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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 학당(2) 민주주의에 눈뜨다①,② 운영자 2020-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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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 학당(2)--민주주의에 눈뜨다

1896,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은 인물이 배재 학당에 부임했다. 개화파의 선구자였던 재필(徐載弼)12년 만에 귀국한 것이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의 쿠데타인 갑신 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그는 역적으로 몰렸다. 그의 가족들은 처가와 외가까지 모두 처형당했다. 일본으로 도피했던 서재필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워싱턴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시민이자 의사가 되어, 미국인 부인과 함께 귀국한 것이다.

서 박사는 한동안 장안의 명물이었다. ...(中略)...

서재필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미국과 성경과 서양 역사 등 새로운 지식이 그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이승만을 배재 학당으로 이끌었던 신흥우에 의하면, 이때 서재필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갑신 정변의 혁명가답게 서재필은 배재 학당에서 혁명적인 시도를 한다. 조선 학생들에게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배운 토론을 훈련시킨 것이다. 그가 주도한 모임이 협성회(協成會)이다. 협성회의 진행 방식은 먼저 주제를 정한다. 그리고 두 팀으로 나누어서 한 팀은 찬성, 한 팀은 반대하는 연설을 하게 했다.

당시에는 토론 문화는 물론, 토론에 관련된 용어 자체가 없었다. 쟁점 사항을 전체 투표에 회부한다든지, 의장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한다든지 하는 개념도 없었다. 그런 시절에 시작된 협성회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의회에 가까운 모임이었다.

 

협성회가 조직될 때, 이승만은 창설 멤버 13인 중의 하나였다. 훗날 그는 서기를 맡고 회장도 되는 등, 협성회의 주요 멤버로 활약했다.

토론의 주제는 처음에는 비()정치적인 것으로 시작했다. ‘배재 학당에서 한복을 입을 것인가, 아니면 서구식 옷을 입을 것인가’, ‘부녀자의 교육이 필요한가’, ‘체력 운동이 필요한가등등이었다.

토론이 열기를 더해 가고 참가자들의 실력이 늘어 가면서, 주제는 점차 정치색을 갖게 되었다. 24회에는 한국에서 상하 양원을 둔 의회제를 성립해야 한다’, 27회에는 각종 정부 기관에 고용된 외국인 고문관들은 해고되어야 한다라는 주제가 선정되었다.

토론회의 주제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우리나라 종교를 예수교로 함이 가함이다. 이때는 이승만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갖는 개화(改化)의 위력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훗날 그가 감옥에서 발전시키게 되는 기독교 입국론(立國論)”의 씨앗은 협성회 시절부터 심어졌다. 

 

배재 학당(2)--민주주의에 눈뜨다

 

학생들을 위주로 진행되던 협성회는 점차 일반인도 참가하는 정치 토론의 장()으로 발전해 갔다. 이승만은 서재필의 가르침과 협성회의 활동에 매료되었다. 어릴 적부터 무언가 하나에 몰두했던 습관이 어김없이 발휘된 것이다. 그 시절에 대한 이승만의 회상을 소개한다.

 

내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나가게 된 것은 오직 영어를 배우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영어를 배우겠다는 포부는 달성했지만, 곧 영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정치적 평등과 자유의 사상을 알게 된 것이다.

조선인들이 당하는 정치적 압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기독교 국가의 국민들이 통치자들의 압제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내 가슴에 어떤 혁명이 일고 있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런 정치 원리를 채택할 수만 있다면, 고통에 처한 동포들에게는 대단한 축복이 될 것이다.’” (로버트 올리버. 2002. p.16)

... (중략(中略)) ...

 

토론이 거듭되면서 참석자들의 자신감도 커졌다. 당대에 가장 앞서가는 학문을 배우고 웅변술, 토론법, 설득 기술까지 배웠으니 사기가 충천했음은 물론이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던 조선의 운명은 젊은 피를 뜨겁게 했다. 그들은 사명감에 불타서 토론회를 거리로 끌고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협성회의 정치색이 분명해질수록, 난처해지는 쪽은 학교 측이었다. 배재 학당을 이끄는 선교사들은 선교 사역을 위해서 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학생들의 모임에 일반인들도 점차 가세하고 있으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부 역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펜젤러 학장은 어쩔 수 없이 학생들에게 자제해 줄 것을 여러 번 당부했다. 협성회는 자제하기보다 확장하는 쪽을 선택했다. 학교 측의 우려를 고려하여, 아예 배재 학당을 벗어난 대중적인 조직으로 변신한 것이다. 189667, 협성회의 이름은 독립 협회(獨立協會)로 바뀌었다. 우리 근대사에 혁혁한 발자취를 남긴 독립 협회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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