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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4. 잊을 수 없는 6.25전쟁(6) 운영자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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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철저한 국가 안보태세

 

(1) 국가안보를 위해 확실한 대적관(對敵觀)을 세워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토를 수호하는 국가안보의 시각에서 볼 때, 확고한 대적관(對敵觀) 정립은 너무나 중요하고 기본적인 사항입니다. 북한은 남한을 타겟으로 무기체계와 군사력을 배치해 놓은, 현재 우리의 적()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북한은 남한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평화통일을 가로막는 북한의 실상을 정확히 인식하고, 국가 수호의 의지를 확고히 해야 합니다, 북한 노동당은 북한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상위에 군림하는 최고 권력 기관입니다, 그 노동당 규약 전문에 명시되어 있는 바로는 조선노동당의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분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여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 해방과 인민민주주의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데 있으며, 최종 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라고 하여, 남한까지 공산화하겠다는 국가적 의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노동당은 북한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조직이므로, 여기 노동당 규약 전문은 실제 북한의 통치이념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분단 국가이며, 남과 북은 휴전 중입니다. 지난날 625동란은 1953727일 정전협정 체결로 잠시 중단되었을 뿐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입니다. ‘휴전이란 쉴 휴(), 싸울 전()’, 전쟁을 쉰다라는 뜻입니다. 쉬는 것을 멈추면 다시 전쟁이 일어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은 군산분계선을 중심으로 6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남한을 위협해 왔고, 북한의 기상천외한 도발로 한반도는 언제든지 전면전으로 확대될 불씨를 안고 있습니다. 2010326일 금요일 오후 920분경, 북방한계선과 인접한 백령도 서남방 해상에서 북한 소형잠수함정에 의한 250중어뢰의 기습 공격을 받아 1,200톤급 천안함이 두 동강이 난 채 침몰되었습니다. 천안함의 승조원 104명 중 58명은 구조되었으나, 실종자 46명중 40명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6명은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산화(散華)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약 8개월 후, 북한은 1123일 오후 234분부터 오후 341분까지 약 1시간동안 서해 연평도와 인근 해상에서 두 차례에 걸쳐 170여 발의 해안포와 방사포를 기습 발사하여 연평부대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이 전사했고, 민간인 3명과 장병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게다가 민간인까지 2명 사망하였습니다. 또한 주택 12동이 대파되었고 25은 불에 탔으며, 차량 3대와 컨테이너 박스도 여러 채 파괴되었으며, 산불까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연평도 주민 1,700명 중 95%가 피난하는 대소동을 빚었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2010326일 천안함 파격사건과 1123일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우리 국민은 세계 유일의 휴전 국가인 한반도의 위기 상황을 목도하면서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확인하였고, 또한 두 사건은 대한민국의 주적이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적관을 모두에게 각인시켰습니다. 명백히 북한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졌는데도, 그들은 한국정부와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억지 주장과 유언비어로 우리 국민의 여론을 분열시키고 끊임없이 나라의 혼란을 가중시켜 왔습니다.

 

북한이 보유한 방사포는 독가스와 같은 화학무기를 탑재할 수 있고 사정거리 160로 수도권 어디든지 공격할 수 있으며, 1500기의 미사일은 부산이나 목포까지도 7분이면 도달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현재 대량살상을 위한 핵무기와 그것을 운반할 탄도 미사일도 수천개 이상 보유한 상태입니다. 북한은 1970년대부터 탄도미사일 개발에 착수하여 1980년대 중반에 사정거리 300SCUD-B, 500SCUD-C를 생산하여 배치하였습니다. 1990년대에는 사정거리 1,300인 노동 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후 배치하였으며, 1990년대 말부터는 사거리 3,000이상의 신형 중거리 미사일(IRBM) 개발에 착수하여 2009년경 작전 배치하였습니다. 200945일 발사된 대포동 미사일 2호는 3단 분리에 성공하였으며, 6,700까지 갈 수 있는 무서운 무기입니다.

북한은 겉으로는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우며, 미국과 일본을 겨냥한 방어용 무기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것으로 한반도를 전략적 타깃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북한은 지금까지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전술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음을 스스로 입증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북한의 핵 개발로, 말만 들어도 몸서리쳐지는 전쟁의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 625전쟁이 여전히 우리의 삶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북한을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되고, 해이해져서도 안 됩니다. 민족의 유구한 발전을 위해서는, 전 국민이 안보의 중요성을 철저하게 인식하여 적의 실체를 알고 철저한 태세를 갖춰, 국가 방위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2) 과거 국난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합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철저히 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역사가 되풀이됩니다. 우리 국민은 수없이 국난을 겪어 왔고 625전쟁이라는 전무후무한 동족상잔도 겼었으며,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국난을 당한 연후에는 반드시, 온 국민이 보다 더 정신을 차려서 그런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적에게 맞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그 대비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이를 간과함으로써 동일한 국난이 반복된 것을 여러 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외적으로부터 당한 큰 침략이 있다면, 1592413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군인 21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와 일으킨 임진왜란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쯤에 당시 병조판서(현 국방부 장관) 율곡 이이는 여러 가지 국제 정세로 보아 나라가 위급하니, 10만 군대를 양성해서 국방을 튼튼히 하지 않으면 왜적의 침략을 받을 위험성이 높다고 조정에 방책을 일렀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세종대왕 이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이때 10만 양병이 무슨 소리냐, 공연히 국고를 낭비하고 민심을 불안케 만드는 어리석은 짓을 할 필요가 없다라며 율곡의 건의를 무시하였습니다.

