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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1. 구한말-일제강점기(2) 운영자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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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제의 노골화된 조선침투

 

(1) 1895,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청일전쟁 이후 조선의 내정을 거의 장악하여 독주하고 있던 일본에 제동을 걸어, 전면적인 반일 운동을 이끈 핵심 인물이 바로 명성황후였습니다. 명성황후는 일본으로부터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러시아 공사 웨베르 등 각국 공사의 후원을 요청하는 등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를 눈치챈 박영효가 명성황후를 폐위시키려고 음모했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도망쳤는데, 박영효는 국왕의 호위병을 폐지하고 일본군이 훈련시킨 조선군 훈련대로 왕궁 수비대를 교체하려 했기 때문에 고종이 격노했던 것입니다. 고종은 갑신정변 때 축출 당한 명성황후를 모두 사면하고 다시 등용하였으며, 김홍집, 김윤식, 이범진, 박정양, 이완용 등으로 일본을 견제하고 러시아에 가까운 내각을 조직하였습니다.

 

 

을미사변

청일 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불과 일 주일 만에 러시아, 프랑스, 독일 삼국(三國)이 간섭하기 시작하자, 일본은 요동반도를 내놓아야 하는 등 비상이 걸렸습니다. 이때 일본으로서는 반일 세력의 배후로 지목된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입장에 대하여 서울의 일본인 신문 한성신보(漢城新報) 기자 고바야카와 히데오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 왕실의 중심이요 대표적 인물인 왕후를 제거하여, 러시아로 하여금 그 결탁할 당사자를 상실케 하는 이외에 다른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왕후를 궁중에서 제거한다면 웨베르 같은 자가 누구를 통하여 한국의 상하를 조종할 수 있겠는가... 조선의 정치활동가 중에 그 지략과 수완이 일개 왕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으니 왕후는 실로 당대 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결국 야수같은 일본은 1895108일 새벽, 조선 침략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 곧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습니다. 을미사변은 일본군 수비대의 엄호 하에 일본의 군인과 경찰과 낭인 등으로 구성된 폭도들이 조선 안방 경복궁으로 무단침입하여,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불태운 사건입니다.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극적 정변으로, 외국 군대가 왕궁을 무단침입하여 국모를 시해한 사건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주한일본공사로서 189591일 조선에 부임했던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고로(삼포오루, 三浦梧樓)917,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여우 사냥이라는 작전명을 세워 명성황후 시해를 위한 치밀한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107일 새벽 2, 조선 정부가 훈련대의 해산을 명하자, 계획 예정일(10)을 앞당겨 8일에 황후 민씨를 살해하기로 결정짓게 됩니다. 새벽 2시 일본 수비대 제 2중대장이 제 2대대를 이끌고 춘생문 부근에 집결하였고, 새벽 3시에는 훈련대 병사들이 마포 공덕리 별장에 있던 대원군을 가마에 태워 입궐시키기 위해 경복궁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대원군을 입궐시키려 한 이유는 대원군이 황후 민씨를 살해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전 610분경 경복궁 근정전 옆 강녕전에, 이 일을 강력히 반대하는 대원군을 협박하면서 내려놓았습니다.

이보다 조금 앞선 새벽 530분경 폭도들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으로 들이닥쳐 담을 넘어 광화문 빗장을 풀고 경비대와 총격전을 벌였는데, 이때 훈련대 연대장인 홍계훈 일행이 죽었고 나머지 경비대들은 도주하였습니다. 폭도 중 한 무리는 고종의 침전이 있는 곤령전으로 쳐들어가 고종과 왕세자(이탁, 훗날의 순종)에게 난폭한 행동을 하였는데, 폭도들은 고종 어깨를 손으로 눌러 주저앉혔으며, 왕세자의 머리채를 잡고 칼등으로 목을 쳐서 의식을 잃게 하였습니다.

이어 폭도들을 이끈 미우라 고로는 민씨의 침전 옥호루로 향했습니다. 폭도들은 각기 황후의 초상화를 한 장씩 가지고 있었으며, 명성황후가 평소 가까이했던 일본인 소촌실(小村室)의 딸이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날 밤, 대궐 안은 횃불이 환히 비쳐 개미도 헤아릴 정도였습니다. 황후는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의 급보를 받고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도망쳤으나 이내 붙잡혀, 적들은 황후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뜰로 끌어내 내동댕이쳤습니다. 두 팔을 벌려 황후 앞을 가로막았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은 양 팔목이 잘리는 중상을 입고 쓰러져 피를 뿌리며 죽었습니다. 일본 폭도들은 구둣발로 황후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일본도를 휘둘러 거듭 내려치며 난도질하였습니다.

끝내 조선의 국모는 45세의 젊은 나이에 야수 같은 일본군에게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악당들은 실수가 없이 확실히 해치워야 한다며 황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함께 살해하였습니다(1895.10.11. 주한영국영사 힐리어의 보고). 모두가 잠든 새벽에 들이닥쳐 만행을 저지른 저들은 그 흔적마저 없애기 위해 황후의 시신을 검은 색 얇은 천으로 싸서 석유를 끼얹고 경복궁 내의 동북편에 있던 녹산(鹿山)의 숲속에서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몇 조각 잔해를 수습해 즉시 태운 자리에다 파묻었습니다. 지금은 그 근처에 민 황후 조난의 터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명성황후는 조선의 국모(國母), 온 국민의 어머니였습니다. 일제가 무단침입하여 우리의 어머니를 뜰로 내동댕이쳐서, 그 가슴을 군화로 짓밟고 수십 군데를 칼로 찔러 처참하게 살해하고, 석유를 뿌려 불태웠으니, 그 사체마저 욕보인 것입니다. 실로 야수같은 일제는 조선의 안방에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민족은 유린 당하고 그 비분은 하늘에 사무쳤지만 조선에게는 일제에 대항할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미우라 고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시해된 왕비가 궁궐을 탈출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임금을 협박하여 왕비를 폐하여 서민(庶民: 일반 서민)으로 한다는 조서를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민간에서는 왕비가 충주에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고, 혹은 진주의 옥천암에 있다는 말도 떠돌았습니다.

 

아관파천

당시 농상공부대신 정병하와 군부대신 조희연 등은 이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고, 이들은 민씨 황후를 폐하여 서민으로 강등시키고 간택령을 내렸습니다. 친러파를 축출하고 친일파를 다시 등용하였으며 유길준과 조희연은 궁궐에서 삭발하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정병하는 고종의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깎았으며, 유길준은 세자의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깎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종은 늘 일제에 대해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독살의 위험 때문에 침식조차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에 고종은 1896211일 새벽, 궁녀들의 가마를 타고 위장하여 가까스로 궁궐 문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하였습니다. 이렇게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비우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거처하게 되었던 사건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릅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이후 친일파 대신들은 모두 파면하면서 일본의 입지는 축소되었고, 러시아의 영향력은 막강해졌습니다.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러시아가 일본의 입안에 거의 들어가 버린 조선에 잠시나마 시간을 벌어 주어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친일파였던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이 죽임을 당하였고, 김윤식은 제주도로 귀양 보내졌으며, 유길준은 일본으로 도망을 쳤고, 대원군은 운현궁에 연금되었습니다.

