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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1. 구한말-일제강점기(1) 운영자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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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한말 조정의 부패와 일제의 조선침투

 

오늘 발전된 조국 밑뿌리의 가장 암울했던 역사는, 바로 근대에서 현대로 전환되는 시기에 일어났던 1950625전쟁입니다. 대한민국 전 국토를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어버린 625는 세계 25개국이 참전하여 600만 명이 희생된 국제대전이었고, 한반도 전체를 적화시키려는 북한 공산당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공산주의가 들어오게 된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그것이 급속도로 번진 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공산주의의 태동은 일제 강점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데,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먼저 구한말 조정의 타락상을 자세히 살펴야합니다. 한 국가가 망할 때는 반드시 근본적이 원인이 있으며, 그 배후에는 망할 조짐이 벌써 곳곳에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조선 왕조는 중기 이래로 잠시 침체하였다가 후기에 이르러서는 영정조시대(1725-1800)의 중흥정치에 힘입어 다소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외척이 정치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폐단과 국가 재정의 고갈, 농촌 경제의 파탄으로, 정국은 또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1800년에 정조(1777-1800, 24년 재위)가 사망한 뒤 11세의 어린 순조(1801-1834)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이른바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단일 가문이 관리임용을 도맡아 정치의 요직을 독점하고, 심지어 왕까지도 멋대로 주무르게 된 것입니다. 순조 말년에는 풍양 조씨, 그 다음 헌종 때는 남양 홍씨가 세력을 잡는 등 약간의 권력 이동이 있었으나, 대체로 안동 김씨 일가가 순조, 헌종, 철종의 360여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국가의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정부의 요직을 독점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는 추락할 대로 추락하여 국권이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 말기(구한말) 조정은 뿌리 깊은 당파싸움으로 극도로 부패하였고, 숭문천무(崇文賤武: 문을 받들고 무를 천하게 여김) 정신만을 강조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 나라를 부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함)에는 전혀 힘을 쏟지 않았습니다.

조정에는 돈을 받고 벼슬을 시키는 매관매직과 특정 성시 집안끼리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치(이른바 족벌 정치)가 자행되면서, 피 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세도정치의 공통점은 나라보다 가문의 이익을 앞세우는 데 있었습니다. 이렇게 거듭된 혼란으로 부패한 탐관오리가 늘면서 국고는 고갈 상태에 이르렀고, 심지어 군인들의 봉급을 13개월이나 지급하지 못하여 188265일 임오군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조선 시대 말기에는 나라의 안팎을 내 집처럼 살피고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는 정직한 관리를 찾아볼 수 없었고, 지방의 관리들까지 사리사욕을 위해 귀중한 시간과 국고를 낭비했습니다. 매관매직과 관리들의 행패가 가혹하여 세금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았던 가난한 서민들은 생활고에 허덕였고 한숨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과중한 세금 착취에 못 이겨 산 속에 들어가서 밤이면 도적떼(‘명화적이라 불리는 불한당)가 되어 관청을 습격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습니다.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가 하면, 양반이 되려고 돈을 주고 성씨 본관을 바꾸어 족보를 위조하는 등 사회의 위계질서가 깨지고 온 나라가 난리에 난리를 거듭하였습니다.

조정이 한동안 국방 강화에 힘쓰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는 상황을 알게 된 가까운 나라 일본은, 조정의 간사한 신하들을 금품과 돈으로 매수하고 그들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통째로 삼키기 위한 계략을 하나하나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무능함과 약점을 간파한 후쿠자와는, 1894지지신보에서 조선은 부패한 유생(儒生)의 소굴로서 위로는 뜻이 크고 과단성이 있는 인물이 없고 국민은 노예의 환경에서 살고 있다. 상하 모두가 문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학자는 있지만 다만 중국의 문자만 알고 세계정세는 모르고 있다. 그 나라의 질을 평가한다면 글자를 아는 야만국이라 하겠다.”라고 조선을 극도로 무시하는 글을 남겼는데, 당시 일본이 조선 침략의 명분을 찾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미 일본은 1853년 동경에 찾아온 미국의 페리 제독 함대의 강요에 의해 18543미일화친(가나가와) 조약을 맺고 개항하였고, 청나라 역시 2차에 걸친 아편전쟁 끝에 186012월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한 북경 함락(베이징 조역)으로 서양의 발전된 문하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1)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1863년 철종이 재위 14년 만에 후사없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 12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이때부터 흥선대원군은 10년 동안 막강한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쇄국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조선에는 독일의 상인 오베르트가 18663월 말과 8월 초 두 차례나 조선 해역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갔으며, 그 직후인 8월 중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입항하여 평양 군민들과 충돌함으로써 후에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1866년 초 대원군은 천주교 금지령을 내린 상태였고, 그 해 9월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인 8,000여 명을 처형하였습니다. 이에 그해 10월 프랑스는 함대를 앞세우고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을 살해한 것에 대해 보복한다며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의 문호 개방이 목적이었으며, 이때 양헌수 부대가 119일 정족산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프랑스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이를 병인양요라고 합니다.

