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2 | 운영자 | 2020-07-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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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과 신학 (Theology in Pauline Epistles) 서 론 Introduction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충만하게 받아 기적과 이적을 행하며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시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장로들, 서기관들 등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쫒는 사람들에게 대한 핍박은 날로 더욱 심화되어 갔다. 하지만, 성령님이 충만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굴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의 복음 전도의 범위는 이방 지역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바울이라고 불리던 사울(Saul, who is called Paul, 행 13:9)은 헬라문화권에서 성장한 유대인(디아스포라)으로서 예루살렘에 유학 와서 가말리엘 문하생이 되었다. 가말리엘(Gamaliel)은 당시 가장 존경받았던 유대교 지도자로 산헤드린(유대 공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랍비보다 더 존칭어인 랍반(Rabban)으로 불리웠고 힐렐(Hillel)학파의 대표였다. 사울은 베냐민지파에 속하며 유대식 이름은 초대왕을 따라 ‘사울’(Saul, 뜻은 ‘묻는다 ask')이라 불리웠고, 이중 문화권에서 태어나 성장했기에 세상에서는 헬라식 이름인 ’바울‘(Paul, Paulus)이라 불리워지기도 했다. 그는 주로 이방인들을 대상한 전도를 하였기에 사울이라는 이름보다는 바울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 사도행전에서도 1차 전도여행시 구브로 섬에서 총독 서기오 바울을 전도하는 기사를 소개할 때부터 바울이라는 명칭으로 바꾸고 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행 13:9) 이 구절 전에는 계속 사울이라고 쓰고 있음은 주로 유대 사회에서 활동할 때였기 때문이다(행 8:1, 9:1~30, 11:25~30, 12:25~13:3).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로 그의 이름이 바울로 되었다는 설은 성경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더구나 사울이라는 뜻은 지극히 큰 자라는 말이며, 바울이라는 뜻은 지극히 작은 자라는 말로 그가 겸손해졌다는 해석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원어 뜻에도 없는 해석이다. 이중 문화권에 살면 흔히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해외에 사는 교포들도 한국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많은 경우 영어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칠 무렵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작별하는 자리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니”(행 20:24)라고 간증할 만큼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았다(롬 14:8, 갈 2:20, 빌 1:20). 바울은 오늘날 터키의 남서지방에 속하는 길리기아 지방 다소(Tarsus in Cilicia 행 21:39, 22:3 ‘소읍이 아니었다’)에서 출생하여 자랐다. 나사렛의 예수보다 약 4-5년 늦게 출생한 것으로 보여진다(약 AD 1~65년). 바울의 아버지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한 유대인이었으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어서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Roman citizenship)자 였다. 그의 부모나 조부가 로마 사회에 뛰어난 공헌을 함으로써 로마시민이 된 것 같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시민권을 획득하면 그의 가족들은 자동적으로 시민권자이며, 자녀들도 시민권을 상속하게 되었다. 바울은 출생 때부터 로마시민이나, 철저한 유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다소는 당시 학문의 요충지요, 헬레니즘의 산실 역할을 한 적지 않는 도시였다. 삼중문화권, 즉 헬라문명과 로마문화와 유대 가정에서 자라면서 바울은 폭넓은 공부를 하여 헬라권 지역 선교사로 미리 훈련을 받은 셈이었다. 