 

한편 을미사변 이후 국모의 원수를 갚자라는 상소문은 끝이 없었습니다. 결국 의병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천 여주 지방에서는 박준영을 중심으로 2천여 명이 모였고, 춘천에서는 이소응을 중심으로 천여 명이 모였습니다. 또한 제천의 유인석, 강릉의 민용호, 홍주의 김복한, 산청의 곽종석, 문경의 이강년, 자엉의 기우만 등이 중심이 되어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대한제국 공포

1897220일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그 해 10월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대한제국의 헌법을 공포하였으며 고종 황제 즉위식을 하였습니다. 고종은 김병시, 정범조 등 온건 개혁파를 등용하였습니다.

이후 대한제국은 모든 분야에 있어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189647일ㄹ에는 독립신문(순 한글 신문)을 창간했고, 3개월 뒤 18967월에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189812월까지 약 30개월간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단체로 활약하였습니다. 또한 독립을 천명하는 상징물을 세우자는 서재필의 아이디어로 독립문이 세워졌는데, 189611월부터 18971120일까지 약 1년 동안 45cm×30cm의 화강암 1,850개를 들여 완공하였습니다. 독립문에는 당시 청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열강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켜 반석 위에 굳건히 세운다는 온 국민의 염원을 담은 글이 태극기 문양과 함께 선명히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의 영은문 터에 독립문을 건립할 것을 결정한 사실을 경축한다.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일본, 러시아 그리고 모든 유럽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독립문이여 성공하라, 그래서 다음 세대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하라.”(June 20th 1896, The Independent)

 

그런데 독립협회 회장 이완용과 이상재, 남궁억 등은 일본의 조정을 받아 고종황제를 폐위시키려 하였습니다. 이들은 박정양을 대통령에, 윤치호를 부통령에, 그리고 각 부 장관에는 독립협회 임원들을 임명하는 조직을 발표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에 고종은 크게 노를 발하고 독립협회 임원 17명을 구속하고 아예 독립협회를 해체하고 말았습니다.

 

 

(2) 1904, 러일전쟁과 한일의정서

190428일에 일본의 육군 선발대가 인천 월미도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는 한편, 일본 함대가 뤼순(旅順,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하여 9일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와 격돌하였습니다. 그리고 10일 러시아와 일본은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브(A. Pavlov)12일에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서울을 빠져나갔습니다.

일본과 러시아가 만주와 조선에 대한 세력 다툼과 전쟁으로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 대한제국은 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중립을 선언하였습니다(1904123). 그러나 일본은 조선을 자신들의 전쟁에 유리하도록 이용하였고, 또 한국 침략의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협약 체결을 요구하였습니다. 일제의 협박 및 강요에 의해 친일파 이지용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觀盼)에 의해 맺어진 협약이 바로 한일의정서(19042)입니다.

겉으로는 대한제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목을 내세웠으나, 이를 빙자하여 일본은 대한제국의 영토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고 군사 활동을 자유롭게 하며 여러 이권을 점유하는 등 실제로는 러일전쟁에 대비한 전략적 협약을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한국의 통신기관을 군용으로 접수하고, 경부경의선 철도부설권도 일본 군용으로 넘겨졌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정치군사적으로 대한제국을 침략하기 위한 확실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러일전쟁에서 승리가 굳어진 일본은, 한국 정부에 재정고문과 외교 고문을 배치했습니다(1차 한일협약, 1904822). 이후 일본의 육군은 한반도를 거쳐 남만주로 진격하여, 19051월 뤼순 요새를 함락하고 이어 봉천을 점령하였습니다. 또한 일본 해군은 19055, 유럽에서 원전 온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한해협에서 격파하여 해상에서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1년이 넘게 장기간 지속되던 전쟁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19059포츠머스 강화회의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굴복, 조약을 맺음으로 끝이 났습니다.

러일전쟁은 한국과 만주에 대한 분할권을 둘러싸고 싸운 것이었으며, 그 배후에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국가들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자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결과로 볼셰비키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위권을 확보함으로써 한국을 거점 삼아 만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한 일본은, 당시 대한제국인 우리나라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간섭에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조선을 점령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 점령을 위해 고종황제 곁에 친일파 중심의 각료를 조직하도록 유도했으며, 군인 2만 명을 용산에 주둔시켰습니다.

 

(3) 19051117,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

을미사변으로부터 약 10년 후, 우리나라는 19051117일 일제의 강요에 의해을사늑약(2차 한일협약)을 맺게 됩니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伊藤博文)가 밤에 대궐을 침범하여 강제로 체결한 것으로, 조약의 공식 명칭도 없고 황제의 서명도 없는 괴문서였습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외교권 박탈, 그리고 통감부를 두어 조선을 지배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51117일 오후,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덕수궁 앞과 회의장 안을 완전무장한 일본군으로 겹겹이 둘러쌌습니다. 서울 시내 전역은 기병 800, 포병 5,000, 보병 2만 명이 장악하여 위협적인 시위행진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당일 이토 히로부미는 구완희, 박용화 등을 시켜 일본 군을 인도하여 궁궐 담장 둘레에 대포를 설치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5개 조항에 대해 고종황제에게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허락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고종은 이를 끝까지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이는 신()의 뜻이 아닙니다. 진실로 본국 정부의 명령을 받고 온 것입니다. 이 일이 인준된다면 양국관계가 행복해질 것이며 동양 평화도 영원히 유지될 것입니다. 속히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만일 이 조약을 허락한다면 곧 나라가 망할 것이다. 차라리 짐이 목숨을 끊을지언정 결단코 허락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토는 덕수궁 별채인 중명전(重明殿, 수옥헌: 漱玉軒)을 총검으로 빽빽이 늘어세워 철통같이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들어와 회의를 개최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한규설이 완고하게 불가능하다고 하자, 이토는 그의 손을 붙잡고 백방으로 수락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토가 힘껏 요청하자 고종이 짐을 반드시 볼 필요가 없고 정부에 가서 대신과 협의하라.”고 하자, 이토는 물러나면서 즉시 어전회의를 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회의에 참석한 각료에게 떼를 쓰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한 사람 한 사람씩 조약체결에 대한 찬반 의사를 물으면서 찬성을 강요하였습니다.