그 당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소위 전국 시대 말기에 전국을 통일하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과 명나라를 침범할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율곡 이이는 국가 안보를 위해 국력을 기르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그런 건의를 한 것인데, 불행하게도 육곡의 건의는 일축되었습니다. 결국 1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 8년 동안 계속된 왜적의 침략으로 온 백성은 헤아릴 수 없는 수모를 당하였고, 수천 년 동안 내려오던 우리 문화재와 귀중한 문화적 유산이 상당 부분 파괴되었으며 국토는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임진왜란과 같은 커다란 국가적 불행을 겪었음에도, 전쟁이 끝난 후 조정이나 국민들은 아무런 대비책이 없이 지내다가 20년 후에 또 다시 병자호란이란 처참한 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조정 안에서는 당파 싸움이 계속되었고, 전혀 정신 차리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다가, 그 당시 만주에서 일어나 중국 천하를 통일했던 청나라 군대에 의해서 또 다시 침략을 당한 것입니다. 이 병자호란으로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왕족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가야 했고, 왕자가 만주까지 인질로 끌려가 유폐 당하는 등 임진왜란 못지 않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얼마 후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지금의 광나루 부근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 황타이지앞에 치욕적인 자세로 항복함으로써 겨우 전쟁이 끝났고, 그때부터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과 같은 처우를 받았습니다.

인조 임금의 아들 봉림대군은 만주 선양(심양)에 볼모로 끌려가 9년 동안 수치스런 곤욕을 당하고 돌아와서 선왕이 죽고 난 후 효종 임금이 되었는데, 병자호란 때 당한 굴욕을 기어코 복수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완(李浣) 장군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북벌 계획을 세우고 몇 년 동안 전쟁 준비를 치밀하게 추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상당한 준비가 거의 완료되었을 무렵 안타깝게도 효종 임금은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이렇게 청나라의 속국처럼 약 300년간을 지내다가 1863년 고종황제가 즉위한 뒤 흥선대원군이 처음으로 국정에 일대 혁명적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패기만만했던 흥선대원군도 며느리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데만 온 힘을 쏟은 나머지, 결국 나라가 망조의 길을 걷게 되었고, 식민지화라는 무서운 역사의 보복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국민이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지난날의 아픔과 퇴영(退嬰)의 악순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1975430일은 월남이 패망한 날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패망해 간 과정을 자세히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북쪽에는 공산주의 월맹이 있었고, 남쪽에는 자유민주주의 월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55년에 월맹이 월남을 공격하여 전쟁이 발생하였고, 이때 미군이 개입하였으나 10년이 되어도 전쟁이 끝나지 않자 1968510일 비밀 협상을 시작하여, 1973127일 미ㆍ월맹 평화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약체결 이후 두 달이 지나 미군이 철수하게 되는데(329), 월맹은 2년 후 다시 공격하여 1975430일 월남은 패망하고 공산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월맹이 미국과 평화협상을 한 목적은, 미군을 축출한 후에 민중봉기를 통해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무력남침으로 월남을 공산화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월남의 패망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유는, 당시 월남은 미국이 넘겨준 최신 전투기 등으로 무장했고 군사력이 세계 4위인 군사 강국이었으며, 가난한 월맹에 비해 경제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월남 사람들의 안보 의식은 형편없었고, 국론이 분열되어 사회는 극도로 혼란했습니다. 월남의 마지막 대통령인 티우대통령은 월맹은 경제난으로 10년 내에 망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월맹을 얕잡아 보았는데, 오히려 월남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월남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월맹군의 공세가 치열해지자 위에(Hue)나 다낭(Danang)등의 도시로부터 수많은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하였고, 사이공 함락과 함께 월남의 군인이나 월남 정권의 협력자와 그 가족들이 난민으로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성립 후에도 난민의 해외 유출이 계속되었는데, 이들이 보트나 어선으로 탈출하는 경우도 있어 보트 피플’(boat people)이라는 이름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월남의 패망은, 군사력과 경제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안보의식이 약해지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산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절대로 북한을 얕잡아 보지 말고, 철저한 안보교육을 통해 범국민적으로 대비를 해야 우리의 조국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월맹은 미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을 철수시킨 후 월남을 침공하여 공산화에 성공했습니다. 625전쟁도, 북한의 사주에 의한 여론몰이로 19496월에 미군을 철수시킨 후 1년 뒤에 북한의 도발로 일어낫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북한은 지금도 이러한 수순을 밟아가려고 합니다.

 

이러한 엄연한 역사적인 교훈을 다 외면해 버리고, 지금도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여, ‘평화협정체결,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습니다.

미군철수는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확고한 한미동맹과 미군의 한국 거주는, 우리 민족의 생존권이 걸린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북한은 현재 대한민국에 거하는 미군이 28,000명에 불과하지만 전시에는 69만 명의 미군이 투입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남한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3)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진 지휘관을 양성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625전쟁 이후 가장 심각한 국가안보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들 합니다. 이 위기는, 나라의 존재 기반을 뒤흔드는 총체적인 위기를 뜻합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호전성이 강한 북한군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땅에 제 2625동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반공에 대한 국민적 단합이 절실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위기 상황에서 가장 실질적이고 시급한 대처는 무엇입니까?

올바른 역사의식으로 철두철미하게 무장하여 전 부대원들의 힘을 결속시킬 수 있는 지휘관을 길러야 합니다, 세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지휘관 한 사람 때문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깨어 있는 지휘관 한 사람이 그립고 또 너무나 절실한 때입니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진 지휘관 한 사람은, 이북의 핵폭탄을 이길 수 있는 큰 위력입니다. 지휘관 한 사람 때문에 나라가 평안케 되고, 지휘관이 용맹한 믿음으로 던지는 말 한마디에 부대원들은 용기백배(勇氣百倍) 힘을 얻고, 전 국민들은 위로를 받고 안심(安心)하게 됩니다.

 

남 유다 제 13대 왕, 히스기야(주전729-686) 14년에,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어와 내탕고에 있는 금(30달란트)과 은(300달란트), 왕궁과 성전의 보물을 그에게 빼앗긴 적이 있었습니다(왕하 18:13-16). 앗수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제 2차로 다시 히스기야를 공격했습니다.(대하 32:1-2). 앗수르 나라에게 제 1차 공격에서 수치스럽게 패한 히스기야는 제 2차 공격에서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철저한 공격 준비 태세를 갖추는 데 전심전력하였습니다(대하 32:5).

