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관교육

  • 홈 >
  • 커뮤니티 >
  • 국가관교육
국가관교육
근현대사1. 구한말-일제강점기(3) 운영자 2020-09-23
  • 추천 1
  • 댓글 0
  • 조회 108

http://www.ynfaith.com/bbs/bbsView/118/5799195

4. 1910829, 한일합병(경술국치)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후 일본에서는 하루빨리 조선을 완전 합병하라는 여론으로 들끓었고, 결국 일본은 1910723일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제 3조선통감으로 보내었습니다. 외국 신문기자 프레데릭 맥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이토 히로부미는 채찍으로 사람을 쳤지만 그는 쇠사슬로 사람을 칠 인물이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을사늑약 체결 5년 후, 1910829, 우리나라는 일본의 탄압에 못 이겨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 때, 한일합병 조약 체결 사실을 발표하게 됩니다. 당시 하늘에서도 일제의 강압에 의한 한일합병을 괴로워한 듯 1910년 운명적인 그해, 810일을 전후해서 일본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집중호우가 쏟아졌습니다. 곳곳에 산이 무너지고 제방들이 터져 강물이 범람하였으며, 철도와 도로가 불통되어 연락이 두절되는 곳이 속출하였습니다. 동경 일본 외무성의 시바타는 한국 강점을 위해 하루에도 여러 차례 서울의 통감부 통감 비서관 고다마 히데오와 전문을 주고 받았는데, 그 가운데 1910814일 정오에 보낸 전문에도 당시의 심각한 수해 상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번 수해는 심각해서 도쿄부 주변 및 인근 현의 상태는 필지(筆紙)로써 다 할 수 없음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된 후, 일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 했던 순종은 결국 일제와의 합병을 알리는 조서(詔書)를 발표했습니다.

짐은 동양 평화를 위해,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써 양국이 서로 합쳐 일가를 이루는 것은 상호 만세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의 통치권을 모두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제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필요한 조문(條文)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한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받기 위해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위임하고 대일본제국 통감부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회동, 상의해 협조하도록 하노라. 여러 신하들도 또한 짐의 확실한 뜻을 본받아 시행하도록 하라.”

 

1910822일 오후 2, 창덕궁 대조전 흥복현에서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습니다. 총리대신 이완용, 내무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대신 이재곤, 왕족대표 이재면, 원료대표 김윤식, 궁내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이병무 등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완용은 한일합병을 해야 하는 이유를 1시간 넘게 설명하였고, 이완용의 설명을 들은 대신들은 항의하지 않았으며, 통곡하거나 우는 자도 없었습니다. 총리대신 이완용은 이 날 한일합병안을 가결시키는 동시에 스스로 일한양국병합전권위원이 되어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관사로 찾아가 합병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를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하며, 경술 9이 국가와 백성을 배반하고 나라를 일본에 넘겨준 것입니다. 윤덕영, 이완용, 한상룡, 조중응, 신흥우 등은 일본과 합병 한 것이 만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대한제국의 멸망은 부정부패와 내부의 적 때문이었습니다. 이완용은 한일합병의 주역으로 훈 1등 백작과 잔무처리 수당 60여원, 퇴직금 1,45833, 총독부의 은사 공채 15만 원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라 잃은 비통한 심경으로 한일합병 조항의 내용을 모두 소개해 봅니다.

 

1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정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함.

2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함.

3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태황제폐하황태자폐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기 지위에 응하여 상당한 존칭위엄 그리고 명예를 향유케 하며 또 이를 보지(保持)하기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함.

4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과 기 후예에 대하여 각기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향유케 하며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함.

5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인으로서 특히 표창을 행함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금을 여()할 것.

6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서 전연(全然) 한국의 시정을 담임하고 동지에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와 재산에 대하여 충분한 보호를 하며 또 기 복리의 증진을 도모할 것.

7 일본국 정부는 성의와 충실로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하는 한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관리로 등용할 것.

8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우증거(右證據)로 량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하는 것이다.

 

륭희(隆熙) 4822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명치(明治) 43822통감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이 조약 또한 을사늑약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였으니 이보다 더 비참하고 부끄러운 문장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1910829일 일본이 강제로 순종에게 국새를 찍을 것을 강요하였으나 순종은 끝가지 거부하였습니다. 당시 순종 황제는 한일 합병은 무효라고 하면서, “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선포한 것으로 나를 유폐하고 협박하여 한 것이노라.”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한일합병조약 체결과 함께 제 27대 조선왕조는 519년 만에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한반도 전체는 하루아침에 남의 땅이 되었습니다. 2,300만 전 국민은 부모 잃은 고아처럼 불쌍하고 가련한 신세가 되어 생지옥같은 일제 식민통치하에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4천 년 역사에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숱한 전쟁을 겪었으나, 외적이 이처럼 우리나라의 백성을 토막치고 강토를 짓밟으며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은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삼천리 금수강산을 삼키기 위해, 일제가 15년 동안 진행시켜 왔던 것이고 잔악한 일제의 침략 야욕의 필연적인 귀결이었습니다.

 

실로 1910829일은 한일합병에 의해 국토와 국권이 완전히 박탈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국치(國恥)의 날입니다. 나라의 국맥이 36년 동안 끊어지게 된 날이요, 왜적의 비참한 식민지 종살이로 굴러 떨어진 날입니다. 이날 온 겨레는 찬란한 문화와 미덕의 나라가 사라져 가는 모습에 비탄에 젖어 통곡했습니다.

36년간 국권을 상실하면서 한꺼번에 몰아닥친 것은, 자유 박탈, 인권의 유린, 국혼의 상실, 말과 글과 이름의 상실 등 이렇게 우리나라는 너무도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일을 당했습니다. 실로 이 나라 백성과 땅은 한 세대가 넘도록 암흑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죽을 만큼 고생스러운 쓰디쓴 아픔을 이를 악물고 참아야만 했습니다. 36년은 너무나 길고 오랜 세월이었습니다. 궁궐은 폐허가 되어 잡초만이 무성했고, 망명한 백성들은 객지에서 온갖 고생과 푸대접 속에 방황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야만 했습니다. 국내에서는 빼앗긴 나라를 언제 다시 찾는다는 기약도 없이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 통치에 짓눌려, 억울하고 서러워도 대항 한 번 못 해보고 망국의 한과 설움을 톡톡히 겪어야 했습니다.