참정부대신 한규설은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한결같이 반대하였고, 법부대신 이하영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도 ()’자를 써서 절대불가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실로 국가의 앞날을 걱정한 몇 안되는 충복들이었습니다.

외부대신 박제순도 ()’자를 썼는데 자 아래에 주()를 달기를 위 조약의 자구를 조금 고친다면 의당 인준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토는 그것이 머가 어렵겠소?” 하고는 붓을 들어 두세 곳을 지우고 고쳐 다시 의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한규설, 이하영, 민영기 이외의 모든 대신이 일제히 ()’ 자를 썼습니다. 한규설은 고종황제에게 가다가 붙잡혀 수옥헌 협방에 갇혔고, 좌우에서 그를 붙잡고 지키도록 했습니다.

이후 이토는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외부의 인장을 가져오게 하고, 도장이 들어오자 일제히 강제 날인을 하였습니다. 자정이 넘어 1118일 새벽 1시 반에서 2시 사이, 이토 히로부미는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앞세워 찬성하는 서명을 하게 함으로써 조약 안건이 가결되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때 을사보호조약을 승인한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이왕용, 권중현 다섯 명을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부릅니다.

마침내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을 일제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보호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일제는 한국의 목에 총칼을 겨누고 강제로 도장을 찍게 하여 나라를 일제에 넘기도록 강도질을 한 것입니다.

 

을사조약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양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 공통의 주의를 공고히 하고자 한국의 부강지실 인정할 수 있을 때에 이르기까지 이 목적을 위하여 다음의 조관을 약정함.

1. 일본 정보는 일본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이 외국에 대하는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고 일본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인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함. *외교권 대행

2.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는 책임에 있어서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 정부의 중개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기로 함. *외교권 박탈

3. 일본 정부는 그 대표자들로 하여금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함을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를 알현하는 권리가 있음. 일본 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기타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을 설치하는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 일본 영사에게 속하였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일체 사무를 관리함. *내정 간섭

4. 일본과 한국 간에 현존하고 있는 조약과 약속은 본 협약 조관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을 계속하는 것으로 함.

5.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도록 보호함.

 

 

이 조약은 한국이 외교뿐 아니라 실제로 국권을 침탈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참정부대신 한규설은 조약이 강제로 맺어진 것을 보고 줄곧 분개하여 덕수궁이 떠나가도록 슬피 울부짖었으며, 얼마 뒤 각부대신은 모두 모여 한바탕 통곡하였습니다. 박제순도 따라서 통곡하자 한규설은 그에게 오늘 아침에 만났을 때 공은 반대한다고 하면서 협박에 못 이겨 날인하게 될지도 모르니 연못에 인장을 던져버리자고 하더니, 끝내 이와 같이 하였소?”라고 꾸짖었습니다. 외부대신 박제순은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과 함께 이토로부터 뇌물을 받아 갑자기 거부가 되었습니다.

한편, 군부대신 이근택의 아들은 참정부대신 한규설의 사위였는데, 한규설의 딸이 시집갈 때 데리고 간 여종이 이근택을 크게 꾸짖고 다시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근택은 대궐에서 돌아오며 숨을 헐떡이면서 집안 식구들에게 강제 조약이 체결된 일에 대해 말하고는, “나는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다.”고 하였다. 그 여종이 부엌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서 식칼을 들고 나와 부르짖기를, “이근택, 너는 대신의 몸으로 국은(國恩)이 얼마나 되느냐? 나라가 위태로운데 죽지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다하니 너는 참으로 개, 돼지만도 못하구나. 나는 비록 천한 사람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노릇을 하겠느냐! 나는 힘이 약해 너를 만 번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이로다. 차라리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한씨의 집으로 돌아갔다.

 

을사늑약 직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 국민들은 분노에 휩싸여 조약에 서명했던 대신들을 공박하고 조약을 반대한다는 투쟁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었습니다.

전국은 비통에 잠기고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상소로 조약체결에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효과를 얻지 못하자 민영환(1865-1905)이 자결하였고, 김하원, 이기범, 차병수 등은 사수국권이라 쓴 경고문을 종로 네거리에 계시하고 운집한 시민들에게 통렬한 구국 연설을 하였던 까닭에, 일본 경찰과 헌병의 칼을 받아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감금되었습니다.

황성신문사의 장지연은 강제 조약을 맺은 것을 사실대로 기록 시일야방성대곡(오늘이여, 목놓아 크게 우노라!)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어 일제의 검열을 무시하고 곧바로 인쇄하여 돌렸고, 피맺힌 절규와 같은 장지연의 사설을 읽은 온 국민은 크게 통분하였습니다. 이에 이토는 장지연을 잡아 가두고 신문사를 즉각 폐쇄조치 하였습니다.

 

당시 듯있는 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을사늑약의 소식에 그 원통함과 울분을 참지 못해 쓰러져 까무러친 자, 너무 통곡하여 실성한 자, 땅에 몸을 던지고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거꾸러진 자, 아예 음식을 먹지 못하는 자 등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그 순간, 하늘에 사무치는 끝없는 울분과 통곡! 그것이 당시 온 국민들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서울 도성의 어수선했던 상황을 역주 매천야록하권(251-252)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온 도성 안은 기가 땅에 떨어졌고, 방방곡곡에서는 수백 수천 명이 무리를 지어 나라가 망했으니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하고 부르짖었다. 미친 듯 취하여 비통해 부르짖고 몸 둘 곳이 없는 듯 움츠러들었으며, 밥 짓는 연기가 오르지 않아 그 정경의 참담함은 바로 전쟁을 치른 듯하였다. 일본인들이 군사를 파견, 순찰을 돌며 비상의 사태에 대비하였으나, 수군수군 비방하는 말은 끝내 금지할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가 한 달 남짓 계속되었다.

나흘이 지나 고종황제(광무황제)1122일 황실고문 헐버트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라며 거부의 뜻을 분명히 하고 만천하에 공포하였습니다.

 

한편, 일제는 우리나라의 경제권을 일본에 완전히 예속시켜 식민지 건설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여러 차례에 걸쳐 강제로 차관을 들여오게 하였는데, 그 액수는 대략 1,300만원 정도였습니다. 이에 19072월부터 일제로부터 빌려온 돈을 갚아 일제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광제와 서상돈을 주축으로 국채보상운동이라는 사회계몽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고종황제를 비롯 민족자본가들과 지식인들, 상인들, 부녀자들가지 모두 참여하여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양기탁에게 국채보상금 착복 혐의를 뒤집어 씌워 구속하는 등 일제의 탄압 때문에,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3. 안중근 의사 의거

(19091026일 오전10)

 

(1) 고종의 강제 퇴위와 마지막 버팀목 군대의 강제 해산

고종의 강제 퇴위(1907719)

일제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뒤 1906년에는 통감부를 설치하였습니다.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비밀리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에 울분을 누르지 못한 이준은 자결하였고, 세 명의 특사가 헤이그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운 헐버트 선교사는 아예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76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꼬투리 잡아 1907719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습니다.

