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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과 하지의 대결 ②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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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하지의 대결 ② 가택 연금 상태에서 할 일이 없어진 이승만은 손수 망치질을 하고 대패질도 하고 집을 수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집이 너무 작아서 이삿짐도 다 풀지 못한 채 지내는 노 부부를 보다 못한 측근들이 다시 나섰다. 이승만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황온순 여사가 자신의 기와집을 선사했다. 그곳이 ‘이화장(梨花莊)’이다. 이승만의 일생을 읽다 보면, 지나친 궁색함에 놀라게 된다. 민족 지도자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생활 수준 때문이다. 일국의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그의 궁색함은 계속되었다. 해진 속옷을 입고 다니고, 6.25 사변 당시 땀띠약이 없어 고생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좌우 합작은 공산화로 간다는 이승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동 유럽의 소련 위성 국가들과 북한이 비슷한 시나리오를 거쳐서 공산화되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소위 ‘연립 정부’를 예로 들어 본다. 스탈린은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에서, 폴란드 연립 정부에 친서 유럽적인 폴란드 망명 정부 각료들을 참가시켜야 한다는 미국 측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는 20명의 각료 중 4, 5명의 비공산주의 인사를 받아들이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그 후 소련의 몰로토프 외상(外相)은 서 유럽 측이 지명한 인사에게 거부권을 행사했고, 서 유럽 측의 추천 대상자인 16명을 체포해 버렸다. 1945년 5월에 폴란드에 연립 정부가 구성되기는 하였으나, 좌우 연립은 명목뿐이었다. 실질적으로는 공산 정권이었다. 소위 ‘좌우합작 정권’은 급격한 속도로 우익 숙청을 단행했다. 1946년 겨울, 올리버는 이렇게 썼다- -“동유럽에서 전혀 성공한 바 없는 좌우 합작 조직을 이승만 박사에게 만들어 내라니, 이런 요구는 일본인 상전을 공산 지배자로 바꾸는 일에 동의하라는 것밖에 안 된다. 언제나 이를 거부하고 반대 발언에서 가장 강경하고 노골적인 이승만 박사에게는 세계 언론으로부터 ‘극우’라는 호가 붙었다. 중도파들에게까지 이 박사는 극단적 반동주의자라는 견해가 널리 유포되어 갔다.” 역사는 때로 서글픔과 위로를 함께 전해 준다. 이승만에게 붙은 극우라는 칭호가 그렇다. 이 나라를 지켜 온 반공, 애국 세력은 오랫동안 극우, 수구, 반동으로 매도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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