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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4. 잊을 수 없는 6.25전쟁(1) 운영자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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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25전쟁은 북한의 명백한 불법 남침

 

(1) 선전포고도 없이 일으킨 북한의 일방적인 불법 남침

1950년은 ‘30년 만에 최악이라는 봄 가뭄이 닥쳤는데, 6월이 되자 아직 장마철이 아닌데도 619일부터 24일까지 연거푸 비가 내리다가 자정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멎었습니다.

25일 새벽 3, 김일성(당시38)은 내각 비상 회의를 열어서 오늘 새벽 1시에 남조선 국방군이 38선을 넘어 공화국을 침공하였다. 인민군은 이를 반격한다.”라는 거짓말을 하여, 전선 사령관 김책에게 “62504시 국방군을 반격하라라고 명령했습니다.

폭풍이 공격 개시 암호명이었고, 동시에 무전망으로도 숫자 ‘224’가 타전되었습니다. 북한군들에게는 사전에 전화로 폭풍’, 또는 무전기로 ‘224’라는 암호가 전해지면 남쪽을 향해 포격을 시작한다고 약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포격 개시와 함께 38선 인근에 배치된 북한군의 포구가 남쪽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습니다.

북한 공산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38240km를 일제히 넘어 일방적인 기습공격을 시작했고, 둑이 터진 저수지의 물이 논과 밭을 덮치듯이 몰아쳐, 전쟁이 터짐과 동시에 38선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북한군과 함께 몰아닥친 붉은 물결은 불과 3일 만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덮쳐 버렸습니다.

북한 정권은 그들의 기습이 성공을 거둘 것이 확실해지자 25일 오전 11, 평양 방송을 통해 국군이 북침하여 인민군이 반격 중이라고 거짓 방송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모든 책임은 남조선 측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현재 남조선 측의 북침을 격퇴하고 반공(反攻)으로 넘어갔다고 방송하였습니다. 그날 오후 135, 방송에서 김일성은 남한이 북한의 모든 평화통일 제의를 거절하고 이날 아침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한을 공격했으며, 이는 북한의 반격이라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라고 남침을 은폐하기 위한 각본을 만들어냈습니다.

북한은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한 반면, 우리 군은 전쟁수행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비교가 안 될 만큼 절대 열세한 남한의 군대가 강한 북한의 군대를 공격한다는 것은 군사 상식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남한이 먼저 북한을 공격한 북침이라면, 어떻게 수도 서울이 단 사흘 만에 함락되고, 국군의 주력 6개 사단 총 44,000명이 단 사흘 만에 전멸되는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625전쟁은 김일성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는 붉은 야욕 아래 일으킨 명명백백한 불법 남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북침설’, 남침유인설‘, ’서울 점령설(서울만 점령하고 평화적으로 협상하려 했다는 허위 주장) 등 거짓말이 사실처럼 퍼지면서 젊은 세대들을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은 625전쟁을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이 미국의 사주를 받은 이승만 도당이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시작되었다.”라고 하면서 북침공모설을 주장합니다. 또 남한이 먼저 북침하고 북한이 반격에 응하게 된 것이라는 선 북침, 후 반격설도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킨 북한을 포함한 교전 당사자들이 대규모 공격을 인정했고, 또 북침설을 증명할 만한 단 하나의 증거문헌도 발굴되거나 제시된 바가 없습니다.

 

625전쟁 발발 당일 서울은, 북침 준비는커녕 여느 때와 같았습니다. 전쟁이 터진 25일 오전 10시 수도극장(스카라)에는 애원의 섬을 보려고 관객이 줄지어 있었고, 25일 오후 1시 서울운동장에서는 관객 1만 명이 넘게 모인 가운데 제3회 전국대학축구 선수권대회의 결승전(연세대와 고려대)이 한창이었습니다.

625전쟁 전날과 당일에 드러난 고급 장교들의 모습만 보아도 결코 북침일 수 없습니다.

채병덕 참모총장의 명령으로 611일부터 발령된 전국 비상경계령이 24일 자정을 기해 해제되었고, 전방 장병들 중 3분의 1은 휴가를 보냈습니다. 채병덕 참모총장과 각급 지휘관과 주요 인사들(육본 각 국장, 실장, 각 사단장, 재경 부대장, 주한 미 고문단 50여명)24일 토요일 저녁 6시부터 육군회관 개관 연회로, 육군참모학교 구내에 만든 장교 구락부 댄스파티에서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채병덕 참모총장 외 육본 국장 실장 10여 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 2차로 명동의 카바레에서 새벽 2시까지 또 술을 마셨습니다. 이들 중에 집에 가지 않고 여관에 들어간 장교도 있었기 때문에 연락이 두절되어, 전쟁 발발 직후 우리 군 전방의 지휘계통은 먹통이었고 공백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2) 1948해주 인민대표자대회때 드러난 김일성의 남침 야욕

김일성의 남침 야욕에 의한 전쟁의 비극은, 1948815일 한반도 남쪽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데 이어 99일 북쪽에서 김일성이 또 다른 정부수립을 발표하면서 예견되었습니다. 남침 야욕은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서부터 이미 드러난 셈입니다. 1948510일에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있었고, 3개월 후 1948825일 북한에서는 정통성 있는 정부를 수립한다는 명목으로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899일 남한보다 약 25일 늦게 공식적인 북한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남한에서 선출된 대표 총 1,080명 가운데 이북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78명이 체포되거나 및 도주하였고, 1,002명이 해주 대회에 참가하였습니다. 당시는 북위 38도선의 경계가 엄격하지 못하여 1,080명 중 1,002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동 회의에 참가한 것입니다.

