고 금일에는 운행 예정이 없음이라는 알림글을 붙여 승객들의 발길을 돌리게 했습니다. 총파업으로 상가가 전부 문을 닫는 등 모든 것이 마비되어, 대구 주민들은 심각한 생활의 위협을 느꼈고, 민간복장에 총을 든 좌익분자들의 행패로 치안질서가 무너져, 대구시는 공포의 도시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925일에는 교환원을 포함한 대구우편국 직원 460명이 파업하였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그 날 오후나 그 이튿날부터 경주우편국 직원(170)을 비롯하여, 포항(180), 안동(210), 상주(180) 등 경상북도 내의 모든 우체국까지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26일 오후부터는 시내의 생산 공장 40여 개 노조가 파업에 참여하였고, 대구중공업이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당시 파업 노동자의 총수는 약 3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927, 경북 당국이 노조(노평위원장: 윤장혁)측에 협상을 요구했으나 팽팽한 양측 주장만 확인했을 뿐 아무런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928, 29, 30일 파업노동자들의 위세는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1) 대구 10 · 1 폭동 사건의 전개

10·1폭동이 있기 전부터 우리나라는 쌀값이 60배로 뛰어오르는 등 식량 상황이 매우 어려워, 수많은 국민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실시된 쌀 배급제는 미군정이 쌀을 모두 모아 균등하게 배급하려는 정책이었습니다. 매점매석(買占賣惜)을 못하게 하여 어려운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의도로 실시한 것이었으나, 생각보다 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어 쌀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백성들의 민심이 흉흉해지고 반미 운동이 확산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남로당은 이런 사회 분위기를 이용하여, 그들의 투쟁이 사상 문제가 아니라 이라는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순수한 항의인 것처럼 포장함으로써, 수많은 민중을 선동하여 반미 시위를 일으켰고, 그렇게 해서 박헌영의 위조지폐 사건을 덮으려 했습니다. 1964101일 화요일 오전, 전평 선동자들은 쌀 배급을 받으러 가자고 시민들을 부추기면서 주로 부녀자 위주로 1,000여 명을 동원, 대구 시청으로 몰려가 쌀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이들의 손에는 부대자루나 큰 양푼 등이 들려 있었습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이럴 것 없이 도청에 가서 결판을 내자.”고 소리쳤고, 그 길로 데모대들은 걸어서 10분 거리인 경북도청광장으로 몰려가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그날 101일 오후, 대구역 부근 금정로(현재 태평로) 운수노조사무실 2층에 조선노동조합대구지역평의회(약칭: 노평) 산하의 시투(市鬪) 사무실이 있어, 사무실 주위에 수천 명의 노동자가 모여 쌀 배급, 일급제 폐지,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취소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적기가와 해방의 노래 등을 합창하면서 시위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역광장에는 100여 명의 무장경찰대와 기마경관대가 경계태세를 갖추고 포진해 있어 긴박감이 흘렀습니다.

1946101일 오후 6, 경찰 150여 명이 조용히 경계만 서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노평 사무실 2층에서 누군가가 경찰 저놈들 죽여라!”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경계를 서던 경찰을 23중으로 포위하고 사정없이 돌을 던졌습니다. 정체불평의 돌에 맞은 경찰이 깜짝 놀라 2층의 노동자들을 향하여 순간적으로 무차별 발포를 하기 시작하였고, 경찰의 갑작스런 총격에 서로 도망치느라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이때 사격으로 여러 명이 쓰러져 경찰이 사람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대구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실제로 경찰의 사격으로 죽은 사람은 대팔(大八) 연탄 공장에서 근무하던 황말용(혹은 황팔용) 한 사람이었습다(당시 화학노조 서기였던 이일제의 증언).

이 일로 좌파 간부들은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102일 노동자들을 총동원하기로 하였습니다.

 

 

102일 오전 8, 대구경찰서 앞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시민들은 전날 경찰이 발포한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다시 난동을 일으켰으며, 좌익 계열의 선동으로 흥분한 군중들은 경찰관의 가택을 파괴하는가 하면 경찰관과 그 가족을 학살하는 폭도로 변했습니다.

 

 

경찰 가족과 우익 인사와 그 가족들을 살해한 것은 조선공산당, 각 노조, 농민조합, 인민위원회, 부녀동맹, 민주청년동맹(민청) 등에 속한 극렬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삼덕동 민 순경의 집으로 가서 트럭으로 집을 들이받았습니다. 5명의 가족이 집 밖으로 끌려나왔는데, 폭도 중 한 명이 경찰관 부인의 복부를 칼로 찔러 죽이고, 쇠파이프로 세 자녀의 뒤통수를 차례로 후려쳐 피가 하늘로 뻗쳤습니다. 그리고 60대인 경찰관의 모친을 참나무 몽둥이로 내려쳐 죽인 후 폭도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짓밟았습니다. 폭도들은 대구 수성천변에서 큰 방직공장을 하는 명륜동 서 모씨의 집으로 가서 안방에 불을 놓아 방화하고 양곡을 모두 약탈했습니다.