 

 

 

 

 

 

 

 

 

 

5. 1919년 기미년 31독립운동

 

한일강제합병으로 한반도의 식민화가 시작된 암흑의 세월 9, 191931일에 이르러 늦게나마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울분으로 온 국민이 하나되어 31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의 200만 이상 국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애국 애족의 민족혼이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타올랐습니다.

 

 

(1) 31운동의 힘을 고양시켜 준 신민회와 105인 사건

‘105인 사건의 시발점은 안명근 사건이었습니다. 1910829일 한일합병조약으로 온 나라가 등불 꺼진 캄캄한 밤을 만났을 때, ‘해서교육총회의 중심 인물로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매진했던 안명근 선생은 더 이상 국내에서는 활발한 독립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서간도에 한인청년들을 이주시켜 학교를 세우고, 이들을 교육하여 중국의 무관학교에 보내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일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무기 구입 등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므로, 안명근 선생은 황해도의 안악과 신천 지역의 부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191011월 황해도 신천의 민병찬 등이 이 일을 일제 헌병에게 밀고함으로써, 191012월 안명근 선생은 사리원에서 평양으로 가던 중 일경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일제는 이 일을 무기 구입을 위한 강도 및 강도미수사건으로 확대 과장하여 가혹한 고문을 가하였습니다. 또 이사건을 의도적으로 부풀려 황해도의 신민회 관계자 160여 명을 잡아들였습니다.

신민회는 1907420일경, 안창호가 귀국 2개월 만에 상동교회의 청년학원을 중심하여 만든 비밀결사 조직입니다. 신민회의 창립 발기인은, 안창호를 제외하고 6인이었는데, 양기탁, 이갑, 유동설, 이동휘, 이동녕, 정덕기이며,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 지역과 서울 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창립되었습니다. 처음 신민회는 전덕기 목사가 상동교회 내() 비밀결사의 성격을 띤 기독교 구국 단체인 상동청년학원을 토대로 조직되었으므로, 신민회 초기 발기인들은 상동교회 교인이거나 그 교회 청년학원과 직간접으로 연관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민회는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국가적 위기 속에 상실되어가는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구국 의식으로 뭉친 모임이었습니다. 한 예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매일 저녁 남녀교인 수천 명이 구국집회로 모였는가 하면 전덕기, 정순만은 평안도 장사 십수명을 모아 박재순 등 을사 5적을 암살할 모의를 계획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신민회를 비밀결사로 할 것인가 아니면 공개단체로 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많았습니다. 안창호는 당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구국 학회와 구국 단체(대한자강회 등)들이 일제의 강화된 탄압 속에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러한 단체와는 구분되는 비밀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보다 투쟁적이고 적극적인 구국운동을 모색하되, 일본 총독부에게 해산을 당해서는 안 되겠기에 비밀결사를 고집한 것입니다. 실제로 일제는 1909년까지 신민회 조직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비밀조직이었던 만큼 신민회에 가입하기 위한 조건은 철저했고, 수차례 테스트 과정을 거쳐 수개월 만에 비로소 가입이 허락되곤 했습니다. 가입절차에 있어서 핵심적인 자격 조건은 그 목적에 걸맞게 첫째는 투철한 국가관(國家觀)과 애국심(愛國心)이 있는가였고, 둘째는 국가를 위해 피를 흘릴 수 있을 만한 담력(膽力)과 희생정신(犧牲精神)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민회 회원은 주로 학생층이었으며, 그 연령대는 10대부터 있었으나 20대가 가장 많았고, 평균연령이 30대를 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대한매일신보, 소년 등 잡지를 통하여 신 사상을 국민들에게 계몽하였으며 독립운동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비밀결사 조직으로 활동하던 신민회가 약 2년 만에 일제에게 발각이 되기에 이릅니다. 일제가 항해도의 신민회 관계자 160여 명을 잡아들였던 이 사건은 안악 사건또는 안명근 사건이라고도 부릅니다. 일제는 심한 폭력과 고문을 가하여 허위 자백을 받아내는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사실을 부풀려 날조하였습니다. 일제는 19101227, 압록강 철교의 낙성식에 참석하려고 떠났던 당시 데라우치 총독이 선천역에 잠시 하차하는 순간 안중근의 사촌 안명근이 데라우치를 처단하려 했으나, 경비가 너무 삼엄하여 저격 순간을 찾지 못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고 또다른 조작극을 꾸몄습니다. 일제의 거짓말 조작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신민회의 주요 간부들이 여섯 차례에 걸쳐서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조작하여, 그들이 만든 거짓된 각본에 따라 회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일제는 신민회를 아예 없애버리려고 기독교계 인사 이명룡, 김동원, 윤치호, 유동열, 양기탁, 양전백 등과 목사 6, 장로 50, 집사 80명을 포함, 평소 일제에 비협조적이던 700여 명의 인사를 연루시켜 검거하였습니다. 검거된 자는 지역적으로 신천, 평양, 정주순으로 많았습니다. 이들은 재판대에 세우기 위해 재판소까지 새로증축하였다고 하니, 이 사건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만합니다.

19121월부터 일본 경찰은 조작, 날조된 내용을 가지고 허위 자백을 받기 위해, 당시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의 지시로 이들에게 가장 악독하고 잔학무도한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주먹과 곤봉으로 온 몸을 사정없이 구타하고 천장에 매달아 때리며, 불로 단근질하기를 8시간씩이나 하였습니다. 그래도 허위 자백을 하지 않자 산으로 끌고가 소나무에 묶어 놓고 칼로 위협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허위로 작성한 내용을 암기하여 자백하도록 몇 전이고 연습시켰으며, 암기할 때까지 고문을 가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포악하고 반인륜적이며 야만적인 무단 식민통치의 실상은, 외국인 선교사들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습니다. 숱한 고문 중에서도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여러 날을 굶긴 후 그 앞에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고 이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한번 고문이 시작되면 3-4시간 계속되었으며, 그러기를 35일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진행하였는데, 모진 고문은 한 초() 한 초씩 그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으나 고문 후에 몰려오는 허기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복 속의 솜을 뜯어먹거나, 문창호지를 씹어먹는가 하면 심지어 깔고 자던 썩은 짚을 씹어 삼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1912830, 1심에서 18명은 충분한 근거가 없다.”라는 이유로 무죄를 언도받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습니다. 그래서 ‘105인 사건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등 주모자급 6명은 10, 그 외 18명에게는 7, 39명에게는 6, 나머지 42명에게는 5년이 각각 선고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유례가 없던 최대 규모의 공판이었습니다.

