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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들의 노력과 이승만의 석방 ② | 운영자 | 2020-06-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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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의 노력과 이승만의 석방 ② (지난호(3/11)의 이야기 끝부분: 사람은 살아온 모습 그대로 죽는다. 그의 최후는 제자들을 사랑했던 스승, 한국인을 사랑했던 선교사의 일생이 축약된 장면이다. 옥중에서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식사도 거른 채 하루를 넘게 통곡했다.) 아펜젤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선교사들은 구명 운동을 계속했다. 그들의 노력과 한규설(韓圭卨)의 후원으로 1904년 8월 7일, 5년 7개월 만에 이승만은 석방되었다. 선교사들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고종 황제와의 관계가 특별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친일파가 궁중을 장악할 때, 언더우드, 애비슨, 헐버트는 목숨을 걸고 고종을 보호했다. 매일 궁중을 드나들면서 고종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밤에는 당직을 서 가면서 고종을 지켜 주었다. 고종이 생애 최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던 황제의 은인(恩人)들이었다. 그들이 알렌 공사와 함께 이승만의 출옥을 고종 황제에게 요청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선교사들의 이승만 석방을 위한 노력은 사실, 규정 위반이었다. 1897년 5월 11일 미국 정부는 셔먼(Sherman) 국무장관 명의로 훈령을 내렸다.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은 선교·교육·의료 사업을 제외한 토착 정치에 절대로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따라서 알렌 공사와 미국 선교사들이 정치범 이승만의 석방을 위해서 베풀었던 여러 조치들, 그 중에서도 내부 협판에게 진정서를 제출한 것은 훈령 위반 행위였다.(유영익. 2002. p.57) 이처럼 미국 선교사들은 본국 정부의 훈령을 어기면서까지 이승만을 비호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승만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선교사 학교를 졸업한 천재가 종횡무진 언론계와 정치계를 누비다가 감옥에 가서 진실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난 이야기는, 선교사들에게는 너무나 감동적이고 너무나 전형적인 스토리였다. 게다가 감옥에서 40여 명의 상류층을 기독교로 이끌고, 학교를 세우며, 도서관을 운영하고, 논설을 쓰면서 일취월장하는 이승만에게서 그들은 조선의 미래를 보았다. 조선을 복음화할 중심 인물로 이승만을 지목한 것이다. 훗날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것은 선교사들에게 내려진, 일종의 영감(靈感)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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