 

이후 18685, 독일의 오베르트 원정대가 흥선대원군의 생부이며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南延君)의 무덤(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소재)을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서양인을 더욱 이적시(夷狄視)하게 되어 쇄국정책과 천주고 탄압을 한층 더 강화시켰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8715,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로 쳐들어왔으니 흥선대원군의 완강한 쇄국정책에 부딪혀 수차례 전투 끝에 개항을 요구하는 서한을 남기고 철수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렇게 서양 세력의 조선에 대한 문호 개방 요구가 잦아지자 흥선대원군은 군사력 강화를 위해 많은 비용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부 재정이 그리 넉넉지 않은데다가 조세제도에 문제가 생겨 백성에게 거둔 세금이 중간에 새어버리는 삼정(三政) 문란 현상까지 겹쳐 매우 궁핍한 상태였습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書院撤廢), 호포제(戶布制) 실시, 당백전(當百錢) 발행, 원납전(願納錢) 징수 등으로 개혁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근본적인 해결점은 찾지 못하였고, 물가상승, 양반층의 반발 등의 부작용만 낳았습니다. 결국 대원군이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하고 위기에 처하자, 지금까지 그 누구도 거론하지 못했던 일을 187311월 면암 최익현 등이 하게 되는데, “삼가 아뢰옵건데 전하께서는 친친의 서열에 있는 사람의 지위를 높이고 녹을 많이 주되 국정에는 간여하지 말도록 하소서라고 하여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고종을 대신해 10년간 섭정을 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1873년 양주의 직곡 산장으로 내려갔습니다.

이에 세력을 얻은 고종은 그의 처가인 여흥 민씨 일족과 그 주변 인물들을 관리로 대거 임명하였는데, 이로써 민씨 일가의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고종의 할머니, 어머니, 부인, 며느리까지 모두 민씨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이 하야(下野)하고 개국(開國)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으며, 일본이 무력을 동원해 강제로 조선의 문호를 열려고 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2) 1876,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

18754, 조선의 문호개방과 지배를 열망하던 일본은 해로(海路) 측량을 구실로 운요호 등 군함 3척을 강화도에 파견하였고, 부산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해로 측량과 아울러 함포 사격을 하며 무력시위를 감행하였습니다. 3개월 뒤 일본이 운요호를 수도의 관문인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도 영종진에 재차 출동시켰고, 약탈과 살상까지 저지르는 만행을 서슴지 않자, 우리측의 수비병들도 발포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을 가리켜 운요호사건(혹은 강화도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거류민을 보호하고 운요호에 포격을 가한 책임을 묻겠다는 구실을 내세워 18761월에 육군중장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를 전권대표로 한 8척의 군함과 약 600여 명의 무장병력이 강화도 갑곶에 상륙하여 협상을 강요하였습니다. 조선측 대표 신헌(申櫶)과 구로다는 오랜 줄다리기 끝에 187623(서명일),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강화도조약은 일본의 무력시위 아래 강압적으로 체결된 최초의 불평등조약으로, 일본이 요구한 13개 조항 중에 최혜국대우조항을 제외한 모든 조항이 포함되었고 조선의 요구는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정치적경제적 세력을 조선에 침투 시키려는 일본의 의도대로 체결된 것입니다. 12개의 조항 중에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하여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한 제 1항은, 실제로는 일본이 조선 식민지화를 방해하는 청나라 세력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산 이외의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도록 한 제 4항이나, 해안 측량을 허용해야 한다는 제 7항은 일본이 군사작전 시에 상륙 지점을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양국 관리는 양국 인미의 자유로운 무역활동에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제 9항은, 일본이 막강한 경제력을 동원하여 조선의 영세한 산업과 상인을 착취하여도 조선 정부가 그들을 보호할 수 없게 만든 독소적인 규정이었습니다. 심지어 일본측은 조선에서 발생한 일본인의 범죄는 일본국 간원이 재판하도록 한다는 치외법권(治外法權) 조항도 포함시켰습니다(10).

