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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올 수 없는 다리, 1946년 ②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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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올 수 없는 다리, 1946년 ② 탁치 운동은 반탁에 대한 공격을 동반했다.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이들은 “친일파⋅민족반역자”로 규탄 당했다. 북한의 모든 정당, 사회 단체에서 신탁 통치 반대 인사들을 숙청했다. 북한의 민족주의자 조만식(趙晩植)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정치 행위가 되고 말았다. 소련과 김일성은 1946년 1월 조만식을 감금했고, 그 이후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형식적으로 손을 잡았던 민족주의자들을 숙청해 버린 후 1946년 2월, 소련은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은 김일성, 부위원장은 김두봉이었다. “임시 위원회”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그것은 사실상 정부였다. 북한의 공식 역사서인 ⌜현대 조선 력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북조선 림시 인민 위원회의 수립으로서 우리 인민은 그토록 오랜 세월을 두고 념원하던 진정한 인민 정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혁명의 강력한 무기를 틀어쥐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인민 대중은 사회의 떳떳한 주인으로서의 자주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연과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창조적인 투쟁을 결정적으로 벌려나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또 한 번 말과 실체가 다른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임시 위원회라고 이름을 붙여서 앞으로는 마치 정부가 아닌 것처럼 가장을 해 놓고, 뒤로는 ‘혁명의 강력한 무기를 틀어쥐고’ 있다. 김일성 자신도 임시 위원회가 정부임을 인정했다. 그는 1946년 8월 15일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는 전체 인민의 의사와 이익을 대표하는 북조선의 중앙 주권 기관”이라고 찬양했다. (양호민, 서울: 생각의 나무, 2004, p.168) 임시 인민 위원회는 토지 개혁을 단행했다. 북한의 토지 개혁은 획일적이었다. 농가(農家)마다 가족 숫자가 다르고 토지의 비옥도가 다르며, 위치에도 차이가 있다. ...(中略)... 그런데도 북한에서는 모든 차이점들을 무시하고 획일적으로 땅을 나누어 주었다. 이는 소련의 경우와 유사하다. 소련의 토지 개혁 사례 가운데, 토지를 무조건 폭 1미터 안팎으로 잘라 준 기록이 있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이 가진 토지가 한 곳에 모여 있지 않고 흩어져 있게 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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