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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올 수 없는 다리, 1946년 ④ 운영자 202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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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nfaith.com/bbs/bbsView/115/5822269

돌아올 수 없는 다리, 1946

 

박갑동은 공산주의가 몰락하게 되는 과정을 지적한다. 무자비한 토지 개혁이 집단 농장으로 이어져 생산력 격감을 낳은 것이 공산권 몰락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것이 실체이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은 대대적으로 토지 개혁의 성공을 선전했다. 폭력적인 토지개혁으로 수탈당한 북한의 지주들은 대거 월남(越南)했다.

토지 개혁과 함께 산업 시설에 대한 국유화(國有化)가 단행되었다.

1946주요 산업 국유화 법령에 따라 전 산업의 90%에 해당하는 1,032개 공장, 기업, 문화 기관이 공산당에게 접수되었다.

토지 개혁이나 국유화는 웬만한 정권이면 함부로 실시하기 어려운 조치이다. 국민의 재산에 손을 대어야 하기에 강력한 반발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북한처럼 전 국토에 대한 무상 몰수, 산업 시설의 90%에 대한 국유화같이 엄청난 조치는 막강한 파워를 가진 정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 일을 단행한 정권이 임시 인민 위원회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정말 앞뒤가 안 맞는다. 북한 군대도 임시 인민위원회 산하로 창설되었다.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한 스탈린의 지령, 38선의 분단 선화, 반공 민족주의자들의 제거, 정권 수립, 토지 개혁과 국유화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정책은 일관성 있게 속도전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남한에서의 미 군정은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남한 정국에서는 갈등만 증폭되고 있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합의는 물론, 심의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은 미국이 한반도를 국제 정세, 특히 중국 대륙의 상황에 따라 정책이 바뀔 수 있는 지역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의 세계 정세도 그렇거니와 특히 중국의 정세는 너무나 유동적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과 달리 한국은 광대한 대륙의 일부였다.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중국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내전이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었고 그 앞길이 투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19458월부터 1947년 초반까지의 미국의 남한 정책은 신탁통치를 실시하기 위한 소련과의 교섭을 계속하면서 중국에서의 사태를 관망하는 Wait-and-see 정책, 안개가 개는 것을 기다리는정책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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