이후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가 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조이기 위해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 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한 7개항의 조약안을 제시, 1907724일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 명의로 조약을 체결하고 조인하였습니다. 이를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 이라고 하며, 고영희, 송병준, 이병무, 이완용, 이재곤, 임선준, 조중은 7명을 정미 7이라고 부릅니다.

 

조선의 마지막 버팀목 군대의 강제 해산(190781)

190781일 오전 9시 한국군 해산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와 함께 한국군 해산에 대한 조서를 제멋대로 작성하여, 하세가와와 총리대신 이완용, 군부대신(국방장관) 이병무 세 사람이 창덕궁에 들어가 순종 황제의 재가를 받으려 하였습니다. 순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거부의 뜻을 밝히자, 이완용은 나라의 재정이 궁핍하여 용병은 해산하는 편이 좋을 듯하옵니다.”라고 말하였고, 이병무는 이완용의 말을 거들어 용병을 해산해야 국고가 든든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순종은 할 수 없이 조서에 서명하였습니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군대를 강제 해산시켜 한국의 군사력을 완전히 무력화하였습니다. 서울의 시위대와 지방의 8개 진위대(군부대)의 무장을 해제시켰습니다. 1년 이상 근무한 병졸에게는 50, 1년 이하 근무자는 25, 하사계급 이상은 80원씩 지급하였습니다. 이때 쌀 한 섬이 3원이었습니다. 서울ㅇ릐 시위대 4,000여 명, 지방 진위대 4,800여 명 총 8,800여 명의 조선군이 무장해제 당하였습니다. 군대 해상 때 남대문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조선 군인 63명이 전사, 1,000여 명이 부상당하였고, 500여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국가주권의 최후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군대가 완전히 해산됨으로써 수족이 잘린 우리나라는 제대로 저항도 못 해 보고 일방적으로 점령을 당하여 사실상 일본의 속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외에도 일본은 우리나라와 기유각서(己酉覺書)를 체결하였고(1909712), 1910625일에는 조선인 경찰권 위탁각서를 체결하였고, 629일 대한제국 경찰을 해체하였고, 만주의 간도(연변)도 청나라에 넘겼습니다(1909년 간도협약).

 

군대 강제 해산 이후 의병 활동

1908년 헤이그밀사사건, 고종 퇴위, 정미 7조약, 군대 강제 해산등의 충격으로 의병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군대가 강제 해산된 뒤, 해산된 조선군 8,800여 명 중 5,000여 명이 의병이 되어 무기를 들고 지방의 의병 부대에 합류애 들어갔습니다. 이때 의병을 이끌었던 대표 의병장은 신돌석홍범도였으며, 전국 의병장은 255명이었습니다.

1907년 전국 13도 의병은 1만여 명으로,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여 창의군을 창의군을 창설하고,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작전을 세웠습니다. 이인영은 전국 의병들에게 격문을 보내 양주로 집결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19081월에는 서울 통감부 공격 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허위가 300명을 이끌고 선발대로 진격했는데 동대문 밖에서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서울 공격 계획이 실패하였고 창의군은 해체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계속해서 충북과 강원도 등에서 항전하였으며, 홍범도 장군은 삼수갑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37회나 전투할 정도였습니다.

일본은 이에 당황하여 보병 1개 사단, 기병 1개 연대, 헌병 6,000명으로 의병 토벌에 나서 의병을 무자비하게 전멸시키는 등 더욱 가엵하게 대응하였습니다. 이때 의병들은 만주 북간도로 후퇴 하였습니다.

 

19091월 박용만은 미국에서 국민회를 창설하였고, 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을 조직하였으며, 사관학교를 세워 군사행동을 준비하였습니다. 1913년 안창호는 미국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였으며, 1919년 김구여운형이 상해에서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였습니다.

 

 

 

(2) 이재명 의사(義士)의 매국노 이완용 암살 시도

나라의 앞날이 캄캄하고 완전히 망해 가는 비운의 시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기력한 나라를 되찾으려 애쓰지 않고 조국을 등지고 제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일부 뜻있는 사람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한국침략에 혈안이 된 일본인과 친일 한국인을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활발하게 진행하였습니다.

나인영(나철), 오기호 등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계획하였다가 실패하였으며(1907325), 1908323일에 전명운과 장인환이 한국의 외교고문으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해 온 스티븐스를 사살하였습니다.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제의 한국 지배가 한국에 유익하고 한국인이 만족해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던 자입니다.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 사법권과 행정권, 모든 관리의 임명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급기야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되어 버린 우리 민족은 너무도 위태로운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름만 남아 위기에 처한 나라를 일제에 넘겨주는 일을 주도한 자가 바로 이완용이었습니다.

이에 19091222일 오전 1130분경 이재명(20) 의사(義士),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선 이완용이 합방을 추진하는 것에 분개하여 그를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완용이 종현 카톨릭 성당(현재 명동 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 추도식에 총리대신 자격으로 참석하였다가 돌아가려고 인력거에 올라 출발하려는 순간, 이재명이 인력거꾼을 찌르고 이완용의 온쪽 어깨를 찔렀습니다. 이완용이 칼을 피하려고 인력거에서 굴러 떨어졌으나 이재명이 다시 두 번을 더 찔렸으므로 크게 부상을 입고 피를 많이 흘려 2개월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일제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아 한일합병 이후 1910913일 처형되었습니다.

 

한편 조국을 배반하고 팔아먹은 만고의 매국노 이완용의 말로는 비참하였습니다. 그는 192621168세에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는데, 장례식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고종의 국장 이후 가장 화려하게 치러졌습니다. 그리고 천하의 명당이라고 하는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성인봉에 묻히게 됩니다. 그러나 소풍나온 아이들도 이완용의 묘라고 하면 침을 뱉고 짓밟자, 1979년 그의 증손자 이석형은 이완용의 묘를 파헤쳐 화장하여 없애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팔아먹은 자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지, 우리의 후세들이 잘 기억하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3) 안중근 의사(義士)의 출생

안중근 의사는 19091026하얼빈에서 국권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습니다. 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분골쇄신한 민족의 마지막 등불이었습니다.

