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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과 임시정부 대통령 추대 ①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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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대통령, 친미 외교와 반공 노선 3.1 운동과 임시정부 대통령 추대 ①
(지난호(1/13)의 이야기 끝부분: 하지만 이승만은 자신의 품에 안겨 죽어 간 이름 없는 애국자들의 장례를 치를 때마다, 각오를 다지며 힘을 내곤 했다.) 1919년 3월 1일, 삼일 운동이 일어났다. 나라 잃은 세월 10년, 억눌리고 핍박받았던 우리 민족은 독립을 향한 열망을 뿜어냈다. 민족 대표 33인의 지시 사항 가운데 마지막은 비폭력을 당부한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일본인들을 모욕하지 말라. 돌을 던지지 말라. 주먹으로 때리지도 말라. 그런 행동은 야만인들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지도자는 인도의 간디이다. 하지만 3.1 운동은 간디가 유사한 운동을 일으키기 3년 전에 일어났다. 이는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선각적 용기를 보여 준다. 3.1 운동의 뉴스는 전 세계에 펴져 갔다. 약소국의 용기 있는 저항에 세계의 양심들은 찬사를 보냈다. 1919년 4월 6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들의 선언은 우리의 독립 선언에 버금가는 것이다. 이것은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의 목소리다. 신의 가호로, 미친 세상이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그러나 미친 세상은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고, 약소 민족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평화적인 시위에 대하여 일제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되갚았다. 조선 총독부의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 1728만 8989명 중에서 무려 83만 1667명이 체포되었다. *약 20% 3.1 운동의 소식을 듣고 이승만이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미국의 국무부에 전보를 보내는 것이었다. 한국의 애국자들이 일본으로부터 탄압을 받지 않도록 미국이 중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인 동시에, 이승만의 일생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기도 했다. 3.1 운동 이후 국내외 여러 곳에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 그 중에서 정부의 요인 명단을 발표한 곳은 6곳이었다. 이승만은 6곳에 모두 최고위급 각료로 이름을 올렸다. 45세 전후에 그의 카리스마는 전 민족적으로 펴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허문도. 인보길 편. p.102) 실제적인 활동을 펼쳤던 3곳에서는 모두 최고 지도자였다. 이승만은 노령(露領)의 대한 국민의회 국무총리,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 총리, 한성 정부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 각 임시 정부마다 체계가 다르고 규칙이 달라서 국무 총리, 집정관 총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지만, “그 모든 망명 정부가 대통령으로서 받든 사람은 오직 이승만이다.”(이병주. 서울:1991. p.26)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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