첫째, 성 밖에 있는 모든 물 근원을 막아서 적들이 물을 얻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대하 32:3-4). 이때 히스기야는 예루살렘 성 밖의 기혼 샘물을 막고 그 물이 지하를 통해 성 안으로 흐르게 하는 놀라운 공사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 지하 수로의 길이는 1,200규빗(547미터)이었습니다.

둘째, 퇴락한 성을 중수하여 높이 쌓고, 외성을 쌓으며, 다윗성의 밀로(토성)를 견고하게 하였습니다.(대하 32:5).

셋째, 병기와 방패를 많이 만들었습니다.(대하 32:5)

넷째, 군대장관들을 세워 백성을 거느리게 하고 군대를 이끌도록 하였습니다.(대하32:6).

다섯째, 백성들을 모아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잇는 백성들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였습니다(대하 32:6-8).

 

이때 적군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야전사령부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이스라엘이 자기의 소변과 자기의 대변을 먹는 자라고 조롱하며 전의를 상실하게 했습니다(왕하 18:27-35, 36:12-20). 그 당시 히스기야가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라고 할 만큼 상대의 힘은 막강했습니다(왕하 19:1-3, 대하 32:20-21, 37:1-4). 그러나 히스기야는 오히려 앗수르 왕의 사자가 보낸 그 협박 편지를 하나님의 성전에 펴 놓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왕하 19:14-20, 37:14-20).기도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군사 185,000명을 쳐서, 아침에 보니 그들이 모두 시체가 되었습니다(왕하 19:35, 37:36). 또 앗수르 왕 산헤립은 고국으로 돌아간 후에 그 몸에서 난 자들의 칼에 죽었습니다(왕하 19:37, 대하 32:21, 37:37-38). 나라에 일어난 놀라운 역사로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드리고 또 히스기야에게 보물을 갖다 바쳤습니다.

이후로 히스기야는 열국의 눈에 존대하게 되었습니다(대하 32:22-23).

지휘관 한 사람이 나라를 뜨겁게 사랑하고 지켜내려는 마음, 그리고 철저한 국가안보태세와 참 예언자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겸손한 마음이 있었기에, 남 유다는 앗수르에게 망할 수밖에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 상황은 히스기야 왕 당시의 남 유다와 너무도 유사합니다. 두 번에 걸쳐 침략한 앗수르처럼, 저 이북의 김정일 괴뢰군의 재침략이 언제 있을지 실로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확고한 안보 의식과 구체적이고 강력한 대응 전략과 국방력 강화, 3대 세습을 이루려는 북한 정권의 속성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가진 지휘관 한 사람이 절실합니다. 지휘관 한 사람의 결단이 나라의 운명, 더 나아가 국민들 개인의 운명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위축되거나 흔들리지 않고,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군 지휘관 한 사람이 있을 때, 이 나라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물론 군 지휘관을 보좌하는 모든 군인들과 후방의 국민들도 나라와 민족을 뜨겁게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4)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전수해 주어야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또다시 많은 사람이 좌파로 기울어가는 위기를 맞아, 여기저기 우려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잿더미로 만들었던 그 공산주의가 또 고개를 쳐들고 국론을 분열시키려 극성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일보가 주최한 2006년 국민의식 조사에 의하면 54.8%가 북한은 남한의 협력 대상이라고 응답했고, 15.8%만이 남한을 위협하는 대상이라고 답하였습니다. 남북통일을 방해하는 것이 미국이며, 우리의 적은 실상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교조 소속 교사와 좌파 성향의 역사학자들이, 학생들에게 한국 현대사를 왜곡하여 대한민국을 규탄하고 반미 친북 좌파 사상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주적이 미국이라고 가르치는가 하면, 제주 43폭동을 미국이 군과 경찰을 자극하여 민간인을 학살했기 때문에 이에 민중들이 항쟁한 것으로 가르치고, 625는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었으며(남침유인설, 서울 점령설), 미군 개입만 없었으면 통일이 됐을 것이라는 궤변을 학생들 앞에서 늘어놓고 있습니다.

2005528일 전북 순창 회문산 자락에 있는 청소년수련원에 군산의 동고등학교 도덕교사 김형근 씨(50), 180명의 중학생 제자들과 함께 남녘 통일 애국열사 추모제에 참여했는데, 그곳에서 빨치산은 훌륭하다라며 영웅으로 찬양하고, “빨치산의 뜻을 계승해 외세를 몰아내고 우리 민족끼리 통일을 이루자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게다가위대한 김정일 장군님께서 창조에 관해 하신 명언을 가르치는 등으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기소되었습니다. 김형근 씨는 전교조 전북지부 통일위원장까지 지낸 자입니다. 그러나, 전주지법 형사 1단독 진현민 판사는 빨치산은 이미 과거 일에 불과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조선일보 2010218일자).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해칠 만큼의 수준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중학생 시절 교사들에게 의해 학습된 잘못된 이념은 그들의 사고를 평생 지배하게 됩니다. 사법부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올바른 법치와 위계질서의 전통을 이어가야만,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사법고시에 합격한 학생들의 신원조회를 철저히 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를 지키는 가장 큰 힘은 최첨단 무기가 아니라 철저한 안보의식입니다. 국가 안보야말로 세계 모든 국가의 제 1의 국가 목표입니다. 이것은 온 국민의 역사의식이 하나 된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좌익 성향으로 흐르는 현상은, 우리 부모 세대가 자신들이 겪은 역사를 정리하는 데 소홀하여, 자녀들에게 참혹했던 공산주의의 폐해와 참된 호국의 의미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를 제대로 교육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일입니다. 지금 가장 큰 급선무는 전 국민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는 일입니다. 왜곡 날조된 역사는 필연코 우리와 우리 후손들을 나약하고 병들게 하여 나라의 장래를 암담하게 만듭니다. 거짓 없는 역사의 보존을 위해 역사를 사실대로 바로 알게 해주는 올바른 역사 교육이 강력히 요청되는 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주전 2166-19991), 하나님께로부터 나라가 영속되게 만드는 중대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18:18-19). 그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이 자자손손 영원토록 지속되게 만드는 방편으로, 그들이 체험한 역사를 잘 가르쳐서 메시아의 축복을 대물림하라는 중대한 지시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후손과 그 후손의 후손들이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올바르고 공정한 길을 떠나지 않도록, 역사적 사실과 그 교훈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시대를 분별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2백만 이스라엘 민족을 40년간이나 이끌었던 광야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주전 1527-1407), 그의 마지막 유언을 통해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6:6-7)라고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우리 후손들이 바른 역사의식으로 하나가 될 때, 이 민족의 거대한 항해는 큰 힘을 얻어 한 목적과 한 방향으로 거침없이 전진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5) 철저하게 실패한 공산주의의 실상을 바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75년 만에 패망한 러시아 공산당