율법에 정통하며 철저한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 그는 일찍이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당대 최고로 존경을 받던 랍비 가말리엘(Gamaliel, Ben Simeon Ben Hillel) 문하(門下)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삼중문화의 생활방식에 익숙했으며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으로 활동하고 있던 중 30세가 되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난 나사렛 지방의 예수라는 지도자가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메시야인 것처럼 처신하고 가르쳤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다니다가 공의회와 총독부에서 기소되어 십자가 처형을 받았지만, 다시 살아나 여러 사람들을 현혹하여 유대교의 가르침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오순절 이후 급속도로 이 새로운 가르침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이들의 기도로 고쳐졌고, 도처에서 이적과 기적을 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빠지니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당시 유대관원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했지만 뚜렷한 혐의를 찾지 못했다. 투옥시킨 제자들이 밤새 사라져 버렸는데 이상한 일은 아침에 옥문은 그대로 굳게 잠겨져 있고 간수들은 철통같이 경비를 하고 있었다(행 5:23). 이들 말에 의하면 천사가 밤중에 와서 저들을 데리고 나왔다는 것이다. 다시 이들을 체포하려는데 가말리엘 교법사가 드다와 갈릴리 유다의 예로 들어 결국 이 새로운 가르침이 이단이라면 스스로 흩어질 것인즉,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8~39)는 충고를 듣고 포기하기도 했다. 하루는 스데반 이라는 자가 체포되어 공의회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성전을 나사렛 예수가 헐겠다고 공갈한 내용과 모세의 규례를 고치겠다는 가르침이 사실이냐고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물었다. 이에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더듬으면서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저들을 향하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 도리어 ‘당신들이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고 있다’(행 7:52~53)는 대목에서 견딜 수가 없어서 손에 돌을 들고 그를 쳐 죽었다. 이때 그의 옷을 벗어 바울이라는 청년 앞에 두었다는 사실(행 7:58)로 미루어 보아 스데반의 순교를 바울이 주도했었다. 바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공의회의 공문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예수라는 랍비를 하나님의 아들이니 메시야니 하고 믿고 따르던 자들을 체포하였으며, 일당들이 다메섹으로 도망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이들을 체포하러 갔다. 다메섹 근처에 거의 다 가서 이상한 빛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바울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는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의 음성에 ‘주님, 누구십니까?’ 다시 대답하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 9:4~6) 이에 바울은 깜짝 놀랐다. 죽은 줄로 알았던 예수가 지금도 살아서 자기를 만나주신 것이다. 이런 극적인 만남이 바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는 완전히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살아갔다. 회심 후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에서 경건 훈련을 받은 후 고향 다소(Tarsus)에 돌아가서 얼마 동안 사역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안디옥에서 목양을 하던 바나바가 찾아와서 바울을 간곡히 권유하여 함께 안디옥교회로 갔다.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1년간 안디옥교회를 섬기다가 예루살렘 공의회로 가서 정식으로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헬라권 지역의 선교를 시작하였다(갈라디아 지방에 여러 교회를 세움). 예루살렘 공의회(48년경) 후 바나바와 헤어져 오늘날 그리스인 마게도냐(데살로니가, 빌립보, 뵈레아 등)와 아가야(아테네, 고린도) 지방에까지 가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 이때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후 소아시아 지방에 가서 에베소에서 약 3년을 보내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다. 그가 3차에 걸쳐 선교 여행하던 중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방의 교회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구제 헌금한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그를 시기하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체포되었다. 지방법원, 고등법원에서 종교적 훼방죄로 사형언도를 받은 바울은 2년간 가이사랴 감옥에서 감금된다. 당시 사형수들이 항소하면 로마에 가서 황제로부터 최종 사형언도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바울은 황제에게 항소했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게 된다. 로마에서 2년간 가택연금 중 자기를 찾아오는 로마인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한다(행 28:30~31). 