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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사1. 구한말-일제강점기(5) | 운영자 | 2020-09-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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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결론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일제는 한국 사람에 대한 민족적 차별, 기회 박탈, 언론․신앙․결사 자유의 박탈과 함께 무수한 단체를 탄압하고 해산시키면서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습니다. 또한 해외 출입과 교육을 금지했습니다. 집안에 있는 모든 쇠붙이는 공출(供出)이라는 명목으로 일제가 다 빼앗았고, 조선 말과 조선 문자의 사용을 금지시켰습니다. 학교에서는 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일본사를 가르쳤고, 일본 노래를 가르쳐 완전히 일본화하는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를 거부했던 숭실학교와 숭의여학교가 폐교되었고, 기독교인 2,000여 명이 수감됐으며, 50여 명이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지방행정구역도동리 단위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으로 통폐합시켜 사소한 일까지 모두 일제의 간섭 혹은 관청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만들어 우리나라의 옥토 40%를 강제로 빼앗아 일본 소유로 하고, 그 땅을 소작인에게 빌려 주어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고, 춘궁기에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수탈했습니다. 특히, 일본은 각종 특혜를 주면서 1910-1926년에 17회에 걸쳐 일본인 이민 희망자 약 1만 명을 엄선하여 조선침략의 담당자로 활용했습니다. 이들 이주민은 경기․경상․전라․황해․충청도에 가장 많았는데, 그들은 조선 민중을 착취하고 압박한 일제의 대변자이며 앞잡이였습니다. 소작민에 대한 수탈로 대규모 해외 이주가 시작되었는데, 1933년까지 일본으로 113만 5,852명, 만주와 연해주로 150만여 명이 이주한 것으로 집계됩니다. 1926년 12월 28일 의열단원 나석주 열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 간부를 죽이고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기습하여 폭탄을 던졌던 사건은 바로 이러한 민족적 증오의 한 표현이었습니다. 급기야 한국인의 성(姓)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과 단발령, 국사에 관한 서적 20여만 권을 소각, 교과서를 비롯한 애국심과 독립정신을 담은 책과 잡지의 몰수, 유물과 유적의 파괴 등으로 민족혼까지 말살하려 했습니다. 학교 교사 중 남자는 군인처럼 제복을 입고 칼을 참으로써 한국인들이 감히 저항할 생각조차 못하도록 기를 죽였습니다. 그러고도 일제는 우리나라를 가리켜 ‘나라를 빼앗기고도 분통해 하지 않는 나약한 열등 민족’이라고 했는가 하면,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기쁜 마음으로 복종한다.’라고 세계에 거짓 선전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미개하고 낙후된 나라’라고 경멸하면서 일본인들 밑에서 종처럼 부려먹는 민족으로 만들려 하였습니다. 우리는 발전된 조국의 현실ㅇ리 과거의 비극과 연결되어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졌습니까? 쌀이 없어서 쑥을 캐다 먹고 소나무 껍질로 양식을 대신하고, 무밥, 술지게미)(술찌끼), 진저리밥으로 허기를 달래던 해방 이전의 쓰라린 가난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일본 사람들의 잔악무도한 만행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으로서 도저히 참기 힘든 비참한 수욕을 36년간이나 당했는데, 그것을 까마득히 입어버린다면 또다시 그런 비극을 당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1933년 1월 30일부터 시작하여 1945년 5월 8일에 끝난 독일 나치에 의한 600만 유대인 대학살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는 이때 학살된 600만 명 유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53년 건립된 추모 박물관, ‘야드 바쉡’(Yad Vashem)이 있습니다. 야드 바쉠은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라’라는 뜻입니다. 홀로 코스트(holocaust:대학살)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고, 다시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벼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확장 공사를 시작해, 10년 만엔 2005년 3월 15일 ‘야드 바쉠 홀로코스트 박물관’(Yad Vashem Holocaust History museum)을 다시 개관하였습니다. 