1917117,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에 의해 일어난 러시아 혁명으로 세워진 구 소련(러시아 공산 정권)19911231, 75년 만에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경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개혁개방세력이 일으킨 쿠데타의 영향으로 공산주의가 해체, 급속히 붕괴되었고, 결국 19911225일 고르바초프주의가 대통령직을 사임한 후 12개 독립공화국이 독립국가연합을 형성함으로써, 199211일 소련은 75년 만에 종말을 맞고 말았습니다.

공산주의(communism)는 서구에서 발생했지만, 비서구적 환경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고, 실패를 향해 내달리다가 결국 비참하게 무너졌습니다. 독일 철학자 마르크스(1818-1883)와 엥겔스(1820-1895)는 다윈(1809-1882, 영국의 생물학자)의 진화론적 사고를 가지고 사유재산 없는 평등한 사회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패와 모순 때문에 결국 망하고, 그 대신 사유재산과 국가가 없어지는 완전 평등의 공상사회가 도래하게 되며, 그것이 역사의 종착점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1917년 레닌에 의해 러시아에서 실제화되었고, 여러 제 3세계 국가들로 뻗어나갔으며 캄보디아에서 가장 극단적인 정권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뒤흔들었던 공산주의는 한 세기를 지나기 전에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공산주의는 부패한 인산들이 사는 세상에서 실제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허황된 망상이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론이며, 오히려 일인 일당 독재를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제거하고 죽이는 잔악한 악()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던 것입니다.

 

레닌에 의한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게 된 것은, 제정 러시아 말기 황실과 귀족의 무능함과 부패 때문이었습니다. 제정 러시아는 이미 산업혁명을 이룬 서유럽 나라들에 비해 경제ㆍ정치 등 여러 면에서 크게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가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이라는 장기적인 소모전에 개입함으로써, 극심한 경제난으로 사회는 매우 혼란하고 불안했습니다. 국민들은 오랜 전쟁과 가난에 시달려 황제 없는 러시아를 원했고 혁명을 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의 발단은 1950122일 일요일, 러시아 정교회의 가풍 신부가 이끈 상트페테르부르그의 15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평화시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날 시위 진압 과정에서 1천여 명이 죽고 3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니, 그야말로 피의 일요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의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66개 도시의 44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항의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4월까지 파업 참가자는 81만명에 이르렀으며,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1894-1917)가 이 사건의 파장이 얼마나 확대될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동안, 10월에는 러시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이 발생하여 경제는 파탄에 빠지고, 국가 기능이 정지 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19051030, 니콜라이 2세가 10월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차르 체제(러시아 황제 독재 체제)가 무너지고 입헌군주제가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10월 선언의 주요 내용은 시민권(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 보장, 입법권을 갖는 의회의 개설, 참정권 확대 등이었습니다. 그러난 10월 선언은 혁명세력을 공격할 시간을 벌기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자유를 약속하였지만 전제정치는 계속되었고 사실상 바뀐 것은 없었습니다. 이에 노동자와 농민들의 파업과 봉기가 계속 이어지자 황제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전과자, 불량배, 파산자 등으로 구성된 특공대를 조직하였고, 19051227일 군대가 노동자들에게 사흘 동안 무차별 포격을 가하여 최소한 1천여 명이상이 죽었으며 , 이후에도 수천 명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수만 명이 유배를 당하는 등 러시아는 피로 물들었습니다.

이 시기 러시아는 강력한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여 일시 큰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활 조건은 여전히 열악하였으므로 , 혁명의 분위기는 고조되어 갔습니다.

1914728일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당은 전쟁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면서 반전사상을 고취시켜 나갔습니다. 19171월 전국적으로 약 25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하였고, 225일 총파업이 벌어졌으며 경찰과의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27일에는 민중 봉기가 수도 전체를 휩쓸었는데, 노동자들은 무기고를 점령하여 무장하기 시작했으며, 저녁에는 수비대 병사 6만여 명이 합류하였습니다. 마침내 1917310, 이른바 3월 혁명(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퇴위(退位)함으로써 제정 러시아는 붕괴되었으며,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르보프 공이 수상이 되었습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1903년 제 2차 대회 때부터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파(과격 정통파)와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한 멘셰비키파(온건파)로 양분되어 대립해오고 있었는데, ‘피의 일요일사건 이후 제 1차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1차 망명을 끝내고 귀국한 레닌이 본격적인 혁명 조직을 만들어가면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격렬한 분쟁을 시작했습니다, 1907년 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자 레닌은 다시 망명길에 올랐고, 1912년 프라하에서 볼셰비키만의 당 대회를 소집하며 멘셰비키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였습니다.

19174월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독일의 도움을 받아 귀국한 레닌은, 즉시 놀라운 기회주의적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프로그램을 , 평화, 그리고 토지라는 짧고 명료한 슬로건으로 요약했습니다. 그의 선전에 각계각층의 대중은 크게 동조하였고, 3월 혁명 후 4만 명에 불과했던 볼셰비키 수가 11월 혁명 직전에는 20만 명에 달하게 되어 그 영향력이 급속히 커졌습니다. 한편 임시정부는 전쟁에 대한 대중의 염증과 경제 파탄으로 지지기반을 잃어갔습니다. 이제 레닌의 볼셰비키당은 임시정부와 경쟁할 수 있는 권위를 갖춘 유일한 조직체가 된 것입니다.

