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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과 임시정부 대통령 추대 ②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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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대통령, 친미 외교와 반공 노선 3.1 운동과 임시정부 대통령 추대 ②
(지난호(1/20)의 이야기 끝부분: 각 임시 정부마다 체계가 다르고 규칙이 달라서 국무총리, 집정관 총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지만, “그 모든 망명 정부가 대통령으로서 받든 사람은 오직 이승만이다.”) 이승만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직위는 한성 정부의 집정관 총재였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에서 13개 도의 대표 25명이 국민 대회를 거쳐서 최고 지도자로 추대한 것에 정통성을 부여했다. 한성 정부가 이승만을 추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민주 정부의 수반으로서 이승만의 개인적인 탁월함, 한성 정부 요인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는 점, 미국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할 때 이승만이 적임자라는 요인 등이 중요했다. 동시에 “한성 감옥 인맥”이 한성 정부의 핵심 인물들이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고정휴, 서울. 2004. p.276) “복당 동지”였던 신흥우와 이상재가 그들이다. 특히 성자와 같은 삶으로 한국인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던 기독교 교육자 이상재가 이승만 추대에 앞장섰다. 한성, 노령, 상해의 임시 정부는 결국 하나로 합쳐져서 통합 상해 임시 정부가 된다. 1919년 9월 상해 임정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세워져, 임시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우리 민족과 정부의 대표자로 등장하게 된다. 임시 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첫 업무에 대해서 올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은 대한 공화국 대통령 명의로 열강의 정부 수반들에게 외교 관계 개설을 제안하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한 셈이었다. 자금도, 강력한 지지자도 없는 소규모 망명 단체가 그토록 많은 것을 이룩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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