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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익 모두가 인정한 지도자 이승만 (1) | 운영자 | 2020-06-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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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익 모두가 인정한 지도자 이승만 (1) 좌익들이 1945년 10월에 이승만 박사를 ‘초대 인민 공화국 주석’으로 추대한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직전 일본과 좌익이 만든 ‘건국 준비 위원회’도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좌익 진영이 1945년 9월 6일에 전국 인민 대표자 대회를 경기 여고에서 열고, 국호를 ‘조선 인민 공화국’이라 결정함과 동시에 이승만을 주석으로 한 정부 각료 명단을 발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우익 진영은 ‘벽상조각(壁上組閣, 근본이 없는 조각)’이라고 비난하였다. 독립 운동가로서의 이승만의 일생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 있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인 동시에, 이승만의 일생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 되었다. 평화적인 3.1운동 시위에 대한 일본의 폭력은 무지막지했다. 일본 총독부의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 1,728만 8,989명 중에서 무려 83만 1,667명이 체포되었다. 국민의 거의 1/20이 체포된 것이다. 3.1 운동의 소식을 듣고 이승만 박사가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미국의 국무부에 전보를 보내는 것이었다. 한국의 애국자들이 일본으로부터 탄압을 받지 않도록 미국이 중재해 달라는 내용이다. 3.1운동 후 국내외 여러 곳에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 그 중에서 정부의 요인 명단을 발표한 곳은 6곳이었다. 이승만은 6곳에 모두 최고위급 각료로 이름을 올렸다. 45세 전후에 이승만의 이름이 전 민족적으로 퍼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적인 활동을 펼쳤던 세 곳에서는 모두 최고 지도자였다. 이승만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령(露領)’의 대한국민 의회 국무총리,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 총리, ‘한성’ 정부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 각 임시 정부마다 체계가 다르고 규칙이 달라서 국무총리, 집정관 총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지만, 언론인 이병주(李炳注)는 한마디로 “그 모든 망명 정부가 대통령으로서 받든 사람은 오직 이승만이다.”라고 요약하였다. 이승만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직위는 ‘한성’ 정부의 집정관 총재였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에서 13개 도의 대표 25명이 국민 대회를 거쳐서 최고 지도자로 추대한 것에 정통성을 부여했다. 한성 정부가 이승만을 추대한 이유가 있다. 민주 정부의 수반으로서 이승만의 개인적인 탁월함, 한성 정부 요인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는 점, 이승만이 미국에서 모든 활동의 적임자라는 요인 등이 중요했다.(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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