그 후 서씨의 운전사 집에 숨어있던 그의 가족 7명을 찾아내고는 그들의 머리, 가슴, 얼굴 등을 닥치는 대로 때려 눈알이 튀어 나오고, 코가 문드러져 죽게 하였습니다. 서 씨의 부인과 큰딸의 시체는 구식 일제 도요다 승용차의 뒷 범퍼에 새끼줄로 매달아 대구 시내를 한시간 반 가량이나 끌고 다녔습니다. 두 사람의 목은 새끼줄에 쪼여 거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기 직전이었습니다.

봉덕동에서는 임 경사가 출근길에 폭도들에게 붙잡혀 자택으로 끌려갔는데, 5살 짜리 아들과 부인과 함께 가족 3명을 집안에 처넣고 밖으로 불을 질렀습니다. 10분 후 임 경사가 아들을 안고 집밖으로 나오자 폭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몽둥이와 죽창으로 임 경사를 사정없이 때리고 찔렀습니다. 그의 부인은 이미 연기에 질식한 후였습니다. 옆집 사람들은 반동의 친척이라는 억지 누명을 씌워 죽일까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했습니다.

 

 

대구 교외 고모(顧母)라는 곳에는 사과농장을 경영하던 배홍수(당시 61) 씨는 군() 내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지방 유지였습니다. 그런데 농민동맹에서 찾아와, 농민을 착취해 재산을 모았다고 모략하며 배 씨의 집을 포위한 후 낫으로 배 T의 면상을 후려쳤습니다. 온 가족이 우르르 달려들자, 폭도들은 곡괭이, 도끼, 자귀 등으로 배 씨의 가족 11명을 모두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그리고는 비안에 있는 닭을 잡아 배불리 먹고, 앞으로 있을 더 많은 학살을 위해서인지 돼지의 기름을 낫, 도끼, 곡괭이에 듬뿍 발랐습니다.

 

 

폭도들은 시내의 각급 학교를 찾아다니며, 경찰이 무고한 양민을 살해하고 있다고 허위선전을 늘어놓았고, 평소 안면이 있는 좌익 학생들을 통해 중도계 학생들을 선동 현혹시켰습니다.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학생들은 폭도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영문을 모르는 학생들은 분격하여 이성을 잃고 안절부절못하였습니다. 대구의대, 대구사범대, 대구농대에는 당시 400여 명의 죄익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군정이 대구 시민을 학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봉기하라는 성토문을 읽고, 교내를 빠져 나와 시가행진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허위선진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나와 폭도들에게 합류했습니다. 이때 동원된 인원은 대구 시내의 각 중학교까지 합쳐 모두 15,000여 명이었습니다.

이사의 학살 관련 내용은 송효순 붉은 대학살61-69쪽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혀둡니다.

 

 

102일 오전 9, 대구의대(현 경북 의대) 학생회장 최무학4명의 학생들이 콜레라로 죽은 시체에 시트를 덮고, ‘어제 대구역에서 경찰에 의해 죽은 노동자의 시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학생들을 선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메고 나온 시체는 경찰의 발포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해부관찰용으로 도립병원에 안치 중이던 시체를 탈취한 것이었습니다. 콜레라로 인한 행려병자 등의 시체가 끊일 날 없던 당시,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을 가져다 이용하는 일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먼저 흰 가운을 입고 입에 마스크를 한 네 명의 학생이 흰 시트를 덮은 시체를 들것에 들고, 당시 안과 시험을 치르는 중이던 2층의 중앙강당으로 들이닥쳤고, 102일 오전 930분쯤, 최무학이 대구사범 강의실의 단상에 올라 시체를 가리키며 전날 밤 경찰의 발포로 희생된 노동자라고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만행을 보고서도 앉아서 공부만 하고 있다면 어떻게 피 끓는 조선의 젊은 지성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굶주린 조선 인민들은 지금 당장에 한 끼의 밥이 필요하지, 미국 놈들이 주는 밀크며 캔디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단결된 힘으로 무고한 인민을 살상하는 친일경찰의 심장부를 찾아가 발포책임을 밝히고 문책해야 합니다.” 연설이 끝나자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일부 학생들이 가자!”하고 팔을 쳐들며 기세를 돋구었습니다. 그것을 신호로, 미리 준비된 듯 흰 마스크에 실습용 흰 가운을 걸친 의료인 차림의 학생 4명이 들것의 네 귀퉁이 손잡이를 쥐었습니다. 그들이 시신을 누인 들것을 들자, 분위기는 마치 순교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엄숙한 종교행사처럼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이 죽인 시체라면서 150여 명의 의대생들이 시체를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면서 800미터 떨어진 대구사대 쪽으로 향했습니다. 섬뜩한 시체 데모 행렬과 자극적인 구호는 충격적일 만큼 호소력이 있어서, 지나가는 구경꾼들까지도 순식간에 흥분하며 뒤를 따랐습니다. 이렇게 콜레라로 죽은 시체 1구가, 학생과 시민 수만여 명을 단숨에 대구경찰서 앞에 모이게 하는 예상 외의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오전 1030분경, 공산당 산하 각 노조, 농민조합, 인민위원회, 부녀동맹, 민청 등의 시위 주동자 1,100여 명은, 대구의대생을 비롯한 중학생 400명을 추가로 동원하여 대구경찰서에 도착하였습니다. 학생 대표들은 이성옥 대구서장과 담판을 하기 위해 서장실로 갔고, 경계를 서던 50여 명의 경찰은 시위 군중에 포위되어 경찰서 안으로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위급한 때에, 이성옥 대구서장, 경북도청의 미군정 경찰부장 플레지어 소좌, 권영석 경북경찰청장 등 세 사람의 수뇌부는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았습니다. 먼저 정복과 정모 차림의 권영석 청장이 호소조로 여러분, 여러분의 대표자를 통해 요구조건을 전달 받을 테니 나머지 분들은 해산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법과 질서를 지켜야만 여러분의 진정한 요구가 수용될 것입니다. 대표들에게 위임하고 곧 해산하면 여기 함께 온 경북도청의 미군정 경찰부장 플레지어 소좌와 의논하여 대표들의 요구조건을 검토하겠습니다.”라고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난 군중들은 집어치워라, 사과하라고 크게 고함을 지르면서 권 청장의 호소를 무시했습니다.

