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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 회의 투사 ① | 운영자 | 2020-06-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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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 회의 투사 ① 독립 협회가 남긴 빛나는 발자취 중에 으뜸으로 손꼽히는 것이 만민 공동회(萬民共同會)이다. 만민 공동회는 시민, 독립 협회원, 관료 등이 참여한 대중 집회이다. 당시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외세, 특히 러시아를 비판하고 자주 독립을 외치는 여론을 만들어냈다. 만민 공동회의 중요성은 명단에서도 확인된다. 만민 공동회에서 활약하던 독립 협회 간부들의 명단에는 훗날 상해 임시 정부는 물론, 다양한 민족 운동의 선두에 섰던 인사들의 이름이 거의 포함되어 있다.(이정식. p.409) 독립 협회가 이 나라 독립 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한 것이다. 1898년 3월 15일의 만민 공동회는 한국 정부가 러시아에 이양했던 이권의 취소를 요구했다. 우리 내정(內政)에 간섭하는 러시아 고문들을 파면하고 우리 경제를 침탈하는 한로 은행(韓露銀行)을 해체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였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인 만여 명의 군중 앞에 등장한 연설가는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탁월한 언변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군중의 대표 자격으로 외무 장관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강력한 민심(民心)을 목격한 러시아는 독립 협회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러시아 고문들을 철수시키고 한로 은행을 폐쇄하였다. 청년 이승만은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수구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고종 황제와 친러파 정권은 1898년 11월 4일,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체포했다.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고 했다는 역적 혐의였다. 독립 협회의 3대 회장 윤치호와 회원들은 도피하여 잠복에 들어갔다. 하지만 행동파 이승만은 숨으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경무청 앞으로 달려갔다. 수천 명의 군중이 그를 따라갔다. 이날 이승만은 또 한 번 ‘최초’를 기록했으니, 최초의 서양식 연좌 농성이다.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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