유죄 선고를 받은 105명이 불복상고(不服上古)를 제기하여, 공판 과정에서 피의자들에 대한 고문 사실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모든 사건이 일제의 조작에 의한 것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게다가 피의자들의 의연한 진술이 계속되고 고문 받은 상처를 내보이며 일제의 잔인한 고문 방법을 폭로하자, 이에 당황한 일본 재판부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꺼려하여 제 2심에서 105명 중 99명을 무죄로 석방하고,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등에게 징역 6년형, 옥관빈에게 5년형을 선고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명백한 증거 자료가 제출되고 사건의 허구성이 분명해지자, 피의자들은 물론 방청인 모두가 환호와 고함과 울음으로 재판정을 가득 메웠습니다.

실형을 받았던 6명이 19152월 천황 대사관 특사 형식으로 3년이 못 되어 출소하였는데, 이때 평양역에는 약 9천여 명의 시민들이 나와서 국가와 신앙을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었던 그들을 극진히 환영하였습니다.

한편 105인 사건으로 선교사들은 국외로 추방시키려 했던 일본은, 본 사건이 확대되어 세계 여론으로부터 종교 탄압이라는 거센 항의와 비난을 받게 되자 선교사들에 대한 구속 및 추방을 철회하였습니다.

105인 사건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대였던 신민회의 실체가 드러나 해체된 것은,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국민들의 항일독립정신이 더욱 고취되었고 신민회의 항일의식을 계승, 승화, 발전시켜 국내외에서 많은 이들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는데, 그 민족적 힘이 약 10년 후에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한 31운동에서 잘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1915년을 전후해 풀려난 신민회회원 대부분은 191931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또한 같은 해 4월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우는 지도력을 나타냈습니다.

 

 

(2) 31독립운동의 기폭제

31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였습니다. ‘그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라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1918년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민족 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약소민족의 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피압박 민족들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특히 우리 민족에게는 국권회복의 큰 소망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큰 용기를 얻어 이 기회에 독립을 달성해 보자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남강 이승훈과 기독교 목사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박희도가 지도하는 기독학생회도 이 운동에 관여했습니다.

 

또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자극했던 결정적 계기는 바로 조선의 제 26대 왕 고종황제가 1919121일 오전 6, 6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서거한 사건입니다. 일제는 뇌출혈로 사망한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일본에서 유학 중인 영친왕 이은(李垠)과 왕족 니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의 결혼이 1919125일로 발표된 이후 갑자기 새벽에 쓰러져 사망한 고종의 석연찮은 죽음 때문에, 항간에는 일제의 독살설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영친왕은 이미 유학 전민갑완이라는 약혼녀가 있었기 때문에 고종은 자신의 아들이 일본 왕족과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아 반대하였고, 이 혼인은 1920428일로 연기되었습니다.

고종황제의 돌연한 부음에 놀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유신영(1853-1919)이라는 노인의 유서에는, 당시 백성들이 받은 커다란 충격과 극에 달한 민족적 슬픔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독립기념관 소장 자료, No. 3018).

나라가 없으나 임금은 있어 복국(나라를 되찾는 것)될까 기다렸더니 시방은 상황 돌아감이 쓸데없으니 어찌 사노, 이러므로 인산 날로 죽기 작정하니 세상은 하직이로다...

국상 기간 내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던 고종황제의 죽음을 애통하는 통곡소리는, 나라 잃은 백성의 울음이요 통곡이었습니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는 거적자리가 펴졌고, 오고가는 조문객들이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자발적으로 줄을 지어 기다렸다가 한 무리가 꿇어 엎드려 통곡하고 일어나면 또 다른 한 무리가 엎드려 통곡하였습니다. 호곡하는 소리는 지금의 덕수궁 앞 광장에 메아리쳐 하늘에까지 닿는 듯했습니다.

실로 고종황제의 일제독살설은, 나라 잃은 설움으로 일제에 짓눌려 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민족적 의분과 울분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거기에는 남녀노소 계급 지위 따위의 차별이란 전혀 없었고 다시 나라를 되찾아보자는 일치된 민족감정뿐이었습니다. 한편 일제는 승하한 고종황제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심에 깜짝 놀라 소요의 조짐이 있는지 잘 감사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이희승 씨는 고종황제의 국장을 보기 위해 많은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오고 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며칠 전부터 전국 각지에서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인산(因山)을 구경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 극빈자가 아닌 이상, 서울로 오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 서울역 출구에서는 인파가 마치 폭포수 모양으로 줄을 대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서울 시내에서는 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길이 없어, 여관들은 물론 초만원이요, ... 그러고도, 시내의 대소 도로의 노면에는 노숙하는 사람들이 또한 굉장히 많았었다. ... 기회는 대단히 좋았었다. 밖으로부터 민족자결의 선풍이 불어왔고, 안에서는 서울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있었으므로, 어떠한 운동이나 거사를 하기에는 천재일우의 절호한 기회였던 것이었다.