이에 플레지어 소좌는, 서장실의 이성옥 서장과 주임급 이상의 간부 경찰관들에게 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시킬 것을 직접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서 간부들은 이 서장의 눈치를 살필 뿐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속이 탄 플레지어 소좌가 다시 명령을 내리자 이 서장은 입을 열어 해산을 시키려면 무력을 사용해야 하는데 학도들은 상대로 어떻게 총을 쏜단 말입니까? 또 고작 수십 명의 병력 으로 수만의 성난 군중을 어떻게 물리칩니까? 나는 그런 명령을 할 수 없습니다.”하며 두 번이나 플레지어의 명령을 노골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이에 플레지어는 속으로 ;대구의 유지들이 친일경찰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반대하는데도 자기를 요직에 앉힐 때는, 이런 비상시에 솜씨를 보이라고 기대한 것인지 모르고...‘ 이런 말을 뇌까리면서 대구경찰서를 떠났습니다. 플레지어는 전화로 미군동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대구 주둔 미 제 1보병연대의 사령관 러셀 포츠 대좌는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이 아니라면서 그의 호소를 묵살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 지사인 헤론 대좌가 미군동원을 황급히 요청하여, 병력이 겨우 도착은 했지만 이미 경찰서가 점령된 후였습니다.

경찰과 학생대표가 긴박한 담판을 한참 벌이는 중, 갑자기 신재석 경위가 흥분하면서 제복 상의와 제모를 벗어 던지고 투쟁 대열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하고는 인민공화국 만세를 삼창했습니다. 거리의 군중까지 일제히 박수를 치며 열광했고, 경찰서 안에 무장해제를 요구하기 위해 들어왔던 학생대표들과 좌익인사들 몇 사람은 신 경위에게 몰려가 헹가래를 쳐주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공산당 도당 책임자 장적우가 경찰이 먼저 무장해제하면 군중을 책임지고 해산시키겠다고 이성옥 서장에게 압력을 넣었습니다. 오전 1130분경, 이성옥 서장은 이 말을 믿고 경찰들에게 모든 총기를 무기고에 넣고 특경대들에게도 무장해제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 서장의 지시대로 별다른 저항 없이 순식간에 충기는 무기고로 들어갔습니다. 이를 지켜본 좌익 요원 누군가와 대학생대표 몇몇이 경찰서 현관 앞으로 나가 상기된 얼굴로 외쳤습니다. “민주인사들의 설득으로 경찰이 백기를 들었습니다. 총기를 무기고에 넣는 것을 우리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이로써 학생 여러분과 애국인민 모두의 뜻이 일단 관철되었습니다. 이제 안심하고 해산 하십시오그런대 해산하라는 말에 자리를 뜨는 자는 몇 명뿐이었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좀처럼 돌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들것에 누인 시체가 군중을 쉽게 물러서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진짜 무장을 해제했는지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 보겠다는 기세였습니다. 또 그동안 갇혀 있던 정치범들도 석방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까지 나오면서 12시경 저들은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여 유리창을 부수고 100여 명의 죄수들을 석방시켰고, 모든 무기를 탈취하고 대구경찰서를 장악하였습니다. 구중들이 험악한 기세로 몰려오자 경찰복을 벗어 던지고 사복을 입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경찰이 많았습니다.

