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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간지 시대를 연 특종 기자 ② | 운영자 | 2020-06-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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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 시대를 연 특종 기자 ② (지난 호(11/20)의 이야기 끝부분 <매일 신문>은 1898년 5월 16일자 1면에 러시아와 프랑스가 이권을 요구한 외교 문서를 폭로했다. 러시아는 목포와 진남포 조계지(租界地)의 사방으로 10리를 차지하려고 했고, 프랑스는 평양의 석탄광을 채굴하여 경의선 철도 부설에 사용하려고 했음을 보도했다. 이 기사는 백성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즉각 독립 협회가 들고 일어났다. 정부 측에 사실을 밝혀 줄 것을 요구했다.) 독립 협회는 질의서에서 “본국의 땅은 선왕의 강토요, 인민의 생업 하는 땅인데,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알아야겠다”라고 항의했다. <매일 신문>의 보도와 독립 협회의 항의로 여론이 들끓자, 러시아와 프랑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정부 측에 외교 문서가 유출된 경위를 따지며 관련자의 처벌을 주장했다. 그네들 열강에게 <매일 신문>은 매우 거슬리는 존재였다. 당시의 외국 공관은 정부 대신들보다도 신문을 더 꺼리게 되어 ‘군사 몇 만 명보다도 더 어렵게’ 여길 정도였다.(정진석, 원영희‧최정태 편집, 1995. p.40) <매일 신문>은 혁혁한 발자취를 남겼으나, 경영상의 문제로 곧 발행을 중단했다. 이승만은 곧이어 1898년 8월에 <제국 신문>을 창간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1898년 한 해 동안 <협성회 회보>, <매일 신문>, <제국 신문>을 모두 창간하는 희한한 업적을 이루었다. 한 해 동안 무려 3개의 신문을 창간한 기록은 아마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다.(전상인, 유영익 편, p.394) <제국 신문>은 조선을 합병한 일제가 모든 한국 신문을 폐지한 1910년 8월까지 12년을 존속했다. 그 시기의 대표적인 신문으로 <황성 신문>과 <제국 신문>을 들 수 있다. <황성 신문>은 주로 지식인 계층을 대상으로 하여 한자와 한글을 겸용했다. <제국 신문>은 한문을 모르는 상민과 부녀자들을 위하여 한글 전용을 선택했다. 여기에서도 이승만의 대중적인 노선을 엿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두 신문의 편집인들이 모두 배재 학당과 독립 협회에서 서재필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라는 점이다. 개화파 지식인들에 대한 서재필의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불의한 시절, 정의파 언론인 이승만은 붓의 힘으로 싸웠다. 1898년 8월 30일자 <제국신문>에는 기자 이승만의 특종 기사가 실렸다. “대한 사람 봉변(逢變)한 사실”이다. “일인(日人)이 수교에서 배를 사서 껍질을 벗길 새 옆에 앉은 대한 사람 하나가 침을 잘못 뱉아 일인의 옷에 떨어진지라. 일인이... 장동 사는 강흥길을 집탈하여 가지고 배 벗기던 칼로 강가를 찔러 다행히 중초(中焦, 심장에서 배꼽 사이)는 상하지 아니하였으나 바른편 손을 찔러 유혈이 낭자한지라...” 침을 뱉었다고 칼로 찔렀으니, 우리나라에 와 있던 일본인들의 행패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그대로 보여 준다. 이승만이 비분강개(悲憤慷慨)한 것은 단순히 칼로 찔렀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한국인이 칼에 맞았지만 한국 순검(巡檢)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대조적으로, 일본인 순사가 와서 오히려 피해자인 한국 사람을 자신들의 경찰서로 연행했다.(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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