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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칠과 이승만의 공통점 | 운영자 | 2020-06-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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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과 이승만의 공통점
영국의 처칠과 이승만 대통령은 동시대 사람이다. 지도자로서 그 둘은 닮은 점이 많다. 처칠은 1874년생이므로 이승만보다 한 살 위이고, 김구보다 두 살 많다. 히틀러의 야욕을 남보다 앞서 알아챈 탓에 처칠은 되레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는 사람’이란 비웃음만 샀다. 1939년 전임자 체임벌린 총리가 독일과 ‘뮌헨 협정’을 체결한 뒤 ‘평화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떠벌릴 때, 처칠은 분개하며 ‘결국은 전쟁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듬해 총리가 된 그는 ‘내가 바칠 것은 피와 땀과 눈물밖에 없다’며,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평화도 지킬 수 없다’고 국민을 설득했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역사는 누가 옳았는지를 증명한다. 1941년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처칠이 방미했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과 자신을 ‘보스’와 ‘부관’으로 칭했다. 과거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처칠은 옛 식민지의 대통령 앞에서 자세를 한껏 낮추었다. 처칠은 ‘전쟁광’이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히틀러의 광기의 시대에 당당히 맞섰다. 그의 통찰력이 편한 길 대신 힘든 선택을 꿋꿋하게 밀어붙이게 하였다. 당장의 인기 없는 결정이 훗날 나라에 큰 이득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다. 그의 가장 큰 덕목으로 ‘위험을 기꺼이 무릅쓰는 용기’를 꼽는다. 영국을 넘어 인류 역사의 물길까지 바꿨다. “언제나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하라. 그곳에서는 적수가 없다.”--처칠한테 큰 빚을 진 프랑스의 드골이 뼈저린 경험에서 터득한 교훈이다. 프랑스가 자랑하던 난공불락의 요새 마지노선이 독일의 전차전으로 우회 돌파 당하자, 프랑스는 히틀러에게 바로 항복했다. 영국이 유럽의 최후의 보루가 된 것이다. 히틀러가 프랑스의 무기를 사용하자, 처칠은 프랑스의 함대를 침몰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 후 드골 대통령은 미국과 소련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1966년, ‘우리가 죽으면 너희도 죽는다’는 비례 억지 전략으로 핵 강국이 되었다. ‘부관’ 처칠은 ‘보스’ 미국에게 영국군의 지휘권을 넘겼다. 영국군 장군들이 투덜대자, 처칠은 그들을 달랬다. “히틀러만 이기면 된다.” 이렇게 유럽에서 히틀러의 야욕을 가장 먼저 알고 맞선 지도자는 처칠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계적으로 일본의 광기와 공산주의자들의 위험성을 동시에 꿰뚫어 본 지도자는 이승만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과 우호국이었고, 소련은 히틀러와 맞선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1941년 6월, 미국에서 이승만은 그의 베스트셀러 ’Japan Inside Out' 책을 통해 일본의 미국 침공을 예견하였고, 1945년 12월, 이승만의 연설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은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이 연설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공산당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서였다. 미국이 1947년 3월 소련에 대한 대결 노선을 선언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보다 2년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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