성경에서는 이 이상의 행적이 알려지지 아니하나, 터툴리안(160~225)에 의하면 바울은 황제의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소아시아를 다시 심방했으나, 기독교를 박해한 네로 황제 때 다시 체포되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참수당해 순교했다고 전한다(65년경). 바울은 참수당할 때 그의 목이 세 번 튀었다고 한다. 바로 그 자리에 바울 순교 기념교회가 서 있다. I. 바울의 신학적 배경과 소명 바울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로마제국 통치하)에 살았으며, 종교적으로는 엄한 율법 아래에서 교육받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나님을 공경한 철두철미한 율법 사상의 소유자였으며, 사회적으로는 헬라(그리스)문화권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성장하여 어려서부터 이방 문명 속에서 보고 배워 이방 문화에 박식하였다, 이렇게 바울은 두 세계의 사람 즉, 유대인세계와 헬라인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는 내적으로는 철저한 유대적인 기질을 가졌으며, 그뿐 아니라 바울은 유대인들이 거의 알지 못했던 로마와 헬라를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이야말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복음을 전하기에 최적합한 자로 인정 택함받아 위대한 사도 바울(Apostle Paul)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행 9:15). 예수님께서 택하신 사도였던 것이다. 이에 정통 유대교에서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은 날로 더하여 갔다. 사울(바울)도 바로 유대교 정통을 부르짖는 열열한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스데반을 죽이는데 책임을 지기도 하였다. 사도행전 22장 3절에 바울은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하였다. 연대는 주후 1년경이라고 한다. 다소(Tarsus)는 역사적인 도시였다. BC 800년경 앗수리아의 샬만넷셀이 정복한 도시 중에 다소의 이름이 기술된 것을 보면 매우 일찍이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 같다. 다소는 길리기아에 있으며 다소 중심으로 흐르는 시드너스강은 지중해와 다소 중간에서 넓은 호수 "레그마" 호를 이루고 있다. 다소 사람들은 호수 기슭에 배들이 정착할 수 있는 선착장을 건조하여 지중해를 항해하는 배들을 이곳으로 정착하도록 했으며 그뿐 아니라 그들은 길리기아 내륙지방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어 가바도기아와 갈라디아 대륙과도 빈번한 왕래가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다소는 대륙과 해상의 교통을 연결하는 동서교통의 요충지이며 무역이 활발하였다. 또 다소는 학문의 도시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많은 학자들이 있어 다른 도시에 비하여 학구열이 컸었다. 특히 "스도이고 Stoism" 학파 철학자들로 유명하였다. 그러므로 다소에는 "스토아Stoa" 철학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컸고, 그들의 사상적 영향은 일반 시민에게 까지 미쳤다. 감수성이 예민한 바울은 이러한 학문적 풍토 속에서 넓은 시야로 인류의 세계를 보았으며 세계의 끝까지 진출하려는 꿈을 키웠을 것이라고 본다. 그는 유대주의나 율법에 국한된 사고를 벗어나 당시 세계를 풍미했던 "노스틱 Gnostic (영지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후에 그가 선교 활동을 하기전 다소에 머물러 있을 때 이러한 사상과 기독교 내지는 유대교의 사상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자기 출생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가 예루살렘에서 잡혔을 때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행 21:39)고 하였다. 이런 곳에서 자라난 바울의 설교도 매우 도시적이어서 농촌적인 예수님의 것과 비교가 된다. 바울의 설교; ① 도시건축 (고전 3:11) ② 군대의 행진 (고후 10:3-5, 고전 14:8) ③ 노예 시장 광경 (고전 6:20, 7:23) ④ 체육장의 형편(고전 9:24-25) 예수님의 설교; ① 포도나무의 비유(요 15:1-5) ② 씨뿌리는 비유(마 13:18-23) ③ 무화과 나무의 비유 (마 24:32-33) ④ 목자와 양의 비유 (요 10:14-15, 27-28)
B. 가족
빌립보서 3장 5절에 바울은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라고 하였다.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에서 출생한 그의 집안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제롬(Jerome)이 전해준 전승에 보면 바울의 부모는 본래 갈릴리의 마을인 "기사랄" 에서 로마군이 팔레스타인을 폐허로 만들 때 다소로 피난했다고 한다. 그는 로마 시민으로 태어날 수 있을 정도로 부요한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바울은 이와같이 부요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다 분토(배설물)와 같이 버리고, 셋집에 유하며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행 28:30-31). 특히 바울의 생질은 유대인 40명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할 때 그는 바울을 도와 구원하였다(행 23:16-24).