 

남한 유권자 850명만 명 중 700만 명이 투표에 참가하였고(80%), 제주도에서도 85,000명의 유권자 중 52,350명이 참가하였습니다. 북한은 남한에서 지역별로 투표한 용지를 모아 북에 가서 전시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남한 정부는 남한의 유권자만 선거하도록 하여 세운 불법 정부이고, 북한은 남부 유권자 전체가 투표에 참여하였으니 자신들이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해주 인민대표자회의의 가장 큰 이슈는 제주 43폭동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제주 인민유격대 제 1대 사령관 김달삼이 가지고 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에 있는 제주 43폭동의 자세한 성과 보고, 첫째, 남한은 제주 폭동에 꼼짝 못할 정도로 무기력하다는 내용과, 둘째, 850만 명 중 700만 명이 투표한 것을 보아 남한의 700만 명이 공산주의로 통일되기를 원한다는 내용 등을 듣고 자신감을 얻어, 마침내 남한의 무력 침투를 결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김일성은 여덟 가지 강령을 통해 남한은 정부가 아니다. 한 지역에 불과하다. 평화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오직 무력으로만 점령해서 통일시키겠다.”라는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박헌영은 연설을 통해, 인민군이 38선 아래로 내려가고 남로당원들이 폭동을 일으키면 남한을 통일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함으로써, 김일성의 남침 야욕을 크게 자극하였습니다.

북한의 남침 전략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북한군의 공격과 동시에 남로당원을 주축으로 하는 민중봉기를 촉발시켜 남한 정부가 스스로 전복되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략에 따라 김일성은 남침 다음날, 방송을 통하여 남한 인민의 봉기를 촉구하였습니다(조선전사 제 2585). 그러나 기대했던 봉기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후에 김일성은 그 책임을 물어 박헌영을 숙청하고 말았습니다.

 

 

(3) 러시아의 비밀문서를 통해 재확인 된 남침

북한의 불법 남침은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1994년 모스크바를 방문한(199462)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하였던 스탈린이 남침을 승인하는 극비 문서에서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마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김 대통령에게 검은 서류 상자 하나를 건넸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김일성의 남침 계획 등을 담은 300여 종의 고문서 사본에는, 19491월부터 19538월까지 소련 외무부와 북한 외무성 간에 오고간 전문,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록 등 한국 전쟁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극비 자료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문서 중에는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에게 남침 계획을 승인받고, 남침 시기 등에 대해 긴밀히 협의한 내용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1950117스탈린에게 38선을 돌파하겠다는 남침계획을 건의하여, 130스탈린이 이를 승인하였고, 513중국의 모택동도 이를 승인하고 북한을 돕는 데 동의하엿습니다. 이 러시아의 비밀문서를 통하여, 김일성이 1년 전부터 철저하게 남침작전을 수립한 상태에서 1950625에 일방적으로 기습 공격했음을 명백히 알 수 있고, 또 이 전쟁에는 중국이나 소련이 깊숙이 개입되어많은 군사력을 북측에 제공하였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 이 문서를 통해 친북 성향의 이데올로그들이 주장해 온 북침설이나 수정주의가 허구였음이 명백히 드러났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298-299).

 

스탈린과 김일성 모스크발 극비회담(1950330)의 내용에는 남한 측이 수용할 수 없는 평화통일방안을 제의하고, 이를 거부하면 전투행위를 개시하여 누가 최초로 전투행동을 시작했는지 진실을 은폐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우리가 남침하여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 20만 지하당원이 봉기에 참여할 것이다.”라고 남침을 분명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소련의 스탈린이 중국의 모택동과 협의하여 수립한 남침 계획의 기본전략은 “19506월 말에 전면 공격으로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인민봉기를 유발하여 한국정부를 전복하는 한편, 북한군이 신속히 남해안까지 내려와 미 증원군의 한반도 상륙을 막아 1개월 내에 전쟁을 종결하고, 815일 해방 5주년 기념일까지 서울에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Shtykov)626일 소련군 부총참모장인 자하로프(Zakharov)에게 보낸 비밀보고에서 개전 상황을 이렇게 썼습니다.

