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근현대사1. 구한말-일제강점기(4) | 운영자 | 2020-09-23 | |||
|
|||||
|
6. 야만적인 일제의 만행과 한국 신민화 정책 (1) 1919년, 수원 제암리 교회당 소실과 함께 희생된 23명 3․1독립운동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던 1919년 4월 초, 경기도 화성(당시 수원군)의 제암리 교회 청년들도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4월 5일, 옆 마을 발안 장날에 제암리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일본경찰과 군인들은 무력으로 만세 시위를 진압하였습니다. 그러나 투철한 신앙과 민족 사상으로 단련된 제암리 교회 청년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밤마다 뒷산에 올라 산봉우리에 봉화를 올렸고, 봉화를 올리면 주민들도 일제히 만세를 외쳤습니다. 만세 시위가 계속되던 중 일본경찰과 헌병대원들이 제암리 교회 청년들의 학살을 계획하였고, 만세 시위를 벌인 지 약 열흘 만인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헌병 제 78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1개 소대 30명을 동원하여 “지난 4월 5일 발안 장터에서 심하게 진압한 것을 사과 하고자 왔으니, 15세 이상의 남자 신자들은 모두 예배당에 모이라”라고 했습니다. 예배당 안에 사람들이 모이자, 모든 문은 폐쇄한 후 헌병대원 30명은 예배당을 포위하고 일제히 총으로 난사하기 시작했고, 교인들이 총상을 입어 쓰러지고 죽자 병사들은 예배당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때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신자들은 총으로 쏘거나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이중 어떤 아버지는 주일도 아닌데 예배당에 모이라고 하니, 무슨 일인가 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까지 데리고 참석했는데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죽여도 이 아이만은 살려 달라’라고 하며 창문으로 아이 얼굴을 밀어냈으나, 그 아이마저 칼로 난도질하여 죽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때 예배당 안에서 남자 21명, 예배당 뜰에서 부인 2명이 희생 되었고, 예배당과 22호 가옥이 소실되었습니다. 갑자기 남편을 잃고 아빠를 잃은 힘없는 부녀와 아이들은 집마저 불에 타버려 산 계곡에 엎드려 밤이슬을 맞으며 지내야만 하는 아픔을 겪었으니, 어린 자녀들은 배가 고프다고 울고 저녁이면 춥다고 울었으며 바람에 낙엽 소리만 나도 일본경찰과 군인이 곁에 나타난 줄 알고 몸서리쳤다고 하니, 그날의 아픔과 슬픔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일본의 학살과 만행은 서천리(용인시 기흥읍: 수원 근처) 부근 기독교인들이 사는 열다섯 군데에서도 똑같이 자행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정주, 맹산, 강서, 천안, 의주, 강계, 곽산, 위원, 창성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도 “남녀 교인을 포박해서 경성의 일본기독교회당에 가두고 무수한 십자가를 나열해 놓은 다음 포박한 남녀를 그 위에 매달고, 왜병이 앞뒤에 늘어서서 독을 바른 몽둥이로 때렸기 때문에 사상자가 심이 많았던”사건을 비롯하여 잔인무도한 만행이 계속되었습니다. (2) 일제의 황국식민화정책 3․1독립운동 이후 자신들의 무단정치(武斷政治. 1910-1919)의 한계성을 절감했던 일제는 문화정치(文化政治. 1919-1931)를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문화정치란, 무력 따위의 힘을 쓰지 않고 교화로써 다스리는 정치를 뜻합니다.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다음과 같은 교육시책을 발표했습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 역사 ․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 무능 ․ 악행 등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모와 조상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 사적․일본 인물․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叛)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이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철저하게 짓밟고 파괴하고 말살했습니다. 