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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記事)와 기사(記事)의 아름다운 충돌 | 운영자 | 2023-08-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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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인 저명 인사가 여행을 하고 나서 그 경험을 소재 삼아 칼럼을 써서 신문에 게재했다. 그 칼럼에는 “혼잡한 기차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빈자리가 있어서 편히 앉아서 여행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을 감사한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다음날 이 칼럼을 본 무신론자 한 사람이 독자란에 투고했다. “나도 그 칼럼리스트가 탔던 혼잡한 기차를 타고 여행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인지는 잘 몰라도 다행히 처음부터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어떤 노인이 서 계신 것을 보고 자리를 양보하고 말았기 때문에 부득이 서서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두 기사를 모두 본 목사님이 교인을 불러 물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습니까?” “당연히 믿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나요?”라고 재차 물었더니 역시 믿는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심을 믿습니까?”라는 물음에는 “예, 저도 그 생각을 하면 온몸이 두려움으로 떨립니다.”라고 대답했다.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심판하러 오시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 교인은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목사님은 신문 스크랩을 보여주었다. 독자가 기고한 내용을 본 교인은 그 자리에서 무릎 꿇었다. 그리고 목사님께 고백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자를 심판하시러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하시러 오시는 사실을 떨리는 심정으로 알면서도, 무엇을 심판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무지했던 그의 모습이 우리일 수도 있다. 이웃의 고통을 위한 눈물의 간구보다도 자신의 행복을 기뻐하는 감사의 기도가 더 많은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웃의 아픔을 위해 자신의 조그만 행복까지 쪼갤 수 있음에 감사할 줄 아는 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을 간직한 자일 것이다. 그 십자가 흔적은 성도의 신분 증명과 같은 것이다. 이제 다가오는 오월은 가정의 달이다. 내 자녀와 내 부모만 바라보던 눈을 들어 이웃의 자녀와 이웃의 부모를 바라보자.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울타리로 삼고 그 안에서 기뻐하기보다, 그 울타리를 열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대지를 덮는 자이다. 십자가 흔적(痕迹) 외에는 모두 비운 마음을 태우며 감사 기도하는 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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