전시관 출구 옆 야드 바쉠 전시실 2층 동판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기념관 출입구에는 살점이 완전히 도려내진 뼈만 남은 물고기가 방문객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데, 그 곁엔 다음과 같은 표어가 적혀 있습니다. “Forgive, but remember."(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다시 비참한 신분으로 떨어질 수밖에 dqjt다는 뼈아픈 그들의 참회와 깨달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하르 하지카론’(Har Hazikaron) 곧 ‘기억의 산’(the Mount of Remembrance)에는 야드 바쉠 박물관뿐 아니라 전시장, 기록 보관소, 기념물, 조각품과 기념비 등 여러 건물들로 이어지는 어마어마하게 넓고 거대한 단지가 조성되 있는데, 단지를 연결하는 길 좌우에는 600만 그루의 가로수가 심겨져 있으며, 각 나무 밑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모자이크로 수놓아져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 독일인들에게 희생된 600만 명의 넋을 달래고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6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국토를 초록색 융단같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한편, 박물관 건물 전체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콘크리트는 파괴되거나 손상되지 않는 재료이기 때문에 나치가 자행한 끔찍한 대학살의 기억이 절대로 파괴되거나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외에도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세계 곳곳에는 홀로코스트 박물관 및 추모관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오늘날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세계 정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그 희생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저 유대인들처럼 참혹한 과거의 참상과 조국의 안녕을 위해 초개와 같이 버려진 그 고귀한 희생을 잊지 말고 오늘에 아로새기는 위대한 민족의식 고취가 절대적으로 필요합ㄴ다. 우리 후손들에게 36년 망국의 설움 끝에 되찾은 조국의 소중함과 억압 속에 신음하다가 되찾은 자유의 가치를 되새겨 주면서, 이 민족의 승리적인 앞날을 구축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해방 이후 66년,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가 깜작 놀랄만한 경이적인 경제성장과 국력신장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북한 공산당은 적화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고 있으며, 좌우익의 대결, 지방색, 세대간의 갈등 등으로 나라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질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탈한 역사를 거울삼아 더욱 국력을 신장시키고 전 국민이 우국충정의 일념으로 하나되어 애국가의 가사대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길이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대대로 물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부록. 일제 시대 망국민족의 한(恨)을 노래한 전통가요 우리 민족은 반도국가라는 지리적은 특성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으며 고난과 시련을 겪어 왔습니다. 하지만 워낙 풍류를 좋아하는 민족적인 바탕 때문에, 그렇게도 모질고 험한 역사 속에서도 우리 민족만의 여유로움과 예술성을 엿볼 수 있는 찬란한 문화를 남겼습니다. 인생이 있는 곳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고 희로애락이 있는 곳에 반드시 노래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민족은 절기뿐만 아니라 농사를 지을 때나 일상생활 속에서 늘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의 감정과 생각, 소망을 표현하였습니다. 우리의 전통가요에는 너무나 많은 외세에 시달려 고난 가운데 살아온 조상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또한 흘러간 노래는 오직 한평생 흙을 주무르며 거룩한 작품을 탄생시키는 토기장이의 깊게 패인 주름이 세월의 흔적으로 생생히 남아 있듯이, 우리의 가슴 속에서 심장처럼 뜨겁게 박동하고 있습니다. 