 

 

폭도들은, 옥산당원들은 물론 좌익 협의로 잡혀 온 수감자와 온갖 잡범들을 유치장에서 풀어주고 무기고에서 소총, 대검 등으로 무장하고 급히 시내로 나왔습니다. 인민보안대장 나윤출은 시위대를 100명씩 묶어 조를 짜서 시내에 배치하였고, 평소 불만을 품었던 인사들을 찾아가 닥치는대로 해치웠습니다. 101폭동사건에 총포가 쓰인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폭도들은 경찰과 우익 지도자와 민족진영 인사와 그 가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기 시작하였고, 대구 시내는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잡범들은 상점과 주점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으며, 온 대구 시내는 완전히 무법천지가 되었습니다.

어느 파출소이건 간에 먼저 폭도들이 농성을 벌인 후, 총기를 가진 십수 명의 극렬분자가 총기를 난사하면 폭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총에 맞지 않고 살아난 경찰관을 즉석에서 타살하였습니다. 죽은 경찰관의 시체를 파출소 앞에 걸어 두거나 상황판에 밀어넣고 사지에 못을 박아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실례로 폭도들은 북성로 2가의 우석환 경위의 집에 가서 두 딸과 부인을 몽둥이로 머리를 쳐서 한 장에서 즉사시키고 그 시체를 대구 경찰서로 가지고 왔습니다. 또한 삼덕동의 민 순경의 집으로 수백 명이 폭도들이 몰려갔습니다. 폭도들 중 쇠 파이프를 가진 자가 세 자녀의 뒷머리를 차례차례 푸려치니 피가 하늘로 뻗쳤으니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시내의 파출소가 대부분 파괴되자, 교외에 위치한 경찰지서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폭도들은 학살한 우익인사와 경찰관들을 밭이나 논, 야산 등에 닥치는 대로 버렸습니다.

 

 

102일 오후 3, 습격당한 경찰지서는 동촌지서 외 6, 달성 경찰서 관하 현풍 지서 외 8개였습니다. 폭도들은 양민의 시체를 마을 입구에 전시해 놓고, ‘보라 이 반동을이라는 붉은 글씨를 남겨 놓았습니다.

 

 

102일 오후 6, 경찰 단독으로 진압이 불가능하자, 주한미군 사령관은 경북 지구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미군이 합법적으로 출동하여 경찰과 합동으로 폭동사태를 진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전평, 그리고 그 산하 각 노조, 인민위원회, 부녀총동맹, 민청, 좌익 학생 등은 이미 미군의 비상계엄망을 교묘히 빠져나가, 지방에서 폭동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폭도들은 시내에 위치한 환이 화물자동차 회사의 화물차와 대구시청의 시영버스, 기타 개인 자동차에 분승하여 대구 외각지대로 빠져나갔습니다.

 

 

103일 오전 9, 폭도들은 성주에 도착해 지방 좌익분자 300여 명을 급히 규합하여 관공서 습격과 양민학살에 들어갔습니다. 먼저 미군이 쳐들어와 양민을 죽인다고 허위사실을 유포시켰습니다. 무지 몽매한 농민들은 공산당원들의 말이 옳은 줄 알고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104일 새벽 3시 폭도들은 성주경찰서를 포위한 후, 기습하여 숙직 중이던 22명의 경찰관을 포박했습니다. 폭도들은 경찰관들을 감금하고 생화장하려고 유치장과 그 주변에 석유를 뿌렸습니다. 그순간 충남에서 파견된 기동경찰대가 도착해 폭도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잡혀있던 경찰관들은 목숨을 구했습니다.

달아난 폭도들은 이후 성주경찰서 관내의 수윤, 초전, 대가, 벽진, 금수, 가천 등 6개 지서를 습격하였습니다. 습격은 대개 심야를 택해 행해졌는데, 죽은 우익 인사와 경찰관 시체를 두 번 죽인다고 죽창으로 마구 찌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공산분자들의 무차별 학살에 항거하다 현장에서 죽어간 양민들의 숫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폭도들의 학살 수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총살하였고

둘째, 죽창과 도검으로 마구 찔러 죽였고

셋째, 집에 가두고 불을 질러 생화장까지 했으며

넷째, 곡괭이쇠망치몽둥이 등 농기구를 사용해 타살(打殺), 또는 생매장했으며

다섯째, 양민을 학살하기 전이나 후에 새끼로 목을 옭아 자동차에 매단 후 거리로 끌고 다녔습니다.

여섯째, 나무에 매달아 때려 죽였습니다.

일곱째, 생사람의 몸에 큰 돌을 달아 물어 던져 수장시켰습니다.

여덟째, 부녀자들의 옷을 벗겨, 사지를 찢거나 잘라 죽였습니다.

아홉째,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어린이를 총검과 죽창으로 마구 찔렀습니다.

열째, 죽은 사람의 얼굴에 석유를 뿌린 후 불을 질러 시체를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상의 학살 관련 내용은 송효순 붉은 대학살72-87쪽에서 발취하였음을 밝혀둡니다.