이 조약을 계기로 조선은 개항을 이룬 듯했으나, 사실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침략정책에 관문을 열어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3) 1882, 임오군란

임오군란(壬午軍亂)이란, 1882(고종 19) 65, 구식 군인들이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과의 차별 대우, 봉급 체불, 군량미 미지급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고관을 살해하는 등 난동을 일으켰던 사건을 말합니다.

조선 정부에서는 18814월 별기군을 창설하였는데, 민겸호가 그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수도 및 외곽 지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된 5군영을 2영으로 축소하였습니다. 이때 상당수 군인들이 실직하였고, 2영에 포함되었던 군인들도 별기군과의 차별대우와 열악한 조건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가 개화정책을 시작하면서 상당량의 미곡이 싼 값에 일본으로 유출되어 국내에는 미곡이 부족했고 농천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부패한 탐관오리들이 사리사욕을 위해 재정을 낭비하여 국고는 더욱 고갈상태에 빠졌습니다.

13개월간 봉급을 받지 못해 가족과 함께 기아로 쓰러질 지경이 되었을 때, 구식 군인에게 우선 1개월분의 녹봉미가 지급되었습니다. 임오년 65(양력 719)이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포대 자루를 들고 모였는데, 민겸호의 하인 둘이 고지기(관아의 창고를 보살피고 지키는 사람)로 창고 문을 열고 쌀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지급된 녹봉미는 약속한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데다 그나마도 겨와 모래가 섞여 있어, 썩은 냄새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지기가 쌀을 착복한 후 남아 있는 쌀에 몰래 겨와 모래를 섞었던 것입니다.

결국 고지기와 군졸들 사이에 심한 말다툼이 벌어졌고, 오랫동안 천대받던 군졸들의 울분이 터져 고지기에게 주먹질을 했습니다. 민겸호는 김춘영, 유복만 등 주동자들을 포도청에 잡아들여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2명을 처형하도록 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군졸들은 더욱 분개하여 69, 민겸호의 집을 기습하여 모조리 파괴하였습니다.

이때 군졸들을 1873년 실각한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자신들을 이끌어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였고, 이에 흥선대원군의 개입으로 군란은 더욱 조직화되었습니다. 군졸들은 대담하고 조직적인 행동으로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약탈하여 포도청 의금부를 습격하고, 일본 공사관을 포위 공격하여 불태우는 바람에, 일본 공관원 전원은 인천으로 도피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별기군의 교란 호리모토를 비롯한 일본 순사 13명이 성난 군인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들은 사기 충전하여 610일이 되자 새벽부터 창덕궁 대궐로 몰려가 난장판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분풀이로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을 칼로 쳐서 죽였으며, 이때 민씨 황후는 궁녀복으로 변장한 채 무예별감 홍재희의 등에 업혀 궁문을 빠져 나와 광나루를 건너 여주 민영위의 집으로 도망쳐 있다가, 충주 장호원에 있는 충주목사(忠州牧使)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여 지냈습니다.

민씨 황후의 행방과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가운데 이 엄청난 반란을 누가 수습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즈음, 고종은 대원군에게 임오군란의 사태 해결을 부탁하며 전권을 위임하였습니다. 1882610, 9년 만에 정권을 다시 장악하게 된 대원군은 민씨가 죽었다고 장례를 치름으로써 군졸들을 해산시켰으며, 그동안 고종에 의해 줄기차게 진행되어 오던 개혁을 모두 중단시켰습니다. 대원군의 조치는 파격적이었습니다. 그의 재집권 기간 동안 별기군과 2영을 혁파하고 다시 5군영을 설치하였으며,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혁파하고,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켰습니다.