러시아인들은 , 평화, 토지를 꿈꾸었지만, 레닌이 의도한 공산주의는 유럽의 내전 도모, 토지의 국유화, 당의 독재권력이었습니다. 1917101, 레닌은 폭동을 위해 동료들에게 혁명은 계급 투쟁이자, 가장 첨예하고 가장 야만적이며 가장 과격한 내전이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어떠한 대혁명도 내전 없이 완성되지 않았다.”라고 설득하였습니다.

임시정부가 새로운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실시하기로 한 총선거일(1125)을 불과 18일 앞둔 117, 레닌에 의하여 임시정부는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191710, 레닌은 비밀리에 페테르부르그 소비에트 의장인 트로츠키의 협력을 얻어 적위대를 조직, 11710시 볼셰비키 적위대는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혁명정부로서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가 탄생하였고 모든 국가권력이 소비에트로 넘어왔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레닌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 이양하는 것처럼 위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레닌은 정권을 잡는 일 깃털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쉬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득세한 것은 민중봉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선전하는 구호 뒤에 숨어서 정권을 탐내는 소수의 무리가 위로부터 강제력을 부과하여 실현된 것입니다.

레닌은 정권을 잡은 지 3일 후 언론의 자유를 구속하는 법령을 공포하고, 징발과 몰수, 체포와 살인을 거듭했습니다.

그런데 레닌의 약속대로 실시된 총선거(1125)에서 예상과 달리 공산당이 불과 25%를 밑도는 175석만 차지하게 되자, 레닌은 1918118일 회의장 안팎으로 무장병력을 동원하였고 결국 의회는 완전히 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의회를 지지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난 군중들은 무참히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19183월부터 그 해 10월까지 8개월간 공산당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자가 170만 명에 이르고, 혁명 이후 5년간 그 수가 약 2천만 명에 달하였습니다.

1918년부터 1921년까지 레닌의 볼셰비키당은 전시체제하에서 정부가 국가 전반을 직접 통제하는 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모든 공장을 국유화하고 경험없는 공산당원을 지배인을 임명하자, 중공업 생산량이 1913년의 13%까지 떨어지고 경공업의 경우는 44%로 떨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식량난이 심각해지자 1918년 식량징발령을 공포하여 농민들이 숨겨놓은 식량을 털어내고, 심지어 다음 해의 농사를 위해 저장해 두었던 종자까지 몰수하였습니다. 1920년에는 내란과 테러와 대흉년까지 겹쳐, 당시 러시아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굶어죽은 자가 50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전염병까지 발생하여 일반 백성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192131, 11월 혁명에서 누구보다도 열렬히 레닌의 볼셰비키당을 지지했던 크론슈타트의 해병 약 15,000명이 공산당의 폭력과 독재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채 러시아의 마지막 반공산독재 의거로 끝나버렸고, 레닌의 총칼에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레닌의 독재와 볼셰비키당을 반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는 폭력으로 시작하여 폭력으로 다스리는 것이 그 본질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평화적인 혁명을 추구하는 것 처럼 말했지만, 사실상 저들의 최종 목적은 평화가 아니라 공산주의혁명이었습니다. 평화는 가면에 불과하고 종국에는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기어코 혁명을 달성하고야 마는, 실로 공산주의는 엄청난 살상력을 가진 무자비한 이념인 것입니다.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노동자계층은 공산주의자들이 경제적 평등을 외치는 순간 그 이론에 쉽게 현혹되었는데, 러시아의 레닌과 스탈린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하여 민중을 위하는 척하면서 민중혁명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독재 공포정치를 시행했습니다.

레닌은 1918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했고, 191936일 모스크바에서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하기 위해 코민테른(Komintern, 3인터내셔널: 세계 각국 공산당의 중앙집권제에 기초한 국제조직)을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등 러시아 인접지역들을 점령하였고, 마침내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소련)이라는 역사상 최초의 일당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레닌은 권력을 잡은 지 불과 5년 후인 1922526d, 뇌동맥 경화증으로 발신불수가 되었고, 1216일에 병이 재발하여 1923년 세 번째 발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으며, 마지막 1년간 실어증까지 않다가 마침내 1924121일 저녁 650, 고리키에서 53세로 사망하였습니다. 장례식은 사망 6일 후인 127일 치러졌습니다.

 

레닌 이후 레닌주의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은 단연 스탈린이었습니다. 스탈린은 1903년에 레닌의 책을 읽고 심취하여 볼셰비키가 되었습니다. 1905년에는 레닌을 만나 그에게서 스탈린(: 강철의 인간)이라는 이름도 얻었습니다. 스탈린은 레닌에게 헌신하고 두드러진 행정수완을 발휘함으로써 레닌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공산당 지도자들과 달리 스탈린은 레닌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레닌은 다른 지도자들보다 스탈린을 앞서 승진시켜 1922년 당 서기장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레닌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있을 당권 투쟁에 대비하여 스탈린은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사람들과 아군이 될 만한 사람들을 승진시켰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다음에야 레닌은 스탈린의 무자비함과 비인도적 폭력에 회의를 느꼈고, 발작 때문에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편지를 통해 스탈린이 권력을 독점할 수 없게 하려 했지만, 스탈린은 그 편지를 감추고는 지노비예프와 케메네프를 끌어들여 삼두정치체제를 수립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의 공통적 경쟁자인 트로츠키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중상모략과 협박으로 트로츠키를 축출하여 멀리 추방시켰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도 제거해 버렸습니다. 레닌이 죽은 1-2년이 지나자 스탈린은 당의 일인자로 부상하였습니다.

