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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관은 명망가, 차관은 공산 좌익 | 운영자 | 2020-06-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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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은 명망가, 차관은 공산 좌익 미 국무부 내 소련 간첩 알저 히스와 그 추종자들과 좌파의 조직적인 방해 때문에, 이승만의 귀국이 해방된 후 두 달 만에 이루어졌다. 사실 귀국 자체가 불가능했으나, 다음 두 가지의 사건으로 이승만의 귀국은 단 번에 해결되었다. 그 중 하나는 하지 장군과 윌리엄즈 중령의 만남이다. 1945년 9월 8일에 인천에 상륙한 하지 장군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구사하는 윌리엄즈 해군 중령을 우연히 발견하여, 그 자리에서 윌리엄즈를 자신의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윌리엄즈는 쌍발 비행기를 타고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 남한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직접 민심을 파악했다. 그 과정에서 윌리엄즈는 한국인들에게 거듭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있다고 하는데 왜 데려오지 않는가?” 라는 물음이었다. 이에 하지 장군은 혼돈 상태의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이승만을 보내 줄 것을 맥아더와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여기서 직시해야 할 점이 있다. 이승만이 임시 정부의 대통령으로 유명했다고는 하지만, 한국을 떠난 지 33년이 지난 후였고, 나이 칠십 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평균 연령이 사십여 세 전후였던 당시 일제 강점기의 한국 사람들이 이승만의 활약상을 알고 있기는 어려웠다. 물론 국내 지도자들은 이승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윌리엄즈가 가는 곳마다 일반 한국인들이 이승만을 보내라고 요청했을까? 그것을 만들어 낸 세력은 놀랍게도 공산 좌익들이었다. 이승만의 귀국을 가능하게 만든 두 번째 이유였다. 해방과 함께, 일본 계략에 의해서 1945년 8월 15일에 좌파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 준비위원회(>건준)가 발족되었다. 다음날 전국 각지의 교도소에서 수천 명의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풀려난 정치범들은 건준의 지방 조직을 차례로 건설해 나갔다. 순식간에 건준은 145개의 지부로 확장되었다. 건준이 세력 확장에 몰두하던 8월 20일에, 한반도에 살육의 광풍을 만든 박헌영이 광주의 벽돌 공장에 숨어 있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일제 치하에서 박헌영은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모진 구문을 받고 풀려났는데, 석방 사유는 정신병자라는 이유였다. 실제로 박헌영은 공산혁명 과업을 위해 석방되기 위해서, 자신의 인분을 몇 달씩이나 먹어 가며 정신병자 행세를 했던 것이다. 서울로 올라온 박헌영은 조선 공산당 재건 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여운형의 건준에 참가해서, 9월 6일에 건준을 조선 인민 민주 공화국으로 흡수해 버렸다. 흥미로운 점은, 박헌영이 만든 조선 공산당이 선포한 인민 공화국의 주석으로, 미국에서 돌아오지도 않은 이승만을 이미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승만을 허수아비로 이용하려는 공산당의 전술이었다.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그때까지 귀국하지 않았던 김 구를 내무부 장관으로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장관에는 국내외의 명망가들을 앞세우고, 차관에는 공산 좌익들을 포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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