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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의 환국(還國), 그 우여곡절 ②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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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환국(還國), 그 우여곡절 ②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하지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구사하는 윌리엄즈 해군 중령을 우연히 발견했다. 한국에 대한 지식이 전무(全無)했던 그는 반가워하며 그 자리에서 윌리엄즈를 자신의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윌리엄즈는 서울의 중앙청에서 하지의 업무를 보좌했다. 그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책상에서 보고서나 만지작거린 것이 아니라, 직접 한국인들을 만나 민심을 파악하려고 했다. 쌍발 비행기를 타고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 남한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한국의 서민들을 상대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윌리엄즈는 한국인들에게 거듭거듭 똑같은 질문을 받아야 했다.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있다고 하는데 왜 데려오지 않는가?”라는 물음이었다. 윌리엄즈는 자신이 전해 들은 민심을 하지에게 보고했다. 하지는 혼돈 상태의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이승만을 보내 줄 것을 맥아더와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이승만이 임시 정부의 대통령으로 유명했다고는 하지만, 한국을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난 후였다. 더군다나 나이 70의 고령이었다. 평균 연령이 40여 세 전후였던 당시 상황에서 보면, 이승만의 활약상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지도자들은 이승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한국인들도 이승만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는 점은 무언가 특이하다. 어떻게 윌리엄즈가 가는 곳마다 한국인들이 이승만을 보내라고 요청했을까? 여기에 또 하나의 우연이 있다. 그 우연을 만들어 낸 세력은 놀랍게도 공산주의자들이었다. 8.15 해방에서 이승만이 귀국하는 10월 16일까지를 학계에서는 ‘좌익 득세기’라고 부른다. 해방 공간을 주도한 세력이 좌파였기 때문이다. 해방과 함께 온건 좌파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건준)가 발족되었다. 다음 날에는 전국 각지의 교도소에서 수천 명의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풀려난 시국 사범들은 건준의 지방 조직을 차례로 건설해 나갔다. 순식간에 건준은 162개의 지부로 확장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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