 

작전을 위한 모든 예비적 조치들이 624일에 완료되었습니다. 624일 사단장들은 “D"(Day)”H“(Hour)에 대해 명령을 받았습니다. 민족보위성의 정령이 부대에 하달되었는데, 그 내용은 남조선 군대가 38선을 침범함으로써 군사 공격을 도발했으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는 조선인민군에게 반공격으로 넘어가라는 명령을 하달했다는 것입니다. 반공격에 대한 명령은 조선인민군 병사와 군관들로부터 대단한 열광을 자아냈습니다. 부대들은 62424:00까지 각자의 출발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현지 시각으로 440분에 군사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10분간 포병 탄막사격과 20-40분간의 직접사격 과정에서 공격준비 사격이 동반되었습니다. 보병이 일어나 원기왕성하게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최초의 3시간 안에 개별 부대들과 대형은 3-5km 진격했습니다. 인민군대의 공격은 적을 완전히 놀라게 하였습니다.

 

흐루시초프(Khrushchyov) 회고록에서도 “1949,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남침을 위한 완벽한 계획서를 가지고 왔다.”라고 밝혔습니다(1949. 3. 1950. 3).

 

2. 결정적인 남침 징후의 묵살

 

(1) 인민유격대의 10차례 남파

북한은 1948년 초, 평양의 동북 35km지점에 위치한 강동에 정치공작과 유격전 훈련을 위한 강동정치학원을 창설하고, 월북한 좌익분자들을 선별하여 3-6개월에 걸친 공산주의 사상교육과 유격훈련을 실시, 대남공작요원으로 양성하였습니다. 여기서 양성된 대남공작대는 다시 양양에서 단기교육을 거쳐 이른 인민유격대로 조직되었습니다. 박헌영은 남쪽 지리를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남 출신의 청년들로 구성된 인민유격대 2,450700명 정도의 대 단위로, 모두 10차례 남파하여 미리 남침 여건을 조성하였습니다.

인민유격대의 10차례에 걸친 침투와 그 토벌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19481114, 북괴군의 군복을 착용하고 99식 소총으로 무장한 약 180명이 양양-오대산 지구로 침투하였다가 국군 토벌대에 의해 대부분 소탕되었다. 이들은 강동정치학원 1차 수료생으로 구성되었으며, 평창 북쪽 30km 지점의 태기산까지 남하하였다가 영월 북방에서 소탕되고 나머지는 제천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2 194961, 400명의 유격대가 오대산으로 침투하였다가 아군에 의해 대부분 섬멸되었다. 나머지는 태백산으로 북상하던 지방 유격대와 합세하여 동해안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3 194976, 200명의 유격대가 오대산까지 침투하였다가 대부분 토벌대에 쫓겨 사살되었고, 20명 만이 중봉산 방면 등으로 도피하였다.

4 194984, 김달삼(제주 인민유격대 제 초대 총사령관) 부대 약 300명이 경북 양양의 일월산으로 침투하였다가, 전진이 좌절되자 영일군 송라면 지경리로 이동하여 경북 보현산 일대의 게릴라와 통합하고 동해여단을 편성하여 유격전을 펼치다가 토벌되었다.

5 1949812, 철원지구에 근거지를 둔 유격대가 선발대 15명을 명지산을 거쳐 용문산까지 남파하였으나 실패하고, 월북 도주하였다.

6 1949815, 5차의 본대 40여 명이 명지산을 거쳐 용문산으로 침투하였으나 국군토벌대가 20명 이상을 공작산까지 유인하여 사살하고, 남은 20명은 응봉산을 거쳐 월북하였다.

7 1949817, 강동정치학원장이던 이호제가 직접 지휘하는 인민유격대 제 1군단 약 360명을 태백산으로 남파시켰다. 이들도 대부분 토벌되었으나 100여 명이 보현산의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여 경북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8 1949928, 50명의 유격대가 양양군 금옥치리로 침투하였으나 국군 8사단에 의해 대부분 섬멸되었다.

9 1949116, 100명의 유격대가 영일군 지경리로 해상 침투하여 보현산의 김달삼 부대에 합류하였다. 유격대의 병력 보충 및 세력 확장을 시도했으나 이후 유격대 침투는 잠시 중단되었다.

10 1950328, 양양 인제 양구에서 대기 중이던 김상호와 김무현 부대 약 700명이 오대산과 방대산으로 침투하였다. 이들은 강력한 화력을 지닌 정예부대였으나 역시 토벌대에 의해 소탕되었다. 이들의 남파 목적은 보현산 지구의 김달삼 부대가 점멸에 가까운 위기에 처하였으므로 그들의 월북을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인민유격대는, 제주 4 3폭동과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으로 진압부대가 호남 및 경남 지역에 집중되어 후방경비가 허술해지고 남한사회가 혼란해지자, 194811월부터 시작하여 1950328일까지 10차례에 거쳐 과감한 침투 공작을 감행했습니다.

전쟁 전에 1년 반 이상 인민유격대와 국군 간의 국부적인 총격전으로 시달렸던 국군이라 국민들은, 싸움은 항상 있는 것으로 알고 무감각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625전쟁 초기에 잘못된 상황 판단으로 작전에 크나큰 지장을 초래했습니다.