최우선으로 역사책 51종 20만 권 정도 강탈해 갔으며, 일본제국 식민으로 키우기 위해 한민족사를 다시 편찬해야 한다며 조선 총독부 직할의 ‘조선사 편찬위원회’를 만들었고 1925년 이 조직을 확대․강화한 ‘조선사 편수회’를 발족하여 1938년까지 37권에 달하는 「조선사」(2만 4111쪽)를 일본의 주장대로 편찬했습니다. 이를 식민사관(植民史觀)이라고 하는데, 우리 민족을 아예 뿌리째 없애고 한국인의 정체성과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일제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배의 학문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조작해 낸 역사관입니다. 식민사관에서는 한민족사를 대체로 다른 나라의 지배하에 살아온 민족이라 하며 스스로 자립할 능력이 없는 정체된 민족으로 부각시켜 한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일본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침략미화론으로 이어졌습니다. 애국심이란 역사와 그 기록과 올바른 전수를 통한 역사의식의 강화, 그리고 조상들이 일구어 온 문화적 유산의 토대 위에 생겨난 자연스러운 유대 관계를 통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놀드 토인비는 “어떤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 나라의 역사를 말살하는 것이 식민주의자들의 철학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일제는 1931년부터 만주와 중국 본토 등 대력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살하여 일본의 전쟁을 위해 한국인을 마음대로 동원․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전시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증거로 일본 천황의 궁성을 향해 절을 하게 했는데, 이것이 동방요배입니다. 황국신민화정책은 한국인을 일본 천황의 신민(신하된 백성)으로 만드는 일종의 민족말살정책이었고, 신앙의 자유를 유린하는 종교적 침략 행위였습니다. 1936년부터는 조선의 히틀러라고 하는 미나미지로(남차량: 1936-1941년 제 7대 조선총독으로 재임.) 총독이 부임하면서 각 음․면 단위마다 신사(神社)를 설치했습니다. 이때 한반도에 세워진 신사의 수는 2,300여 개에 달하였고, 그곳들은 한국 민족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말살시켜 가는 현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모든 한국 백성에게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아침 조회 때마다 암송케 하였습니다. ① 학교에서의 신사참배 강요 일제는 전국 교회를 상대할 경우 강한 반대 운동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 먼저 기독교 관련 학교에 손을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1935년 3월, 평남 지사로 부임한 야스다게는 11월 4일 평안남도 공․사립 중등학교 교장 회의를 소집하고 개회 벽두에 평양 신사에 참배를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 숭실학교 교장 윤산온 선교사와 숭의여자중학교 교장 서리 정익성, 순안 의명중학교 교장 이희판 선교사가 각각 신앙 양심상의 문제로 참석할 수 없다고 끝까지 거절하다가 교장직을 파면 당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기독교 학교는, 학교를 폐쇄하더라도 신사참배에 불응한다는 ‘마포삼열’계열과, 학교를 살리기 위해서 신사참배에 동조해야 된다는 ‘언더우드’계열로 분열되기도 하였습니다. ② 교회에서의 신사참배 강요 일제는 자신들의 정책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교회 지도자들은 노골적으로 박해하였습니다. 그 정책은 바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였습니다. 각 교회당 안에는 ‘가미다나’라는 작은 신단을 만들어 예배 드리기 전에 먼저 그것에 절을 하게 하고 동방요배를 강요했습니다. 이에 반대하면 가차없이 끌어다가 갖은 고문을 하고 옥에 가두고 수없이 매로 쳐서, 수많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이 땅에 순교의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교회들은 경남노회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는 10계명에 위배되는 죄요! 신사참배는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입니다!”