 

한편 충주에 피신해 있던 민씨는 619일 청나라의 천진에 주재하고 있던 김윤식 등으로 하여금 청나라의 원ㄹ\조를 요청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청나라는 627일 마첸창(馬建常)이 이끄는 육군 4,500명을 육로로 보내고, 77일에는 4천 병력을 5척의 군함에 실어 남양만으로 급파했습니다. 712, 청나라가 대원군을 군란선동 배후자로 지목하여 강제로 납치하여 천진으로 압송해 감으로써 대원군의 재집권은 3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으며, 이후 민시 황후가 20년간 집권하게 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를 지키는 군대를 천시하고 군인을 홀대한 나라 치고 번영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지정학적 여건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강군(强軍)이 뒷받침된 국력을 기르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선 정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구한말 우리나라가 주권 침탈을 당한 주요인은, 나라가 오랫동안 숭문천무의 정신만을 내세우는 정치인들의 손에 의해 경영되었기 때문입니다. 1882년의 임오군란은 숭문천무 정책의 종착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의 연호는 광무(光武)였습니다. ‘무를 빛내고 숭상하겠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할 때 동원한 우리 병력은 2개 사단에 불과했습니다.

 

 

(4) 1882, 제물포 조약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발생한 피해보상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였습니다. 저들은 제물포항에 도착한 뒤 국왕을 알현하고 일본측의 요구 조건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였습니다. 1882830(고전 19), 일본의 군함 히에이(比叡) 함상에서 일본군의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6개 조항의 제물포 조약을 일사천리로 체결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금으로부터 20일을 기하여 조선국은 흉도를 체포하고 수괴를 가려내 중벌로 다스릴 것.

2 일본국 관리로 피해를 입은 자는 조선국이 융숭한 예로 장사를 지낼 것.

3 조선국은 5만원을 지불하여 일본국 관리 피해자의 유족 및 부상자에 지급할 것.

4 흉도의 폭거로 인하여 일본국이 받은 손해 그리고 공사(公使)를 호위한 육해군의 군비 중에서 50만원을 조선이 부담하되, 매년 10만원씩 5년에 걸쳐 완납 청산할 것.

5 일본 공사관에 군인 약간 명을 두어 경비하게 하며, 병영의 설치수선은 조선국이 책임을 지고, 만약 조선국의 병민이 법률을 지킨지 1년 후에 일본 공사가 경비가 필요하지 않다고 인정할 때에는 철병을 해도 무방함.

6 조선국은 일본에 대관(大官)을 특파하고 국서를 보내어 일본국에 사죄할 것.

 

 

위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한 결과, 군란 주모자들을 처벌하고 배상금 55만원 가운데 15만원을 선 지불하였습니다. 그리고 박영효, 김옥균, 김만식을 일본에 사죄사로 파견하였습니다 또 일본은 공사관 경비를 구실로 1개 대대 병력을 한성에 파견하였는데, 자기들 경비는 한 푼도 들이지 않고 공짜로 병영을 설치하였습니다. 실로 임진왜란 이후 처음 당하는 치욕이요 위협이었습니다.

청나라 또한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 일본에 대한 우위권을 차지하려고, 청나라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는 등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에 적극적이었으며, 연금해 두었던 대원군을 3년 만에 조선으로 보내어 고종과 싸우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임오군란은 조선에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을 확대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5) 1884, 갑신정변