 

(2) 남침 최적기, 625일 확정

이후 김일성은 6월 말경이야말로 전쟁의 최적기라고 판단, 616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의 동의를 받은 후 남침 일자를 625일로 정했습니다. 김일성이 625일을 남침 최적기로 판단한 이유는, 그가 직접 언급한 바 첫째, 더 늦어지면 북한군의 전투 준비에 대한 정보가 남한에 흘러 들어갈 수 있다. 둘째, 7월이 되면 장마가 시작되어 부대 기동(起動)에 제한을 받게 된다. 셋째, 공격이 개시일을 일요일로 계획한 것은 한국군의 경계가 소홀할 것을 예상하여 기습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밖에 또 다른 이유는, 김일성이 광복절인 815일을 적화통일의 정치적인 적기로 보고 이 날짜에 맞추기 위해 하루 진격 속도를 10km로 계산, 최종 목표인 부산까지 50일간의 작전 기간을 산정하고 이를 815일부터 역산하여 625일로 정한 것입니다. 해방 5주년 행사를 김일성이 주관하여 부산에서 성대하게 치르자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므로 북한 전역은 1949년 초부터 사실상 전시동원체제에 들어갔습니다. 전시동원체제, ‘전쟁을 위해서 국가의 모든 역량을 한 곳으로 집결시킨다는 뜻으로, 나라 전체가 군부에 의해 통제되고 움직여지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19497, 북한은 민간조직 형식으로 조국보위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17세부터 40세까지의 모든 남녀를 총동원하여 강제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남침 직후인 195071일 전시총동원령이 선포되자, 본래 제외되었던 이들까지 모두 징집되었고, 또 징집 연령을 낮춰 17세부터 30세까지 군에 입대시키고 31세부터 50세까지는 군 노무자 및 군수산업 공장 인부로 동원하였습니다.

 

(3) 북한의 위장 평화 공세

북한은 남침 준비를 서두르는 한편, 침략 계획을 은폐하고 동시에 남한의 경계태세를 허술하게 만들기 위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라는 미명 하에 갖가지 위장 평화 공세를 전개하였습니다. 원래 공산주의자들이 평화라는 용어를 남용할 때는 뒤에서 몰래 침략 준비를 하고 있는 법인데, 이때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195067일 북한 방송은 소위 평화적 조국통일 호소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따르면 해방 5주년 기념일에 최고입법회의를 열기 위하여 85일에서 8일 사이에 남북 총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이를 토의하기 위하여 615일에서 17일 사이에 남북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의 대표자 회의를 해주(海州) 또는 개성(開城)에서 열자는 것이었습니다. 전쟁 직전 1950610, 김일성은 자신들이 억류하고 있던 조만식 선생과 남한 형무소에 수감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남로당 지도자 김상룡, 이주하를 교환하자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이에 이승만은 김창룡을 시켜 둘을 데리고 개성과 사리원 중간쯤에 위치한 여현에서 만나도록 하였는데, 조만식은커녕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약속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위장 평화 공세로 국민들의 마음만 해이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619일에는 소위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제안을 방송을 통해 발표하였는데, 남한이 이에 동의한다면 621일에 서울 또는 평양에서 남북한 국회의 대표들이 회합을 갖자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북한은 남침 수일 전까지도, 겉으로는 얼토당토않은 대남 평화 공세를 외쳐대면서 속으로는 비수(匕首)를 갈고 있었습니다.

 

(4) 북한의 전면 남침 준비 완료

북한은 19489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창건한 이후, 지하 동굴에 총과 탄약을 제조하기 위한 무기 공장을 만들어 무기 생산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소련은 1949년 봄부터 확대 보강되는 인민군을 위해, 전차와 야포 등의 중화기와 트럭 오토바이 그리고 연료 등을 북한의 항구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19503월이 되자 이북 주민들에게 남한에서 북침할 가능성이 높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38선으로부터 5km 이내 주민을 모두 후방으로 철수시키는 등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505월부터는 남침을 위한 본격적 부대정비와 이동이 시작되었고, 모란봉극장의 회의(1950.5.16)가 개최된 직후 북한의 민족보위성와 소련 군사고문관들은 전쟁을 위한 최종적인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북한 자체 생산한 소화기와 탄약, 소련에서 지원받은 전투기를 비롯한 기동 장비와 중장비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사용할 비축 유류 문제까지 해결함으로써, 남침 전쟁을 위한 모든 준비를 19505월 말까지 완료하였습니다.

 

북한의 남침 음모 일지

 

19493

 

김일성 러시아 모스크바 방문 남침 승인 요청

스탈린의 거절

19504

 

김일성 러시아 모스크바 방문 남침 승인 요청

스탈린 승인

19505

 

김일성 중국 모택동에게 남침 동의 요청

모택동 지원 약속(한인계 장병 2만명 이상 지원 계획 수립)

19506

위장평화 공세

610

 

 

 

남침모의 사단장급 이상 전군 지휘관 회의

본 회의 목적은 대기동 작전훈련을 가장하여 전투사단과 모든 기본부대는 물론 병기의 일체와 전 장비를 총동원하여 무력남침의 비상태세를 갖추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 참모장 강건은 623일까지 어떤 적의 공격도 물리칠 수 있는 준비태세를 취하도록 명령

618

 

 

 

각 사단장 앞으로 남침 정찰명령 제 1호 하달

국군의 주력부대 위치를 파악하여 공격부태 정면의 국군에 대한 상황 설명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공격 개시 전날 밤까지 적정을 정확히 파악하여 정찰행동을 개시하라는 명령

