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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최고의 반공주의자: 반공 독립 노선 ①,②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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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대통령, 친미 외교와 반공 노선 최초, 최고의 반공주의자: 반공 독립 노선 ① 이승만의 천재성은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계속)
임시정부 대통령, 친미 외교와 반공 노선 최초, 최고의 반공주의자: 반공 독립 노선 ② (지난호(2/17)의 이야기 끝부분: 이승만의 천재성은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갈채를 보냈다. 국민들을 노예로 삼아 억누르며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러시아의 짜르(:황제)를 물리치고 노동자와 농민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혁명의 대의(大義)에 열광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바로 그 순간부터 반공(反共)이었다. 1917년 혁명 직후부터 공산주의는 “원래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 본성을 거역해 가며 국민을 지배하려는 사상 체계”라고 간주했다. 공산주의를 따르는 정치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장담했다(유영익. p.222). 세계의 주요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공산주의의 정체를 파악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이승만은 어떻게 그토록 일찍 공산주의를 꿰뚫어보고 그토록 강경하게 반대할 수 있었을까? 이승만 연구가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손세일, 조갑제, 김길자의 견해가 같다. 그것은 이승만이 철저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다. 그는 진리에 정통했기에 거짓의 가면에 속지 않았다. 빛에 몰두했기에 어둠은 쉽게 분별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반공 노선은 임시 정부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임시 정부 내에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1920년 한인 사회당 대표로 박진순, 박애, 이한영이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60만 루블의 지원금을 받아서 돌아왔다. 이들과 이동휘, 김립 등 상해의 공산 혁명 간부들은 1920년 9월 15일 한인 공산당을 조직했다. 1920년 임시 정부에서는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의 정면 대결이 벌어졌다. 이승만은 소련과의 협력은 조국을 공산주의자의 노예로 만들자는 것이라며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일생을 특징지은 강력한 반공주의의 시작이었다. 1923년 이승만은 논설 “공산당의 당 부당”을 집필했다.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모든 부자의 돈을 합하여다가 나누어 가지고 살게 하면 부자의 양반 노릇하는 폐단은 막히려니와, 재정가(기업가)들의 경쟁이 없어지면 상업과 공업의 발달이 되기 어려우리니, 사람의 지혜가 막히고 모든 기기 묘묘한 기계와 연장이 다 스스로 폐기되어, 지금에 이용후생(利用厚生)하는 모든 물건이 다 더 진보되지 못하며, 물질적 개명이 중지될지라...”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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