 

온 국민과 민족 대표들은 나라 잃은 슬픔이 극에 달하였던 때, 고종황제의 국장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서울로 모여들 것을 예상하고, 이 시기를 독립운동 절호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고종황제의 인산일(因山日장례식)33일을 이틀 앞둔 31일에 거족적인 민족 운동인 31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3) 31독립운동 정신의 집약, 기미독립선언문

1919312,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서 5천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역사적인 독립선언문 낭독이 있었고, 그 후에 일제히 독립만세를 우렁차게 외쳤습니다. 같은 시간 태화관에서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29인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에는 31독립운동의 정신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아래는 기미독립선언서의 원문을 알기 쉽게 해석하여 옮긴 것입니다. 이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19192월부터 밤에 3주 동안 삶이 없는 틈을 타서 한 편마다 3-4일씩 걸려 기초를 작성했습니다. 31일 이 독립선언서가 선포되자, 일제는 그 필자를 찾느라고 혈안이 되었고, 후일 공판에서 최남선에게 선언서 끝에 붙은 공약 3장의 2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라는 구절이 내란죄에 적용된다고 하여 크게 문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논란을 벌인 공약 3장은, 실은 최남선이 아닌 한용운이 추가한 글이었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 (해석)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하는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이것으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으로써 자손만대에 알려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며 이것을 선언하는 터이며, 이천만 민중의 충성을 모아 이것을 널리 알리는 터이며,

사람된 양심의 발로로 말미암은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것을 드러내는 터이니,

 

이는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므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것을 막고 누르지 못할 것이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당하여, 역사 있은지 여러 천년의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 지 이제 10년이 되도다

우리가 생존권마저 빼앗긴 일이 무릇 얼마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성을 가지고 세계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일이 무릇 얼마인가!

 

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풀어 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로의 두려움을 없이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도의가 짓눌려지는 것을 다시 살려 키우려면,

사람마다 인격을 옳게 가꾸어 나가려면,

불쌍한 아들딸들에게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이 길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하려면,

우선 급한 것이 겨레의 독립인 것을 뚜렷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속의 칼날을 품으니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가 되고,

인륜과 도덕이 무기가 되어 우리를 지켜 주도다.

우리가 나아가 이것을 얻고자 하는데 어떤 힘인들 꺾지 못하며 물러서 계획을 세우는데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할까?

 

병자수호조약(1876) 이후, 시시때대로 굳게 맺은 약속을 저버렸다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탓하려 하지 아니 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인은 실생활에서 우리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이 터전을 식민지로 삼고, 우리 문화민족을 마치 미개한 사람들처럼 대하여 한갓 정복의 쾌감을 탐낼 뿐이요, 우리의 영구한 사회의 기틀과 뛰어난 이 겨레의 마음가짐을 무시한다 하여, 일본의 옳지 못함을 책망하여 하지 아니하노라. 자기를 일깨우기에 바쁜 우리에게는 예로부터의 잘못을 따져볼 겨를도 없노라. 오늘 우리의 할 일은 다만 나를 바로 잡는 데 있을 뿐 결코 남을 헐뜯는 데 있지 아니 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에 따라 자기 집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는 일일 뿐,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의 감정을 가지고 남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일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인 일본 위정자의 공명심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이 그릇된 현실을 고쳐서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른 바탕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

처음부터 이 겨레가 원해서 된 일이 아닌 두 나라의 합병의 결과는 마침내 억압으로 이루어진 당장의 편안함과, 차별에서 오는 고르지 못함과, 거짓된 통계 숫자 때문에 이해가 서로 엇갈린 두 민족 사이에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도랑이 날이 갈수록 깊이 패이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한번 살펴보라.

용감하게 옛 잘못을 고쳐 잡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바탕한 우호적인 새 시대를 마련하는 것이 서로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가까운 길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또한 울분과 원한이 쌓이고 쌓인 이천만 국민을 힘으로 붙잡아 묶어 둔다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보장하는 노릇이 아닐 뿐 아니라, 이것이 동양의 평안함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사억 중국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새암을 갈수록 짙어지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 전체가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운을 초래할 것이 뻔한 터에, 오늘 우리의 조선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버티고 나아갈 이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의 평화가 중요한 일부가 되는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에 꼭 있어야 할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라. 이것이 어찌 감정상의 문제이겠느냐!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계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새 봄이 온 누리에 찾아 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 얼음과 찬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저 한 때의 시세였다면, 온화한 바람, 따뜻한 햇볕에 서로 통하는 낌새가 다시 움직이는 것은 이 한 때의 시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돌아오는 마당에 세계의 변하는 물결을 타는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가 본디 타고난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가 넉넉히 지닌 바 독창적 능력을 발휘하여 봄기운이 가득한 온누리에 겨레의 뛰어남을 꽃피우리라. 우리는 그래서 분발하는 바이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전진하나니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음침한 옛 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룩하게 되누나.

천만세 조상들의 넋이 우리를 안으로 지키고,

전 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으로 보호하나니

일에 손을 대면 곧 성공을 이룩할 것이라.

다만 저 앞의 빛을 따라 전진할 따름이로다.

공약삼장

.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 모든 행동은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나라를 세운 지 사천이백오십이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 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33()

 

 

 

 

여기 독립선언서를 살펴보면, 일제의 무자비한 통치에 반항하거나 원망하는 내용은 전혀 없고, 다만 우리 민족이 자립 자존해야 한다는 대의에서 출발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신분과 성별을 초월한 자유평등의 정신, 세계평화와 인류복지를 추구하는 우리나라의 고매한 민족 정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기미년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로 시작하는 1948년 제헌헌법의 전문은 대한민국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31정신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계승되어야 할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건국 정신입니다.

 

이 독립선언문의 인쇄는 천도교가 경영하던 보성사 인쇄소에서 맡아, 227일 밤 6시 이후 굳게 문을 걸어 잠그고 밤새도록 22천장을 찍었습니다. 그 인쇄물은 보자기 또는 가마니에 싸여, 또는 학생의 책가방이나 행상의 상자 속에 실려 서울 시내를 비롯하여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이갑성은 선언문 400장을 보따리에 싸들고 경상도로 떠났고, 개성북부 예배당 강조원 목사에게는 모월 모일 몇 시 차로 내리는 7-8세 가량의 어린아이 괴나리봇짐 속에 독립선언서 몇 장에 들어 있다는 편지를 띄웠습니다.