갑신정변은 1884(고종 21)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을 비롯한 급진개화파의 개화(開化)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세계 역사의 발전 방향에 따라 봉건 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근대화를 꾀하였던 정변입니다. 급진개화파는 스스로 개화당 혹은 독립당이라 불렀습니다. 개화당이 일본에 유학시킨 서재필(徐載弼) 등 사관생도들이 18847월 귀국하여 지휘 체계를 갖춘 부대가 설립되고, 비밀무장조직으로 충의계(忠義契)까지 조직되었으며 약 1,000명의 정변 무력을 준비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집권세력인 민씨 척족정권은 나랏일은 생각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 추구에만 급급하여 개화당의 개혁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대규모의 병력을 주둔시켜 정치, 경제, 군사 등에서 내정 간섭을 계속하며 조선 침략의 계책을 꾸미고 있었는데, 민시 황후는 그러한 청나라를 의지하여 정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개화는 뜻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듯하였으나, 마침 18848월 베트남에서 일어난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청나라는 3,000명의 군사 중에 절반인 1,500명을 철수시켰습니다. 청나라는 3,000명의 군사 중에 절반인 1,500명을 철수시켰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급진개화파 세력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18841017(양력 12 4),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郵政局)의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개국 축하 연회장에는 민영익홍영식김홍집김옥균서광범윤치오 등 급진개화파와 각국 외교관이 참석하였습니다. 10시쯤 불이야하는 소리가 나자 민영익이 밖으로 나오다 칼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이 일은 김옥균 등이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계획대로 일본 공사 다케조는 일본군 200여 명을 지휘하여 고종이 있는 경운궁을 에워쌌고, 김옥균 일파는 창덕궁에 들어가 민태호조영하한규직윤태준이조연환관 윤재현 등 친청파를 죽였습니다. 정변 주도 세력은 서재필 등 사관생도 14명과 조선군 70, 김옥균 등 청년 30여 명, 상인 100여 명, 일본군 200여 명, 450 여 명이었습니다.

개화당은 군사지휘권을 가진 영사들과 민씨 일가의 핵심 세력들을 제거하고 신정부를 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옥균을 중심으로 협의된 혁신 정강을 제정 공포하였습니다. 혁신 정강은 대원군의 환국, 문벌의 폐지, 불필요한 기구나 제도의 폐지, 탐관우리 처벌, 규장각의 폐지, 순사제도(巡査制度) 실시, 모든 국가 재정의 일원화, 근대식 제도 도입 등 14개조로 구성되었습니다. 비록 불안정하고 엉성하지만 그 내용은 근대 민주주의제도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주둔 중이던 청나라 군대 1,500명이 즉시 공격하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 국왕을 모시고 있던 홍영식은 청군에 의해 참살되었습니다. 결국 갑신정변은 19일 오후 3, 3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외세를 의존한 결과 개화의 뜻을 이루지 못한 갑신정변을 ‘3일 천하라고도 부릅니다. 갑신정변은 근대화의 방향은 제시하였지만 도리어 근대화를 늦추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일본은 당시 공사관 소실 등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조선측에 물어 조선 정부는 일본에 사죄하고 배상금까지 지불하였습니다. 이후 일본과 청나라는 18854, 천진조약을 체결하고 양측이 모두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1885년 고종은, 갑신정변으로 개혁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끝까지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여 문교부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있는 각료는 여흥 민 씨뿐이어서 민병식, 민응식, 민영상, 민영준, 민영소, 민두호, 민영환 등 약 260여 명의 민씨를 다시 등용하였고, 고종은 민 씨 세력에 의해 좌우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민 씨 세력과 다른 세력이 서로 싸우게 되어 정국은 매우 불안하였습니다. 이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여 관려와 양반들은 평민들과 노비들을 착취하고, 혹독하게 탄압하였습니다.

 

 

(6) 1894,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무엇보다 일본 세력이 깊이 침투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1894년에 있었던 동학혁명과 그것을 빌미로 일어났던 청일전쟁입니다. 동학혁명은 갑오년에 일어났다 하여 갑오농민운동,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동학(東學)이란 서학(西學)에 대응할 만한 동토(東土) 한국의 종교라는 뜻으로, 천주교 등 밀려드는 서학에 대처하여 민족의 주체성과 도덕관을 바로 세우고 국권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만든,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신흥종교입니다. 동학은 1860(철종 11) 경주 사람 최제우에 의해 창도되었습니다. 최제우는 서자 출신으로 조선에서는 도저히 출세할 수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는 20세부터 10년간 전국을 다니며 서민들의 아픔을 보고 배웠습니다. 유성룡의 양명학과 허균의 평등사상의 영향도 받았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전개하여, 당시 양반들에게 착취와 극심한 학대를 받았던 평민과 노비들에게 그는 마치 구세주와 같았습니다.