622

 

 

 

각 사단장 앞으로 남침 전투명령 제 1호 하달

195062312:00시까지 이른바 이승만 군대를 무찌를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는 명령(공격작전에 필요한 신호규정까지 명시)

 

 

()기동 작전훈련을 가장한 38도선 전역 전투부대 배치 완료

북한은 1950612일부터 23일까지 12일간에 걸쳐서 실시한 대기동 훈련을 가장하여 전투부대를 은밀하게 38도선 전역에 배치하였는데, 그들이 보유한 10개 사단 중에 제 1군단 5개 사단과 제 2군단 4개 사단 등 9개 사단을 편성(13, 15사단은 예비), 전방에 배치하였습니다. 9개 사단 외에 제 10사단은 숙천에 예비로 주둔하였습니다.

 

북한군 공격부대 전방 도착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군단 김웅

금천에서 창설

2군단 김광협

화천에서 창설

부대

주둔지도착지

부대

주둔지 도착지

1사단 최 광

남 포 구화리

2사단 이청송

원산 화천

3사단 이영호

신의주운 천

5사단 김창덕

나남 양양

4사단 이권무

남 포 연 천

12사단 전 우

원산 양구

6사단 방호산

사리원계정, 해주, 죽천

945육전대 김원말

갑산 성진

105전차여단

평 양 연천, 남천

766부대 오진우

회령 원산, 간성

고속기둥부대

105전차여단(-) 지휘관 : 유경수

107전차연대 3사단 포천 축선

109전차연대 3사단 포천 축선

203전차연대 1개 대대 4사단 동두천 축선

203전차연대(-1) 1사단 개성-문산 축선

603모터사이클 연대 지휘관 미상

모터사이클 4개 대대

- 3개의 모터사이클 중대

- 1개 박격포중대

- 1개 중기관총 중대

장갑차 1개 대대

대전차포 1개 대대

예비사단

13사단 최용진

평양 금천

15사단 박성철

회령 화천

10사단 이방남

숙천 주둔

 

 

공격부대들은 612일부터 주둔지를 출발하여 38도선 북방 10-15km지역으로 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주둔지가 38도선에서 가까운 부대는 도보로, 먼 부대는 기차를 이용하였으며, 예비사단도 각각 해당 군단지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렇듯 북한군은 전쟁 직전 치밀한 공격계획과 철저한 준비 속에 전쟁준비에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주공부대 제 1군단

북한군 제 1군단은 수도 서울을 겨냥한 주공(主攻) 부대였습니다. 옹진반도에서부터 국군 제 7사단 주둔지까지 담당하였는데, 서에서부터 동으로 제 6사단, 1사단, 4사단, 3사단 순으로 전방에 배치하고, 13사단을 예비로 보유하였습니다.

고속기동부대로 2개 전차 연대 및 1개 전차대대를 보유하였는데, 105전차여단(-) 예하의 107전차연대, 109전차연대’(포천 축선), ‘203전차연대 제 3대대’(동두천 축선)는 서울로 진입하게 될 제 4사단과 제 3사단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203전차연대(-1)는 개성-문산 축선의 제 1사단을 지원하도록 하였습니다. 작전 목표인 서울 점령과 서울 이북의 국군 주력을 격멸하기 위해 서울 북방(의정부-포천 방면)에만 전차(T-34)를 집중 배치시킨 북한군 초기 작전은 치밀했습니다. 전쟁 발발 초기에 북한군은 옹진반도나 동해안 축선에는 전차를 한 대도 배치시키지 않았습니다.(SU-76자주포 배치).

 

조공부대 제 2군단

북한군 제 2군단 홍천-춘천-동해안 일대로 침투하는 조공(助攻)부대였습니다. 국군 제 6단은 정면으로부터 동해안까지 전개하였으며, 서에서 동으로 제 2사단, 12사단, 5사단 순으로 전방에 배치하고 제 15사단을 후방에 예비로 보유하였습니다. 5사단은 국군 전선을 동서로 분리하여 서로 지원하지 못하도록 각개 격파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2사단은 제 4연대, 6연대, 17연대 3개 보병 연대와 포병연대(3개 포병대대), 그리고 제 5사단도 제 10, 11, 12연대의 3개 포병 연대와 포병 연대로 편성되었으며, 12사단과 동일하게 유지하였습니다.