바울이 다소에서 얻은 로마 시민권은 그가 전도 여행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런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있는 조건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자들은 자기 영토 내에 거주민을 크게 두 부류로 구별하였다. ① 이탈리아의 원주민을 위시하여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로마에 공을 세운 자, ② 금전 또는 정복민과 함께 온 노예들이다. 전자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서 특수한 인권과 권리를 허락하였다. 이것이 어떤 명예나 지위는 아니라 하더라도 로마법에는 그들에게 체포, 구금, 매질이나, 십자가에 처형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전도 여행 중에 반대자들에 의하여 빌립보 옥중에 투옥되었을 때,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자임을 밝히자 즉시 석방되었고(행 22:24-30),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인의 난동으로 가이사랴에서 구금되었을 때, 억울함을 황제에게 호소하여 정당한 재판을 받기 위해 고소했던 것이다(행 25:9-12). 고대 세계에서는 로마 시민은 영예스러운 칭호였으며 땅끝까지 통하는 완전 통행증이었다. 바울은 그러한 시민권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또 그것을 자랑하였다.
C. 교육
바울의 가정은 대표적인 바리새인의 가정으로 엄격한 가정교육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유대 법으로는 다섯 살이 되면 성경 공부를 시작하고, 열 살이 되면 율법 전승들을 공부해야 한다고 규정짓고 있다. 바울도 이 규례를 따라 다섯 살 때부터 성경을 배웠으며 열 살 때 유대교의 중요한 문헌들을 암송하였으며 또한 천막 만드는 기술도 함께 익히게 되었다. 유대교의 사상은 생각과 행동을 함께 할 수 있는 교육 지표를 갖고 있다. 이러한 유대 교육의 목표를 본다 할지라도, 이념과 실천 즉 생활 교육의 병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이 선교사역 과정에서 학창 시절의 직업교육은 그의 선교 생활에 크게 기여했던 것을 잘 알 수 있다(행 18:3, 살후 3:8). 바울은 율법을 더 배우기 위해 "가말리엘"에게 보내졌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자기 내력을 이야기한 것을 보면(행 22:3), 예루살렘에 오랫동안 거주한 것으로 말했다. 그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바울의 스승은 아들 "시몬 가말리엘"이 아니고 그의 아버지인 "가말리엘 1세"였다. 그는 베냐민 출신으로 바리새주의자의 거두였고, 특히 그는 개종자에게 후대함으로 그 이름이 높아졌다. 바울은 고향을 떠나 유대 예루살렘에서 율법 교리의 교육을 엄하게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행 22:3; 빌 3:5-6; 갈 1:14). 이것만 보아도 바울은 완전한 교육을 받은 율법자이며 인정받은 법관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자기 자신을 뛰어난 유대인임을 자랑하였다. 바울을 출생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빌 3:5). 즉 그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시로서 선민의 표시를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이라는 것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선택받은 민족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로마서 11장 1절에서도 재삼 강조하였다. 또한 바울은 혈통적으로 볼 때 단순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그는 이스라엘의 귀족이었다. 또한 그는 바리새인이었다. 즉 그는 충실한 유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별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갈 1:15).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으며 율법을 지키기 위해 스데반 순교의 책임자로였다. 오직 율법에 따라 살고 사고하는 것이 그의 생활이었다. 비록 그가 헬라 문화권에 살고 있었지만 일반 "디아스포라"처럼 헬레니즘에 동화되지는 않았다
D. 성격
바울의 성격은 강직하고 열정적이었다. 그가 노한 즉 추상같고 평시에는 온화한 봄날 같았다 한다. 이런 성격은 회심 전이나 회심 후에나 변치 않았다. 회심 전에는 이런 성격으로 기독교인을 박해했고, 회심 후에는 또한 이런 성격으로 전도하였다. 그는 이런 성격으로 회심 전에는 스데반을 박해하였고, 또한 회심 후에는 베드로를 면책하였다(행 8:1, 갈 2:12). 그리고 교회 안의 교인이라도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거짓 사도요","저주를 받은 자들이요", "개"들이니 삼가하라고 했다(고후 11:4, 13-15; 갈 1:8; 빌 3:2). 이런 일은 그의 성격이 악해서가 아니라 열정적이고, 강직한 데서 오는 것이다. 이 강직한 성격과 인격은 결국 십자가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 바울의 힘 있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서 유대인의 죄를 회개시키고, 이방인의 마음을 감화시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하였다. 그이 이 강직한 성격은 전도 여행시 당한 많은 박해와 환난을 이길 수 있었다. 그가 말한바와 같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8-10). 