 

 

(2) 경북 도내 군청과 경찰서의 피해

경북 22개 군청과 경찰서가 5만여 명 시위대에 의해 점령되었고, 대구 시내는 전쟁과 방불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미군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폭도로 변한 군중이 경찰의 몸을 칼과 도끼로 난자하고 큰 돌을 머리에 떨어뜨려 짓이기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대구 101폭동에서 경찰에 대한 좌익 폭도들의 만행은 다음과 같습니다.

 

 

칠곡 경찰서

서장 윤상탕(당시 35) 경감은 당시 경찰직에서 파면당해 있었으나, 죽창곤봉 등을 가진 광기에 찬 황점암 일행 60-70명이 그를 붙잡아 집 앞 거리에서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회원 지서

지서장 김현대(43)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용케 피신하였으나 누군가가 손가락질하며 화원 지서장이라고 고함치자 순식간에 10여 명의 청년들이 몰려와 그 자리에서 개 패듯이 때려죽였습니다.

 

 

달성 경찰서

경찰관 6명이 사망, 17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가옥 107채가 파괴되었습니다. 미군 순찰대가 달성공원에서 7구의 경찰관 시체를 발견했는데, 발견 당시 두 명은 숨이 붙어 있었으나 사지가 제대로 붙어 있지 않았고 거세를 당한 참혹한 경우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폭도들은 경찰의 얼굴과 몸뚱이를 칼과 도끼로 난자하고, 손을 등뒤로 묶어 출혈로 쓰러질 때까지 모가 날카로운 돌을 던졌으며, 큰돌을 머리에 떨어뜨려 짓이기는 야만적인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왜관 경찰서

102일 오후 9시 소총과 수류탄, 낫과 창으로 무장한 1천여 명의 폭도가 집결하기 시작, 3일 새벽 550분쯤 왜관 경찰서를 습격하여 서장 장석한을 살해하기 전에 눈을 파내고 혀를 잘랐으며 나머지 경관 네 명도 그렇게 도끼로 참살하였습니다. 다른 세 명의 경관은 여러 차례 구타를 가했습니다. 폭도들은 왜관 경찰서장 장석한 경감을 전화선으로 묶어 시내를 한 바퀴 돌게 하였습니다. 끝내 장 경감은 공산당에 의해 몽둥이로 타살된 후 시체는 길거리에 버려졌습니다.

 

 

영천 경찰서

2천 명(다른 기록에는 1만 명으로 추산)이 죽창, , 도끼를 들고가서 경찰서를 포위하고 습격했는데, 경찰서에는 이때 다섯 상자의 탄약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탄약창고의 열쇠를 가진 경관은 살해된 상태였습니다. 총격전을 벌여 경찰 15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총격전을 벌여 경찰 15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경찰서와 공공기관 및 주택 100여 채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 밖에도 46명의 경찰관이 실종되었는데, 그 중에 적어도 40명은 폭도들에게 납치되었습니다. G-2보고서에 의하면 경찰서가 점령되기 직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것으로 짐작됩니다.

폭도들은 대구에서 100명의 지원경찰이 내려오기까지 만 이틀 동안 영천을 지배했습니다. 영천의 지방 공산당원은 다른 지방에 비해 훨씬 악랄했습니다. 금융조합, 면사무소, 공회당, 경로당 등을 닥치는 대로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각 면에 산재해 있던 좌익분자 700여 명이 고개를 들고 붉은 대열에 참가했는데, 모두 이 지방 사정에 밝은 본토박이들이었습니다. 곧이어 신녕, 임고, 청통, 화산, 고경 등 5개 지서가 차레로 완전 소실되었습니다.

 

 

이태수 영천 군수를 잡아 새끼줄로 묶은 뒤에 도끼와 죽창, 낫 등으로 난도질하여 죽이고 군청에 불을 질렀습니다.

19명의 면직원과 관리들이 살해당했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때 5만여명이 시위하였고, 공무원 15명이 죽었으며, 적어도 100여 채의 건물을 포함한 수 많은 공공기관과 가옥이 전소되었습니다.

당시 경북 도내에서 가장 심한 참극을 빚은 곳이자 막대한 피해를 입은 영천군의소요 상황에 대하여 대구시보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대구시보 46.10.13).

3일 오전 1시경 군내에 일제히 봉기한 수만의 폭도들은 “38번은 이제 철폐되었다북조선인민위원회의 우리 동포들은 굶주린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남조선으로 들어왔다. , 굶주린 동포들은 일어나라!“고 외치며 읍내를 포위했다. 이들은 경찰서를 습격 방화한 뒤 군수 이태수를 사택으로 끌어내어 진학한 방법으로 죽게 한 다음, 몸에 석유를 뿌려 불타는 군 청사 내에 던져 생화장에 처하였다. 폭도들은 방화등기소신한공사 출장소 등을 방화, 전소케 했다.