또한 고속기동부대로서 제 603모터사이클 연대를 두어 운용하였습니다. 19498월 중국으로부터 입북한 조선의용군 출신 2,000명이 근간을 이루었습니다. 모터사이클 4개 대대와 장갑차 1개 대대, 대전차포 1개 대대로 되어 있었는데, 모터사이클 1개 대대는 3개의 모터사이클 중대와 1개 박격포중대, 그리고 1개 중기관총중대로 편성되었습니다. 한편, 603모터사이클 연대는 부대개편에 따라 부대명칭이 변경되었는데, 처음에는 12MTSP정찰(일명 ‘603모터찌크연대’)로 불렸다가, 105전차여단의 ‘603차량화 연대, 19505월에는 ‘603경기계화 연대로 불렸습니다. 이처럼 국군 제 6사단 방어전면의 북한군 전력은 완전 편성된 3개 보병사단에 1개 모토사이클 연대가 투입되어 막강한 화력을 지원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624일 저녁 7시까지 식사를 완료하고 완전 전투준비를 갖출 것과 저녁 7시부터 930분까지 중대별로 군무자 동원대회를 실시하여 전투준비 상태를 검열할 것을 지시하는 등 전쟁 발발 전날 사실상의 남침준비가 완벽하게 완료되었습니다.[2사단 참모장 현파(玄波) 명의로 작성된 지령 제 15].

 

해안 상륙부대(766부대, 945육전대)

해안 상륙부대로는 제 766부대와 945육전대를 두었습니다. 해안으로 상륙한 이 부대들은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공격하여 국군을 완전히 격멸하고자 했습니다.

766부대와 제 945육전대는 해상침투 준비를 하였습니다. 766부대는 주로 남로당원 및 강동정치학원 출신 등으로 편성된 유격부대로서, 주 임무는 남침과 동시에 강릉 부근에 상륙하여 무장폭동을 야기하는 한편,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일이었습니다. 부대 이동은 623일까지 명령대로 완료되었습니다.

 

19493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창설된 766부대625발발 첫날인 1950625일 새벽, 주문진 - 강릉 - 삼척에 대한 상륙전을 전개, 전쟁의 선봉장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부대는 전쟁발발 1개월 전 함경북도 원산에 위치한 호도반도에서 상륙전 훈련을 실시한 뒤 621일 수십 척의 어선에 분승해 원산을 출발, 상륙예정지인 속초 부근에 대기해 있다가 25일 새벽 3시쯤 주문진 앞바다를 통과하여 오전 7시경 강릉 남쪽 임원진 부근으로 상륙하였습니다. 임원진리 왕바위 해변에 상륙한 제 766부대는 무방비상태인 마을을 휩쓴 후 일부는 태백산맥으로 침투하고, 일부는 삼척 방면으로 이동하였습니다. 766부대는 동해안 도로의 중요지점을 확보함으로써 국군 제 8사단의 사령부와 부대들을 분산시키고 결국 내륙으로 후퇴하게 함으로써 북한군 제 5사단이 순조롭게 동해안 축선을 따라 진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945육전대는 1개 중대가 625일 새벽 3시 정동진 해안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후 2개 대대가 해안에서 3-4km 떨어진 해상에 머물고 있는 수송선으로부터 발동선과 범선을 이용해 차례로 상륙하였습니다. 동해안으로 상륙한 945육전대의 경구 국군 제 21연대의 증원을 저지하고 전선에서 공격하는 제 1경비여단 부대들과 합동으로 강릉 북쪽에서 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38경비여단(1경비여단, 3경비여단, 7경비여단)

한편, 전쟁 직후 제 1경비여단(산악침투부대)은 북한군 제 8사단(사단장 오백룡), 3경비여단은 북한군 제 9사단(사단장 박효삼), 7경비여단은 북한군 제 7사단(사단장 이익성)으로 증편하여 내무성에서 민족보위성으로 이관한 후 전선으로 투입하게 됩니다.

 

(4) 전쟁 하루 전, 북한의 모습

전쟁 하루 전 624일부터 부대의 관측 인민군 장교들은 부대 지휘관들에게 국군의 부대 배치, 병력, 지리 등을 설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민군 지휘관들은 일제히 위장하고, 38선에서 지도를 들고 전방에 대해 관측하고 있었습니다.

1950624일 밤, 각 부대 문화군관들은 북조선 인민공화국은 수립 이래 가장 큰 위험에 직면해 있소. 인민군 전사 여러분 지금 서부에서는 국방군이 38선을 넘어 공화국을 향해 북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부에 있는 우리 전사들이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신속한 행동으로 적의 침공을 반격하여 응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남반부를 미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야 합니다. 남반부 인민 해방전쟁은 우리가 서울만 가면 됩니다. 그것은 남반부 인민들이 혁명에 동참하여 봉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1군단은 서울을 반격하고, 2군단은 수원으로 진격해서 서울을 포위하여 이승만을 비롯한 각료들과 군관 나라들을 서울에서 궤멸시켜 해 방전쟁을 조기에 끝낼 작정입니다. 우리는 815일 서울에서 공화국 수립 2주년 환영대회를 열렬히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싸우러 갑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꼬한 문화부 군관들은 부대원들에게 군군이 북침하였으니 이것을 되받아 치되 동부에서는 서부가, 서부에서는 동부가 반격해야 한다.”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인민군들은 이 말에 남한에 적개심을 품고, 38선을 넘기 위해 24일 오후 8시부터 공병대는 민간복 차림으로 지뢰를 제거하기 시작하였고, 다리에 폭파장치가 있는지 치밀하게 조사하였습니다.

