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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최고의 반공주의자: 반공 독립 노선 ④,⑤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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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대통령, 친미 외교와 반공 노선 최초, 최고의 반공주의자: 반공 독립 노선 ④ (지난호(3/03)의 이야기 끝부분: 나라를 잃은 우리에게는 일단 나라를 되찾고 외세를 물리친 자주 독립 국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조국이 없다는 공산주의는 독립운동에 제약이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모난 돌이 정(釘) 맞는다. 둥글둥글하고 무난해야지, 튀어나와 모가 나면 표적이 되기 쉽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무수한 표적이 되어 왔다. 그에게는 비난이 빗발쳤다. 실제로 소련의 자금이 지원된 상황에서, “노예” 운운하며 소련을 배척하고 현실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미국에 집중한 외교 노선은 임시정부 내에서도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1925년 3월 31일자 <독립 신문>이다. “원래 외교라는 것은 외국과 교섭하여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런 목적에 비추어볼 때,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중국과 약소 민족, 그리고 침략적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를 적으로 하는 소련가 제3국제당(코민 테른-국제 공산당)이 일차적인 외교 대상이 되었어야 마땅했다. 태평양과 중국 대륙에서의 이권을 놓고 일본과 다투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열강도 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제2위에 속한다. 그런데 이승만은 소련은 적색(赤色)이라 위험하니 불가근(不可近)이고, 중국 등은 약자라 무세(無勢)하니 불가교(不可交)라 하여 오직 백색유세(白色有勢)한 미국만을 하늘같이 신뢰했다. 그러나 미국이 우리 민족 운동에 대하여 하등의 원조를 주었다는 것을 아직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반공 노선은 더욱 투철해졌다. 이미 1917년 무렵부터 가졌던 반공 의식은 1933년 모스크바를 방문하면서 분명한 확신이 되었다. 여행을 즐겼고 수많은 대륙과 바다를 건넜던 이승만은 파리의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한 뒤 모스크바에 갔다. 짧은 체류였지만, 이승만은 분명한 인상을 받았다. 그때의 느낌을 적은 기록이다. “내가 모스크바를 다녀온 동안에 보고 느낀 것은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농가들보다도 러시아의 농가가 가장 빈약한 점이었다. 기차 속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러시아의 길거리에서 굶어죽은 사람을 많이 보았다고 하였다.”(서정주, p.248) 노동자와 농민의 천국이라는 소련에서 길거리에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이는 공산주의의 허구성과 악마성을 분명히 보여 주는 사례이다. (계속)
임시정부 대통령, 친미 외교와 반공 노선 최초, 최고의 반공주의자: 반공 독립 노선 ⑤ (지난호(3/17)의 이야기 끝부분: 넓은 세상을 누비며 공산주의의 실체를 직접 눈으로 본 이들이 이 나라의 대통령과 부통령이 되어 공산주의를 막아냈다. 국민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복(福)이 아닐 수 없다.) 반공 노선이 확고해지는 것은, 먼 미래를 향해서는 당연하고 바람직했다. 우리 민족의 차원에선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당시의 이승만에게는 고립과 적대를 의미했다. 독립운동과 건국의 시기에 시대의 유행은 반공이 아니라, 좌우합작(左右合作)이었다. 2차 대전의 연합국들은 일본, 이탈리아,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 좌우합작 형태의 전쟁을 진행했다. 중국에서도 일본에 대항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연합(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국공합작을 주도하고 이승만을 괴롭힌 인물이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이다. 그는 국민당 최고 지도자 장개석의 처남으로, 외교를 관장하는 실력자였다. 송자문은 소련과 공산주의에 호의적이었다. 결과적으로 훗날의 역사에 비추어 평가한다면,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망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었다. 국민당을 망하게 만든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도 영향을 끼쳤다. 송자문은 장차 한국이 독립되었을 때, 김원봉・조소앙 등 중국에서 활동하던 좌파가 집권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김구에게 좌파 세력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승만은 김구에게 공산당과 손을 잡으면 관계를 끊어 버리겠다는 강경한 경고를 거듭 보냈다. 하지만 김구가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선 자금이 필요했고, 자금을 제공하는 송자문의 압력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결국 김구는 김원봉 등 공산주의자와 제휴했다. 1942년 12월, 상해 임시정부가 좌우합작 정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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