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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 압박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운영자 | 2020-06-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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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압박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미 국무부 내 공산 좌파들의 방해 활동 때문에 이승만은 해방된 지 40일 만에야 뒤늦게 귀국했다. 1945년 10월 16일에 미군 수송기로 김포 공항을 통해 입국할 수 있었다. 그에게 가장 시급했던 것은 정부를 세우는 일이었다. 프린스턴대 국제법 박사인 이승만이 볼 때, 통일된 독립 국가의 건설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그는 강대국들이 한국에게 즉각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위험이 크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이 한국인의 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일이 급했다. 당장 한국인의 단결이 시급했다. 그래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구호가 나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은 국민의 뜻을 모으기 위한 국민 운동을 벌이려 했다. 한국인들이 분열되었다는 것을 세계에 보이면 강대국들이 독립을 늦추기 위한 구실로 이용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1945년 10월 23일에 65개 정당과 단체의 대표들을 모아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조직했다. 그것은 각각의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단체들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체였다.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단결된 모습을 강대국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일단 좌파들도 모이게 했다. 이승만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좌파들 가운데서 “혁명을 고집하는 극렬 파괴 분자들만을 거부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마침 공산당의 박헌영과 인민당의 여운형은 이승만을 이미 인민 공화국의 초대 주석으로 추대하였기 때문에, 좌파들은 그의 제안에 무조건 반대할 수만은 없었다. 1945년 10월 31일에 박헌영이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했다. 박헌영은 협조의 선결 조건으로 친일파 숙청을 요구했다. 그런데 공산 좌파들 중에도 많은 친일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박헌영의 요구는 사리에 맞지 않았다. 그에 대해 이승만은 나라가 세워진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응수했다. 공산 좌파와의 타협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박헌영은 이승만에게 자신이 만든 조선 인민 공화국 주석 취임을 간곡히 부탁했다. 이승만이 이를 거부했고, 마지막으로 11월 16일에도 주석 취임을 요청하였으나 이승만의 태도는 불변했다. 이때부터 박헌영은 사사 건건 이승만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공산당은 11월 23일에 이승만을 비난하며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탈퇴했다. 뒤이어 여운형의 인민당도 이탈하였다. 따라서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는 우파들만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의 이름으로 11월 24일에 미∙영∙소∙중 4대 연합국과 미국 국민에게 한국인의 자주 독립 의지를 천명하는 ‘우리의 결의문’을 보냈다. 그것은 자유 선거를 통한 조속한 독립 정부, 건국을 요망하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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