라고 주동하여 1931년 9월 신사참배를 반대키로 결정한 바 있으나, 1938년 9월 제 27회 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를 필두로, 총회 산하의 총대 88묭,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등 총 206명이 일제의 권력 앞에 다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여기에 주기철․박봉진․허성도 목사 등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감옥에서 옥사하였습니다. (3) 주기철 목사의 순교 당시 한국에서 제일 큰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있던 주기철 목사는, 일제로부터 나를 되찾고 한국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 당하신 이 땅의 충실한 밀알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주현성(朱炫聲)씨의 4남 3녀 중 4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다 1919년 3․1운동 때, 2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자마자 마산 문창교회의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 때 눈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한 후 성령의 감동으로 성직에 대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1922년 경남노회의 추천서를 받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25세). 28세에 목회를 시작하여 부산 초량교회에서 6년(1925-1931)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6년(1931-1936년), 1936년 7월에는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39세). 주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5층 건물의 새 성전을 짓기 시작하여,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그런데 헌당 예배 당일, 예배 15분 전에 주 목사가 갑자기 제 1차 체포되었고 헌당 예배는 당회장 목사 없는 가운데 눈물 속에 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1938년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1938년 제 27회 총회, 총회장: 홍택기 목사)을 반대하다가 제 2차로 구속되었고, 이후 1938년 제 3차로 의성 경찰서에 연행되어 7개월 구금되었는데, 옥고생활 가운데 가장 혹독했다고 합니다. 그 후 석방되어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가지의 나의 기원’이란 제목으로 유언적 설교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1939년 9월 제 4차로 연행되었으며, 1939년 12월 19일 일제의 권력 앞에 아부하던 총회로부터 주 목사는 목사직 파면 처분을 받았고, 1940년 3월 24일 산정현교회가 완전히 폐쇄된 후 목사관 사택에서 주 목사의 가족이 추방되었습니다. 1942년에는 평양 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주 목사에 대한 잔악한 일제의 모진 고문과 학대는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주 목사는 일제가 기독교를 학대하며 강요했던 신사 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뾰족한 못판 위를 걷는 고문, 전기 고문 등을 연거푸 당했습니다. 온갖 고문으로 몸이 찢기고, 손발톱이 다 빠지고, 하루에도 여러 번 기절하곤 했습니다. 배고픔과 추위, 육신의 고통 속에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주전자에 물을 가득 담고 고춧가루를 잔뜩 담아 와서는 코와 입에 부어 넣고, 배가 농구공 두 개만큼 부불어 오르면 의자 두 개를 얹어 놓고 짓 눌렀습니다. 그러면 입과 코, 귀에서 붉은 물인지 핏물인지 모르는 것이 흘러나왔습니다. 면회 때마다 주 목사가 오정모 사모에게 야단치는 것이 있었는데, “왜 옷에 솜을 이렇게 두툼하게 넣어 와서 날 괴롭히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문실에서 한참 매를 맞고 피를 많이 흘리면 피가 두터운 솜에 전부 스며들어 그게 빨리 마르지 않았고, 고문할 때마다 끼얹는 찬물이 옷에 배어서 피, 고름, 물로 늘 젖어 있었습니다. 