안중근은 1879(고종 16) 92일 순흥(順興)을 본관으로 한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26대손으로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조성녀, 趙姓女)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안 의사가 6살 때인 1884년 부친이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의 꿈을 포기하고 일가족을 이끌고 신천군(信川郡) 두라면(斗羅面) 천봉산 밑 청계동으로 은신한 후 안 의사는 이 산촌에서 성장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의 흑점이 있어, 어릴 적 집안에서는 안응칠(安應七)이라 불렀습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의협심과 무용력이 남달리 뛰어났고, 말을 잘 탔을 뿐만 아니라 사냥을 할 때 활과 총을 잘 쏘아 날아가는 새와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 명중시키는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또한 바른말을 잘한다 하여 17세에 번개입(電口)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가문은 5대조 안기옥 대부터 할아버지 안인수 대까지 무과급제자만 7명을 배출할 정도로 대대로 해주에서 세력과 명망을 지닌 집안이었습니다. 이러한 가문의 위상을 배경으로 할아버지 안인수 때는 집안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진해현감을 지낸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성품이 어질고 무거웠으며, 살림이 넉넉했을 뿐 아니라 자선가로도 도내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슬하에는 63녀를 두었는데 그 중 셋째 아들이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이었으며, 안중근은 안태훈 진사의 큰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안태훈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농민군 가운데 일부의 무리들이 마을로 들어와 일으킨 소요를 막기 위해 의병을 조직하여 그들과 전투를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농민군이 버리고 간 1,000여 푸대의 쌀을 수습하여 군량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알게 된 조정은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압박해왔고, 여러 차례 관가에 불려가 고초를 겪고 쇠약해진 몸에 을사늑약의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몇 번이나 실신하다가 44세 한창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4) 안중근 의사(義士)의 의병 활동

안중근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1905년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로 떠나 망해 가는 고국의 소식을 전하고, 국권 회복에 힘쓸 동포들을 모으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때 안 의사는 대한제국 민씨 정권의 핵심인물이었던 민영익을 찾아갔는데, 두세 번 찾아가도 문지기 하인이 문을 닫고 대감께서는 한국인을 만나지 않는다.’며 들여보내지 않자, 이에 안중근은 민영익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그대는 한국인이 되어 가지고 한국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면 어느 나라 사람을 만난단 말인가? 더구나 한국에서 여러 대에 걸쳐 국가의 녹()을 먹은 신하로서 이같이 어려운 때를 만나 전혀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혼자만 베개를 높이 하고 편히 누워 조극의 흥망을 잊어버리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 우리나라가 허물어지고 위급해진 것이 모두 그대와 같인 대관들 때문이요, 민족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부끄러워 만나지 않는다는 것인가?”

 

또한 인천의 큰 부자로 쌀 장사를 하다가 상해로 망명한 재력가 서상근을 찾아가 국내 정세를 말하고 나라를 구할 방도를 물었습니다. 이에 서상근은 나에게 한국의 일은 이야기 하지 마시오. 나는 일개 장사치로서 몇 십만 원이 넘는 돈을 정부 고관에게 빼앗기고 몸을 피해 여기까지 왔고, 더구나 국가의 정치야 우리 같은 백성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나는 입에 풀칠이나 하면 족하니 나에게 다시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마시오.”라고 하자, 이때 안중근은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더구나 나라란 몇 명의 대관들의 나라가 아니라 당당한 2천만 백성의 나라입니다. 국민이 국민 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민권과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의 민족 세계에서 어째서 한국 민족만이 남의 먹이가 되어 앉아서 멸망하기를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이렇게 두세 번 설득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고 소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안 의사는 그곳에서 우연히 황해도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같이한 프랑스인 르각(곽원량) 신부를 만나게 되어 그의 조언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일단 애국계몽운동을 하기로 하고, 그해 12월 고향으로 돌아와 국권이 회복될 때까지 육영사업에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063월 그는 고향 청계동을 떠나 항구도시 진남포에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지방 애국계몽운동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본래 교육가인 그를 의병이라는 무장투쟁가로 변신케 한 것은 곧 일본의 통감정치였습니다. 1907년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폐위와 군대의 강제 해산은, 안중근 인생에 가장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077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한국의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황제를 강제 폐위시키고 정미조약을 강요하며 군대를 해산하였고, 산림과 광산 그리고 철도를 빼앗는 등 한국의 식민지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한일 완전 합병 계획을 은밀히 실행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이에 안 의사는 마침내 구국의 결의를 다지며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도착, 그해 10월 중순 엔치아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의 임시 사찰을 맡고 연해주 각지 한인마을을 순회하며 애국계몽을 위한 강연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어 안 의사는 의병조직에 참여하여 엄인섭, 김기룡과 함께 의형제를 맺고 의거를 도모하였습니다. 이범윤, 김두성 등과 3-4천명으로 추정되는 의병을 양성하고, 다음해 30세 되던 1908년 봄 김두성을 총독, 이범윤을 대장으로 한 대한국 의군 창설에 성공한 안 의사는 참모중장으로 선임되어, 독립특파대장으로 출전, 치열한 항일투쟁을 결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의병이란 나라가 외침을 받아 위기에 놓였을 때 스스로 떨쳐 일어나 외적과 맞서 싸운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정식 군인은 아니지만 군인처럼 부대를 만들고 무장을 갖춰 적과 의열 투쟁을 했습니다. 의열(義烈)이란 의롭고 맹렬하다는 뜻으로, 의사열사(烈士)를 합한 말입니다.

대표적인 의병들의 의열 투쟁으로는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을미의병,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을사의병,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확대된 정미의병 등이 있습니다. 전국의 의병수는 약 15만 명이었으며, 이들은 일본군과 3,500회 정도 전투를 하였으며, 전사자가 17,000여 명, 부상자가 36,0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독립투지는 의병출전 격려사에서 잘 나타납니다.

한 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 번, 두 번에 이루지 못하면 세 번, 그렇게 네 번 열 번에 이르고, 백 번을 꺾여도 굴함이 없이 금년에 이루지 못하면 내년, 내년에 못 이루면 후년, 그렇게 십년 백년이 가고, 또 만일 우리 대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아들 대, 손자 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하고야 말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 그리하여 큰 일도 기필코 이루어질 것이다.

 

19087월 안 의사는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 고을에서 일본 군경과 세 차례의 교전 끝에 50여 명을 사살하고 그대로 일군의 주요기지인 회령으로 진격하여 3천여명의 일본 수비군을 격퇴하는 등 13일 동안 30여 차례의 교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잡은 포로들을 석방하자 그들의 밀고로 이 작전은 정보가 노출되었고 정예 일본군의 토벌작전에 밀려 고군분투하였습니다. 그러나 탄환이 떨어지고 부하들도 흩어져 중과부적으로 참패하였고, 안 의사와 의병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장마속 산길을 헤맨 끝에 한달 반 만에야 연해주 본영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안 의사는 의병투쟁 중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동요하는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로 격려했습니다.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

 

안 의사는 의병 활동을 하면서 일본군을 피해 다니는 동안 국가안위(國家安危) 노심초사(勞心焦思)’라는 그의 휘호처럼 불안하고 참담한 나날을 보냈으며, 그의 육체는 피골이 상접하여 가까운 사람조차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다시 심경을 가다듬고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프스크 등 러시아 영토의 연해주 일대와 중국 땅 흑룡강 상류지방을 시찰하며, 강연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동지 규합에 힘쓰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이 무렵 그곳 한인 사회에 침투하고 있던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의 일당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도 있었습니다.