바울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예수의 생명이 그 몸에 있어서 넘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희랍인 이상으로 조직적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같은 치밀한 조직이나, 로마서와 같은 당당한 논설은 도저히 그 시대 사람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과 사랑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괴수"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또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였으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였다(딤전 1:15, 고전 15:9, 13:13, 롬 8:39, 고전 15:31). 결국 그에게는 풍부한 지, 정, 의가 믿음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 훌륭한 사도로서 신학자도 되고, 전도자가 되어, 동서남북으로 좇아 다니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
3. 회심의 신학적 의의
바울의 회심에 대한 의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사도행전에 기록과 바울 자신이 쓴 서신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전설적이고 객관적인데 비해, 바울 자신이 쓴 서신(갈 1:15-16; 고전 9:1-2; 고후 4:5-6)에는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실상 바울의 회개의 계기는 바로 바울 자신의 주관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파할 주님의 사도로 쓰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역사였다고 하는 편이 올바른 해석이 될 것이다(행 22:21; 고전 15:8-10; 엡 3:7; 갈 1:1; 엡 1:1; 딤후 1:1). 그리고 바울의 신앙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자기의 잘못된 신앙관을 깨닫고 회심한 후 그의 신앙은 180도로 변한 철저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믿었다(빌 3:7-9). 바울은 회심 전에 하나님을 섬기던 율법적인 신앙관을 바꾸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됨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확신을 그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택정하셨다고 하였다(갈 1:15-16).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전 생애를 영광 가운데 인도하셨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과 자기의 성별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라 했다(엡 3:7-9). 바울의 이같은 확실한 신앙은 마침내 자신을 이방인들을 구하는 복음의 사도라는 불같은 사명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골 1:25, 딤후 1:9-11). 바울 자신도 회심 이전에는 일반 유대인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독교인들이 유포한 한낱 유언비언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기존 유대 종교를 혼란시키는 이단자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다시 일어나신다는 확증을 얻게 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1-11절에 보면 그가 극적인 내적 각성을 설명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생애가 전환케 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신앙의 핵심이요 또한 바울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자신이 쓴 서신에서 여러 번 언급하고(고전 15:1-21; 롬 1:4; 고후 5:15; 빌 3:10-11; 롬 6:5-10) 있으며,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21절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을 다루고 있고 기독론의 기초가 되어 있다. 예수님의 부활 사상이 바울에게 있어서 얼마만큼 '핵심적인 것'이었는지는 데살로니가후서와 빌레몬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그의 서신에서 언급하고 있다(롬 6:47:4; 고전 6:14; 고후 13:4; 갈 1:12, 20; 고전 15:21-22; 엡 1:20; 빌 3:10-11; 골 3:1-3; 살전 1:10, 5:10; 딤전 2:5-6; 딤후 2:8; 딛 2:14).
바울은 부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단호하게 선언한 것은 고린도전서 15장 15절에서 19절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도 신학적인 교리도 아니다. 그것은 바울이 직접 체험한 경험에서 얻은 최대의 사건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의 사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으며 그의 모든 생활의 초점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의 현존 안에서의 삶에 맞추었다(갈 2:19-20; 고후 5:13:15, 빌 1;20-21, 3:7-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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