동학의 만민평등 사상은 종래의 유교적 윤리와 퇴폐한 양반사회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을 있습니다. 대표 이념이 평등인데다 민간 신앙과 접목된 단순한 교리였으므로, 일반 서민층에 쉽게 파고들어 짧은 시간에 다수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1861년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했을 때 6개월 만에 3천 명이 몰려들었습니다. 이에 나라에서는 18641월 최제우를 체포하여 처형하였습니다.

 

동학혁명의 결정적 계기는, 전북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정부패와 동학교도 탄압 사건이었습니다. 전북 고부는 땅이 비옥하여 저수지가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데, 조병갑 고부군수는 억지로 저수지를 더 만들고 백성에게 물값을 받았습니다. 또한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뒤집어씌워 벌금을 챙겼고, 부친의 비석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돈을 걷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1894215(양력) 전봉준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패에 저항하여 단숨에 고부관청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1894년 음력 3월 하순, 동학농민군은 총대장 전봉준, 대장 손화중, 김개남 등을 필두로 8천 명이 백산에 모였는데, 이들은 정부의 정예군에 대항하여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또한 정부에서 급파된 홍계훈이 이끄는 800명의 진압군도 장성 황룡천 전투에서 물리치고, 427일 전주성을 무혈점령하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의 요구는 탐관오리의 제거와 조세 수탈을 시정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동학농민군이 점령하는 곳마다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고리대금도 탕감하고, 부정축재한 양반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자, 노비들은 저마다 만세를 부르며 동학농민군에 충성하였고, 정부에서는 그 세력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동학 세력이 점점 커지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습니다. 청은 189457, 군사 2,500명을 아산만에 상륙시켰으며, 이에 따라 일본도 천진조약을 빌미로 59일 인천에 7,000명의 대부대를 상륙시켰습니다. 조선 땅이 외국 군대들의 싸움터가 된 것입니다.

일본 군대는 1894621, 대원군을 태운 가마를 앞세워 왕궁을 포위하고 조선 정부의 안방 경복궁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왕궁을 지키던 조선 군대는 무장해제되어 순식간에 흩어졌고, 당일 국왕과 대신들은 연금되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한나절도 안 되어 일본의 전쟁 도발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이틀 후인 1894623, 일본 해군은 아산만에 정박 중인 청나라 군함을 기습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고, 8일 뒤(71)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18949, 청나라와의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본격화하였습니다.

 

조선 땅이 외국군들의 전쟁터가 되자 이에 분개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 지도부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18949월 제 2차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전봉준은 심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일본군이 개화라고 일컬어 애초부터 한 마디 알리는 말도 없이 민간에 전파하고, 또 격서도 없이 군대를 서울에 끌어들여 밤중에 왕궁을 격파하여 왕을 놀라게 하였다고 하기에, 초야에 묻힌 사민(士民)들이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분개하지 않을 수 없어 의병을 규합해서 일본인과 접전하게 되었다.”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지난번 전주에서 해산했던 동학농민군이 삼례로 집결하기 시작하였고, 논산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무려 20만 명에 달하였습니다. 한편 4만여 명으로 구성된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에 일본군은 논산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우금치 일대에 방어선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1119,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동학군의 최후 대접전이 있었습니다. 이때 동학농민군은 수는 많았지만 무기가 변변치 않아 고작 몽둥이, 죽창, 활과 칼, 총에 불을 붙여서 쏘는 화승총뿐이었고, 일본군은 최신식 기관총과 소총으로 무장하였습니다.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동학농민군은 막대한 희생을 내고, 겨우 500명만 남긴 채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나머지 김개남, 손화중도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26명의 지도부는 대둔산 정상에서 항전하다 전원 자결하였습니다. 이때 양반들은 숨어 있는 동학군을 찾아 무참히 죽였습니다.

 

이처럼 동학혁명은 외세의 침입으로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채, 결과적으로 예기치 못한 청일전쟁의 발발 요인이 되었습니다. 18946월 일본의 도발로 시작된 청일전쟁은 조선 땅에서 8개월이나 지속되다가 이듬해 1895417,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조약을 계기로 일본은 기대했던 대로 우리나라를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기세로 식민지 정책을 펼치는 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청나라의 전권대표 이홍장(李鴻章)과 일본의 전권대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승인한다.