평양의 겨울은 영하 25도를 밑도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러면 옷이 다 얼어서 판자처럼 뻣뻣해져, 간수가 넣어준 음식을 가져오려고 움직이는 동안 아물어가던 상처가 또 터지고 피고름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솜을 안 넣으면 피가 흘러도 시멘트 바닥으로 다 흘러 버릴 것이고, 물을 부어도 금방 말라 버릴 테니까 그 고통은 없을 것인데 왜 자꾸 솜을 넣느냐?”라고 야단을 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주 목사의 감방에서는 단 하루도 찬송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찬송이 울려 나오지 않는 날이면 주 목사가 혹 운명하지는 않았는지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순교 당일 평양 형무소 소장의 주선으로 오정모 사모와의 최후의 면회가 이루어졌습니다. 면회라기보다는 금방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은 형무소 소장이 급히 연락하여, 주 목사를 병보석으로 퇴소시켜 병원에 입원시켜도 좋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오정모 사모는, 간수의 등에 업혀 나와 피골이 상접한 주 목사와 최후의 면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7년간 단 하루도 따뜻한 방에서 자지 않았던 오정모 사모는, 조금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살아서는 이곳을 못 나오십니다.”라고 오히려 강하게 격려하였습니다. 이제 주 목사는 “내 살아서 이 붉은 벽돌문 밖을 나가리라 기대하지 않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 나는 오래지 않아 주님 앞으로 갑니다.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잘 부탁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산정현교회와 조선의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하겟고. 나의 죽음이 한 알이 밀알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도 다시 간수의 등에 업혔습니다. 오정모 사모가 너무 가슴이 아파 “마지막으로 더 부탁할 말씀이 없으시냐”라고 물었을 때, 주기철 목사는 손을 한 번 흔들어 주면서,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이 먹고 싶은데...”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고문으로 난 상처와 영하 25도를 밑도는 감옥소의 냉기에 몸이 얼마나 쇠약해졌으면 위대한 순교자의 마지막 말이 ‘따뜻한 숭늉 한 그릇만 먹고 싶다’라는 말이었을까요? 이 면회가 이루어지고 다섯 시간 뒤인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해방되기 1년 4개월 전에 주기철 목사는 1938년부터 약 7년간의 옥고 끝에 47세로 평양 형무소에서 순교하였습니다. 후에 주 목사의 시신은 사과 궤짝 널빤지에 실려 집으로 모셔와 사모가 알콜로 몸의 구석구석을 닦았는데, 갖은 고문으로 온몸이 찢겨 있었고, 발톱과 손톱은 빠지거나 제 모양을 잃고 일그러져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주기철 목사는 한낱 불명예스러운 죄수로서 이 세상을 하직하였지만, 실로 그는 우리 민족 양심의 횃불이었으며, 한국 교회 순교적 신앙의 전통을 단절 없이 이어주는 한 알의 소중한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의 고귀한 신앙과 애국심은 순교의 형극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며, 마침내 민족 해방의 최후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4) 일본 침략 전쟁의 총알받이로 끌려간 젊은 청년들 조선의 많은 사람들은 일본에 강제 동원되어 1929년부터 탄광, 비행장, 군수공장에 노무자로 끌려가 노예처럼 일을 했는데, 그들의 수가 200만여 명에 달하엿습니다. 특히 일본 남양군도, 미얀마, 사할린 등의 오지에 끌려가서 죽도록 노동했던 자들이 약 70만 명에서 10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일제는 1943년에 징병제도를 발표하고 젊은 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전쟁터로 끌고 갔고, 일본의 침략 전쟁의 전선에서 총알받이로 희생되었습니다. 징병제로 끌려 간 젊은이가 21만 명이며, 학도병으로 끌려간 자가 4,500명이나 되었습니다. 일제는 패전을 앞두고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이들을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지시마 열도에서는 5,000여 명이 학살 당했으며, 만주의 731부대에서는 3,000여 명이 세균무기의 인체실험 대상자가 되었습니다. 