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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외교 노선인가? ②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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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대통령, 친미 외교와 반공 노선 왜 외교 노선인가? ②
(지난호(1/27)의 이야기 끝부분: 전성기에 7백만에 이르는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일본을 무력으로 물리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설령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힌다고 해도, 우리 민족이 받아야 할 보복은 참혹했다. 일제는 1919년 3.1 운동 이후 고조되었던 국내외의 항일 운동 세력에 대해서 잔인하게 보복했다. 1920년 노령 연해주에서 4월 참변이 일어났다. 일제는 독립 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한인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방화, 학살을 저질렀다. 우리 겨레 300여 명이 죽고 100여 명이 체포당하는 비극이었다. 뒤이어 간도 사변이 일어났다.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간도 한인 사회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었다. 3,469명이 피살되고 170명이 체포되었으며, 71명의 여인이 강간당했다. 민가 3,209호, 학교 36개교, 교회당 36개가 일본군에 의해 불타 버렸다. 이처럼 우리가 일본군을 공격하면 일본군은 엄청난 보복을 동포들에게 퍼부어 댔다. 무력으로 일본을 이길 수가 없고, 일본군을 공격한 대가로 치러야 하는 우리 민족의 희생도 너무 컸기에, 이승만은 외교 노선을 주장했다. 둘째는, 국제 정세를 읽는 이승만의 안목이었다. 이승만은 일찍부터 일본과 미국의 충돌을 예상했다. 아시아 각국을 침략한 일본은 구미 열강, 특히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미국과 필연적으로 대결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때가 도래하면 한국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력 투쟁도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한국인의 자력(自力)에 의한 일본과의 정면 대결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소모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승만은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결국 미국의 힘을 이용할 때만 한국의 독립은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친미(親美) 외교 노선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독립 운동의 유일한 길이자 마지막 보루였다. 그가 임시 대통령이면서도 정부의 소재지인 상해가 아니라 워싱턴에서 활동하기를 고집했던 이유도 이러한 신념 때문이었다.(고정휴. 유영익 편. P.112) 이승만은 1919년 11월 3일 임시 정부 요인 취임에 즈음하여 상해로 전보를 보냈다. “원동(遠東)의 일은 총리가 주장하여 하고 중대한 일은 내게 문의하여 하시오. 구미의 일은 나에게 임시로 위임하시오. 중대한 일은 정부에 문의하겠소. 정부와 이곳은 절대적으로 협력할 필요가 있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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