또 부잣집을 습격하고 역시 방화, 가산을 약탈했다. 이때 임고면의 이인석, 정도영 양씨도 피해를 입었고 특히 이인석 씨는 네 살먹은 외동손자까지 참살당하였다. 군내 각 면사무소, 각 경찰지서는 물론 신령면 같은 곳에서는 성당, 교회, 소학교까지 불태워졌고 전도사까지 학살당하였다.

108일 현재 군내 피해상황은 전파가옥 200, 반파가옥 약 1천호, 경관을 포함한 관공리(官公吏) 사망자 16, 중상자 19, 일반인 사망자 약 24, 중상자 약 20, 피해액 약 10억원, 본서와 지서에 보관된 무기 전부가 탈취당했다고 한다.

 

 

구미 경찰서

103일 오전 9시에는 선산군 좌익들(서산군 민전 사무국장: 박상희)이 모여 구미 경찰서에 진입, 구미 경찰서 배상철 서정에게 경찰 권한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고 위협하고, 경찰서 안의 경찰들을 모두 유치장에 감금하였습니다.

이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 박상희는 진압군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상주 경찰서

103일 폭도들이 경찰서를 습격해 근무 중이던 5명의 경관을 폭행하고 생매장에 죽였으나, 1025일 마산에서 폭도 주동자가 체포되었습니다.

 

 

자양 지서

화산 지서의 한 경찰관이 산으로 도망가는데 폭도들이 쫓아가서 낫으로 두 눈을 뽑아 죽인 후 그 경찰관의 자택으로 몰려가 불을 지르고, 5명 가족을 그 불 속에 집어넣어 생화장해 죽였습니다.

이어 금호, 북안, 대창, 자양(보현), 화북, 삼창 등 7개 지서가 파괴된 후 탈취 당했는데, 자양 지서 경찰관들과 그의 가족들을 살해한 방법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적도들은 경찰관과 그 가족들을 사지(四肢)를 찢어 죽였습니다. 한 팔, 한 다리에 3-4명씩 달라붙어, 있는 힘을 다해 찢어 죽인 것입니다. 경찰관의 부인은 완전히 벌거벗긴 채 이런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3) 경관들의 치료를 거부한 대구의사회

당시 대구의사회에서는 경관들의 치료를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독립신보 46.11.1) 부상당한 경관들이 병원으로 호송되어 와서 도리어 죽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의료인들이 경관들의 치료를 거부하고 따돌리는 방법으로 폭도들의 항쟁대열에 참가했던 것입니다.

... 병원 앞까지 실려 왔으나 환자가 밀려 미처 치료받지 못한 채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부상경관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때마침 동인 로터리 쪽에서 트럭 한 대가 도착해 한 떼의 부상경관을 하차시켰다. 그러자 구경꾼들 속에서 폭도인 듯한 젊은 사람 대여섯명이 뛰쳐나와 목총 같은 걸로 부상경관들을 마구 구타하는 것이 아닌가. 부상경관의 머리통을 어찌나 호되게 때렸는지 뻑뻑 소리가 길 건너 교정에서 바라보고 있는 내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 구타 기세가 너무나 살기를 띠어 아무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당시 의대 3년생이었던 홍선희 경북외과의원장의 목격담)

도립병원 정문 앞 원형화단 둘레에서 끔찍한 살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디서 호송해 왔는지 빈사상태의 경관들이 늘어져 있었는데 그 중 몇 사람이 고통으로 몸부림치거나 죽음 직전의 경련으로 몸을 떨자 저놈들 아직 덜 죽었다고 소리치며 둘레의 청년 7-8명이 몽둥이로 확인 타살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원한이 깊다고 해도 반송장이 되어 병원에 실려 온 중환자에게까지 저럴 수가 있을까... (폭풍의 10, 362.)

... 어떤 부상한 경찰관이 살려달라고 병원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폭도들이 그 사람을 끄집어내려고 했다. 그 경관은 계단의 모서리를 쥐고 안 내려오려고 하는데 위에서 그 병원의 의사가 떠밀었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일이었다.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경관의 머리를 폭도들이 돌을 번쩍 들어 내리쳤다. 머리는 박살이 나고 흰 것이 튀어나왔다.(이원만, 나의 政經 50)

... 대구에 있는 병원들은 부상당한 경찰들이 폭도들에 의해 끌려나가 살해 당한 이후 부상경찰의 수용을 거부하였다고 한다.(미 제 24군의 G-2보고서)

도립병원을 비롯 일부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원들이 공동성명을 냈다. “발포를 중지하지 않는 이상 환자의 치료와 진찰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 실제로 이때는 이미 도립병원 안에 폭도가 끼어 있어 입원한 경찰관을 죽이기도 했다.(석정길, 새벽을 달리는 동지들)

부상경관에 대한 의료인들의 경고문이나 노골적인 적대감은 뒷날 인술부터 베풀어야 할 의료인들이 인명을 경시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그 결과 경찰의 만만찮은 보복을 낳았습니다.