스탈린은 레닌에 의해 시작된 숙청을 제도화하여 공포정치를 펼쳤습니다. 1929년 농업집단화와 1930년대 후반의 대숙청 이후 굴라크(Gulag: 1930-1955년 강제수용소)의 규모를 키워 약 1,500만 명의 소련인들이 거기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고 10%는 거기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최고조에 달했단 시기인 1937-1938년에 처형된 사람의 수는 한 달 평균 약 4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500만 명에 달하는 농민이 학살당했거나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으며, 또 다른 100만 명은 이른바 인공기근(人工飢饉)으로 굶어죽었는데, 스탈린 자신은 이 숫자를 약 1,000만 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스탈린은 KGB의 전신인 NKVD(엔카베테-비밀첩보기관)을 세웠는데, 이들에게는 정권의 모든 적을 제거할 수 있는 광범위한 재량이 주어졌습니다. 이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스탈린은 1940NKVD의주도 아래 폴란드가 다시는 소련에 대항할 수 없도록 엘리트들을 모두 처형하라고 지시하였고, ‘카틴숲에서 폴란드의 지식인 군인 예술가 성직자 사회운동가 등은 물론 감옥 수감자들까지 포함하여 약 25,700명을 학살하였습니다.

 

스탈린이 1953년 사망하기까지 30여 년 동안 구 소련에서 실종 사망한 민간인의 수는 약 2,0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한겨레 199843일자), 심지어 스탈린은 자기의 아내를 죽이고는 유명한 의사를 찾아내어 자살로 사망진단서를 쓰도록 당시 비밀경찰 두목 야고다에게 지령했다고 막심 고리키의 회고록은 밝히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1971315일자).

무자비한 숙청과 공포정치의 한 측면에는 스탈린 숭배가 있었는데 사실상 그것은 신격화였습니다. “스탈린 동지에게 오류는 없다.”, “모든 것은 스탈린 동지의 지도에 따라...” 따위의 말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들은 앞다투어 스탈린의 위대함을 격찬했습니다. 스탈린을 찬양하는 미술품과 연극, 심지어 칸타타까지 무수히 만들어졌으며, 학생들은 학교에서 스탈린의 저작물을 학습했습니다. 학자나 노동자나 스탈린의 지도 덕분에 자신들이 일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되뇌었습니다. 이는 충분이 중국과 북한 등 다른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독재 권력의 유지를 위해 답습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신으로 숭배를 받으면서 스탈린은 점차 현실과의 접촉점을 잃어버렸습니다. 아첨꾼에게 둘러싸이니 그는 러시아의 진정한 상황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권력을 가졌지만 가족은 죽거나 멀어졌고 암살이 두려워 국내여행을 할 수 없었으며, 술만이 시름을 잊게 해줄 뿐이었습니다. 결국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5331, 스탈린은 모스크바 근교의 별장에서 혼자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한 후 자기 방에 있다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뇌졸중을 일으켰고, 오른쪽 반신이 마비된 상태로 나흘을 더 버티다가 35, 75세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러시아 공산당은 거대한 일당독재체제였기 때문에, 소수의 공산주의 간부급들이 백성들을 감시하면서 행도의 자유, 이주의 자유, 언어의 자유, 사고의 자유를 박탈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강제적인 공업화로 경제가 급성장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생산의 효율성이 점점 떨어지면서 경제상황이 악화되어 갔습니다. 특권 지도층을 제외한 전국민이 배고픔에 허덕였고 급기야 나라 전체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자유를 보장하고 나라의 번영을 가져와서, 백성들이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살게 해 주고 근심 없는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 사실이라면, 공산주의로 대단한 위용을 떨치던 나라가 어떻게 그토록 쉽게 붕괴될 수 있었겠습니까?

영국의 저널리스트 맬컴 머거리지는 소련 정권에 관하여 생각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신나는 일을 꼽으라면, 그것이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성공했더라면... 인간은 끝도 없이 테러를 당하고 결국에는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러시아 공산당은 또 하나의 독재체제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권유지를 위해서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폭력을 포기하고 개방으로 나서자 곧 붕괴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의 뜬구름 잡는 이상주의를 스스로 버렸고, 소련 해체 후 다른 나라의 공산주의자들도 이 이념을 포기했습니다.

스탈린의 후계자였던 흐루시초프의 전기를 그의 아들 세르게이가 썼는데, 그는 학생시절부터 나는 공산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나는 아버지를 졸라서 공산주의의 본질을 밝혀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에도 어떤 알아들을 수 있는 답변을 얻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 자신도 공산주의에 관하여 명확히 알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산주의 진영의 최고 지도자가 자시 아들에게조차 공산주의에 대해서 제대로 성명하지 못했다면, 도대체 일반 국민이 어떻게 공산주의 이론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38개월 만에 실패한 크메르루즈(Khmer Rouge) 공산당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 남서부에 있는 나라로 타이(태국), 라오스, 베트남과 접하여 있고, 면적은 약 181,035km이며, 인구는 1,450만 명 정도입니다. 18638월 프랑스 보호령으로 식민지가 되었다가, 시하누크 국왕(1941-1970)의 독립운동으로 1953년 독립을 하였습니다. 캄보디아 왕국은 1953년부터 1970년까지 유지되었는데, 1970317일 친미계인 론 놀이 시하누크의 외유 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크메르 공화국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반()베트남 정책을 취했던 론 놀은 점점 세력이 약화되어 1975417일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폴 포트’(Pol Pot)가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폴 포트는 원래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보기 드문 엘리트였으나,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뒤 공산주의와 모택동 사상에 빠져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당시 파리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캄보디아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식민지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하기 위하여, 폭력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가르침을 흡수했습니다. 그들은 귀국하자마자 군대를 조직하여 고원지대에서 엄격한 훈련을 받게 했는데, 그 군대의 구성원은 대부분 극빈 가정의 12-14세 사이의 청소년들이었습니다.

