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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의 대 일본 선전 포고 -(2) | 운영자 | 2020-06-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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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대 일본 선전 포고 -(2) 이승만은 미군 정보 조정국(COI)에게, 재미 한인들로 독립적인 특수 부대를 창설해서 일본과의 전투에 투입해 줄 것을 계속 요청했다. 그 요청은 OSS 중국 책임자가 된 ‘애쓴 맥도웰 게일’과 알게 되면서 이루어졌다. ’애쓴 게일‘은 이승만이 한국에 있을 때 가까이 지내던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조카였다. 게일을 통해 이승만은 그 기구의 책임자인 도노반과 2인자인 프레스톤 굿펠로우와도 가까워졌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1941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열린 여러 차례의 정보 조정국 회의에도 직접 참석해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그 후 미국 육군의 전략 정보처(OSS)는 ‘냅코(NAPKO) 계획’이나 ‘독수리 계획’과 같은 특수 유격 훈련 계획을 마련하고, 이 훈련을 마친 한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진공하는 작전을 세웠다. ‘냅코 계획’은 미국 하와이의 한인을 한 반도와 일본에 침투시키는 것이고, ‘독수리 계획’은 중국에 있는 광복군을 한 반도에 침투시키는 것이다. OSS는 이들 계획을 집행하기 위해 광복군 안에 한미 합동 지휘부를 세웠다. 1945년 4, 5월깨 실천 단계에 들어간 이들 계획에는 김우전(광복회 회장)과 유일한(유한 양행 창업자) 등도 참여했다. OSS 한국 그룹의 지휘관으로는 함용준 박사가 선발됐다. 하버드대와 예일대 등에서 강의했던 그는 미 해군 정보국(oni)에서 정보 훈련을 받았으며, OSS에서 특수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캘리포니아주 뉴포트 해안에 있는 ‘서해안 훈련 센터’에서 1945년 3월부터 약 2개월간 실시됐다. OSS는 그를 지휘관으로 활용하기 위해 1945년 1월 미국에 귀화시킨 뒤 같은 해 3월에 ‘임시’ 대위 계급장을 달아 주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이승만은 김구의 중경 임시 정부에 요청하여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도록 독려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임시 정부 자체에서 선전 포고를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이승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3대 독립 운동 노선에서 박용만이 무력 투쟁론, 안창호가 실력 양성론이었다면, 이승만은 외교 독립론의 축에 속했다. 우리나라의 임시 정부가 존재했을 당시에는 무력 투쟁론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그로 인해서 이승만의 외교 독립론은 안창호나 신채호, 이동휘 등으로부터 크게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승만은 끊임없이 일본이 미국을 결국에는 공격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미국의 민심을 우리나라에게 동정시키도록 설득하는 외교적인 방법을 해야 한다고 이미 오래 전부터 주장해 왔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승만은 외교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에게 선전 포고를 함과 동시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야 비로소 해방 후에 우리나라가 자주적인 독립을 할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고, 이를 요청했던 것이다. 결국 김구의 중경 임시 정부는 이승만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였다. 프린스턴 국제법 박사 이승만의 혜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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