금수강산 구석구석 살아 숨쉬는 우리의 정신, 그 속에 녹아있는 끈끈한 우리의 가락, 정 많은 민족의 따스한 마음 씀씀이를 찾아볼 수 있는 우리의 가락이 있기에 더욱 우리의 옛 노래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나라가 어렵고 우리의 살림이 어려울 때, 노래는 우리의 민족의 숨결이자 친한 벗이었고,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는 참 위로자요,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근현대사의 아픔을 담고 있는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를 때에 우리 민족의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과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그러한 아픔을 깊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황성옛터가 그러했고 타향살이가 그러했듯이, 우리의 흘러간 옛 노래를 보면 각각 시대 배경과 거기에 담긴 우리 민족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가사 속에서 망국의 설움을 다시 한 번 새길 수 잇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불초한 사람의 바람입니다. 1. 황성옛터 일제 강점기 36년은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 이래 최악의 수난기요, 수치의 역사였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노예로 전락한 우리 민족의 슬픔은 너무도 처절하였습니다. 아무리 맑고 푸른 하늘을 보아도 조국을 빼앗긴 서러움 때문에 구름 낀 하늘이요,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소리도 슬피 우는 소리로 들릴 정도였습니다. 당시 조선인이라면 1928년에 발표된 ‘황성옛터’를 듣고 망국의 설움에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황성옛터의 본 제목은 ‘황성의 적’이며, 일제 시대 항일 노래 작사가 왕평(본명: 이응호, 1908-1940년)씨가 작사하고,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전수린(1907-1984년)씨가 곡을 붙였습니다. 1절)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2절) 성은 허물어져 빈 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3절)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황성옛터의 ‘황성’은 왕의 성을 뜻하는 것으로, 왕조가 망하고 폐허가 된 성을 보면서 망국의 한을 달랜다는 내용입니다. ‘황성옛터’로 널리 알려진 개성 만월대(滿月臺)는 개성시 송악동 송악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고려의 옛 궁궐터입니다. 만월대는 919년(태조 2년)에 창건된 이래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에 의해 소실되기까지 34대 455년간 흥망성쇠를 함께한 고려의 도읍지이며, 작곡가 전수린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고려가 망한 이후 그 화려하고 장대했던 개성 만월대는 600여 년간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해방 이후 발굴). 이 노래가 창작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1928년 늦가을, 악극단 취성좌(후에 조선연극사) 단원들이 만주 일대에서 신의주, 평양까지 공연을 마치고 황해도를 바라보는 온천지 배천으로 와서 여관에 머물 때였습니다. 비가 내려 공연을 할 수 없어 모두 여관에 있으면서 며칠 동안 굶주려 배고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극단의 배경음악 연주자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전수린과 왕평이 고려의 영화를 되새기며 만월대 옛터를 찾아갔으나 풀벌레 우는 소리만 쓸쓸하게 울려퍼질 뿐이었습니다. 550년 전 번성하던 고려의 왕도(王都) 개성의 영화는 온데간데 없이 폐허가 되었고,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있는 옛 궁궐을 주춧돌과 흐트러진 성벽의 일부만 초라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전수린과 왕평은 권력의 무상함과 나라 잃은 사람들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그 초라한 옛터의 모습이 지금 일제 치하에 있는 민족의 서글픈 신세와 다를 바 없음을 떠올린 것입니다. 여관으로 돌아와 만월대의 밤을 회상한 전수린은 바이올린을 들어 즉흥적으로 연주하여 오선지에 옮겼고, 그 멜로디에 왕평이 가사를 붙였습니다. 망국의 비애와 함께 떠돌이 악극단원ㄴ으로서 나그네 신세의 서글픔이 교차해 한동안 오열했다고 합니다. 1928년, 악극단 취성좌가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극장 단성사에서 연극 공연의 막간에 이애리수(당시 18세)가 이 노래를 불러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애리수 자신도 가슴에 밀려드는 망국의 설움을 선율에 담아 부르면서 비통한 감정을 가누지 못하여 3절을 부르다가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해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관례대로 관객들에게 거듭 허리 굽혀 인사하며 울먹인 것에 양해를 구했으나, 객석에서는 오히려 폭풍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애리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3절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노래 반, 울음 반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수도 관객들도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였고, 떠나갈 듯한 박수 속에 앵콜이 요구되어 다음 막의 연극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회자의 말은 묻히고, 관중들은 열광하며 따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언제나 3절에 이르면 가수와 관중 모두가 노래 반, 눈물 반이 되어버렸습니다. 