 

1970417,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 폴 포트가 이끄는 캄보디아 공산군 크메르루즈군이 탱크와 무장트럭을 앞세우고 무혈입성했을 때, 당시 론 놀 정권의 부패와 폭압에 시달리던 캄보디아 국민들은 열렬히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군은 농업식 공산주의라는 이상적인 사회를 최단시간에 건설하기 위해 혁명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죽이고, 도시에 소개령(疏開令)을 내려 사람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리고 화폐와 사유재산과 종교를 폐지시켰습니다.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과 지식인들은 반동이라는 명목 하에 수없이 학살하였고, 친미정권에 협력했던 지식인 정치인 군인은 물론,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공무원, 교수, 의사, 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와 중류층이상의 사람들을 국민을 개조한다는 명목으로 무조건 처형하였습니다. 크레르루즈군은 우리가 건설하고 있는 국가를 위해서는 훌륭한 혁명가 100만 명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필요치 않다. 우리는 한 명의 적을 살려두기보다 열 명의 동지를 죽이는 쪽을 택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뚜올 슬랭(Tuol Slang)의 박물관 자리는 과거 정치범 수용소가 있던 곳으로, 이곳에 약 17,000명이 수용되었는데 이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7명에 불과했습니다. 이곳의 수감자들은 족쇄가 채어진 채로 벽이나 바닥에 붙들어매어져 있었습니다. 즉시 처형되지 않은 사람들은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식량을 배급받았고, 기력이 다할 때까지 강제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크메르루즈가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와 도선관은 폐쇄되었고, 신문도 사라졌습니다. 안경을 끼기만 해도 인텔리, 즉 혁명의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신발이 닳으면 고무 타이어로 샌들을 만들어 신었고 의복은 검은색 작업복 한 벌만 허용되었습니다.

연구원들의 발표에 의하면, 크메르루즈군은 친 베트남 정부군에 의해 프놈펜에서 철수할 대까지 38개월 동안 인구 700만 명 가운데 약 25%170만 명의 자국민을 학살하였습니다(국민 4명 중에 1명꼴). 그러나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학살당한 수가 약 300만 명에 이릅니다. 이로 인해 현재 캄보디아인구는 35세 미만의 젊은 층이 전 국민의 7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대학살은, 영화 킬링필드’ (The Killing Fields)의 실제 주인공인 캄보디아를 탈출해 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의 잔혹한 학살 정책은, 19791월 베트남이 크메르루즈군을 몰아내고 친() 베트남계인 캄프챠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ampuchea)을 수립함으로써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크메르루즈군의 자국민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 행위를 보면서, 공산주의가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가를 분명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캄보디아는 6 25 직후인 1950년년대만 해도 가난에 허덕이는 대한민국에 쌀을 보내 주기도 했었는데, 크메르루즈의 칼바람이 휩쓸고 간 1970년대 후반에는 그야말로 온 나라가 킬링필드(Killing Fields)가 되어, 순식간에 거대한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산주의 잔학상에 몸서리쳤던 캄보디아가, 이제는 한국의 발전상을 본 받겠다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에는 캄보디아가 진저리치며 내다버린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따르는 얼빠진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불과 32년 전, 캄보디아인들이 당한 뼈아픈 민족적 상처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실상을 똑똑히 확인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아직도 그 실상을 직시하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 있으니, 실로 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미 역사가 준엄하게 심판하고 사형시켜 버린 공산주의 이론을, 우리의 현 세대들이 아직도 그 본질을 직시하지 못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한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너무도 우매한 짓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떠는 잠꼬대 같은 허풍에 다시는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붉은 피의 대학살로 한 나라를 단숨에 궤멸시켰던 이 불행한 역사가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 어떤 나라 어떤 지역에서도 재현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북한 사회의 비참한 실상

우리나라 현대사를 얼룩지게 만든 대구 10 1폭동과 제주 4 3 폭동, 여구 14연대 반란 등을 주동했던 자들은 하나같이 조국을 미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해방되었다는 북한의 현재 실상이 어떠한가를 생각해 볼 대 그 결론은 자명해질 뿐 아니라, 그들이 외친 구호나 주장이 얼마나 공허하고 거짓으로 포장되어 있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현재 북한은 식량난으로 인하여 300만이나 굻어죽고, 공개 총살과 같은 공포 정책으로 북한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은 심각하게 유린되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세계 각국의 발표는 이북의 실상과 공산주의의 실체를 다시 한번 정확하게 일깨워 줍니다.

국가 신용도 185개국 중 최하위’ (2001.7.17 이코노믹리뷰)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지수 125개국 중 122’ (2008.2.20 노컷뉴스)

세계 최악의 독재자 1위는 김정일’ (2008.2.17 아시아경제)

자연재해 위험지수 2, 인구당 사망 1’ (2007.12.14 VOA news)

'언론 자유 지수 169개국 중 168' (2008.10.22 데일리NK)

'지구촌 최악 인권탄압 국가' (2010 세계인권 보고서)

 

북한의 공산주의 사상은 당과 수령(일당 독재자)의 존재를 위해 인민의 희생을 무조건 강요합니다. 사람을 혁명의 도구로 생각하여, 당과 수령에 협조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고 사람을 무차별 학살하며, 당과 수령을 위해서는 부모를 죽여도 죄로 여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참으로 지구상에서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사상이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기본 권리를 송두리째 빼앗아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아주 무능하고 나약하게 하여 결국 병들어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공산당 구 소련이 75년 만에 몰락한 것은, 공산주의 사상이 결국에는 나라를 송두리째 파멸시키는 무가치하고 흉악한 사상이라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만천하에 증명한 것입니다.