 

 

(4) 경북 경남 전남 지역 등 전국으로 폭동 확산

조선공산당의 조종에 의한 폭력사태는 영남 일대로 확대되었고, 다시 각 지방에 지령을 내려 각지로 파급되었습니다.

조선공산당 시위대들은 50-100여 명씩 조를 짜 조장을 뽑은 후 조장의 지시에 따라 환이자동차 회사에 가서 자동차를 탈취하고, 수십 명씩 승차하여 경북 22개 군청 소재지로 출발하였습니다. 처음 대구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난 폭동은 경북 전역으로 번졌고, 그 거센 물결은 다시 경남으로, 그리고 전남으로 순차적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대구에서의 101폭동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은 각 지방당부에 10월 폭동에 대한 호응 투쟁을 전개하라는 지령을 내려 폭동은 각 지방으로 파급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김남식의 남로당 연구Ⅰ」243쪽에서는 “101폭동은 1946101일부터 1111일까지의 기간에 경상북도 18개 군을 비롯하여 남한 전역의 73개 시군에 파급되어 갖은 난동, 만행을 저질렀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103: 서울에서 1만 명 군중이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겨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군정청 앞에서 시위.

105: 부산, 인천, 군산, 목포, 여수, 마산, 통영 등에서 해원(海員) 15천 명이 이른바 동정파업’, 인천부두 노동자 3백 명 파업.

108: 경남 밀양 모직물 공장 종업원 2백여 명 파업, 부산 항에서 선박시위.

1020: 경기도에 파급되어 개성, 봉동, 임한, 연안, 백천, 대성, 장단, 광주 등제이서 경찰서 지서 습격 등 난동.

1022: 서울 종로에서 정권은 인민위원회로!’. ‘쌀을 달라’, ‘박헌영 체포령 취소등 삐라를 살포하며 소요.

1030: 화순 탄광 노동자 5천 명 파업, 목포에서 전화 종업원 120명 파업 및 파출소 습격 방화, 15백 명 시위 끝에 목포 경찰서 습격 난동.

폭동은 11월에도 계쏙됐다. 전남 장성군에서 지서 습격파괴, 보성군에서 득량 지서 습격, 독촉(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청년 2명 학살, 면력 지서 습격, 1111일 전주형무소 죄수 417명 탈옥, 전남 해남군에서 지서면사무소 방화 소각 등이 이어졌다.

 

 

(5) 대구 10 1폭동사건의 배후

9월 총파업과 대구 101폭동사태는 중앙당부의 지시를 받은 현지의 하급 당부에 의해 철저하게 준비되었습니다. 저들은 심지어 선동에 능숙한 당원을 개별적으로 불러 교육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일부 학자가 잘못 알고 있듯이 9월 총파업과 대구 101폭동은 자연발생적 폭동이 아니라, 북한의 소군정이 깊숙이 관여한 사건이었습니다. 북한 소군정이 조선공산당 지도부에 자금을 조달했을 뿐 아니라, 당시 남한 정세에까지 소련이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이 스티코프의 비망록을 통해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4차 회동 때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을 만났는데, 그때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군정의 협력을 받아 북조선의 소비에트화 정책을 조기에 실현시키도록 투쟁하라고 지시하면서, 그를 북한정권의 지도자로 지명했습니다. 이후 1946828일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을 창립하기에 이릅니다.

또한 박헌영에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분투하는 그대의 혁명투쟁을 높이 평가한다는 격려를 하였습니다. 박헌영은 그 자리에서 지도자로는 지명받지 못했지만, 차기 대권후보라는 주위의 위로를 받으면서 실망하지 않고 소련의 지시에 복종하였습니다. 스탈린의 격려를 받고 귀국한 박헌영은 폭력 전술을 채택하였고,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 폭동을 계획, 실행함으로써 해방 이후 남한의 정국을 극심한 혼란으로 몰고 갔습니다.

9월 중순, 전평 상무위원회는 당의 신전술 지령에 입각해 194610월 파업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조선공산당이 10월 파업 투쟁 계획을 한 달이나 앞당겨 9월에 일으켰습니다. 일정을 한 달 앞당긴 결정은 소군정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스티코프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4699일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당시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했다.

이에 대해 스티코프는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고 지시했으며, 그것이 911, 16일 두 차례에 걸쳐 내려졌다고 기록했습니다.

9월 총파업이 전국적으로 크게 확대되고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남한 정국을 뒤흔들었던 것은, 이와 같은 조선공산당과 소군정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로당은 9월 총파업이 일어난 지 사흘 뒤인 1946927일 중앙상무위원회 제 6차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북로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이번 남조선에서 시행된 미군정의 반동정책을 반대해 923일 부산 철도공장 종업원의 파업을 시작으로 24일에는 남조선 4만 철도 종업원 총파업, 25일에는 전기 전차 출판을 위시해각 기업 종업원들의 총파업이 전면적으로 전개된 데 대해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북로당은 전 당원들이 총동우너해 남조선 노동자의 영웅적 총궐기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낼 것이며, 적극적인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고 밝혔습니다.