 

 

(4) 전국적으로 확산된 31독립운동의 불길

191931일 토요일, 아직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은 싸늘한 날씨였습니다. 파고다 공원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서울 주변 산봉우리마다 횃불이 올라가고, 독립만세운동의 심지가 당겨졌습니다. 많은 한을 안고 떠나가는 조선의 큰 아버지 고종황제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선 주민들, 그리고 민족적 일체감으로 뜻을 합하여 지방에서 상경한 많은 군중들과 수천의 학생들도 이에 합세하였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서울로 모인 수십만이 어느새 일체를 이루어 한 목소리로 열광적인 만세를 연달아 외쳤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행진하는 시위 군중들의 수가 늘어나 그 기세는 맹렬했습니다. 이에 일본 관헌들도 처음에는 멍청하게 수수방관할 뿐이었습니다. 숨도 한번 크게 쉬어보지 못하고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대한독립을 감격에 겨워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마음껏 목이 터져라 연거푸 외쳤습니다.

 

같은 31, 의주, 선천, 평양, 진남포, 안주, 원산, 함흥 등지에서도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온 천지에 메아리쳤습니다. 서울에서만 첫날 40-50만 명이 참가했고 고종의 장례식인 33일만 잠깐 조용했다가 그 후로 끈질기게 지속되었습니다.

 

이렇게 31운동의 함성은 전국 곳곳으로 울려 퍼져 동네 청년의 사랑방에서, 또 시골 아낙네의 골방에서도 수많은 태극기가 그려지고 수많은 독립선언문이 쓰여졌습니다. 북부 지방에서는 3월 초순부터 일어났고, 서울을 제외한 중부와 남주 지방에서는 3월 중순부터 5월 말까지 독립운동의 불길이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만주, 연해주, 미국 등 해외에까지 확산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경의선경원선경부선 등 철도변에 위치한 주요 지방으로 전파되었는데, 나중에는 산골과 섬마을까지 급속도로 파급되었습니다. 그렇게 31운동은 전국 211개 군에서 1,542차례나 일어났습니다. 거기에는 남녀노소, 유생, 교사, 학생, 종교인, 상인, 농민, 노동자 등 각계 각층 200여만 명의 백성들이 지역과 종교, 신분을 초월하여 참여하였습니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라고 한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지표로 한국 민족이 살고 있는 곳이면 국내든 해외든 거족적이고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실로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으로,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온 국민이 하나되어 부르짖은 대한독립만세는, 세계의 지축을 흔들 정도로 엄청났습니다. 저마다 흰 저고리를 입고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어나와 끓는 피와 함께 토해내는 거센 만세 소리,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때 손에는 단 하나의 무기도 없었고, 든 것이라고는 오직 태극기뿐이었습니다. 아무런 난동 없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애끓는 가슴만이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5) 어린이, 기생, 거지까지 만세 대열에 동참

만세 대열에 학생, 농민, 노동자 등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참여했는데, 고위계층보다는 사회적으로 무시받고 천대받는 힘없는 백성들이 많았습니다. 저들은 오직 조국을 부둥켜 안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는 일념으로 함께 어우러져 너 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섰던 것입니다.

흥원 시흥 강진에서는 보통학교 어린이들이 앞장서서 어른들의 잠을 깨웠습니다. 진주에서는 걸인 독립대까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거지가 된 것은 왜놈들이 우리 살 길을 빼앗은 탓이다. 우리 나라가 독립이 안 되면 이천만 동포가 모두 거지가 될 것이라.”라고 당당한 논리를 펴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심지어 해주, 안성, 창원에서는 기녀(妓女)들까지 북채를 던지고 유흥에 나서기를 거부하며 총동원 하였습니다.

 

1919329, 수원 종로거리에서는 김향화가 이끈 30여 명의 기생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였습니다. 41일 아우내 장터 시위를 주동한 유관순이 모진 수형생활을 하던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는 그보다 3일 앞선 329일 수원에서 일어난 기생 30여 명의 시위를 이끈 김향화도 함께 갇혀 있었습니다.

 

수백만이 참가한 31독립운동은 힘없는 조선의 백성들을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서게 한 획기적 이정표가 되었으며, 근대민족운동의 신기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참으로 31독립운동은 세계 어느 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의롭고, 용감하고, 장렬한 운동이었습니다. 31정신이 우리 겨레 속에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어떤 역경도 능히 극복하고 영광스러운 민족의 미래를 개척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6) 천안 아우내 장터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과 그 희생

애 어른 할 것 없이 삼천리 금수강산 온 땅을 붉은 선혈로 물들인 31독립운동, 만세의 함성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마디마디 아픈 상처가 맺혔습니다. 맨주먹을 가지고는 총칼 가진 일본과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일제는 총과 대창, 창검으로 만세 부르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이고 마구 총질을 하였습니다.

만세운동은 개성에서 북으로 올라가 선천에서는 서울과 같은 시간에 학생들이 앞장서서 교회 종소리를 신호삼아 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는데, 기수였던 신성학교 교사 강신혁이 일제의 총을 맞고 쓰러져 31독립운동의 장렬한 첫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태극기를 흔들다 양팔을 잘린 이도 있었습니다.

정주와 청원에서는 처절한 싸움도 있었는데 수천 명의 군중을 이끌던 최석월과 변갑섭은 일병(日兵)이 내리치는 칼에 태극기를 든 오른팔이 떨어져나가자 엎드려 왼팔로 태극기를 주워들고 돌진해 나갔다. 격앙된 일병들은 왼팔마저 잘라버렸으나 그들은 끝내 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나가다 다시 무자비하게 내리치는 저들의 칼 끝에 비통한 최후를 마쳤다.”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열사는 31독립운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31독립운동하면 막연하게나마 유관순 누나를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유관순은 지금부터 92년 전 너무도 냉혹한 시대에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한 열사입니다. 유 열사는 19021216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열사의 집안은 조선 중기 광해군 때가지 중앙 정계의 관원을 지낸 명문 사족(士族)이었습니다. 31독립운동 당시 유 열사는 18세로, 이화학당의 보통과를 졸업하고 고등보통학교 1학년 학생 신분이었습니다. 그녀난 교비생(장학생)으로 추천될 만큼 똑똑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 등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3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화학당 학생들은 강력하게 만류하는 프라이 교장선생님을 뿌리치고 학교 담을 넘어 탑골공원까지 나가 시위 군중에 끼어들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유관순과 5인 결사대는, 35일 남대문역 앞에서 벌어진 수만의 학생단 시위에도 학교 담을 넘어 참여했습니다. 이날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은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다가 외국인 선교사들의 강력한 요구로 겨우 풀려나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습니다.

