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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MCA와 105인 사건 ③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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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와 105인 사건 ③ (지난호(10/21)의 이야기 끝부분: 탄압의 마수는 처음부터 이승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본인도 구속될 각오를 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또 한 번 미국 선교사들이 그를 구출했다. 서울 YMCA에서 활동하던 질레트 총무와 마침 그때 한국을 방문했던 YMCA 국제 위원회 모트 총무의 개입으로 체포를 면했다. 그들은 총독부 측에 미국 교계에서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이승만을 체포하면 국제적으로 말썽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단 구속은 면했지만, 한국에 머무르는 것은 여전히 위험했다. 마침 1912년 기독교 감리회 4년차 총회가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주한 선교사들과 감리교계 목회자들은 한국 대표로 이승만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승만은 집을 저당 잡혀서 여비를 마련했다. 그가 한국을 다시 떠난 것은 공교롭게도 만 37세 되던 생일날이었다. 박사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지 2년이 채 못 되어 기약 없는 망명의 길을 떠난 것이었다. 당시 75세였던 아버지 이경선은 중풍으로 누워 있었다. 이승만은 눈물로 작별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는 문 앞까지 배웅 나와서, 차마 6대 독자 외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손만 흔들었다. 영웅은, 못할 짓이다. 가족에게도 그렇고 부모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양반이며 왕족이었던 이승만은 일찍이 상투를 잘라 유교 문화에서 살아온 부모에게 충격을 주었다. 스물두 살 나이에 보부상들과 격투를 벌일 때, 시위 현장까지 찾아온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눈물로 만류했다. 신문에 이승만이 죽었다는 기사가 실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보부상에게 맞아 죽었다고도 했고, 고문 받다가 죽었다고도 했다. 아버지가 감옥까지 찾아와 아들의 시체를 달라며 울고불고 한 적도 있었다. 그 모든 고난에 더하여, 아들은 이제 시대의 풍운(風雲)에 밀린 떠돌이 망명자가 된 것이다. 1912년 3월 26일, 눈물의 인사를 나눈 것이 부자(父子)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승만은 세계 감리교 대회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며 기독교 정신에 호소했다. “기독교나 민주주의 정신은 약자를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일본은 무력으로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한국인을 지독히 탄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의 기독 교도들은 모름지기 단결하여 이 피압박 민족을 하루바삐 해방시키고, 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하며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 유지에 이바지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의 연설에 공감하는 이들도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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