일제는 패전 사흘 뒤인 1945년 8월 18일, 일본 전범의 재판과 관련해 일어날지도 모를 재일 한국인들의 폭동을 우려하여 한국인 노동자를 부산으로 송환하라는 명령을 일본 해군을 통해 예하부대에 내렸습니다. 이러한 명령에 따라 “금번 기회에 귀국하지 않으면 다음에 기회가 있을지 알 수 없다.”라는 말로 북해도의 각 탄광에 강제 징용되었던 자들을 감쪽같이 속여, 7,000여 명의 조선인을 태운 4,740톤급 일본 해군 군함 우키시마호는 8월 21일, 일본 북동쪽에 있는 아오모리현의 오미나토항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부산항으로 향하던 우키시마호는 돌연 방향을 돌려 24일 오후 5시 20분쯤, 일본 중부 동해 연안에 있는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갑자기 원인모를 폭음과 함께 배가 폭발하여 두 동강이 나면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사고의 원인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부산 도착 후 조선인의 보복이 있을 것이 두려워 일본군이 계획적으로 폭파시켰다는 증언이 함께 탄 일본 해군장교들에게서 즐비하게 나왔습니다. 조선인 승선자 3,725명, 사망자 524명, 실종자 수천여 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당시 배에 탔던 생존자의 말을 빌면 배에 탔던 한국인은 7,000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전해지며 현장을 목격한 현지 주민들에 의하면 사망자는 1,000명 이상이라 합니다. 이들은 일제의 강제 노역으로 노예처럼 연명하던 노동자와 그 가족들러서, 광복의 기쁨과 귀향의 즐거움을 채 느끼기도 전에 eP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5) 일본군의 성 노예로 끌려간 조선의 젊은 처녀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대륙침략을 시작했고, 1941년에는 진주만을 기습공격하고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제 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시켜 나갔습니다. 1932년 만주수립 이후 일본군의 성적욕구를 해소하기위한 목적으로 일제는 민간이 아닌 군의 주도 하에 위안소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된 이후부터는 전쟁이 확대되어 군인이 늘어가고 장기전이 되자 일제는 군위안소 제도를 확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동원된 여성들을 가리켜 위안부(慰安婦)라 하였는데, 병사 처지에서 보면 위안부였지만 날마다 강제로 반복해서 윤간 당하는 입장에서는 성 노예 그 자체였습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현지 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하기도 했으나, 옛 일본군 군의관인 아소 테츠오의 증언에 따르면 1938년 12월 상해 위안소에 있던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조선인이었습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일제는 조선의 처녀들에게 접근하여 취직을 시켜준다거나 좋은 돈벌이가 있다는 감언이설로 피해자들과 그 부모를 속여, 대대적으로 끌어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의 심한 수탈로 끼니를 때우지 못하고 민족 전체가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좋은 일자리가 있다. 낙원 같은 곳에 취직시켜 주겠다, 돈을 벌어 가족과 나라를 살리는 길이 있다.”라는 감언이설에 누구라도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군과 경찰이 나서서 폭력, 협박, 유괴, 납치, 인신매매 등을 통해 강제로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강제로 동원된 조선의 젊은 처녀들이 약 2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강제 연행 당시 피해자들의 연령층은 대부분 10대로, 이들 중에는 아직 초경이 없을 정도로 어린 자가 많았습니다(증언자 중에는 11세에 끌려갔다는 자도 있음). 증언자들에 의하면 단 사람도 이때 자신들이 위안소로 간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현지에 도착한 후에는 이미 거부나 도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군 위안소 생활을 통해서 돈을 모아 자기와 가족이 자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조차 이내 무너졌으니, 위안소 생활을 통해 돈을 벌었다는 여성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용규칙에 요금제도의 규정이 있었으나 아예 돈을 못 받았다는 증언이 대부분이고, 오히려 식비, 옷값, 화장품값 등의 온갖 명목으로 갚아야 할 빚만 늘어났으며, 군용수표를 받은 경우가 있었지만 일제가 망하자 휴지 조각이 되었습니다. 