관객들의 거듭되는 재청에 이애리수는 다시 나와 노래를 부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이애리수는 일약 스타가 되어 첫 ‘국민가수’로 불리게 되었고, 사람들은 연극 공연보다도 이애리스의 노래를 듣기 위해 극장에 모여들어 장내는 늘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심지어 1929년에는 막간에 나와 노래 부르기로 한 이애리수가 출연하지 않자, 관객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바람에 공연이 중단되고 경찰이 출동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후 빅터 레코드사를 통해 1932년 정식으로 음반을 낸 ‘황성옛터’는 5만장이나 팔려 당시 대중가요 역사의 한 획을 그었습니다. ‘황성옛터’는 발표 당시엔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준 민족의 노래로 대중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애창곡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많은 대중들에게 널리 불려지는 불후의 명곡이 도었습니다. 또한 이 노래는 망해버린 고려 왕조의 사적을 통해 역사적 비애를 떠올리게 하고, 곧 일제에 의해 짓밟혀 아무 소망 없는 황무지처럼 되어버린 식민지 현실을 자각하게 하였습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황성옛터’가 너무 소극적이고 퇴영적(退嬰的)이라는 비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이 없어 넋두리조차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시대의 상처를 정확히 자극했기에 ‘황성옛터’에 대한 당시 민중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그렇게 민족정서가 강한 노래였기 때문에 일제 당국은 이 노래로 민족적 집단의식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주시하였고, 공연이 있을 때마다 이 노래로 눈물의 합창을 하자, 종로서의 임석 일본 경관이 무대 위로 올라가 공연을 중단시켰으며, 후에 금지곡 처분을 내려 강력히 탄압하였습니다. 이 노래의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은 종로서에 끌려가 밤새 조사를 받고서야 풀려났으며, 대구의 한 보통학교에서 음악 시간에 이 노래를 가르친 교사는 파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가수 진방남(작사가 반야월)이 신인가수 시절에 이 노래를 부르다가 이론 순사에게 끌려가서 혹독하게 문초를 받고 겨우 풀려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노래가 지속적으로 사랑받으며 불려진 것은, 그 무렵 일제의 탄압과 압제가 가중되어 이를 견대다 못해 괴나리 봇짐을 메고 고향산천을 등지고 만주로 떠나는 자가 많았고, 그렇게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과 회한, 민족적 울분을 토해내는 노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로 황성옛터는 일제 형극(荊棘)의 36년 그 모진 세월 속에 함께 울고 몸부림치며 불렀던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옛노래입니다.
2. 울 밑에 선 봉선화 3․1독립운동 이후 뜻있는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해외로 망명하는가 하면 깊은 산중에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그 당시 애국지사들과 억압받던 백성들이 말할 수 없는 고생과 한숨 속에서 독립운동을 염원하고, 또 조국 강산을 그리면서 불렀던 노래가 ‘울 밑에 선 봉선화’(순수 우리말로는 ‘봉숭아’)입니다. 1절)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2절)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 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3절)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조선 최초의 예술 가곡인 이 노래가 발표된 해는, 1919년 기미년 3․1독립운동의 열기가 아직 채 식지 않은 1920년이었습니다. 일제시대 우리 민족의 애환이 깃든 민족의 주제가요, 조선 독립을 애타게 기다리던 백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의 첫 작품으로, 한국 가곡의 효시로 꼽히는 곡이며, 조선 양악계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형준씨가 시를 붙였습니다. 