모진교는 춘천 지방 북한강과 소양강 사이에 250m 길이의 다리로, 38선에서 불과 300m 남쪽에 있어, ‘38라고도 불렀습니다. 모진교는 화천에서 춘천으로 진입할 수 있는 관문으로, 이 다리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북한의 기계화부대가 춘천으로 진입할 수 없었으므로, 북한에서는 625전쟁을 앞두고 모진교 주변으로 부대를 이동시켰습니다.

모진교(38)에서의 남침 징후와 관련하여 ‘625 50주년 특별연재로 신동아 20005월호에 연재된 잊혀진 전쟁의 비록()의 한 부분을 소개해 봅니다.

 

1950년에는 ‘30년 만에 최악이라는 봄가뭄이 닥쳤다. 농민들은 이제나 저제나 비 소식을 기다리는데 장마철이 시작되는 6월이 와도 큰 비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참에 일본 오키나와 남쪽에서 규모가 작은 태풍 엘시가 발생해 서북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여왔다. ‘타는 목마름으로 비를 기다리던 농민들이 겨우겨우 모심기를 끝낸 그해 623일 오후 2시쯤, 태풍 엘시의 영향으로 춘천 일대에 모처럼 가랑비가 내였다.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샘밭골은 당시 38선 바로 남쪽에 위치해있었다. 38선에서 불과 300m 남쪽에 있는 북한강에는 모진교라는 길이 약 250m의 다리가 걸려 있었다. 이 다리 북쪽인 화천군에는 함흥에 주둔하다 수일간 야간 행군 끝에 617일 이곳으로 이동해온 인민군 2사단(사단장 이청송 소장-인민군 소장은 국군 준장과 같다)이 포진해 있었다. 인민군 2사단이 춘천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당시 이 다리 지역을 방어한 것은 박용덕 상사가 이끄는 6사단 7연대 수색대였다(사단장 - 김종오 대령).

그러나 다리 북쪽 지역에 있는 38선 이남 지역이 너무 좁아 7연대 수색대는 다리 남쪽만 방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다리 북쪽에는 인민군 초소가 생겨났으니, 사실상 모진교가 38선인 셈이었다. 당시에도 지뢰가 있었다. 국군은 인민군의 침공에 대비해 다리 한복판에 지뢰를 매설해 놓았다. 그리고 원격 장치로 다리를 폭파할 수 있게끔 별도의 폭발물을 설치해 두었다.

가랑비를 맞는 모진교 아래 북한강에서 을씨년스럽게 물안개가 피어 오르는데, 다리 북쪽에서 홀연히 흰옷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당시는 인민군이 월남자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할 때였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인민군 초소로부터 전혀 총격을 받지 않고 다리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흰옷은 한 노인이었다. “! 저 영감이!”라고 하며 7연대는 수색대원들이 당황해 하는데 !”하는 소리와 함께 지뢰가 터지고, 노인은 다리 한복판에서 꼬꾸라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노인은 장씨였고, 화천으로 출가한 딸의 집에 살고 있었다. 장씨의 평생 소원이 38선 남쪽 춘천에 살고 있는 아들 집에 가보는 것이었다.

이청송 인민군 2사단장은 개전을 앞두고 사단 정치 장교인 이시혁(李時赫)에게 요충지인 모진교의 방어 상황을 알아보라.”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이시혁은 이산가족을 찾던 장 노인을 찾아내, 설득 반 위협 반으로 아들집으로 가라.”라며 모진교로 내몬 것이다. 장씨의 죽음으로 인민군은 모진교에 폭파 시설이 있음을 간파했다.

그로부터 10여 시간 후인 62324(6240), 육군본부는 611일부터 발령된 전군 비상 경계령을 해제했다. 이 경계령은 51일 메이데이(근로자의 날) 시위와 2대 총선인 530선거, 그리고 67일 북한이 남북한 선거를 제의하고 610일에는 북쪽의 조만식(曺晩植)과 남쪽의 이주하(李舟河), 김삼룡(金三龍)을 교환하자고 제의함에 따라 취해진 조처였다.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자 육본 장교들은 토요일인 624일 저녁부터 육군참모학교 구내에 만든 장교구락부 낙성 기념 댄스 파티에 들어갔다.

(이정훈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전쟁 개시 하루 전 624, 육군본부 상황실에서는 22일과 23일에 획득한 첩보를 분석하고 적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 7사단으로부터 인민군 군관들로 보이는 일단의 무리가 아측을 향하여 지형 정찰을 하는 것 같다.”라는 보고를 받고, 이는 필시 북한군의 전면 공격이 임박한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정보 실무자들의 이러한 판단에 따라 이날 오후 3시에 채병덕 참모총장을 비롯한 육본 일반 참모들이 모여서 긴급대책을 강구하였습니다. 이때 정보 실무자들이 비상경계령 해제의 즉각 중지와 휴가 및 외출의 즉각 중지, 또한 최소한 3분의 2병력의 부대 대기를 건의하였지만, 채병덕 참모총장에 의해 즉시 묵살되었습니다. 다만 채병덕 참모총장은, 첩보대를 포천, 동두천, 개성 등지에 파견하여 적정을 살피고 그 결과를 다음날인 625일 오전 8시까지 보고하라는 지시만 내렸습니다.