이에 북조선직업동맹이 노동자, 사무원, 문화인 대회를 개최할 것과 증산 돌격 등의 운동을 전개하고 전 당원들이 노동시간을 한 시간 연장해, 그 소득액을 남조선 노동자들에게 위문금으로 보낼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일부 학자들은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이 공산당의 조직적 선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 명칭도 ‘10월 항쟁이라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나, 스티코프의 비망록에 따르면, 소군정은 9월 총파업 때 200만원을 지원한 데 이어 10월 폭동이 계속된 약 3개월 동안 남조선 투장기근으로 300만원과 39만원, 그리고 122만 루블을 조선공산당 측에 보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조선공산당이 폭동의 상황전개에 따라 소군정과 지속적으로 교감을 가지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진 셈입니다.

또한 이 사건의 구체적인 배후 인물은, 이북 황해도 해주의 박헌영과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이었습니다. 이재복(1903년생)은 이유업의 장남이며, 경북 안동군 사람이었는데, 평양신학교와 교토신학대학을 졸업한 목사였습니다. 그는 영천 읍내의 중앙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좌익 계통인 인민당에 입당, 경북도 인민위원회의 보안부장을 거쳐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라는 파격적인 위치까지 올라갔습니다. 그가 대구 101폭동 사건의 주동자였습니다.

 

 

(6) 대구 10 1폭동 사건의 결과

대구 101폭동 사건으로 대구 시내에서만 경찰 38명이 사망하였고, 공무원 163, 민간인 73명이 사망하였고, 부상 1천 명, 행방불명 30, 시위혐의자 7,400명이었으며 776동의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경북 도내에서 경찰인명피해는 사망 80, 행방불명 및 납치가 145, 부상이 96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습격을 받은 관리이거나 우익인사들 등 민간인 사망자수는 24, 부상 41명 납치 21명입니다(G-2보고서).

 

 

대구 101폭동은 경찰 4,500, 김두한(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이끄는 우익 청년 3,000, 대전 2연대 1개 중대, 2연대 등이 총출동하여 겨우 진압되었습니다.

101폭동의 여파는 몇몇 형무소에까지 미쳐 공산당들은 전주광주공주 등 지방 형무소에서도 집단으로 탈옥하였습니다. 전주감옥에서는 1111일 오후 2시 좌익죄수들의 선동으로 죄수 842명 중 417명이 간수들의 무기를 빼앗아 탈옥했고, 곧이어 22일 저녁에는 광주에서 900여 명이 탈옥하려다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져 죄수 4명이 죽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는 등 사고가 잇따랐습니다. 미 군정하의 형무소는 재소자의 80%이상이 좌익계열의 폭도로서, 이들은 마치 형무소가 공산당의 집회소인 양 착각하고 갖은 음모의 소굴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형무소는 바로 이들 폭도들의 표적이었습니다.

대구 101폭동으로 공산당도 크게 피해를 보았으니, 연말까지 검거된 당원이 7,000명이 넘었고 그 중 1,500여 명이 구속되는 등 큰 타격을 입고 조직 내에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결국 1120일에 이르러 중죄인 5명이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데, 대구시 인민위 및 공산당 지방 부당의 최문학, 이삼택, 이광열, 박학구, 이재희 등이었습니다.

 

 

대구 101폭동은, 해방 이후 1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가 얼마나 급속히 파급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잔인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밤낮 없는 경찰들의 수색에, 시위 가담자들은 북한으로 탈출하거나 야산대가 되어 산에 숨어 버렸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국방경비대 대구 6연대에 입대하였습니다. 국방경비대(1946115일 창설), 신병을 모집할 때 미 군정청의 방침에 따라 신상조사나 사상검토를 하지 않고 신체검사와 구두시험만으로 선발했으므로, 경찰의 수배를 피해 좌익 세력들이 마음껏 입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대구 6연대는 좌익 소굴이 되어 여수 14연대 반란 이후 194811월까지 3차에 걸쳐 반란을 일으키다가 결국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전평이 중심이 된 대구 101폭동 사건을 계기로, 삽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남한 전체에 미군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퍼져 나갔습니다. 미군과 경찰이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수배하자, 이들은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숨어들어 우리나라 빨치산의 시작인 야산대(野山隊)’를 만들었습니다.

뒤에 이들은 ()빨치산이라 불렀습니다.

 

빨치산의 어원은, 프랑스어의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된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는 당원, 동지, 당파등을 뜻하며 또한 흔히 알고 있는 게릴라 등과 같이 쓰여집니다.

빨치산은, 남한의 단독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에 맞서 일으킨 제주 43폭동과 19481019일 여수 순천사건을 시발점으로 하여 조직화, 본격화된 좌익 게릴라 부대 및 그 당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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