 

310일 임시휴교령이 내려 313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 천안으로 내려왔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36일 주일 밤 예배를 마친 후 아버지 유중권(1863-1919), 어머니 이소제(1875-1919), 숙부 유중무, 동네 어른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과 함께 우리 고장이 죽은 듯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며, 아우내(병천) 장날을 기해 만세 시위를 계획했습니다. 이후 각 부락을 다니면서 시위운동 참여를 권하였습니다.

191941(음력 31) 9시쯤, 아우내 장터에는 3,000여명이 넘는 장꾼을 가장한 군중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우내 장터는 겉으로는 손님을 부르며 물건값을 흥정하는 등 북적거리는 듯하였으나 서로 눈빛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태극기를 몰래 주고받으며 옷 속에 얼른 감추는 등 얼마간의 긴장이 지속되었습니다.

오후 1시 조인원이 긴 대나무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장터 중앙에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낭독을 마친 조인원이 먼저 두 손을 높이 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이에 군중들도 함께 만세소리를 외치며 행진할 때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습니다. 유중권, 김구응, 김상헌, 김구헌, 김교선, 조병호 등이 조인원을 뒤따랐으며 곧 그 뒤에 유관순과 어머니 이씨, 각 고을에서 모여 든 군중들이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며 대열을 지어 나갔습니다. 조인원은 선두에서 용감하게 만세시위를 이끌었습니다.

이때 유관순도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열에 앞장섰습니다. 재빠르게 달려온 일본 헌병들은 선두에 선 유관순의 큰 태극기 깃대를 쳐서 부러뜨리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총검에 찔려 피를 흘리는 유관순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가면서 발로 차고 때렸습니다. 아버지 유중권은 잔혹한 일본군이 자기 딸을 발로 차고 때리는 모습을 보고 뒤따라가면서 거듭 만세를 절규하듯 외쳤는데, 바로 그때 잔학한 헌병 하나가 유중권의 옆구리를 총검으로 찌르고 이어 머리를 찔러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일본 헌병들은 평화로이 시위하는 군중을 닥치는 대로 찌르고 총을 쏘았습니다. 유관순의 어머니 이소제도 남편의 죽음을 보고 더욱 분기가 일어나 시위운동에 나섰다가 피살되었습니다.

이날 무자비한 일본 헌병이 휘두른 총검에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장렬하게 죽었고, 주민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부모님이 일제의 총칼에 무참히 돌아가사는 것을 보고 정신이 아득했던 유관순은, 주동자 체포에 혈안이 된 일본 수색조에 의해 중상을 입은 채로 체포되었습니다.

같은 날 공주에서는 영명학교에 다니던 오빠 유우석이 공주에서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 감리교 목사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의 칼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습니다.

 

 

일본군의 총검에 의해 한날한시에 참혹하게 죽어간 부모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어린 유관순 열사는 독사보다 더 지독한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5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습니다. 이에 항소하여 공주감옥에서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된 후 630일 경성 복심법원 재판에서 다시 3년형을 받았으며, 이후 유관순은 고등법원에 상고를 하지 않아 191974, 징역 3년이 확정되었습니다. 조인원과 숙부 유중무는 같이 상고하자고 권유하고 설득하고 타일렀으나, 유관순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삼천리 강산이 어디면 감옥이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서대문 감옥소에서도 수시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끌려나가 발길로 차이고 모진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특히, 31독립운동 1주년인 192031일 오후 2시에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만세소리는 감방마다 연쇄폭발을 하듯 터져 나왔고, 이때 3천 명이 넘는 수감자들이 호응하여 변기 뚜껑으로 철판 벽을 두드리고 발길로 문짝을 차는 등 요란했을 뿐 아니라 모화간, 냉천동, 애오개, 서소문 등 감옥 바깥에도 시위가 퍼져나갔습니다.

간수는 감옥소에서의 만세시위가 처음이 아니었던 유관순을 소동의 주모자로 지목하였고, 1평도 안 되는 지하 감방에 그녀를 가두고는 온갖 매질과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는 끝끝내 자주독립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화학당의 월터 학당장 서리가 서대문형무소 병사로 면회를 가서 보니, 유 열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얼굴이 퉁퉁 붓고 병색이 완연했었다고 합니다. 감옥 안에서 함께 수형했던 어윤희 여사는 유관순 열사가 배고픔, 외로움,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흐느끼고 울부짖었으며,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어윤희 여사는 유관순이 너무 매를 맞고 모진 고문을 당해서 죽었다고 하면서, “다리를 천정에 끌어올려 매고 비행기를 태우고... 물을 붓고...”라고 유관순이 당한 고문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유관순은 항상 허리를 감싸 안고 고통스러워했는데, 병천에서 붙잡힐 때 창에 찔린 것이 도무지 맛지 않아 계속 고름이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수시로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해 몸이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오빠 유우석이 6개월형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나 유관순에게 마지막 면회를 갔을 때,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했으며 맞잡은 손의 자국이 그대로 눌린 채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손가락으로 눌러 만져보니 살이 썩어서 손에 피가 묻어나왔습니다. 병원에 입원을 시켜야 한다고 간수를 붙들고 애원했으나, 유관순은 감옥 내 소동을 선동하는 중죄인으로 낙인직혀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3년형을 받았던 유관순은 특별사면령(1920428, 영친왕과 일본 왕궁 손녀의 결혼)에 의해 절반만 살고 나오도록 되어 있어, 191941일부터 계산하면 16개월 후인 1920930일이면 형기가 만료되어 출감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심한 구타와 오랜 고문으로 방광이 터져 몸이 썩어 들어가는 등 고초를 당하다가 마침내 1920928일 오전 820, 19세의 꽃다운 청춘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가족들에게 유관순 열사의 사망 통지를 하였으나, 독립운동 시위로 온 집안이 풍비박산되어 소식이 없었고, 이어 가까운 친족을 수소문하는 데도 시일이 많이 흘러 시신은 보름 동안 방치되었습니다. 유관순의 부모도 죽고, 할아버지 유윤기는 큰아들 유중권 내외가 한날에 처참하게 죽은 충격에 두 달 보름 뒤에 숨졌으며, 숙부도 복역 중이었고, 어린 동생들(관석, 인석)은 공주 영명학교 교감 댁에서 보호 받고 있었습니다.