 

38도선 부근에서 1949년부터 자주 발생한 남북한 군사적 충돌은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라는 풍문으로 점점 확대되면서 군과 국민들은 상당한 위기의식과 큰 불안감에 사로잡혔습니다. 1950년에 들어서면서 2월 위기설, 3월 위기설, 4월 위기설까지 심각하게 거론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북한의 전쟁 준비는 이미 완료되었고 남침은 이제 시간문제다.”라고 하는 취지의 발표가 반복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5월에서 6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라고 경고하였는가 하면, 맥아더 장군도 310일 워싱턴으로 보낸 기밀정보 보고서에서 최근 획득한 정부에 의하면 북한이 6월에 남한을 침략할 것이라 한다.”라고 정확한 지적을 하였습니다.

38선에서의 위기가 고조되자 유엔 한국위원단의 현지 감시반은 69일부터 624일까지 강릉에서 옹진반도까지 38도선 전역을 순시하고 남침 불과 하루 전인 624일 안전보장이사회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거기에는 최근 북한군이 38도선 인접 지역으로 4-8km 이동한 바 있고, 옹진 북쪽 근처에서 군사 활동이 증대되고 있다.’라고 하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것이 전쟁 직전 공식적인 유엔 보고서이며, 이는 남한이 먼저 북한을 공격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귀중한 증거 자료이기도 합니다.

 

남침 징후의 결정적인 몇 가지 사례만 보아도 참으로 통탄을 금할길이 없습니다. 강릉 8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1950610 인민군 유격대 공작원들이 서해 해상을 통해 일제히 침투해 들어온 것을 보고 포로로 잡아 조사한 결과, 인민군의 전쟁 준비가 다 됐음을 확인하고 우리도 전시 체제를 갖추고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고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보고했으나, 이를 묵살 당하였습니다. 이에 이형근 준장은 8사단장직 사표를 내고 부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후에 이종찬 장군이 이형근을 권하고 채병덕 참모총장을 설득하여 다시 부대로 복귀시켰습니다.

함흥에서 주둔하던 인민군 2사단(사단장 - 이청송 소장)617일 야간 행군으로 이동,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619 귀순한 박철호 전사를 통해 6사단장 김종오 대령에게 보고되었고, 이를 심각한 상황으로 판단한 김종오 대령은 육본에 보고하였으나, 채병덕 참모총자은 인민군은 절대 도발하지 않는다.”라며 또 이 사실을 묵살하였습니다.

1950619, 강릉 밑 해안에서 인민군 전사가 귀순하여 아주 결정적인 남침 징후에 관한 정보를 주었습니다. 그는 일 주일 후면 전면 남침이 시작될 것입니다. 엄청난 인민군이 후방에서 39선 가까이 와서 남침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알리려고 귀순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육본은 묵살하였습니다.

 

1950620, 임영신 상공부 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 갔습니다. 임영신 장관은 인민군이 곧 남침한다는 소식으로 세상이 뒤숭숭하여 3월 경, 북한 실정을 잘 아는 김기희라는 사람에게 60만원을 주고 북한 실정을 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 자금으로 12명을 선발, 그들과 함께 북한 군부대의 동태를 정탐하고 돌아와 북한 전 지역이 비상 사태에 들어가, 밤납 없이 38선으로 남하하는 군용열차와 군용 트럭이 줄을 이었고, 외금강에서는 급수 급탄 등을 하느라 기차가 밀려 있는데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민군의 남침에 대해 빨리 준비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고,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허위 사실이라고 우겨 대통령도 믿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1950622, 화천 정면의 6사단 7연대에 인민군 전사가 귀순하였습니다. 그가 나는 전차병이다. 화천지구에 1개 대대의 전차가 집결하고 있다.”라고 하자 임부택 연대장은 즉시 관측소에 가서 정찰을 했습니다. 유천면의 인민군 부대에 지금까지 보지 못한 포진지가 보이고 포신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망원경으로 유심히 관찰해 보았더니, 평소에 없던 차량이 빈번히 움직여 인민군의 남침이 곧 시작될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임부택 연대장은 즉시 육본 정보국에 보고하고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역시 육본은 묵살하였습니다.

장도영 육본 정보국장은 옹진 17연대, 동두천 1연대, 포천 9연대, 춘천 7연대, 강릉 10연대 정보를 종합 분석한 결과, ‘이는 인민군의 전면 남침이라고 판단,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624일 오후 2에 보고하면서, 오늘 저녁이 위험하니 비상경계령만이라도 부활시켜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이때 채병덕 참모총장은 화를 벌컥 내면서 오전에 해제하였는데 어떻게 오후에 다시 경계령을 부활시키는가?”라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도영 정보국장은 국장들을 불러 인민군의 전면 침공이 예상된다.”라고 하였는데, 국장들도 별 반응이 없이 유언비어를 퍼트려 사회를 혼란시킬 작정인가? 당신 빨갱이 아니오?”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이 터지기 전 무려 417회의 남침 징후가 육본에 보고되었습니다. 19506월이 될수록 그 횟수와 징후는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음에도, 육본은 북한의 남침을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송두리째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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