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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을 대표한 미국인들 | 운영자 | 2020-06-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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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대표한 미국인들 많은 미국인들이 이승만을 가까이에서 도왔다. 문제는, 일부 재미 교포들이 이승만은 한인들을 대표할 만큼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폄하하였고, 그 비방을 미 국무부 관리들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이승만을 후원하는 미국인들에게는 이승만이 한국인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미 국무부에 알리는 일이 중요했다. 그래서 스태거즈 변호사는, 한국에 있다가 1940-41년에 일본에 의해 추방된 미국인 선교사들을 일일이 찾아 연락처를 알아내어, 그들에게 한국인을 대표할 인물이 누구인지를 묻는 설문지를 돌렸다. 대부분이 이승만을 꼽았다. 이에 스태거즈는 국무부의 극동 담당 스탠리 혼벡 박사를 찾아가 설문지를 내밀며 당장 검토해 줄 것을 요구했다. 혼벡은 마지못해 한 시간 동안 그 문서를 살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정도면 이승만의 대표성이 증명되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국무부의 태도에는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의 해방이 다가오면서 이승만은 몇 명의 미국인 후원자를 더 얻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로버트 올리버 박사다. 그는 오리건 주립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워싱턴에서 군수품 조달 부서에 일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는 시라큐스 대학과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 교수를 지냈다. 이승만이 1942년 8월 하순에 올리버 박사와 만나게 된 것은 에드워드 정킨 목사의 소개 때문이었다. 정킨 목사는 한국에 파견되었던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이었다. 이승만의 군사적 후원자는 1943년 2월경에 알게 된 미 육군 전략국(OSS) 소속의 프레스턴 굿펠로우 대령(大領)이다. 굿펠로우는 일본과의 전쟁에 한국인들을 활용하라는 이승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한 한인 청년들을 비밀리에 특수 부대로 훈련시켜 일본이나 한국에 침투시켜 첩보 활동과 파괴 활동을 벌이게 할 ‘냅코(NAPKO)' 계획을 세웠다. 이는 이승만이 한국인의 무장 투쟁이 임시 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을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장석윤을 비롯해 12명의 한국인 청년들을 선발했다. 그리고 1942년 12월 4일부터 훈련을 시작하여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함으로써 대(對)일본전에 투입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 참전국으로서의 지위를 갖추어 전승국으로서의 권리를 가지려는 이승만의 계획이 무산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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