그곳 교포사회에서도 친일 세력이 침투해 있는 것을 보고 190927일 안중근은 엔치아 부근 카리 마을에서 믿을 수 있는 동지를 모아 단지동맹을 결행하고 국권회복과 동양평화유지를 위하여 헌신 할 것을 맹세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습니다.

이때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맹원 12(안중근30, 김기룡29, 강순기39, 정원주29, 박봉석31, 류치홍39, 조순응24, 황병길24, 백규심26, 김백춘24, 김천화25, 강창두26)은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끊고, 그 선혈로 태극기의 앞면에 大韓獨立(대한독립)’이라고 쓴 후에 피로 범벅이 된 손을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불러 하늘과 땅에 맹세하였습니다.

 

안중근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같이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소.’ ... 마침내 열두 사람이 각각 왼손 약지를 끊어, 그 피로 태극기에 글자 넉 자를 크게 쓰니 바로 대한독립이었다.

 

 

(5) 19091026, 이토 히로부미 암살

안중근은 19099,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회담을 하기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거사의 유일한 동지였던 우덕순의 증언에 의하면, 안중근은 이건 분명히 하늘이 준 기회라며 그 신문을 보고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안 의사는 이 계획을 독립투사 정재관, 김서무 등과 논의하고 우덕순과 1021일 오전 850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출발하여 1022일 밤 915하얼빈에 도착하였습니다. 중간에 러시아어 통역관 유동하가 동행하였으나 집안 사정으로 귀향하고, 후에 조도선이 합류하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018일 대련 부두에 상륙하여 러시아 측에서 보낸 귀빈열차를 타고, 1021일 여순의 일본군 전적지를 시찰한 다음 봉천(심양)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일본의 주선으로 무순의 탄광지역을 돌아보고 1025일 밤 장춘에 도착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날 밤 청 나라 당국이 주최한 환영회에 참석한 뒤 열차편으로 하얼빈 역에 도착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거사 이틀전,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동정철도 총국의 특별열차 편으로 1025일 밤 11시에 장춘을 출발하여 러시아 재무대신 코콥체프와 하얼빈에서 회담을 한다는 중요한 정보까지 입수하였습니다. 10시 간 정도 소요될 것을 계산하면 하얼빈 도착 시간은 26일 아침 정도가 될 것입니다.

 

거사 장소를 처음에는 이토가 도중에 잠시 쉬어갈 차이자거우 역으로 정하였다가 나중에 두 군데로 나누어, 차이가거우 역은 우덕순과 조도선이 맡고, 안 의사는 하얼빈을 맡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덕순은 러시아 병사의 통제가 삼엄하여 거사를 이루지 못한 채 차이자거우 역을 지났고 기회는 하얼빈의 안중근에게 주어졌습니다.

 

전날 안 의사는 그곳 한인 사회에서 신망 높던 김성백의 집에 묵게 되었는데, 거사를 앞두고 좁은 방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장차 행할 일을 하나하나 정리해 가면서 자신의 비장한 심경을 피를 토하듯 장부가에 담았습니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응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 것인가

동풍이 점점 차가워지니 장사의 의가 뜨겁다

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이토)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 대한 동포로다

 

거사의 유일한 동지 우덕순도 시를 지어 마음을 같이했습니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너를 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을 원했지만 하상견지만야런고

너를 한번 만나려고 수륙으로 기만 리를

혹은 윤선 혹은 화차 천신만고 거듭하여

노청양지 지날 때에 주 예수여 살피소서

동반도의 대제국을 내 원대로 구하소서

오호라 간악한 늙은 도적아

우리 민족 2000만을 멸망까지 시켜 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소리 없이 뺏느라고

궁흉극악 네 수단을...

 

지금 네 명 끊어지니 너도 원통하리로다

갑오 독립시켜 놓고 을사 늑체한 연후에

오늘 네가 북향할 줄 나도 역시 몰랐도다

덕 닦으면 덕이 오고, 죄 범하면 죄가 온다

네 뿐인 줄 알지 마라 너의 동포 5000만을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보는 대로

내 손으로 죽이리라

 

역사적인 19091026일 날이 밝아,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경, 일단 역사 안 찻집으로 들어가 동정을 살펴보니 러시아 군인들과 출영객이 역사 안팎으로 들어차서 혼잡했습니다. 이윽고 오전 9시쯤 이토 일행이 탄 특별 열차가 플랫폼에 멈췄고 마중 나온 러시아 재무대신 코콥체프 일행이 열차 안으로 들어간 후 그와 일본 총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토와 수행원이 기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때 안 의사는 이 거사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꼭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찻집에서 나왔습니다. 이토가 의장대를 사열하고 외국영사단 앞으로 가 출영객들로부터 인사를 받기 시작했고, 안 의사는 러시아 군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많은 일본인과 러시아인들이 붐벼 별다른 제재나 검색 같은 것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하늘의 도움이었습니다.

오전 915, 군대가 경례를 붙이고 군악대 연주가 하늘을 울렸습니다. 이토가 귀빈들의 영접을 받으며 러시아군 의장대를 정면으로 하여 우측에서 좌측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촘촘한 의장대 사이로 러시아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이 긴, 조그만 늙은이가 걸어 나왔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그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9시쯤 되어 드디어 이토가 탄 기차가 도착했다.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찻집에 앉아 상황을 살펴보며 언제 저격하는 것이 좋을 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때 이토가 기차에서 내렸다. 군대가 경례를 붙이고 군악대 연주가 하늘을 울리며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분한 기운이 터지고, 삼천 길 업화가 머릿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어째서 세상 일이 이같이 공정하지 못한가. 슬프도다. 이웃 나라를 강제로 빼앗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꺼림이 없는 약한 인종은 어찌하여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이토가 러시아 병사들이 도열한 앞을 환영객들에게 손을 흔들련서 지나갈 때, 안중근은 저것이 필시 늙은 도적 이토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곧바로 뚜벅뚜벅 걸어서 용기 있게 나가(5m 거리에서) 곧 권총을 뽑아 들고 주저없이 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쏘았습니다(안중근 의사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중에서). 이토에게 세 발 모두 명중했으니, 이토의 왼쪽 폐와 왼쪽 옆구리에, 그리고 오른쪽 팔을 스친 다음 뱃 속에 머물렀습니다.

안 의사는 본시 이토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한번 잘못하면 천하대사가 낭패라고 판단, 만전을 기하여 일본인 중에 의젓해 보이는, 앞서가는 자들을 향하여 다시 세 발을 더 쏘았습니다.