 

1012일 들것에 실려 이화학당으로 들어 왔을 때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이미 부패한 지 오래되어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하였습니다. 출옥을 눈앞에 두고 있던 열사가 참혹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이화학당 친구들은 얼마 안 있으면 나올 줄로 알고 옷과 머리핀을 준비했는데, 시신을 보자 기겁을 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하여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화학당의 월터 학당장 서리가 시신을 인수받았으며, 공주 감옥에서 같은 감방에 있었던 김현경은 무명천을 떠서 밤을 새워 눈물로 얼룩진 수의를 지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유관순을 진정한 영웅으로 평가하여 다시 비단 옷감으로 수의를 만들어 바꾸어 입혔습니다. 또 태극기를 만들어 그녀의 가슴 위에 덮고 입관하였습니다.

이틀 뒤인 10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가족 외에 같은 반 학생 대표 몇 명만 장례식장에 참석하였는데 형사가 명단을 들고 일일이 대조하며 참석을 제한하였습니다. 유관순의 유해가 나갈 때는 월터 학당장 서리와 학생을 대표하여 김활란 선생이 뒤따랐으며,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비석도 무덤 표지도 없이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이곳이 군용기지가 되면서 파헤쳐져 열사의 시신은 사라졌습니다.

위의 내용 중 일부는 독립기념관 연구원 이정은 저() 유관순-불곷같은 삶, 영원한 빛(사단법인 류관순열사 기념사업회, 2005)을 참고하였음을 밝혀둡니다.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집안에서 자라 학교 근처의 정동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심을 키웠으며, 그의 깊은 신앙심은 일제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국할 수 있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31독립운동이라는 거사를 이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고 게다가 가냘픈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 배경과 순수하고 올곧은 성품, 옥중에서도 일제 앞에 결코 굽히거나 타협 없이 꿋꿋하게 타올랐던 대한독립의 의지, 독실한 신앙, 그리고 일제로부터의 모진 학대를 견뎌낸 투지 등을 되새겨 볼 때, 그녀의 남다른 애국충정은 결코 한순간의 우발적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독립선언서에 나타는 독립의 염원과 그 민족정신을 온 몸으로 보여 준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어린 열사의 가슴에서 초지일관 식지 않았던 대한독립의 뜨거운 함성, 일제의 총칼도 꺾지 못했던 그 민족혼이, 오늘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한 불씨로 남아 활활 타오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유관순 열사 외에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거나 참여했던 서민들은 수십만 명에 이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어놓은 이들은 대한민국 백성이라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31독립운동의 주역들입니다. 우리들이 조국 대한민국의 품에서 현재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까지 이러한 수없는 눈물과 피의 희생이 그 터전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7) 31독립운동 이후 일제의 비열하고 무자비한 학대

예기치 못한 거족적인 만세 시위에 대한 일제의 보복은 극에 달했습니다. 1,542회에 걸쳐 전국 218개 군 가운데 211개 군에서 2,023,098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 중에 7,509명이 살해되고, 15,961명이 부상을 당하고, 46,948명이 투옥되었으며, 교회당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는 715채나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일제는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을 비롯한 송진우, 현상윤 등 배후 인물과 수많은 사람들을 내란죄의 명목으로 검거하였고, 검거된 자들은 하나같이 뼈를 깎는 고문을 겪어야 했습니다. 특히 송진우는 일경에게 붙잡혀 옷이 갈기갈기 찢긴 채로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갇혔는데, 이때 일제가 풀어 놓은 사나운 개가 사지와 몸뚱이를 물고 할퀴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도 만세운동에 참가만 해도 시위자들을 눕혀 놓고 작두로 목을 자르거나, 살이 찢겨지다 못해 뼈가 하얗게 노출되는 참혹한 몰골이 될 정도로, 쇠로 만든 채찍으로 사정없이 내리치곤 했습니다.

일본측 기록을 보아도 31일부터 1030일까지 8개월 동안 재판을 받은 피고가 17,990명에 이르고, 그 중 5,156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대부분 감옥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아, 두 평도 못 되는 좁은 방 안에 20-30명씩 수용되어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한 채 육체적 고통을 당했습니다. 강영준 등 젊은 여학생 31명은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무수한 난타를 당했습니다. 일경은 심지어 쇠꼬챙이로 유방을 지지는가 하면 체모(體毛)에 고약을 녹여 붙였다가 그것이 굳은 다음 급히 잡아떼는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를 갈지 않고는 도저히 회상할 수 없는 생생한 실화였습니다.

이렇게 일단 일제에 검거되기만 하면 원시적이고도 극악한 고문을 견뎌야 했습니다. 빨갛게 단 철봉으로 손가락을 지지고, 벌거벗기고 채찍질하거나, 집게로 생손톱을 잡아 뽑고 혹은 콧구멍에 뜨거운 물이나 고춧가루를 쏟아 붓고, 손톱 밑에 대못질을 하고, 수없이 태형을 가해 끝내 목숨이 끊어진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성기에 종이 심지를 꽂아 놓고 불을 당겨 불구자로 만드는 등 잔악한 고문을 예사로 자행하였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 하더라도 충분한 치료와 조섭(調攝)을 하지 않으면 폐인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일제의 만행이 무자비하고 극악무도했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꺽지는 못했습니다. 투옥된 지 8개월 만에 일본 재판장이 판결에 앞서 피고들에게 앞으로도 조선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한용운은 의연하고 당당하게 그렇다! 언제든지 이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그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고 답하여 일제 앞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천명하였습니다. 한용운은 일제가 참회서나 굴복서를 쓰라고 할 때도 끝까지 거부하였으며, 옥중 선언을 통해 우리의 독립은 산상(山上)을 떠난 둥근 돌과 같아 목적지에 이르지 아니하면 그 세()가 그치지 않을 것이니 조선 독립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라고 굳은 자신감을 밝혔습니다. 이에 일본 검사도 감탄하여 더 이상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8) 31독립운동의 영향

