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약 없는 외교, 구미(歐美)위원부의 활동 ①,② | 운영자 | 2020-11-14 | |||
|
|||||
|
기약 없는 외교, 구미(歐美)위원부의 활동 ① 한성 정부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된 이승만은 1919년 8월 25일 집정관 총재 명의로 공포문을 발표한다. 그 중 제 2호에 “대한민국을 구미(유럽과 미국) 각국에 대표”하는 기관으로 구미위원부를 성립한다는 내용이 있다. 구미위원부의 권한과 기능은 구미(歐美)에서 정부의 주권 되는 기관이었다. 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유럽과 미국 지역에서의 국사와 외교는 물론, 교포에 대한 행정적 기능도 상해 임정을 대신하여 총괄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상해 임정과 구미위원부의 관계는 동서 양쪽에 분립된 일종의 연립 정부였다고 할 수 있다.(한시준, p.269) (계속)
임시정부 대통령, 친미 외교와 반공 노선 기약 없는 외교, 구미(歐美)위원부의 활동 ② (지난호(3/24)의 이야기 끝부분: 말하자면 상해 임정과 구미위원부의 관계는 동서 양쪽에 분립된 일종의 연립 정부였다고 할 수 있다.) 구미위원부는 이승만의 친미 외교 노선을 실행하는 기구였다. 구미위원부를 통하여 미주 교민들로부터 안정적인 자금 지원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방 열강 특히 미국에 대한 외교, 선전 활동을 꾸준히 전개해 나감으로써 미일(美日) 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될 때 미국의 지원을 얻어 한국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했다. 구미위원부는 미국 본토에 25곳, 미국의 속령 하와이에 11곳, 멕시코와 쿠바에 6곳의 지방 위원부를 두었다. 구미위원부 출범 이후 이승만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독립운동 자금 모금이었다. 모금을 위해 이승만은 아직 세워지지도 않은 대한민국 명의의 독립 공채(公債)를 판매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활용했다. 그것은 핀란드의 유명한 여류 독립운동가 말름스트롬 여사에게서 얻은 아이디어였다. 이승만은 1918년 뉴욕에서 열리는 약소국 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 여사에게서 공채 발행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공채 발행 실적은 양호했다.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 칠레, 캐나다 교포와 화교에게서 1921년까지 81,351달러가 모금되었다. 그 액수는 구미위원부 총수입의 65%였으며, 해외 독립운동 단체가 거둔 자금 중 최고액이었다. 구미위원부는 공채 판매 대금으로 매달 상해 임정에 천 달러 이상을 송금했다. 그리고 독립운동 관련 저서 및 잡지, 팜플렛 출판을 지원했다.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이 발간한 <한국 평론(Korea Review)>, 프랑스 파리에 있던 황기환(黃玘煥)의 <자유한국> 등의 발간을 후원했다. 특이한 점은 공채에 적힌 글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국 독립을 전취(戰取)하기 위한 투쟁에 있어 그 자금난에 봉착하였다. 하나님은 기필코 한국민에게 자유를 부여할 것이며, 정의에 호소하는 우리의 독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임시 정부는 자금 염출 방법으로 공채를 발행하나니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여, 솔선하여 공채를 구입하기 바란다. 이 금액은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합법 정부가 수립되는 즉시 상환한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인 비율은 1% 남짓한 실정이었다. 그런데 임시 정부의 공채에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공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성 감옥의 사형수 이승만을 사로잡았던 기독교 입국론은 독립 운동의 과정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