그 곡조의 멜로디는 느린 템포이면서 안정감이 있고 그 가락이 우리나라 구전 민요인 아리랑처럼 아주 완벽합니다. 이 노래는 일제에 수난당하는 이 나라와 백성을 연약한 봉선화(鳳仙花)라는 이름이름이 붙여졌으며, 순수 우리말로는 ‘봉숭아’입니다. 봉선화는 우리나라 전국 각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어 흔히 볼 수 있는 꽃으로, 고려 시대 이전부터 심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부터 소녀들은 초가을이면 봉선화 꽃잎과 백반을 함께 섞어 찧어서 손톱에 물을 들이곤 했습니다. 가뭄에 강하며 햇볕이 잘 드는 곳이면 어디서든 잘 자랍니다. 4-5월에 씨를 뿌리면 6월 말부터 꽃피기 시작하여 7-8월이면 분홍색, 붉은색, 주황색, 보라색, 흰생 등이 홑꽃, 겹꽃으로 잎 겨드랑이에 1-3송이씩 피어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첫서리가 내리는 10월 말까지 4-5개월 동안 오래 꽃을 피우며, 한 겨울 혹한에도 그 씨가 얼어 죽지 않고 견디다가 그 이듬해 봄이면 어김없이 그 주변 어딘가에서 다시 피어나옵니다. 화려한 정원이 아닌 울 밑이나 장독대 아래 수줍은 듯 피어난 봉선화의 자태는 아리따우면서도 순박하며, 무성한 봉선화 잎 사이로 슬며시 고개를 내밀면서 누군가를 몹시 그리워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실제로 봉선화와 친구가 되어 함께 놀아 준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때 묻지 않은 순박한 촌 아가씨들이었습니다. 이 노래의 1, 2, 3절은, 봉선화가 개화하여 여름철 한창일 때부터 가을에 낙화하고, 겨울을 지나 이듬해 봄에 다시 피어나는 때까지를, 일제하에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쓰라림과 서러움에 적절히 빗대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울 밑에 선 봉선화’는 순박하고 때 묻지 않은 우리 민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처량하다’라는 것은 이 노래 전체를 대변하는 표현으로, 일제의 압제를 받고 있는 우리 민족의 초라하고 너무도 딱한 처지를 나타냅니다. ‘길고 긴 날’은 반 만년 유구한 우리 민족의 역사와 그 긴 생명력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는 봉선화 꽃이 한참 아름답게 피어나는 자태를 노래한 것으로, 우리 민족이 개화기(開花期)를 맞아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할 수 있는 시대였음을 보여 줍니다. 2절에서는 모진 가을 바람에 생명을 마감하고 힘 없이 떨어지는 봉선화 꽃의 처량한 모습을 읊었습니다. 여름 내내 그토록 만발하여 한참 아름다웠던 꽃송이가 가을 바람에 침노를 당해 땅바닥에 떨어지고 시들어지고 보잘것없는 모양이 되어 버린 그것이, 꼭 일제에게 짓밟히면서도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해 보고 어느새 상할 대로 상해 버린 조국의 비운과 이 민족의 처량하고 불쌍한 신세와 같다고 한탄한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에게 차마 못할 짓을 거듭하여 그 잔학상이 끔찍했고, 우리 민족의 수난과 시달림이 극에 달했던 상황이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표현입니다. 이 노래의 절정은 3절에 있습니다. 봉선화가 겨울을 지나 이듬해 봄에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새롭게 피어나는 강인한 생명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봉선화는 꽃잎이 다 떨어질 즈음 열매가 익으면 잔뜩 부풀었다가 조금만 건드려도 꼬투리가 톡 터지는 그 힘으로 씨앗이 튕겨져 나옵니다. 그래서 봉선화의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touch-me-not)'인데, 튀어나간 씨앗들은 대부분 모양이 둥글고 표면이 매끈하여 이리저리 잘 굴러 다니다가 그 이듬해는 같은 자리에 어김없이 더 수북이 자라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실제로는 무언가에 닿아 열매가 터져야만 씨앗이 번식되듯이,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략으로 숱한 수난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생명을 이어온 모습을 봉선화의 생명력에 빗대어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3절은 이 노래의 절정을 이루면서, 북풍한설 모진 찬바람에 형골(형체)마저 사라질지언정 생명을 잉태한 씨가 사방으로 흩뿌려져 대지 위에 힘차게 뿌리를 내리듯이, 우리의 민족혼은 결코 죽지 않고 길이 남아서, 찾아온 새봄에 다시 살아난다는 강인한 조국 해방에 대한 민족적 염원을 처절하게 절규한 것입니다. 이처럼 1, 2, 3절 가사 구석구석에는 폐부를 찌르며 가슴에 스며드는 우리 민족의 시대적 슬픔과 짓눌린 그늘, 그리고 비장한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얼핏 들으면 애처로우나, 사실은 가슴에 용기를 북돋워 주는 곡이었습니다. 이 노래가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된 계기는 이 노래가 발표되고 약 20여 년이 지나 홍난파가 죽고(1941년) 난 이듬해인 1942년이었습니다. 