31독립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비폭력으로 절대 독립을 요구한 온 겨레의 하나 된 함성이었습니다. 실로 조선이 독립국임을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일제는 살아있는 우리 민족혼의 저력을 확인하였을 것이고, 우리 민족은 그 정신을 집약하여 민족 독립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31독립운동의 첫 열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우선 독립을 선언한 이상 주권국가로서 독립된 정부를 세우는 것이 당현한 일이고, 독립운동을 끝까지 조식적으로 이끌어나갈 핵심 주체가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31독립운동 직후 러시아, 상해, 서울 등 여러 지역에 임시 정부가 세워졌는데, 19199월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를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815일 해방 때까지 상해를 비롯한 중국 각지에서 외교활동과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자주 독립운동에 큰 영향

31독립운동은 세계 약소민족 국가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첫째, 1919년 중국에서 북경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54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은 5.4운동 선언문을 통해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한 대한민국을 본받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상해에서는 중국인 학교 교장들이 한인들의 5.4운동 지원에 감사하다며, 한인청년독립단 간부들을 초청하여 다화회(茶話會)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둘째, 19194월 인도에서 마하트마 간디를 중심으로 일으킨 비폭력무저항의 사티야그라하(인도어로 진리수호라는 뜻) 운동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는 영국에 대한 독립운동이었는데, 이들의 독립운동 정신은 31독립운동처럼 비폭력운동이었습니다.

셋째, 19196월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마닐라 대학생들과 영국 식민지였던 이집트의 카이로 대학생들의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만주 연해주에서의 독립군 무장투쟁

31독립운동 직후 평화적 시위 보다는 무력(武力)에 의한 조직적인 독립운동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어, 1940년 이르기까지 약 20년 동안 만주연해주 지역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920년의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입니다.

191931독립운동 이후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재정비, 또는 새로 편성된 독립군은 주로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중심으로 항일전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192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들 독립군은 간도의 일본인들에게 큰 위협 세력이 될 정도였습니다. 간도 지역의 각 독립군 부대들은 그 소속 단체별로 거점을 확보하여 세력을 길러나갔는데 북간도 각지에서 지회를 둔 대한국민회, 만주 일대의 대종교도들과 의병들을 규합하여 발전한 북로군정서, 연길현 명월구에 본영을 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왕청현 봉의동에 본영을 둔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서간도 한족회가 조직한 군정부를 개편한 서로군정서, 구한말 의병장들이 주동이 된 대한독립단,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에 의해 조직된 광복군총영(대한광복군 사령부)등이 대표적입니다.

 

봉오동 전투(192067)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등이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192064일과 6, 두만강을 넘어 간도 지역으로 진입한 일본군 아라미 중위의 남양수비대를 삼둔자 지역에서 격파하고 봉오동 지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에 삼둔자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나선 야스가와(安川) 소좌의 일본군 19사단과 격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독립군은 봉오동 주민을 모두 대피시킨 후, 험준한 사방 고지에 매복하고 일본군을 유인하여 기습공격으로 대승을 거두는데, 일본군 157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그 후 독립군은 재빨리 대한국민회의 활동 거점인 의란구 지역으로 이동하여 부대를 정비하였습니다. 일본군은 독립군에 의해 기습을 받아 손실만 입었을 뿐, 독립군 토벌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부녀자와 노약자 등 20여 명 한인을 살상한 채, 두만강을 건너 철수하였습니다.

 

 

청산리 전투(19201021-26)

봉오동에서 대한독립군 부대에 크게 패한 일본군은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에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전 병력을 삼도구-안도(安圖) 통로인 청산리 계곡으로 급히 이동시켰습니다.

106일부터 이미 간도 지역에 병력을 투입시키기 시작한 일본군 아즈마() 지대(支隊)10-11일 사이에 지대 병력의 대부분을 용정촌에 집결시켰습니다 지대장보다 먼저 용정촌에 도착한 제 73연대장 야마다(山田) 대좌가 보병과 기병 일부 병력을 이끌고 용정촌에서 두도구로 이동하여, 13일 새벽에 이도구-삼도구 일대에 정찰을 실시하였으며, 15일에 지대장 아즈마 소장이 용정촌에 도착함으로써, 지대 병력의 집결이 완료되었습니다. 17일 밤,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 rAPrhr에 아직도 잔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용정촌의 지대 사령부에서 그들을 섬멸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에 독립군은 일본군과의 접전을 회피한다.’라는 묘령 회의 결정에 따라 분산된 활동을 하기 위하여, 홍범도 부대는 득미동 부근으로 이동하고, 김좌진 부대만이 청산리 계곡에 남게 되었습니다. 김좌진 부대는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전투 준비에 돌입하였습니다. 우선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해 독립군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사기가 떨어져 허둥지둥 도망갔다.’라는 허위 정보를 퍼뜨린 후 백운평 골짜기에 매복하였습니다. 이범석이 지휘하는 제 2제대원 600여 명이 계곡 좌우에 위장을 철저히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이를 알아채고 1021일 오전 8시경부터 첫 공격에 나섰지만, 오전 9시 독립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고 야스가와 소좌의 전위부대 200여 명은 교전 시작 20분 만에 전멸되었습니다. 곧이어 도착한 일본군 야마다(山田) 토벌 연대본부는 산포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하고 독립군을 공격하였지만 완전히 엄폐되어 있는 독립군 반격에 9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거의 진멸하고 말았습니다.

전투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꼬박 6일 동안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곡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임시정부 군무부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군 전사자 1,200, 부상자 2,100명이었고 독립군의 경우는 전사자가 60명에 부상자 90명으로 독립군 사상 가장 큰 격전이면서 최대의 승첩(勝捷)이었습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 병사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고, 또 지휘관들은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한 유격전술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만행으로 고통당하는 전 민족에게 뜨거운 구국충절의 정신을 불어넣는 크나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근현대사1. 구한말-일제강점기(4) 운영자 2020.09.23 1 108
다음글 근현대사1. 구한말-일제강점기(2) 운영자 2020.09.23 1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