2. 청국은 요동 반도와 대민 및 펑후섬(澎湖島)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

3. 청국은 일본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

4. 청국은 일본정부와 그 국민에게 최혜국대우를 부여한다.

5. 청국의 사시중경소주항주의 기선항로를 승인한다.

6. 개항과 일본 선박의 양쯔강 및 그 부속 하천의 자유 통항 용인,

그리고 일본인의 거주영업무역의 자유를 승인한다.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은 청으로부터 요동반도와 대만을 받은데다, 청나라의 간섭이 사라진 조선 땅에 대하여 단독 지배권을 확보하였습니다. 요동과 일본 본토 사이에 갇힌 조선의 운명은 급전직하의 위기로 치닫고 있었고, 일본은 한반도를 그 세력권에 넣아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여 대륙 진출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습니다. 청일전쟁이 조선에 초래한 결과는, 국가로서의 붕괴 그 자체였습니다.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일본인 고문관을 조정에 배치하여 각부의 업무를 장악해 갔고, 조선의 조세를 담보하여 일본 차관을 들여놓게 한 후 철도, 우편, 전신 등을 장악해 갔으며, 조선의 외교권까지도 박탈하려 하였습니다.

 

 

(7) 1894-1896, 갑오개혁(갑오경장)

1894621일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한 후, 강제로 국정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새 정부는 일본군에 힘입어 세워졌으나, 일본은 당장 청과의 전쟁 중에 있었으므로 조선의 내정 간섭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화파 정부는 비교적 자율적인 내정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갑오개혁이라고 부릅니다.

18941217일 김홍집과 박영효가 발표한 홍범 14에는, 앞으로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다짐이 담겨 있습니다. 그 내용은 9월에 부임했던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 공사가 제시했던 내정 개혁 강령 20를 약간 손질한 것뿐입니다. 그 첫 번째가 조선은 청에 의존하고 있는 관념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확실히 건립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20년 전 강화도 조약 때부터 조선의 독립을 이토록 고집한 이유는, 조선 진출에 큰 장애물이었던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갑오개혁은 3차에 걸쳐 추진되었습니다.

 

1차 갑오개혁(18947-10)

1차 갑오개혁은 군국기무처에서 정치 사회 제도의 골격을 잡은 것입니다. 그 중에 백성들에게 크게 환영받은 것은 양반과 상민의 신분 차별 폐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공사 노비제의 폐지, 인신(人身) 매매의 금지, 과거제를 폐지하여 능력 있는 인재의 관료 참여를 허용한 것 등입니다. 그리고 평민이라도 나라에 이롭고 백성을 편하게 할 의견이 있으면 군국기무처에 글을 올려 회의에 붙이도록 하는 등, 지방민의 정치 참여를 제도화하고자 했습니다.

 

2차 갑오개혁(189411-18955)

2차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은 김홍집과 박영효 연립 내각이 추진한 것으로, 주로 지방 제도를 개현한 것입니다. 문무의 구분을 폐지, 의정부 8아문 폐지, 월봉제도(月俸制度) 수립, 8도의 행정제도를 23부로 전환, 관리 등용에 있어서 과거제도를 없애고,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아문의 대신에게 관리임용권 부여, 지방관에 의해 집행되던 사법과 군사업무를 중앙에 예속, 근대관료체제 이후 치안과 행정을 분리했습니다.

 

3차 갑오개혁(18955-18962. 일명 을미개혁’)

3차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은 태양력 사용, 도량형의 통일, 종두법 시행, 우체사(우체국) 설치, 건양 연호 사용, 단발령, 근대식 각종 학교 설치, 훈련대와 시위대를 합병, 서울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 설치 등입니다. 이 가운데 단발령에 대한 반발이 심하여 고종이 단발의 모범을 보였으나 백성들은 정부 명령을 완강히 거부하고,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라고 하며 따르지 않았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여러 제약과 외세의 압력 때문에 실패한 개혁이라고 보는 측면도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근대 사회로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내용을 망라하고 있어 성공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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