소프라노 가수 김천애씨(당시 23세)가 처음으로 동경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각 음대 졸업생 대표들만 참석하는 신인 발표회에서 독일 가곡을 부른 후 앵콜송으로 봉선화를 부른 때부터입니다. 공연이 끝나자 청중들의 박수 갈채가 떠나갈 듯했고, 교포들은 무대 뒤로 찾아와 김천애씨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귀국한 김천애씨는 어디든 무대에 설 때마다 흰 소복 차림으로 이 노래를 불러 청중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일제는 나라 잃은 슬픔을 봉선화에 비유한 가사를 문제삼아 가창금지는 물론 빅터 레코드사에서 제작된 음반까지 판매를 금지시켰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대에서 봉선화를 불렀던 김천애씨는 일제 경찰에 여러 차례 잡혀가 모진 고초를 당하였고, 뿐만 아니라 일제는 봉선화 노래를 부르기만 해도 붙잡아가곤 했습니다. 실제로 봉선화를 불렀던 학생들을 잡아다가 의자에 묶어 놓고 집게로 혀를 뽑아서 죽인 일이 있으며, 그 수가 밝혀진 것만 해도 386명이었다고 합니다. 일제의 만행을 경험한 세대라면 36년간 오랜 치욕의 세월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당시 우리 국민들은 일제의 총칼 아래 짓밟혀 인권은 말할 것도 없이 재물까지도 강제로 약탈을 당하였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풀 뿌리와 나무 껍질을 먹는 등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민족 전체의 삶이 모질고 험한 가시밭길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일제에게 억압당하고 짓눌린 민족적 울분이 극에 달했으나,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은 봉선화에 빗대어 망국의 슬픔을 이 노래로 달랬으며, 몰래 숨어 목이 메이도록 이 노래를 부르면서 독립에 대한 염원을 울부짖었습니다. 특히 8.15해방 직전, 일제에 의한 민족적 억압이 극에 달했을 때 처형장에서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마지막으로 부르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독립운동가, 애국지사들이 많았습니다. 실로 ‘울 밑에 선 봉선화’는 나라 잃은 설움으로 사무친 우리 민족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던 노래이면서, 일제 시대의 처절했던 시대상을 함축하고 있는 민족 가곡으로 우리 민족사에 그리고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3. 눈물 젖은 두만강 우리 조상들은 민족의 수난기에 독립운동을 하면서 수많은 좌절을 겪었습니다. 독립투사가 되어 두만강을 건너 집을 떠난 남편과 아들의 생사를 확인 할 길 없어 피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1930년대에 두만강 나루는 살 길을 찾아 중극으로 건너가는 실향민들과 독립군에 지원하여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낯선 타국땅으로 떠나가는 청장년들로 붐비었습니다. 그래서 두만강 나루는 사랑하는 남편, 아들과 이별하는 여인들의 오열이 하루도 그칠 새가 없었습니다. 이때의 민족 애환을 담은 노래가 바로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1930년대에 발표된 ‘눈물 젖은 두만강’입니다. 1절)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고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2절)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쉬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3절) 임 가신 강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그 님이 보고 싶구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1930년대는 일제의 탄압이 날로 극심해져, 노래 가사를 짓는데 은유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작곡가 이시우씨는 이 노래에 앞서 ‘봄 잃은 낙동강’을 창작하였는데, 여기서도 역시 일제에게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설움을 외면할 수 없어 낙동강에 봄이 와도 그 봄마저도 잃었다고 은유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랫말 속에, 목이 메이도록 애타게 기다리는 ‘님’역시 사랑하는 연인이 아닌 우리 겨레, 조국과 독립투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얼핏 가사만 보아서는 애절한 남녀간의 사랑 노래처럼 보입니다.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1, 2, 3절 연이어 나오는 가사들은, 사랑하는 님을 한없이 그리워하듯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민족적 통분과 한(恨)이 서려있습니다. 아마도 당시 독립투사들과 그 가족들은 빼앗긴 조국의 설움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복받쳐 목이 메이도록 이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을 것입니다. 