이 세 발의 총알은 일본인 하얼빈 총영사관 가와카미(川上)의 오른팔에, 이토의 수행비서관 모리()의 왼쪽 허리를 관통해서 복부에, 남만주 철도주식회사 이사인 다나카(田中)의 왼쪽 다리에 박혀 차례로 쓰러졌습니다.

이때가 오전 930. 저격 직후 러시아 헌병들이 덮치자 힘에 밀려 넘어지면서 권총을 떨어뜨렸던 안 의사는 곧장 일어나 하늘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라는 뜻의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를 크게 세 번 외치고, 그 자리에서 붙잡혔습니다.

순식간에 하얼빈 역은 아비규환이 되었고, 열차 특실로 옮겨진 이토 히로부미는 오전 10시경 과다출혈로 숨지고 말았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나이는 당시 69세였으며,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약 4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안중근이 사용한 총기는 정교한 브라우닝 7연발 권총으로, 그가 사용한 총탄 끝에는 십자 모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안 의사는 그토록 염원하던 일, 19091026일 오전 930, 조국을 만신창이로 만든 이 나라의 원흉, 국적(國賊) 1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함으로써 한민족의 기상을 세계에 보여 주었으며, 핍박받는 식민지 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잠들었던 민족의식을 일깨웠습니다. 세 발의 총탄에 관통상을 입은 이토는 아무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곧바로 절명했습니다.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온 세계가 떠들썩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은 서로 환호의 찬사를 보냈으며 사람들은 감히 통쾌하다는 말은 못했지만 저마다 어깨가 들썩했고 서로 은밀히 축하하곤 했습니다.

 

이토를 처단한 안 의사는 생사에 연연하지 않았으니, 이토를 총살한 목적을 말할 때 한국 의병의 참모중장 자격으로 죽인 것임을 일본 법정에서 떳떳하게 밝혓습니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한국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훗날 공판 과정에서 재판장이 이토를 쏜 뒤에 그 자리에서 자살이라고 할 생각이었는가?’라고 물었을 때, 나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이토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도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으로, 아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개 때문에 이토를 죽여도 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라고 답했습니다.

또한 그 자리에서 얼마든지 도주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안중근은 예상했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거사한 것이므로 결코 도주할 생각이 없었다.”라고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6) 1910326, 여순 감옥 생활 144일 만에 순국

19091030, 하얼빈 일본제국 총영사관, 1회 심문조서에서 미조부치 타카오 검찰관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를 아무런 떨림도 없이 논리정연하게 답하여 일본인 재판관과 검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말한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둘째, 한국 고종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셋째, 을사 5조약과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넷째,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다섯째,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를 한 죄요

여섯째, 철도, 광산, 산림, 농지를 빼앗은 죄요

일곱째,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여덟째,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요

아홉째,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요

열째,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열한째,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열두째,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열셋째,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 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열넷째, 대륙침략으로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요

열다섯째,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이다.

 

안 의사가 지적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은 어김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안 의사는 그 시대 제국주의의 가장 실세인 독재자 이토 히로부미의 파렴치함을 적나라하게 알린 것입니다.

 

검찰관이 피고는 이토 공의 생명을 잃게 했는데, 그러면 피고의 생명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라고 묻자, 나는 원래 내 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토를 살해한 후 나는 법정에 나가서 이토의 죄악을 일일이 진술하고, 이후 나 자신은 일본 측에 맡길 생각이었다. ... 이토는 죽을 죄를 지었고, 하늘을 대신해서 내가 집행한 것이다. 나의 거사를, 앞으로 일본이 평화를 위해 노력하라는 진언으로 받아주기를 바란다. 나는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다.”라고 답하였습니다.

안 의사는 그 위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조금도 떨리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올곧고 의연한 자세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낱낱이 파헤쳐 밝혔고, 이에 일제 검사와 변호사들은 모두 그의 박식함과 당당함, 막힘없이 강물처럼 말을 이어가는 논리에 놀라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1회 심문조서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과 상세한 진술을 들은 미조부치 검사는 지금 진술한 것을 들으니 당신은 정말 동양의 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사는 절대로 사형을 받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라고 진정어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안 의사는 내가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소. 단지 이 뜻을 일본 왕에게 속히 알려 이토의 못된 정략을 시급히 고쳐 동양의 위급한 대세를 바로 잡는 것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이오.”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동안 여러 자료에 나타난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일본인들은 안 의사의 훌륭한 인품에 감동하여 고문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안 의사 자서전에 형무소장 구리하라와 일반관리들도 모두 친절을 베풀어 주어 고마웠다고 기록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 의사는 1909114일 여순에서 두 번째 검찰관 심문을 시작으로 그해 1226일까지 11번의 심문을 받았는데, 횟수를 거듭할수록 검찰관의 심문태도가 강압적인 분위기로 변해 갔습니다. 이것은 당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는 안 의사 의거의 정당성과 재판관할권의 애매한 입장 그리고 안 의사의 돈독한 신앙심등에 대한 배려로 무기징역을 고려했으나, 일본 정부 내 강경파가 서둘러 극형에 처하라는 밀명을 보내옴으로써 관동도독부 법원의 태도가 표변(豹變)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음은 1909116일 오후 230분경, 여순 감옥에 수감 중이던 안 의사가 쓴 글 중 일부입니다.

슬프다! 천하 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옳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해, 하얼빈에서 총 한 발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늙은 도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몸이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고 말했던 그의 애국 충정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편 안 의사의 이토 저격 사건이 세계로 알려지면서 국내외의 유능한 변호사들이 안 의사를 살리기 위해 변론을 맡겠다고 나섰으며(러시아인 2, 영국인 2, 스페인인 1, 한국인 2, 일본인 1), 재판을 위한 모금 운동이 할발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재판을 자신들의 뜻대로 진행하려고 국제변호사 선임을 막고 일본인 관선변호사(미즈노 기치타로오, 카미다 세이지) 두 명으로 대체하여 형식적인 재판 절차를 밟아갔습니다. 안중근 가족이 선임한 한국인 안병찬 변호사도 1910114일 대련에 도착하여 법원에 선임계를 제출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 안병찬은 피를 토할 정도로 성하지 못한 몸이었음에도, 재판이 진행될 때마다 법정에 나가 일제의 일방적인 재판을 지켜보았습니다. 이후 안병찬은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힌 이재명 의사의 변호를 맡았고,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1931운동에 참여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쳤습니다.

 

여순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취조는 검찰관 미조부치와 조선통감부에서 파견된 사카이 경사 두 사람에 의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조부치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마치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위해 벌인 전쟁인 것처럼 호도하고, 일본의 통감정치가 한국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한국은 독립해서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어린아이와 같으며, 따라서 일본이 후견인이 되어 보호하고 있는 것임을 인정하라고 안중근을 집요하게 회유하려 했습니다.