북한은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는 나라입니다. 오직 당과 수령을 중심하는 사회로서 개인의 신체적 자유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신체의 자유는 정신적 활동에 관한 자유와 함게 인간의 근원적인 요구이며 동시에 인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이북은 인권침해와 신체자유의 침해를 방지하는 형식적인 제도를 두고 있을 뿐, 실제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는 전혀 준수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주 이전 및 여행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가 제도적으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규정되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제약이 있거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거주 이전에 관하여는 정부 당국에 의해 직장이 배치되어 당국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행은 자기가 사는 군 내에서만 가능하고, 그 경계를 벗어나려면 인민반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인민위원회에 이르기까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합니다. 특히 평안북도, 자강도, 양강도, 함경북도 등 국경지역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승인번호를 받아야 하며, 평양을 여행하기 위한 승인번호는 좀처럼 받을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수령을 신격화하는 체제이므로 다른 종교 활동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국제적 압력 때문에 형식상 봉수교회와 장충성당 등 일부 종교시설이 1980년대부터 세워지긴 했으나, 당 지령에 의한 형식상의 예배만 드릴 뿐입니다.

모든 결정의 최종 권한은 오직 당과 수령뿐이므로 언론의 자유는 꿈도 꾸지 못합니다. 모든 통신수단도 당이 철저한 통제 속에 관리 합니다. 이북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정치범수용소는, 북한이 3대 세습과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인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최악의 나라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북한에는 6개의 정치범수용소가 운용(運用)되고 있으며, 20만 명의 정치범이 수감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당과 수령을 중심하고 국민들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함으로서 현재 세계적으로 성공하고 경제적 풍요를 누리며 국제사회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면 모르겠으나, 현재 북한의 실상은 완전히 그 반대입니다. 그런데 철 없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북도 사람들이 먹고 사는 곳인데 설마 자유가 아주 없겠느냐?”는 망상과 환상 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김일성은 북한의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 주민들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하얀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 독재체제 동안 한 번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약 900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으며 굶주림을 견디다 못하여 어린 딸을 장터에 내놓는 어머니까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유 대한민국의 품에서 자유를 흠뻑 먹고 마시여 온갖 풍요를 다 누리고 있으면서 저토록 낡아빠진 공산주의 사상에 도취되어 거기에 희망을 걸고 따라가는 얼빠진 인간이 있다면, 더 이상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개가 먹고 토한 음식을 먹는 것과 같고, 해만 끼치고 아무 쓸모가 없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것을 다시 주워다가 집안에 들이는 꼴입니다.

공산당이 있는 그 땅은 가난과 굶주림뿐이며, 어떤 발전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만이 모두가 자유와 평화를 영원히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임을 철저히 가르쳐 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6 25라는 엄청난 값을 치르고 배운 역사적 교훈을 우리 후손들의 가슴 속 깊이 새겨주어야 합니다. 국가를 염려하는 일은, 정치가나 군인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의 공동 과제입니다. 나라가 있어야, 개인도 귀하고 가정도 행복하고 교회도 소중한 것입니다.

 

 

(6) 나라를 지키며 이름없이 죽어간 숭고한 희생을 잊지말아야합니다.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967명의 유대인 저항군은 엘리아살 벤 야일(Eleazar ben yair)장군을 지도자로 하여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 3년간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주후 73415일 로마 정예 제 10군단에 의해 마사다성은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엘리아살 벤 야일 장군은 결코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한 우리가 목숨이 아깝다는 이유로 로마인의 노예가 될 수 없습니다. ... 이렇게 자유를 누리면서 세상을 떠나는것이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영광스러운 기념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식량에는 손대지 말고 그냥 남겨둡시다. 우리가 자결한 것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자유에의 열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열방에 과시하도록 합시다. ...” 라고 애절하게 호소하였습니다. 이후 제비뽑힌 10명이 전부를 죽이고, 남은 10명 가운데 제비뽑힌 또 한명이 9명을 죽이고 마지막 한명도 스스로 자결하였습니다. 지하 동굴에 숨어 있던 여자(노인)와 어린아이들은 대학살을 모면하여 후세에 증언을 남겼습니다. 결사항전을 다짐한 유대 군인 967명은 유대인의 거룩한 민족혼을 간직한채 장렬하게 자결하였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때 최후의 일인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죽어간 마사다의 그 정신을 잊지않고 기억하기위하여 이스라엘 신병 군인들의 정신훈련의 마지막 장소로 마사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훈련과정에서 마사다는 이제 두 번 다시 함락되지 않는다!”는 구호를 외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마사다의 967명의 희생을 숭고하게 기리며 잊지 않듯이, 대한민국 백성이라면 6·25동란 직후 3일 만에 국군 44천 명의 순수한 생명이 공산당에 의해 무참하게 희생된 역사적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국군에서는 6·25동란때 전장의 포화속에 묻힌 수많은 희생자들의 유해발굴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60여년만에 유해 4,133구 유품 80,467점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산하(山河) 어딘가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약 13만의 희생자가 믇혀있습니다.

지금 발전된 조국에서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확실히 그들이 이 땅에서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입니다. 나라를 위해 피 흘린 수많은 무명용사들, 꽃봉오리도 피우지 못한채 하루살이처럼 전사한 순국 선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총알받이로 희생하면서 국군 방어선을 끝까지 지켜 주었던 어린 학도병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휴전된 지 60여 년이 지나도록 그 유해조차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자나 깨나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을 부모의 아픔을 생각하면 참으로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먼저 떠나신 참전용사를 비롯하여 현재 생존해 계신 약 25만의 참전용사들, 그들은 참으로 용사다운 용사였습니다. 전투현장에 있는 동안은 이미 나라의 제단에 바쳐진 목숨이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승전의 기쁨에 서로 부등켜안고 눈물을 흘리다가도, 함께 싸우다가 쓰러져간 동료 전우들을 생각할 때는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많은 피와 땀과 희생과 아픔속에 우리는 마침내 이 땅을 지켜낸 것입니다. 무명용사로 교복차림의 학도병으로 숨져간 이들, 총탄이 빗발치는 그 험한 곳까지 지게로 탄약과 식량을 실어 나르던 노무자들, 그 피의 값어치가 얼마입니까?

오늘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진 것도 이릅도 없이 나라위해 사라져간 전우들의 생명의 값입니다. 그 터전위에 숨을 쉬고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우리는,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본받아 다시 한번 일사각오의 순국정신으로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굳은 각오와 결심을 가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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