이 노래를 창작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일제의 억압이 극심했던 1935년 일제 시대 유랑극단 ‘예원좌’라는 악단 일행이 중국의 동북지방인 용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조선인 부락을 찾아 순회공연을 다니던 중 두만강 하구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도문’에서 조선인이 운영하는 한 여관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마침 가을철이라 뒷마당에 있던 두 그루의 단풍나무가 하나는 빨갛게 다른 하나는 노랗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 나무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해에 두만강을 건너올 때 고향을 잊지 않으려고 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라고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이시우 씨를 비롯한 몇몇 배우들은 그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고향 생각에 잠겼고 불현듯 이시우 씨는 ‘추억’이라는 주제가 떠올라 악상을 고르려고 사색에 잠겨 밤이 깊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밤, 난데없이 여인의 비통한 울음 소리가 너무도 처절하여 일행 모두가 잠에서 깼습니다. 이시우 씨는 다음날 여관집 주인에게 그 여인의 사연을 물어보았습니다. 여인의 남편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는데, 얼마 후 일본 경찰에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두만강을 건너 남편이 끌려간 형무소를 찾아갔으나, 이미 총살당한 후였다는 것입니다. 나라 잃은 슬픔에 남편까지 잃고 설움에 겨운 여인은 마침 그날이 남편의 생일이라 생일상 겸 제사상 술을 부어 놓고 그만 울음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작곡가 이시우 씨는 그 여인의 사연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만강 가에 나간 이씨의 눈에는 두만강의 물결이 나라 잃고 헤매는 우리 민족의 피눈물처럼 보였습니다. 이씨는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이 일제의 학정에 못 이겨 고향 산천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를 향해 떠날 때, 그들이 나라의 독립을 꿈꾸며 흘렸을 피눈물과 그들의 부모와 처자식이 겪어야 했던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두만강의 물줄기에 빗대어 작곡을 하였습니다. 현명천 시인이 즉흥적으로 1절 가사를 썼고, 2,3절은 김용호 시인이 지어, 1938년 김정구씨에게 노래를 부르게 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후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희생된 남편을 향한 그리움에 목메는 여인의 애절한 호곡 소리는 “그리운 내 님이여”로 승화되었고, 빼앗긴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은유되었습니다. 나라 잃은 서러움 때문인지 이 노래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큰 반응을 얻었습니다. 예원좌 악단의 장월성이라는 소녀 배우가 공연 막간에 나가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고국을 빼앗긴 사람들의 공감대를 타고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 노랫말과 그 가락 속에 우리 민족이 당했던 억압과 말할 수 없는 설움, 그리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애절함이 생생하게 담겨 있기 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194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인을 자극하는 민족성이 강한 노래’로 낙인찍혀, 발매 및 가창금지곡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눈물 젖은 두만강’은 6․25동란 이후에야 널리 애차되었는데, 실은 1930년대 일제 학정이 극에 달했던 배경 속에서 나라 잃은 민족적 아픔과 비극, 그리고 속히 독립되기를(님이 오시기를) 열망했던 노래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민족의 아픔과 염원을 담은 노래들이 발표된 후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 점점 젊은 세대들에게는 잊혀져가는 노래가 되었지만 그 노래들 속에 담긴 민족정신은 대대로 계승되어야 할 위대한 유산인 것입니다. 이러한 유서깊은 문화 유산들이 우리 후손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계속 불리어짐으로 전 국민에게 우국일념을 일으키는 국민의 노래로 영원히 남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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