강제로 동원된 조선 처녀들은 군용열차와 군용트럭에 실려 일본군이 침공했던 아시아와 태평양 전역, 그것도 전쟁의 최전선까지 일본군을 따라 이동하였습니다. 극히 열악한 환경인 데다 전선 지대라 생명의 위협가지 감수해야 했습니다. 마굿간이나 전선지대의 텐트, 혹은 임시목조 가건물의 판잣집의 비좁은 공간에 갇혀, 마룻 바닥에 이불 하나로 모진 추위를 견디어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본 군인들의 성 노예가 되어 날마다 잔인한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위안소 경비가 엄격하여 철저한 감시 속에 외출은 금지되어 있었고, 간혹 탈출하다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사살을 당했습니다. 일본군 문서에 의하면 위안소의 명칭은 ‘군위안소, 군인클럽, 군인오락소, 위생적인 공중변소’ 등으로 불렸습니다. 처음에는 니꾸이지(二クイチ)(29:1)정책이라고 하여 한 여자가 29명의 일본군을 상대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증언자들에 의하면 실제는 이러한 기준이 무시되고 한 명의 위안부가 60-70명의 군인들을 상대할 것을 요구 당했습니다. 일본 군인들은 위안소를 찾아와 줄을 서서 연거푸 쉴 사이도 없이 들이닥쳤습니다. 줄을 서는 군인들은 넘치고 여성은 부족했으니, 위안소 규칙과는 상관없이 ‘들어오는 대로’ 군인을 상대해야 했고, 그것을 저항하거나 거절하면 닥치는 대로 때리고 짓밟아 온 몸은 멍들고 찢겼으며, 공개적으로 칼로 난도질당하거나 목이 베어 비참하게 살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성병이 심해지거나 임신이 되면 606호 주사와 중독성이 큰 수은이 든 약을 먹이는가 하면 심지어 월경 중에도 쉬는 날이 없이 연속적인 성적 학대를 당했습니다. 그렇게 보통은 7-8년, 길게는 10년 이상을 당했습니다. 임종록(林宗綠) 씨가 1974년 3월자 아세아공론에 게재한 여자 정신대(女子挺身隊)라는 글을 보면 일본 군인들의 야만적인 행동의 극치가 드러납니다. 「거의 모두가 한국 처녀인 한 떼의 여자들이 트럭에 실려 왔다. 여자 정신대라고 불리는 위안부들이었다. 막사를 모포 따위로 칸을 막아서 한 칸에 한 사람씩 배치한 다음 전 장병을 광장에 집합시켰다. 부대장은 한바탕 연설을 늘어 놓은 다음, 여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막사 속으로 사라졌다. 병졸들은 막사 앞에 열을 짓고 자기 차례가 되기를 목마르게 기다렸다. 한 사람이 들어가서 볼 일을 보고 나오는데 십 분이 채 안 걸렸고, 길어야 십오 분이었다. 십 분이 지나 십오 분 가량 되면 기다리는 병졸들의 입에서는 욕설이 마구 튀어 나왔다. 여자들은 속치마를 입었다가 벗었다가 할 사이도 없었다. 천장을 향해 벌거벗은 채 드러누워 있을 다름이었다. 마치 나체(裸體) 인형과 같았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여자들의 하복부는 피로 물들어갔다. 줄을 선 병졸들이 삼분의 일도 줄어들기 전에 여자들은 의무실로 실려 나갔다.」 야수같은 일본 병사들은 남자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꽃다운 나이의 십대 소녀들의 온 몸을 짐승같이 달려들어 걸레처럼 만신창이가 되도록 망가뜨렸습니다. 게다가 병에 걸려서 위안부 노릇을 못하게 되면 어디론가 끌려가 실종되기 일쑤였습니다. 우리 대한의 딸들 20여만 명이 하나같이 그렇게 살점이 찢기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늘 불안과 초조와 공포 속에서 신음해야 했습니다. 공중변소에 배설을 하듯 짐승만도 못한 짓을 행한 일본인들의 사악한 만행과 그 잔악성은 너무도 기가 막히고 치가 떨리고 소름이 끼칩니다. 더욱 천인공노할 일은, 패전 이후 일제가 모든 흔적을 없애기 위해 위안부 노릇을 했던 자들을 대부분 사살했고, 혹은 자결을 강요하며 현지에 버려지도록 했습니다. 일본군의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마음속 깊이 수치심으로 응어리져 귀향을 단념한 이도 많았으며, 숱한 어려움을 헤쳐가며 고향 땅을 밟은 이도 있으나 대부분 일본군에게 짓밟혔던 혹독한 세월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k 위안부 중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고 혼자서 사는 이가 많았는데, 그들은 위안부의 삶이 남긴 상처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독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일평생 신체적 질병은 말할 것도 없고, 순결을 잃은 여성이라는 굴레와 한(恨)을 지닌 채 고향 사람, 친척, 부모 앞에 나서지 못하고 숨을 죽이며 살았습니다. 