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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의 분단 정책과 이승만의 대응 ③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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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분단 정책과 이승만의 대응 ③ 독재자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북한의 공산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1945년 10월 12일, 여전히 이승만이 귀국하기도 전에 북조선 주둔 소련군 25군 사령관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반일당(反日黨)과 민주주의적 단체들은 자기의 강령과 규약을 가지고 와서 반드시 지방 자치 기관과 소련군에 등록하여야 하며 동시에 자기의 지도 기관의 인원 명부를 제출할 것.” 실제로 집행된 명령은 명령서보다 훨씬 엄격했다. 각 정당은 인원 명부를 제출하는 것은 물론, 신원 조사도 받았다. 심지어 조상 때부터의 가계(家系)와 8세 이후의 자서전 내사까지 받아야 했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은 당시 북한 지역의 정치 지도자급 인사들의 정치적 성향에서부터 출신 배경까지 샅샅이 파악할 수 있었다.(이지수, p.73) 이와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소련은 북한의 공산화에 박차를 가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소련이 진군한 지역에는 대단히 유사한 공통점이 있다. 먼저 착취자들의 재산을 무산 대중에게 돌려준다는 요란한 구호와 함께 토지 개혁을 실시한다. 그리고 기존의 공산당과 여타 정당 사이의 합당으로 노동 대중 정당을 출범시킨다. 처음부터 공산당 정권으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노동 대중 정당의 노선을 주장하는 연립 정권을 수립한다. 연립 정권이 수립되고 나면 잇달아 의심스러운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연립 정권에 참여한 인물들의 암살, 사고사, 숙청이 이어진다. 의문사(疑問死)가 연달아 일어난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자들은 소련과 친화적인 공산주의자들뿐이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친소 단일 정권을 수립한다. 이때쯤 되어서 정당의 이름도 공산당으로 바뀐다. (이지수, p.65) 소련의 “공식”은 북한에도 충실히 대입되었다. 처음에는 기독교인 조만식까지도 포함한 연립 정부의 형태를 취했다. 그러다가 국내파 공산주의자인 현준혁이 암살당하고 민족주의자 조만식은 연금되어서 생사(生死)가 불투명해졌다. 북로당의 김일성과 남로당의 박헌영이 남아 있더니, 결국 국내파 박헌영은 숙청되었다. 최종 승자는 소련군 장교 출신 김일성이었다. 좌우 합작이니, 연립 정부니 하는 것은 친소 독재 정권으로 가는 중간 단계들에 불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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