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에서 일어난 5대 기적 | 운영자 | 2024-06-28 | |||
|
|||||
6.25 전쟁에서 일어난 5대 기적
6.25 전쟁의 5대 기적(1)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인 전쟁이 둘이 있으니 임진 왜란과 6.25 전쟁이다. 임진왜 란은 1592년에 일어나 1598년에 히데요시가 죽음으로 끝나기까지 7년에 걸친 끔찍한 전쟁이었다.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 12만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12시 정오에 휴전으로 끝났다. 온 강산이 초토화된 후이다. *밤 10시 까지가 맞는 듯! 1598년 임진 왜란이 끝난 지 6년 후 명재상이었던 서애 류성룡이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징비록이란 책이다. 징비록에서 류성룡 재상은 거듭거듭 쓰기를 <하늘의 도우심이었다>고 기록하였다. 6.25 전쟁에서도 하늘의 도우심은 마찬가지였다. 6.25 전쟁은 대한민국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음에도 공산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다. 전황이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이 일어나곤 하였다. 6.25 전쟁에서 일어난 기적은 크게 5가지였다. 첫째는 대한민국이 UN으로부터 국가 건국의 승인을 얻는 데서부터 나타났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날은 1948년 8월 15일이다. 그 날이 대한민국의 건국절이다. 북한 김일성 정권은 그해 9월 9일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란 국명으로 건국했다. 신생 국가가 건국되면 유엔으로부터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해 유엔 총회는 파리에서 열렸다. 10월 말에 시작하여 12월 15일이 마치는 기간이었다. 정부는 장면 박사를 단장으로 정부 수립 승인을 얻을 대표단으로 파리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소련 대표 비신스키가 한사코 승인을 방해하였다. 대한민국 승인 안이 상정만 되면 비신스키가 소련의 위성국들과 짜고는 회의 방해로 마이크를 잡고는 놓지를 않았다. 드디어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12월 14일이 되었다. 다급함을 느낀 장면 박사는 대표단을 이끌고 교회당을 찾아가 철야 기도를 드렸다. 다음 날 15일이 되자 역시 대한민국 승인 안이 상정되자 비신스키가 여전히 마이크를 잡고 장광설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0분이 지나자 갑자기 비신스키 목에 병이 생겨 호흡이 곤란하여지고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고 그 시간에 사회자가 더 발언 없습니까 물으니 조용한지라 표결에 붙였다. 47 대 8로 대한민국이 승인되었다. 그로부터 1년 반 후에 6.25 남침이 일어났다. 유엔이 공적으로 승인한 국가가 침공을 받게 되자 유엔이 나서서 공산화를 막게 되었다. 글자 그대로 하나님이 간섭하여 일어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2019-06-24 ,김진홍 목사의 아침 묵상 6.25 전쟁의 5대 기적(2) 6.25 전쟁 69 주년을 맞으며 질 수 밖에 없었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대한민국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었던 데에는 5가지 기적이 있었다. 어제 글에서 첫 번째 기적을 적었으니 오늘은 두 번째 기적을 살펴보자. 두 번째 유엔군이 참전하여 북한군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기적이다. 유엔군 참전이 왜 기적인가? 유엔군이 공식적으로 참전하려면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 안전보장 이사회에는 상임 이사국 5 나라가 있다. 이들 5 나라들 중에서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참전 결정을 할 수 없다. 그들 5 나라 중에는 소련이 있다. 소련이 절대로 참전에 찬성할 수 없다. 그런데 북한군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유엔군 참전을 결정하는 회의에 기적이 일어났다. 소련 대표가 참석치 않은 것이다. 소련이 그 중요한 회의에 당연히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모두들 알고 있는데 예상을 깨고 소련 대표가 나타나지 않았다. 회의 시작 시간이 지나도 소련 대표가 나타나지 아니하자 나머지 4 나라로 회의를 열었다. 4 나라는 만장일치로 참전을 결의하였다. 지금까지 그 회의에 소련이 참석치 않은 이유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소련 대표가 설사로 못 왔다는가 하면 비행기 연착으로 못 왔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이유를 확실히 안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도우신 것이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믿는다. *2019-06-25, 김진홍 목사의 아침 묵상 6.25 전쟁에 겪은 기적(3)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은 이래 남한과 북한은 우여곡절을 거쳐 남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북은 공산주의 체제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던 즈음 만하여도 남한은 국민 소득이 불과 80달러, 북한은 240달러였다. 그 시절엔 북한이 남한보다 3배나 더 잘 살았다. 남한은 미국이 보낸 원조 자금으로 나라 살림을 겨우 꾸려 나가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 후 60년 남짓한 세월에 정세는 완전히 역전하였다. 대한민국이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였다. 나는 북한을 여러 번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북한 현장을 접하여 보면 허물어져 가고 있는 체제임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지금은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에 비하여 무려 50배 이상이어서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승리하였다. 북한이 핵무기 하나로 자신들의 약점을 커버하려 하지만 이미 역부족일 것이다. 우리 남한이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렇게 승리하게 되기까지에는 여러 차례 고비가 있었다. 그런 고비의 정점이 6.25 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4시에 북한군이 12만 군대를 앞세워 38선을 넘어올 때에 남한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였다. 북한의 권력자 김일성은 전쟁이 일주일이면 부산 점령까지 끝날 것으로 낙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대한민국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기적도 한두 번이 아니라 다섯 차례, 여섯 차례 기적이 일어나 전세는 역전되고 남한은 공산화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 기적의 두 가지는 지난 글에 적은 바이다. 오늘 글에서는 세 번째 기적으로 적겠다. 세 번째 북한군이 남침을 시작한 이래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대로 밀고 나갔으면 부산까지 단숨에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북한군은 서울에서 3일을 그냥 허비하였다.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으니 이제 완전 승리할 것으로 착각하고는 소중한 3일을 허비하였다. 그 3일간 국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미군이 들어오고 유엔이 참전을 결정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북한군이 서울에서 왜 3일을 허비하였는지 그 이유를 아직 모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하나님께서 도우신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2019-06-27 ,김진홍 목사의 아침 묵상 전쟁에 겪은 기적들(4)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4시에 북한군 12만이 일거에 38선을 넘어 침략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12시에 휴전이 선포되어 끝났다. 3년 1개월 기간에 전 국토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고 총성이 멈추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전쟁이 시작되던 때에는 남한이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그런 절망적인 조건에서 공산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런 기적 중에서도 기적 중의 기적이 5, 6차례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인천 상륙 작전이다. 인천 상륙 작전이다. 이 인천 상륙 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창안하고 지휘하여 기적같이 성공케 된 작전이다. 맥아더 장군이 처음 작전을 제안할 때에 모두가 반대하였다. 성공할 확률이 오천 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인천항의 지형이나 조수간만의 조건이 2시간 안에 상륙을 마쳐야 하는 조건이었기에 누구나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천재적인 지휘관답게 역발상을 하였다. 성공할 확률이 오천 분의 일이기에 성공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방어하는 적들도 그렇게 판단하여 방어를 소홀히 할 것이다. 그러니 의외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50년 9월 15일에 상륙 작전이 개시되자 마치 해안에 밀려드는 밀물처럼 상륙군이 진격하여 모든 사람들의 우려를 물리치고 성공하였다. 이로 인하여 북한군은 허리가 잘린 처지가 되어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모두가 불가능한 작전이라 우려하였던 인천상륙작전이 예상을 뒤엎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도우셔서 일어난 기적이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