자신의 청춘이 망가뜨려진 데 대한 분노와 화병, 불안증, 피해의식, 심각한 우울증, 불면, 악몽에 시달리는 등 숨질 때까지 참혹한 나날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조선의 딸들, 대한의 딸들입니다. 그러나 아무 힘이 없던 식민 시대의 딸들이었기에, 그야말로 한 순간의 자유도 없고 보상이 없는 데도 말 한 마디 못하고 시키는 대로만 당해야 하는 굴욕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실로 울밑에 선 처량한 봉선화처럼,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의 종이 된 자의 설움과 치욕이 그처럼도 처절했습니다. 정절(貞節: 여자의 곧은 절개)과 정조(貞操: 여자의 깨끗한 절개와 지조, 성적 순결을 지키는 일)를 생명보다 더 중시했던 우리 조선의 처녀들이, 죽음보다 더한 수모를 피눈물을 삼키며 감내해야 했습니다. 참으로 우리 딸들이 당한 그 기막힌 비극은, 곧 내 나라 조선이 당한 아픔이며 비극입니다. 이보다 더한 국가적인 수모가 세상에 또 있을까... 너무나 혹독하게 당했던 역사적 사실들이, 이념과 세월의 힘에 밀려서 묻혀 버리거나 의도적으로 덮히거나 왜곡된 채 남의 일처럼 쉬 잊혀져버린다면, 그것은 나라의 기초와 뿌리를 상실하는 더 무서운 비극이 되고 맙니다. 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이 신상 공개를 꺼리다가 1991년 8월, 46년만에 용감하게 나서서 자신이 일제 시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세상에 처음 공개하셨습니다. 김 할머니가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라고 간곡히 호소하며, 당시 조선에서 끌려간 위안부들이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사실을 낱낱이 고발함으로써 일제의 잔악상이 전 세계에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국가적인 수모를 다시 당하지 않으려면 이 비통한 역사의 흔적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세밀히 살펴서 우리 후손들이 그 진상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다시는 내 나라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사실, 그리고 나라의 주권을 빼앗겨서는 안 되는 이유를 거듭거듭 우리의 후대에게 각인시켜 주어야 합니다.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가 무수한 채찍 속에서 몸이 부숴지도록 노예생활을 했던 대한의 젊은 아들들, 위안부로 꽃다운 청춘을 강제로 빼앗겨 밤낮으로 고향산천과 부모를 그리워하며 낯선 타향에서 눈물과 아픔 속에 지내었을 우리 대한의 젊은 딸들의 희생, 그것이 대한민국 해방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무참히 학살을 당했거나 끝내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타향에서 슬픔과 외로움을 삭히다가 쓸쓸히 눈감아야 했던 분들... 지금 발전된 대한민국의 밑뿌리에는 이토록 비통하고 아프고 피눈물 나는 고귀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분들의 처절했던 희생을 기억하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또 새겨야 하겠습니다. 일제 36년간의 혹독한 수난과 치욕과 압박을 겪은 세대들은, 감히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하고 끔찍스러운 고통을 견뎌냈습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말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의 청장년을 징병과 징용으로 끌어가고 젊은 여성들을 종군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강제로 동원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대를 이을 젊은 남녀 대부분이 끌려감으로써, 이 땅에는 어린이와 노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조선 여성에 대한 강제 종군 위안부 정책은, 당장은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동물적으로 처리하는 수단이었으나, 궁극적으로는 조선 민족을 말살하려는 음모가 숨어 있었던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일제(日帝)의 패망이 조금이라도 더 늦었더라면, 조선인의 출산율은 급격히 떨어져 대한민국은 민족 단절이라는 최대 위기를 맞게 되었을 것입니다.
|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