또 이토를 죽인 것이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라고 한 마디만 하면 사형을 면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온갖 거짓말로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안 의사는 침착한 태도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포살하려고 작심했을 때 나는 이미 죽기를 각오한 바요.”라고 말하는가 하면, 나의 행동은 의를 위함이지 절대로 사적 명예를 탐해서 나온 것이 아니오. 나는 의로 나라에 보답하고 의를 위해 내 생명을 기꺼이 바칠 것이오. 따라서 명예는 나와는 하등 관계가 없소.”라고 대장부의 기개를 나타내었습니다.

 

한편 안중근 의사의 공판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191027일부터 12일까지 일사천리로 6차례 진행되었습니다. 재판장은 마나베, 검찰관 미조부치, 변호인으로 미즈노와 카마다 두 관선변호인이 출두했습니다. 191027일 재판장은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순으로 성명, 나이, 신분, 직업, 주소, 본적지, 출생 등을 차례로 물었으며, 대부분의 심문은 안중근에게 집중되었는데, 안중근은 검사의 신문 때와 다를 바 없이 당당하고 거침없이 소신을 밝혔습니다.

“...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이토를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7개조의 조약이 성립될 당시부터 살해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토를 살해할 작정으로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으로 가서 내 한 몸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한국의 독립을 도모하고 있었다.”

 

19102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재판장 마나베는 안중근 의사를 사형에 처한다고 선고하였습니다(우덕순은 징역 3, 조도선과 유동하는 16개월 형). 안 의사가 일제의 침략 행위와 이토의 죄에 대해 발언을 하려 하면 재판장은 문서로 남기라면서 입을 막았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안 의사는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라고하며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다시 살아날 기회가 될지도 모를 상고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219일 안 의사가 공소권을 포기하자 일본정부는 크게 놀랐습니다. 고등법원장 히라이시는 일부러 형무소로 찾아와 상고를 권고하였으나 안 의사는 끝내 이를 거절했습니다.

안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는 안 의사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두 동생을 급히 여순으로 보내면서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라는 뜻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한국에서는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에 시모시자(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사형 언도의 소식을 듣고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모여 너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네가 사랑하는 교우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살려달라고 구걸하면 양반집 체면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제는 평화스러운 천당에서 만나자.”라는 말과 함께 아들의 수의를 만들어 보내었습니다. 안 의사는 사형 집행 전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지어준 까만 한복 바지와 흰색 저고리를 입었습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장남 안중근이 집안도 돌보지 않고 독립 운동에 앞장섰을 때 적극적으로 그 일을 지원했던 이가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안중근이 해외 망명을 추진할 때 어머니는 집안일은 생각하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집행 전날 두 동생(안정근, 안공근)이 찾아왔을 때 가장 먼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두 동생의 손을 굳게 잡고 기도를 올린 후 자신의 유언을 받아쓰도록 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약 3개월 동안 영하 30도가 오르내리는 혹한의 추위를 견디면서 또 혹심한 신문과 재판을 받는 틈틈이 매일 몇 시간씩 저술을 쉬지 않았습니다. 공판 개시 2개월 전인 19091213일부터 옥중 자서전 안흥칠 역사를 쓰기 시작하여 1910315일에 탈고하였습니다. 안 의사는 이 자서전을 통해 만 30년이란 짧은 생애를 출생부터 성장 배경과 그 과정,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게 된 경위와 그 이유까지 진솔하고도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안응칠 역사에 이어 안 의사는 곧바로 동양평화론의 집필에 들어갔습니다. 법적으로 보장된 항소를 포기하는 대신 고등법원장 하라이시에게 예정된 사형집행일을 15일 정도 연기해 달라고 탄원하고 집필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사형을 앞둔 너무나 절박한 상황에서 318일 서문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그가 남길 글의 내용이 두려웠는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안 의사는 서문,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 5단계 중에 전감까지만 완성하고 끝을 보지 못했습니다.

 

1910326일 오전 10, 여순은 아침부터 짙은 안개 속에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전날 고향에서 보내온 흰색 명주 한복으로 갈아입은 안 의사는 간수 4명의 호송을 받으며 형장으로 끌려나왔습니다. 이윽고 감옥 소장이 사형 집행문을 낭독하고 뭔가 남길 말이 있느냐고 묻자 아무것도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일한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할 것을 바란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안 의사는 마지막으로 동양평화만세를 삼창하고자 한다라고 하였으나, 감옥 소장(전옥)이 허락지 않아 사형집행을 명하였습니다. 이에 간수가 반 장짜리 종이 두 장을 접어 안 의사의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천을 씌웠습니다. 안 의사는 수 분간 묵도를 했고 기도가 끝나자 수 명의 간수에 둘러싸여 교수대로 향했습니다. 교수대의 구조는 마치 2층집 같아서 작은 계단 7개를 올라가면 화로방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안 의사가 교수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 간수 한 명이 그의 목에 밧줄을 감고 교수대 한쪽을 밟으니 바닥에 꽈당소리를 내며 떨어졌습니다. 1015분 안 의사는 완전히 절명했습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1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안 의사는 수감 생활 약 5개월(144)만에 중국 요녕성 대련시 여순(뤼순)에 있는 감옥 교수형장에서 32(31)로 순국하였습니다.

두 동생은 대한독립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유해를 주국으로 반장(返葬)하지 말라는 유언을 기억하며, 안중근이 처형되던 날 감옥 밖에서 형의 시신을 넘겨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점심 때가 지나가고 날이 어둑해져도 소식이 없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감옥 소장을 찾아가 형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따졌습니다. 그는 당신들은 혈육의 정으로 유골을 가져가려고 하지만 정부의 명령이 있으니 어떻게 하겠는가?’라며 끝내 안 의사의 유해를 내어주지 않았고 안 의사가 묻힌 곳조차 알려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안중근 추모 열기를 미리 감지한 일제가, 안 의사의 유해를 돌려주게 될 경우 그가 묻힌 곳이 곧 한국의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공동묘지 비슷한 분묘 속에 그의 유해를 감추어 버려 아직도 그의 시신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형 직전 두 동생을 통해 전한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언에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미 생사를 초월한 안 의사의 한국의 자유 독립을 그리는 사무친 심경이 담겨 있습니다.

[순국 전날, 이천만 동포에게 남긴 안중근의 유언]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 자로서 여한이 없겠노라.

 

대한독립을 평생의 사명으로 알고 오로지 대한독립을 도모했던 그의 불굴의 투혼이, 오늘날 독립을 이룩한 자유 대한의 품에서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가슴에 다시금 선명하게 새겨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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